독전대와 중동부 전선 이야기(6, 전용운 일병 이야기 계속)
휴전회담이 오랫동안 정체상태에 빠진 채 진전이 없는 가운데 53년 1월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중공군측은 유엔군이 전쟁을 확대 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중 구주 연합군 사령관을 역임한 원수 출신인데다 52년 12월에 한국 방문후 미국 내부에서 전쟁확대 논의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군은 지구작전-적극방어라는 기존의 작전을 고수하면서 대상륙작전 줍비를 최우선 과제로 노력을 기울여 해안선 방어 및 대공수 방어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러면서 계속 시간을 확보하여 병력과 화력을 보강하고 작전물자도 확보하여 3월에 들어서는 선별적 공격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먼저 서부전선에 미 제1군단지역인 연천 북방과 지금의 판문점 북동쪽 지역으로 집중되었다.
1)53년 3월3일, 중공군이 미 제2사단의 전초인 사미촌 부근의 후크(Hook)를 그리고 3월말에 또 한차례 공격했으나 격퇴된다.
2)53년 3월17일, 중공군이 미 제2사단의 방어선상 355고지(고왕산)을 공격한다.
3)53년 3월23일, 중공군이 미 제7사단이 방어중인 역곡천 남안의 불모고지(275)와 포크찹고지(234)고지를 공격 한다. 불모고지의 배속된 콜롬비아 대대는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의 손실이 나면서 피탈되고 포크찹고지의 미 제31연대도 일시적으로 피탈되었다 탈환하게 되는데 300여명의 전사나 부상등 인명 손실을 가져온다.
4)53년 3월말, 판문점 북동쪽 16km지점인 네바다 고지군인 베가스(157),레노(148), 카슨(무명고지)에서 미 제 해병 1사단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여 레노전초는 포기하고 나머지 2개소는 피탈에 이은 역습으로 재탈환을 반복하며 사수하는데 무려 118명이 전사하고 801명 부상에 98명이 실종 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다.
53년 4월은 또 그렇게 지나갔다. 3월의 탐색전이 서부전선이라면 5월에는 중부와 중동부 전선에서 미 제 9군단, 국군 제 2군단, 미 제 10군단지역에 집중 되면서 주로 국군 제 2군단의 금성 돌출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금성돌출부란 한강하구에서 장단 -판문점-수옥시-백마고지-김화저격능선-금성 남단-교암산-관망산-949고지-내곡-황기-남강-동해안의 감호를 연하는 전선에서 중부전선의 화천북방 전선이 금성쪽으로 10km정도 불거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아군이 1951년 추계공세 때 확보한 후 52년 적군의 추계공세 때도 격전을 치르며 고수한 곳이다. 53.4.28일에 재개된 휴전회담을 지원하고 본공세의 기도를 은폐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53년 5월은
1)서전으로 5월12일 689고지(택사스고지)와 오봉능선으로 공격을 해 왔다.
이 지역들은 주저항선의 요충인 973고지 바로 북쪽 1.5km 위치한 지역으로 국군 3사단으로부터 인수전에도 18연대가 1개소대를 전초로 운용하면서 중공군 181사단이 파상고격을 무려 8번이나 빼앗겼다 빼앗음으로 지켜졌는데 5사단도 6일간의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2)53.5.13일에는 국군 5사단 949고지 서북방 4km지점의 삼각봉전초에, 국군 8사단의 북한강 서안 과호리의 271고지(마제형고지)공격을 가해와 마제형 진지는 5.17일까지 무려 4차례의 역습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피해현황은 전사 181명, 부상 262명 실종 23명의 손실을 입고 적 추정사살 789명 포로 10명을 획득 하였다.
"말이 전사 181명이지 4일간에 부상등 466명의 인원 손실을 생각해 보라, 다 죽었다!"
마제형진지는 북한강과 금성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271m의 높지도 않은 고지이지만 이곳을 피탈당함으로써 차후 적에게 공격발판을 마련해주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수도사단지역의 직목동에 있는 470고지와 회고개, 국군 9사단이 방어하는 저격능선에도 공격이 있었으나 일단 격퇴하였다.
이렇게 53년 5월은 갔다.
중공군은 1단계 5월공세를 종료한 이후 제 2단계 하계공세로 전환하여 대대급 진지로까지 확대하여 전 전선에서 51년 춘계공세 이후 최대규모의 공세가 6월부터 시작 되었다.
53.5.27일에 금성돌출부에 대한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서부 전선에서도 다시금 네바다 고지군과 후크고지에 대해 공격을 동부전선에서는 351고지에 대해 공격을 함으로서 전 전선에서 전투가 진행 되는데 특히 금성돌출부에 그 역량이 집중 되었다.
'53년 6월은
전초고지 전투에 이어 주저항선에 강력한 공격이 진행되어 네바다고지, 812고지, 351고지를 피탈당하게 된다.
중동부 전선에서는 1)53.5.27~6.4일에 중공군 제 67군 예하 200 및 201사단이 금성 동쪽 국군 6사단 지역의 전초 돌고지(B고지)와 수도사단의 전초 지형능선과 수도고지를 공격하여 돌고지와 지형능선 끝의 난초고지가 피탈 된다.
2)같은 기간에 중공군 제 60군 예하 181사단이 국군 5사단의 949고지 전방 피의 고지, M1능선, 두경봉 전초를 공격했으나 모두 격퇴 되었다.
3)53.6.10일부터 중공군 60군의 공격으로 국군 5사단의 949-973-883고지 피탈과 주방어선 붕괴 되었다. 사단은 '53.4.15일 국군 제 3사단과 교대하여 이곳에 진출하였으며 북한강 동안에 개설된 보급로와 후동과 황병동 사이에는 작전용 교량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개 제파로 여러 방향에서 동시 다발로 공격을 감행하여 아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무려 10,000발의 포탄을 공격개시 시간대에 퍼부어 아군의 유개호 진지를 흔들어 버렸다. 당시는 휴전이 곧 이행 되는 것처럼 인식되어 전장군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모든 부대들이 참호속에서 수류탄으로 대항하고 수습되는 잔류인원을 급조하여 역습을 실시하고 전 전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사단에 배속된 3사단 22연대의 경우 1/3의 병력이 휴가 또는 외출중이라 요구하는 장소(883고지)와 시간에 역습부대로써 임무에 제한을 받았다.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 부대가 3끼이상 굶으며 특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극도로 사기가 저하 되어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게 되어 6월15일 금성천과 북한강에 연한 방어선(Iceland Line)으로 철수를 명하게 된다.
"오호통제라, 작전용 교량을 심야 '53. 6 15일 02:00~03:00에 폭파시켜 제 2의 한강교 폭파와 같은 비극이 재현 되었다."
그나마도 사기저하되고 굶주린체 후퇴하는데 비는 내리고 강물은 불어나고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그 엄청난 굉음소리는 더욱 공포심을 자극하여 많은 인원이 강물에 휩쓸려 전사했다.
"소대장님 어디로 도하합니까?"
"김일병, 나도 찾고 있다. 기다려~!"
뒤에서는 따발총이 마구잡이로 갈려지고 있다.
까만 밤에 항복을 해도 손들은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황병동일대로 몰려들은 인원들은 때죽음을 당했다.
강 남으로 가려 물속으로 뛰어든 인원은 지난 밤사이 퍼부은 비로 인한 급류로 다 죽어야 했다.
아침에 날씨가 개여 유엔 공군기 가 한국전쟁 사상 1일 최고 출격횟수를 기록하며 2,143회나 출격하여 중공군의 진지와 부대를 강타하여 적의 돌파구 확장과 추격을 차단하게 된다.
얼마가 죽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갈고리를 들고 강가에 엎드려 떠내려 가는 시신을 건져 올렸다." 참전용사님의 증언이다.
"나는 7월말에 파로호 밑에 있으면서 상부의 지시로 잉어를 잡으러 배를 띄워 들어갔는데 5사단 마크가 보여 갈고리로 올려 보니 수색대원이 옷 입고 그대로 죽어 있어요." 6사단 포병 용사님의 눈물어린 증언이다.
모든 중장비의 철수가 불가하여 미군의 박격포 중대도 모든 박격포를 파괴해야만 했다.
4)53.6.1일부터 북한군 제 3군단이 국군 12사단이 방어중인 금강산-서화 접근로상의 양견부 812-854고지를 공격해 왔다. 사단은 '52.1월 8일에 창설 되어 12월 30일에 전선에 투입 되어 인북천과 남강을 끼고 주 보급로를 방어중이었다.
'53.1~3월에도 북한군은 계속적으로 812-854고지를 공격해 왔다. 이때마다 적의 기습을 방어하면서 많은 인원들이 전사하게 되는데 동계라 적설로 차량 운행이 쉽지않아 결국 현지 가매장을 하게 된다.
"방법이 없어요, 현지에 가매장 할 수 밖에는 ... ."
'51.2월 횡성전투에서 포로로 되어 끌려가다 구출된 이양원용사님(91세)은 노무자 중대 선임하사로 이곳 전투에 참여 하였다. 40여명이 전사하여 실제 가매장한 장본인이다.
이미 고지들은 유개호 작업이 이루어져 대부분 동굴진지에서 전투를 진행하게 되는데 결국 좌측의 812고지를 6월에 피탈 당하고 854고지는 고수하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그렇듯이 초전에 실패는 경계가 소흘해서 벌어지게 되며 바로 812고지가 그런 상황이었다. 지금 고지는 북측이 점령하고 있고 바로 동남방 최기거리에 무명고지가 있는데 이곳은 끝까지 방어하게 되어 지금 이곳을 "쌍룡고지"라 한다.
당시 역습 대대장을 했던 고인이 되신 박정인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812고지를 탈환후 총구 검사를 헸더니 사격을 실시한 병사가 51%밖에 안되었다 한다.
현재 쌍룡고지에는 아군의 GP가 있다. 바로 눈앞에 812고지가 있고 적의 소초가 있다. 고지 정상 주변은 완전히 그물망처럼 교통호가 발달 되어 있으면서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안고 있고 철조망이며 미확인 지뢰가 널려 있다.
지피 공사간에 유해가 나와 일정 장소에 매장한 것을 수습해 왔으며 굴토해본 결과 소뼈등도 함께 섞여 있어 그래도 전쟁 막바지에는 보급이 제대로 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5)같은 시기에 1090고지 및 M1고지 전투가 진행 되었다. 이곳은 중공군 33사단이 공격을 감행하는데 국군은 20사단이 방어중에 있었다. 국군 제 20사단은 1953년 2월 9일에 창설되어 5월 15일에 이 전선을 국군 제 7사단으로부터 인수 받았다.
1090고지는 이미 '51.12~'52.2월, '52.10월에 걸쳐 공방전이 벌어져 아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곳으로
12사단은 이미 적이 제 5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측방에서 압력을 가해오는 가운데 새로이 편입된 예비인 국군 7사단의 8연대로 938고지를 지역을 방어토록 하고 62연대가 1090고지, 61연대가 M1고지에서 사투를 벌였다.
결국 6.18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뺏기고 빼앗음을 반복하며 1090고지전투를 승리하게 된다.
당시 마지막 역습시 중대장을 한 3대대 1중대장 고일주 용사님(91세)은 200여명의 중대원이 20명 밖에는 남지 않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방법이 없어요. 특공조에게 수류탄을 주어 적 특화점을 공격토록 하고 죽으라는 거지... ."
"다른 우리군의 지원사격은 없었습니까?"
"왜 포병도 박격포도 종일 사격을 하지, 적은 개미떼처럼 제파식으로 오고 또 오고 끝이 없어"
"전사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중공군 전사자는 깔고 앉아서 전투도 하고 호안에 뒤엉켜 있어 사실 까만 밤에 잘 몰라요."
"그때는 왜 그리 비도 잘 오고 안개가 자욱해서 관측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아침이 되어 훤해지면 적이 잠시 물러가는데 이때는 노무자들이 많은 전사자나 부상병을 들고 내려가지만 어디 제대로 처리가 되겠어요~!"
크리스마스 고지는 남과 북에 각각 같은 높이가 불과 거리가 2km도 안되는데 대부분 평지같은 분지라 사실 숨을 곳도 별로 없었다 한다.
"사실은 노무자들이 더 불쌍해요, 총도 없고 그 포탄이 비오듯 하는데 그곳을 뚫고 밥도 가져오고 보급품도 나르고 그러다 죽으면 누가 챙겨줄 사람도 없어요."
"중대장은 이렇게 살아 90이 넘었는데 미안해요. 전우들을 보고 싶어요. 어서 가서 보고 싶어요... ."
그러다 53.6.18~19일에 진지를 국군 제 7사단 5연대에 인계하였다.
M1고지는 바로 1090고지 동쪽 능선에 딸린 무명고지로서 6.22일까지 16회를 혈전에 혈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7월4일 미 제 45사단에 인계하고 해안분지 전선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혈전을 계속 한 그 이유는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싸움 이었다.
6)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쟁탈전
'53.6월 적의 공세가 금성돌출부로 지향될 무렵 국군 8사단은 제 2군단의 중앙 사단으로서 교암산 우측 765고지로부터 지형능선과 수도고지-북한강에 이르는 주저항선을 방어하고 좌측이 6사단 우측이 5사단이 병행 방어 하였다. '53.6.10일 중공군은 우전방 5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6월12일부터 8사단의 주저항선을 공격해 왔다.
수도고지는 이미 '52.10. 25일 수도사단과 교대하여 전부터 쌍방간에 전투의지를 시험하는 결전장이 되어 주저항선처럼 동굴진지로 구축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적 4개중대가 밀어붙이는 바람에 진내사격을 실시 하면서 중대원이 백병전으로 맞섰지만 대부분 모두 전사하고 중대장과 행정요원은 포로가 되면서 피탈 되었다.
"시체를 치우지 않아 너무 많아서 수도사단과 실갱이도 했어요"
참전용사 이판남(89세)님의 증언에 의하며 용사님은 당시 공병으로 참가 했는데 고지를 동굴식으로 토치카로 만들고 지뢰를 매설하고 철조망을 치고 했다 한다. 처음 '52. 10월 말에 들어갔는데 정말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자보지 못했단다.
시체 썩는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시체를 굴려버려 저 밑에 계곡에는 많은 수의 시신이 뒤엉켜 썩어가고 있었다 한다.
"동굴형이면 그만큼 방어에 유리할텐데 그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가 특별히 있습니까?"
"글세 경계병이 문제지. 출구를 적이 지키고 지져대면 방법이 없어요. 졸면 죽는다고 하지만 몇일을 굶고 잠도 제대로 못자면 눈뜨고 자고 있어요"
"오히려 참호보다도 못해요, 그 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많은 인원이 죽어 갔어요"
"후퇴하면서 넘어지고 구르고 하면서 그 까만 밤에 손에 잡히는 것이 시체들이야, 물컹물컹하게~"
눈물을 흘리신다. " 공병들이 제일 많이 희생되었어요."
다음으로 적은 지형능선을 공격해 왔다. 고지 바로 200m 앞의 난초고지에 적의 전초가 나와 대치중이다. 드디어 '53.6.13에 적이 야간 공격을 가해 왔다.
하지만 이곳도 수도고지처럼 동굴진지에서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도 못하고 사면에서 밀어붙이는 적에게 고지를 유린 당하고 만다. 역습도 실패한다. 정면과 측방으로 부대 간격을 이용하여 많은 적들이 이미 진지 후사면까지 들어와 있으니 진내사격을 해도 같이 교통호에서 총검으로 수류탄으로 상호 찌르고 포탄이 터져 죽고 ... .
이래서 결국 8사단도 밀려 내려가 5사단처럼 아이슬란드선으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고 국군 3사단을 배속 받고 5사단은 미 제 10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여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게 된다.
'53.6.10부터 시작된 적의 공세는 18일을 기해 소강산태로 돌아섰다.
결국 국군 제 2군단은 53년 6월 전투에서 지형능선과 수도고지를 그리고 북한강 동안의 949-973-882고지군을 빼앗겨 13km 정면에서 4km를 후퇴했다. 아군의 손실은 7,300여 명, 적의 손실은 추정 13,000여 명에 달했다.
서부전선에서는 1)53.5.28일 네바다 전초에서 대혈전이 벌어져 미 제 25사에 배속된 터키여단이 중공군 120사단의 공격을 받아 베가스 전초는 5번의 빼앗기고 빼앗는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상실하게 되는데 적 3,000명을 살상하고 5명을 생포한 반면 전사 151명 부상 239명 실종 2명의 엄청난 피해를 감수했다.
2)같은 기간에 영연방 제 1사단이 방어하는 후크고지(150)를 공격하였으나 3차례의 격전에서 170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동부전선에서는 인민군이 국군 15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351고지에 대해 먼저 '53.6.2일에 공격을 해왔다. 351고지는 51년 추계공세시 수도사단이 점령한 이래 제 11사단(51.11.15), 제 5사단('52.1.11)으로 방어임무가 인계되는 동안 쟁탈전이 계속 되었다.
월비산은 11사단이 방어시 '51.11.18~24전투시 피탈되었다.
351고지는 확보된 채 제 15사단이 인수 하였으며 동굴화된 벙커와 분대단의 대피호 교통호로 연결된 요새화된 진지였다.
1953.6.2일 자정경 인민군 제 7사단이 강력한 화력의 지원을 받으며 진내로 진입하게 된다.
사실 나중에 포로로부터 확보된 진술에 의하면 적은 이미 2개월전부터 유사한 지형에서 예행 연습까지 하고 투입되었다 하니 그들의 세밀한 준비에 놀랄 뿐이다.
결국 지내 사격을 하고 아군 포병과 B-29편대의 공중지원까지 받으며 역습을 했으나 결국 우리가 파놓은 함정(유개호)에 숨어서 고개를 숙인 적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전사 222명 부상 537명 실종 11명 등 총 770명의 손실을 입고 물러나 지금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권주한 참전용사님(89세)증언은 36연대 8중대가 마지막 방어부대였다고 한다.
"어떻게 그래도 살아남으셨네요?"
"우리 8중대 다 죽었어요. 진내사격을 요청해 포병도 동해안에서 함포도 비행기도 쏘아대니."
"동굴진지에 들어가 있으면 살아남지 않나요?"
"그러면 뭐해. 적이 동굴 입구를 봉쇄하고 화염방사기를 쏘지 수류탄 까서 던지지... ."
"연결되는 교통호에는 시체로 가득해요. 그 속으로 피해서 살아나와 무조건 뛰었지"
"아니 역습 부대들은 없었습니까?"
"예비대인 9중대가 바로 밑에 있었는데 포사격으로 폭삭 했어요. 싸우지도 못하고 반은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