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교과는 1,2학기에 걸쳐 우리 나라의 역사를 통사(通史) 형식으로 배웁니다.
5월 초순까지 학습한 내용은 선사 시대부터 고려 시대의 불교 문화에 관한 부분까지입니다.
그런데 통일 신라에 이어 후삼국 시대를 공부할 때,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내용을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교과서에는 이렇게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입방정이 발동하여 금산사에 다녀와서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네요.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해인사 팔만대장경까지 보고 와서 자세히 알려주겠다는, 굳이 안해도 될 약속까지 하고 말았으니 참...
화창한 날씨 만큼 길도 좋아서 넓은 길, 고갯길 다 지나도 40분이 채 안걸려 매표소 입구에 도착한다.
금산사를 생각할 때면 야트막한 산자락에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앉아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진입하는 길은 의외로 와인딩 코스가 꽤 길다.
입장료 3천원으로 알고 와서 자동차들 뒤에 서서 입장료 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매표원이 차들에게만 입장료를 받더니 내겐 신경도 안쓰고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다.
머시여~ 두발이라고 무시하는거시여?
머 그렇다믄 베리땡큐 감사여~ㅎ
초여름 녹음이 우거진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 금강문 나무그늘에 염소 붙들어 매두고~
잠시 금산사의 역사를 짚어보자.
금산사!
"금산사 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찰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진표율사는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즉 금산사는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강문을 들어서는데 편액 글씨가 멋지다.
천왕문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미륵사지의 그것 만큼 크지는 않지만 아주 잘 생긴 당간지주가 서 있다.
여기서 부터는 아마추어 답사객의 서투른 입방정 보다 금산사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에 기대는게 좋을 듯 하다.
-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 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당간 지주는 어느 정도 역사가 있는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지주를 관통하는 가로 막대 홈이 두개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처럼 세 곳에 홈이 있는 지주는 드문 편이다.
더구나 이처럼 지주와 당간이 온전히 보존된 경우는 더욱 드물다.
아래 왼쪽은 안성 칠장사의 철당간과 지주, 오른쪽은 많이들 보았을 계룡갑사의 철당간과 지주이다.
철당간은 속이 비어있는 원형의 철통을 크기가 약간씩 작아지도록 만들어 끼우는 방식이다.
당간 위쪽에 깃발을 매달아 중요한 행사를 알리는 용도로 사용한 것인데, 현재 남아있는 모양으로만 보면 어떤 방식으로 깃발을 고정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지금의 게양대 처럼 도르래와 당김줄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행사 때 마다 당간을 눕혀 깃발을 묶어서 일으켜 세우는 방식이었는지...?
지주 옆에는 거대한 귀부와 이수가 놓여있다.
생동감 있는 꼬리, 리듬감 있게 돌아간 귀갑의 윤곽과 다소 과장된 비늘이 제법 솜씨있는 석공의 작품인 듯 한데 비신이 없으니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가묘인 모양이다.
지금 우리가 유물과 유적이라 부르는 것들도 처음에는 다 이렇게 새파란, 아니 새하얀 색깔과 뚜렷한 무늬로 화려함을 자랑했을 터이다.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쌍용이 여의주를 물고 희롱 중~
신혼부부가 한다는 사탕키스가 이런건가?
이거 대낮부터 너무 찐한 거 아닌가? ㅎ~
보제루~
옛 건물에 붙는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문, 루, 각, 전, 당, 단, 헌, 옥, 제...'등 이 있는데 건물의 형태, 층수, 크기, 용도 등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붙여진다.
이 건물은 2층 이므로 '루'가 사용되었다.
앞에 세워진 진표율사의 중창 사적은 이 절의 핵심이므로 한번씩은 읽어볼 만하다.
본존을 모신 대적광전~
8만원 주고 산 중고카메라가 여기서 본색을 드러낸다.
줌 조절만 하면 그때 부터는 초점이 어긋나는 것이다.
결국 줌 기능은 있어도 사용을 못하고 단렌즈 처럼 사용을 해야하니 앞뒤로 발걸음이 바빠진다.
5불 6보살을 모셔놓았다.
많다...
대적광전을 물러나와~
왼쪽을 보면 보물 827호 대장전이 있고, 오른쪽을 보면 국보 62호 미륵전이 있다.
음식상 앞에서 더 맛있는 것을 먼저 먹을까 나중에 먹을까 하는 고민을 여기서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비유는 적절치 못한 것이,
비록 대장전이 규모와 명성에서 미륵전에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오늘 여기에 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저 대장전 지붕의 보주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 주저없이 발길을 옮긴다.
대장전 앞의 석등~
역시 홈페이지의 설명을 인용하면...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용마루 가운데 놓인 문제의 보주~
-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래 사진은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팔각당이다.
쉽게 얘기하면~
대장전이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건물을 다시 지을 때 지금의 모양으로 바뀌었지만 목탑 지붕에 있던 장식은 버리지 않고 재사용을 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다른 건물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이런 모양을 갖게 된 것이다.
대장전에서 미륵전을 바라본 모습~
잠시 대적광전 뒤로 돌아가 보면 조사전이 나타난다.
그 절에서 주석하다 입적한 큰스님을 조사로 모시고, 대개 "당"을 당호로 사용하는데 이곳은 "전"을 사용하고 있다.
건물에 비해 당호가 너무 무겁다 싶지만 아마도 진표율사 같은 거물급 스님이 있어 그리 하지 않았을까 싶다.
조사전 옆의 나한전~
편액 글씨가 멋져보여 전명옥이란 이가 누구인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
담헌 전명옥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역임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나한전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올라 방등계단으로 향한다.
밟고 오르는 계단은 階段이고, 방등계단의 계단은 戒壇이다 .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염불보다 젯밥 정신에 충실한 내 사이비 답사객의 본성은 여기서도 버리질 못한다.
네모 반듯한 계단의 양쪽면을 따라 작은 석상들이 둘러서 있다.
헌데 아무리 들여다 봐도 이 석상들 간의 어떤 연관성이나 규칙을 찾지를 못하겠는 것이...
어떤 것은 제주 돌하르방을 닮았고, 어떤 것은 장옷을 둘러쓴 조선 여인을 닮았고,
또 어떤 것은 봉분 앞의 문인석과 무인석의 형상을 하고 서 있다.
안내판에도 별다른 설명이 없고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참 답답할 노릇이다.
쥐꼬리만한 짧은 식견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나그네의 한계이다.
방등계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륵전~
여기는 방등인데 담쟁이 덩굴의 기세는 등등하다.
방등계단의 계단을 다시 내려와 미륵전의 서쪽 기둥을 한번 쓸어보고 건물의 앞쪽으로 돌아드는데,
세월에 닳은 거대한 돌쩌귀가 고색 창연하다.
금산사 미륵전~
이 절을 기억하게 하는 얼굴이다.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존불 중의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인터넷에서 퍼온 모습이다.
서당개 삼년에 뭘 어쩐다더니 그간 여기저기 눈동냥을 하다보니 이제 불상의 재질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석불과 철불, 목불과 소조불, 근.현대의 청동불과 이제는 석고불까지~ 불상을 조성하는 재질도 참 다양하다.
불상의 대좌로 추측되는 연화문 석물이다.
둘레가 10M가 넘는 거대한 규모이니 아마 미륵전 안의 주불 못지 않은 거대불을 안치한 전각이 있었던 듯 하다.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한 보물 제27호 육각다층석탑~
특이하게도 흑색 점판암 재질로 되어있는 소탑이다.
역시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의 노주~
원래 석등이었던 듯 하지만 불을 켜는 공간인 화사석이 없어져서 제 모습을 잃은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범종각을 건너다 보니 어여쁜 여인네 둘이 손짓을 하며 뭔가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시계를 보니 마음에 점을 찍을(點心) 공양 시각도 한참 기울어 뱃속은 저 텅빈 목어처럼 헛헛한데...
만나기로 한 친구는 결국 못 만나고 산문을 나선다.
돌아나오는 길가에 귀신사(또는 狗腎寺-개의 거시기 절이라는 얘긴데 이건 직접 가서 봐야 그 이름이 붙은 내력이 이해될 것이다.ㅎ~)를 한눈으로 흘리며 다음 목적지 함양으로 향한다.
첫댓글 멋지고 후기 잘 봤습니다...ㅋ 전 아이들과약속한건 아니지만 초파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화순 운주사, 순천 송광사. 남원 만복사지, 익산 왕궁리 탑을 구경했답니다
네~ 꽤 장거리 여행을 하셨군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역사 기행, 좋지요.
정성이 가득담긴 투어후기 잘 봤습니다~^^
잘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시원한 사진과 설명............덕분에 좋은 여행을 다녀온것 같습니다.
st끼리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더 즐거웠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