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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기!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촛불,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Sir, a man who loves is not jealous. jealousy is of the brain; and where there is love, there is no domination. When you love somebody, you are not dominating, you are a part of that person. There is no separation, but complete integration. It is the brain that separates and creates the problem of domination.
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질투라는 것은 잔머리 굴린다는 뜻이지만, 사랑할 때는 군림하지 않지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의 일부로 되는 거지요. 그때는 분리가 없어서 완전한 화합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머리를 굴리니까 분리가 일어나고 지배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요.
-- Jiddu Krishnamurti, Talk 4, Poona, 19 September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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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우리들, 이 모습 이대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도 하는 거다’는 비슷한 소리를 거의 당연시하는 거 아닙니까? ‘군림’이야 정치가들 하는 짓이겠고요.
말씀의 핵심은 “사랑”한다면서 ‘잔머리 굴리지 마라!’ 그 말씀이겠지만요. 세상에, 좀 덜 똑똑하다 해도 ‘잔머리’ 안 굴리는 사람이 어디 있을 거라고······.
친구 하나의 아호가 ‘소석’입니다만, ‘나,’ ‘자아’라는 것의 속성이 바로 ‘잔머리 굴리기’ 아닙니까? 거기서는 ‘나’ 자체가 이미 ‘분열’이기 때문에, 결코 “전체”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끌내 “인간”이 못 되는 거지요.
시대의 화두, ‘인류세’ 화두, “기후재앙,” “대멸종” 아니라도, 수수만년 “고해”로 살아온 인간 세상에다가 “사랑”을 말씀하시는 까닭에, 하필 “벽오동” 심은 뜻이 달리 더 있겠습니까? ‘부디, 인간 좀 되어라!’ 그 말씀이겠지요. 아주 “오래된 미래!”
시골 어느 한적한 구석에, ‘숨어 사는 신세’로 훨씬 더 멍청하게 살아가는 중늙은이 하나. 그가 자기 일상을 일러, “멍때리기”라고 하든 말든, 그 꼴이 어디 고운 데가 짜다라 있기나 하겠습니까? 나름이겠지만, 터나 마나, 또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을 거라고······.
“사랑”이라는 게 ‘인간’ 각자의 의식 수준에서도 저러하겠거늘, 더는 소위 종교라고 하는 데서도 그다지 “전체”적이지 못하지요? 그건, ‘종교’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저 ‘인식’의 영역을 못 벗어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진짜배기 “종교”적인 경지에서 살아가시는 분은 참으로 귀한 세상이지요. “삶”은 ‘시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했는데, “종교”가 ‘인식’의 영역에 머물러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이런 발언을 두고 역시 “니나 잘 하세요!” 하겠지만, 딴 사람 누군가가 잘 하나 못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개인 각자가 스스로 그런 귀한 사람 되고 볼 일입니다. 더구나 “종교인”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다면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런 딱지 없는 사람에게 윽박지를 건 더 없겠지요. 참으로 제대로 산다는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 사람 자신일 터입니다. 자기 말고 누가 더 잘 알겠습니까!
그 시작이 젊은 날, 흔하게 내밷고는 하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반드시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겠지요. 그때부터 이미 “사랑”이라는 것이, 고작 ‘밀당’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 비슷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직 인생 채 시작도 안 한 젊은이들을 그렇게 가르쳐야지요. 그래야 그게 “교육” 아니겠습니까? 왜, 어째서, 누구누구할 것도 없이, 꼭 ‘나처럼 살아버리라’고 가르친단 말입니까? 삼천리 금수강산, 지금 사회 지도층이라는 인간들이 꼭 그러고 있는 거지요? 몸소, 그 본을 보이고 있잖습니까.
꼭 그러니, 많은 늙은이들 왈, “인생” 다 살아봤자, ‘참, 허허롭다’고 한다지요? 평생을 통하여 저다지 이다지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여 살도록 가르쳐고 있으니, 안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그걸 해결하자고 크리슈나무르티, “인류사 새로운 성인(聖人)”께서 오신 거지요. 다들 그러거나 말거나지만요. 소위 ‘종교인’들이 꼼짝달삭 안 하는데, 더구나 정치가들이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겠습니까?
하다못해, 기어이, 다음 세대라도 그리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매양, 하는 소리가 꼭 그 소리뿐이군요. 나아가서 끝내는 제 자신의 “삶”이 문제지, 정작, 누구 ‘다른 사람 인생’이 문제인 건 아니지요. 그러니 ‘니나 잘 하세요!’ 그런 소리도 감지덕지입니다.
이딴 주절거림에, 어떻게 마치 ‘시’ 같은 ‘한 줄’이나마 나와주면 스스로 참 고맙겠지만, 하도 오래 전에 손놓은 일이라, 그것도 선뜻 나와줄 것 같지가 않습니다. “평생을 써봤자 한두 수 남는다!”는 “시(詩)” 말씀입니다.
어쨌거나 다음 세대 저 젊은이들 가운데, 정말로 저렇게 시작해서 진짜로 그 “사랑”을 만나게 된다면, 그런 젊은이가 바로 그 공동체 진짜배기 보배로운 사람이겠지요.
거기서 “그런 세상이 오면 나는 없을 것 같다.”시던 님.. 철이 철이라서 그런지, 다시금 “노란 아저씨”가 더 그리운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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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6] ‘머리’ 안 굴리는 “삶”
제가 한 짓이지만, 위 본문에 7 년 째 이 날짜, 한 해도 안 빠트리고 줄줄이 주저리 말이 많군요. ‘너더분하다’ 하실 분도 계실 듯.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직은 인생 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뭐,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세월 다 보내버릴 수가 없어서 말씀입니다. 소위 ‘환갑·진갑’ 다 지났다 해도, 요새는 그 나이 ‘창창하다’는 말도 쓰던데요. ‘심부름 시켜 사서 경로당에도 못 가고,’ ‘노래 시키는 통에 관광버스도 못 탄다’는 소리에.. 이래저래 ‘혼자’ 잘 지낼 수밖에 없는 나이일까요?
은근히 아래 달린 거 보니까, 너무 길군요. 그래도 미처 못 한 말이야 왜 없겠습니까?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온전하게 선한 마음,” 진짜 사랑하는 마음, ‘악함’과 전혀 무관한 “선함,” “착함” 그런 것일 듯합니다. 그런 선함에 ‘미련’이니 ‘원망’이니 ‘질책’이니 무슨 ‘권리’니, 하여튼 저렇게 머리 굴리는 행위가 당하겠습니까? 평생을 그렇게 잔머리굴리기로만 살아왔다 해도, 남은 인생이나마 진짜로 “행복”하려면, 먼저 걸리적거리는 것들부터 내다버려야지요. 이마저 말로만이겠습니다만.
이 풍진세상, 어쨌거나 니나내나 그 무슨 소리들 무지막지 내뱉는다고 해도, 범사회적으로는 ‘백년지대계’ “교육”에서부터 “인간”으로 길러내고자 해야 할 것이며, ‘으뜸 가르침’ “종교”에서부터 ‘제대로’ 인간들을 “고해”에서 건져내고자 해야 말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 얼마나 ‘그리 하고저’ 하고들 있습니까? 이런 사회상, 세계상에, 그 못 볼 꼴들에, 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는 그 ‘고운 마음씨’를 들먹이면 안 된다는 말일까요? 달리, 누군가, 그런 ‘고움 마음씨’ 언급이라도 하는 나라, 그런 민족이 또 있습니까? 있다면 그 얼마나 더 좋은 일이겠습니까만. 그마저 “헌법”에서, “교육법”에서 빼버리겠다고 날뛰는 무리들이 설치는 꼬락서니. 하필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머리..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다 가자고, 그딴 허연 짓거리들이 그렇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행되고 있는지.. 저들이 달리, 또 어떤 소리를 해댈지, 이어서 또 무슨 짓을 벌여놓을지, 어마무시 무서운 세상 아닙니까? 명색이 ‘금배지’ 달고 산다는 작자들이.. 그것도 ‘민주’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정당에서.. 세상에 가장 영향력이 크다 할 “정치”라는 게, 저다지 이다지 가장 형편없이 폭삭 썩어서는.. 그나마 좀 생각 있는 사람까지 도매금으로 욕 바가지 뒤집어쓰게스리.. 어제오늘 일도 아니겠습니다만.
말이 또 엇나갔나요? 어쨌거나 저렇게 ‘머리 안 굴리는 삶’이란 게 바로 진짜배기 “종교적인 삶”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게 바로 온전하게, 질박하게 살아버리는 “삶”이겠지요? 케이 저서 제목, “독수리의 비상”처럼, 아무런 흔적도 안 남기는 “삶,” 도대체 흔적이 남을 수도 없는 “삶” 아니겠습니까? ‘머문 자리’ 흔적이야 자연스러운 거라고 해도 말씀입니다.
“사랑” 말씀에 여기 ‘정치’가 당하겠습니까? ‘교육’에서도 “사랑”이 뭔지 안 가르치지요? ‘종교’라고 진짜로 “사랑”하기나 합니까? 그 누구도 관심 없으니, 저 꼴로 “홍익인간”마저 쓰레기 취급인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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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끄적거려놓은 건 몇 년 사이의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읽어라도 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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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6] “사랑” 아스라이 멀리 있는 그 어떤 것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건. ‘세상과 하나가 되는 거’란 말씀이겠지요? 대상과 ‘하나’로 된다는 게.. 쉬이 누구라서..
어쨌거나 “사랑” 말씀에 달리 무슨 토를 더 달까요?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닌데요. 이렇게 말로 나부랑대다가는 죽을 때까지도 “사랑” 못 하는 거지요?
말씀 핵심은 인간 누구라도, 의식적인 ‘분리·분열’없이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하나가 되어라. 그래야 진짜로 “사랑”이 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행하며 살아라, 그런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때가 되면 가겠지요.
그러나 아득할 뿐입니다. 처음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만. 결코 ‘잔머리’ 굴리지 마라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머리,’ 말을 좀 비속어로 해보자면, ‘잔대가리’라고도 하겠지요. 좀 거칩니다만, 행여 이딴 거 평생을 굴려서 무슨 철학·이념 따위를 주창해봤자 결코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생체기관입니다.
그거 굴린 결과입니다만, 아래 주저리주저리 달린 거 보니까, 천상 ‘글쟁이’밖에 못 되겠군요. 그나마 일류는 언감생심이고, 기껏 해봤자 ‘삼류’ 정도가 맞겠지요?
그러나 우짜든지 간에, 한평생 ‘눈곱’만치라도.. 그야말로 ‘내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게 가꾸어가야만 하겠습니다.
“자기로부터의 혁명”과 ‘조직’들의 “포위망”과 “사랑” 사이에서, 단 한 발 재겨 디디기도 쉽지 않다 해도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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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호님이 Prasanta Kumar Sahoo님의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2017년 3월 16일 · ]
[20170316] 인생 다 살아버린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들이 먹히겠습니까마는
역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겠는데요, '나'가 먼저 나선다면 그게 하나로 될 수가 있겠습니까?
'머리를 굴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말이고, '생각'이란 언제나 '나'를 내세우는 것이며 '내'가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얘기는 아니지만, 일단 '나'로서의 '생각'과 '지성'으로서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니까, “지성”을 이해하기 전에 우선은 '나'에 휩싸여 있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알아채야만 하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봐야,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자기 자신을 '안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질투'는 문제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더욱 꼬이게만 하는 것이니까, 결코 '사랑'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도 하는 것이라고들 하지요? 그게 바로 '나'가 나서서 합리화하는 '머리' ‘잔돌’ 아닙니까!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속셈이지요.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연 사랑이라는 게 뭐냐?' 하고 물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나이 든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아요. 그러니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부가 되었다고 해도, 아내가 나서서 '남편을 잡는다'거나 또는 반대로 '아내를 잡는다'는 말을 전혀 거리낌 없이 쓰고들 있는 것입니다. 서로 지배하겠다는 거지요. 가슴이 아니라 머리만 굴리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렇게 제대로 생각해보는 사람이 있을라 치면 ‘소 닭 보듯’ 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나'를 내세우지 않는다면서 '가족', '가문'을 내세운다면, 그 또한 확장된 '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족', '가문'을 내세우는 것을 장려하지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이라고 배우고 가르칩니다. 그게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가족, 가문, 종족, 민족, 국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행정적인 역할의 국가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나'가 개입되는 동일시가 있다면 결국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고작 지역감정이겠습니까! 범위가 넓어졌습니다만 이게 결코 터무니없는 비약이 아닙니다. '사랑'을 얘기하면서 '권력'을 추종하고 '전쟁'을 용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개인이 나서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마음 자세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에 없는 사랑이라면, 세상 어디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다들 '사랑'이 뭔지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부모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꼭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키우는 거지요. 그러니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고는 서로 죽이라고 하는 겁니다. 죽어도 '영광'스럽게 죽는 거라나 하면서 말입니다.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면서 하물며 인간이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모순 속에서 살고들 있는 겁니다. 그게 사회라는 것이고 국가라는 것이며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말씀들은 그렇게 세상 전체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개인들이 모여서 세상을 이루는 것이니까, 내 속에서 바른 가치들이 서 있어야 그게 세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나' 다르고 '세상' 달라서야 쓰겠습니까? '내 사랑' 다르고 '세상 사랑' 다른 게 아닙니다. 그래서는 되는 일도 아니고요.
"하나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면, 전체를 다 사랑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하나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 하기에,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란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도 하신 것 같네요. 그러나 우리는 너나없이 다들 사랑할 수 있는 됨됨이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문제라는 생각조차도 못 하고 살지요? 아니라면 뭔가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 것이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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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6] 주구장창 ‘말로만..’
사랑, 그 사랑에 무슨 말을 더 보태겠습니까? 평생을 더 보태도 모자라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충분치 않은 것을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의 조직종교 입장에서 보면,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용납하기가 그렇겠지요?
하필 어찌 꼭 한국 사회에서만 그렇겠습니까? 전세계적으로도 그들이 그다지 환영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고타마 시타르타’ 본디 가르침과 똑 같다고 본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요즘에는 저한테 자꾸 견제가 들어오는 바람에 ‘사실’을 ‘사실’ 그대로 얘기하는 것도 걸리적거리는군요. 하기사 감정적으로 나오는 인간들과 왜 맞서겠습니까마는! 저들 역시 기껏해야 불쌍한 중생에 지나지 않는 것을요. 자신들이 그럴수록 더욱 더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만드는 행위를 강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니 저는 이런 글들을 마치 일기처럼 써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죽어서라도 공개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때는 케이 가르침이 조금이나마 더 퍼져가는 거름이라도 될 수 있을까요? 이건 완전히 무슨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군요. 거기가 대나무 숲이었던가요? 쩝. 한밤중 홀로 외치는 이 처량함이여. 그래도 크게 더 외쳐볼까요?
“임 금 님 귀 는 ~ ~ 땅 나 구 귀 다 아 ~ ~ ~”
최근에는 또, 페이스북에서는 제 글에 대해서 ‘게시물 광고 못 한다’고 미리 막아서는 경고도 나오는군요. 아직은 제가 제 게시물에 대해서 돈 들여가면서 광고한 적도 없고, 그런 마음이나마 먹어본 적도 없는데, 왜 이 따위 견제가 앞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많은 게시물들은 광고하라고 수시로 메시지가 뜨기도 하더만요. 명색이 “페이스 북”에, 아무리 기계가 하는 일이라고 해도, 없던 일이 새로 생기는 걸 보면 또 누군가 훼방 놓는 거 맞겠지요? 아니면 오히려 하도 광고를 안 하니까, 페이스 북 영업에 지장이 있다는 말일까요? 꼭 이렇게 쫄쫄 흐르는 흐름, 그 코 묻은 돈까지 벌어먹어야 되는 영업 수준이 아닐 텐데 말씀입니다. 꼴랑 그런 ‘이익’이 아니라, 이렇게 ‘인류 평화’에 기여한다는 게 페북 가치를 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극동을 제외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에 대한 활동들이 저렇게 페북에서 제일 활발한 것이겠지요? 명박정부 등장 전후로 대학 강의까지 다 잘리면서, 정말 ‘찍’소리도 못 하고 아주 천하백수로 숨어 살 듯 살아왔는데, 친구들 아니었으면 진짜 어디 쥐도 닭도 모르게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씀이지요. 촛불혁명에 새시대가 되어도 여전히 이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꼭 마차가지인 셈입니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흐름이 아니래도 그러시네들······, 정말. 이제 좀 포기들 하세요, 좀!! “한 인간의 인생을 이렇게나 매장시켜 놓고서도 계속 그러겠단 말이냐?”
언제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랏!” 하는 말이 나돌았었지요? 어떻게 휘청거리면서라도 가기는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제가 꼭 그 심정입니다. 그냥 인간 좀 사랑하겠다는데, 거기에다가 도대체 뭘 어쩌겠다고 계속 이렇게나 방해만 하고들 있단 말일까요? 그도 그렇지마는, 이제 하소연이 나오는군요, 왜, 인생 황혼이 다 되도록 함께 걷겠다는 사람도 하나 안 나올까요? 그나마 있던 친구들은 다 멀어져버리고 말씀입니다. 어째도 ‘혼자 가는 길’이지만, 그래도 곁에 누군가 딱 하나라도 있어주면 좀 더 좋겠습니다. 온다고 왔는데 도대체 진짜 오기는 온 건지, 간다고 가는데 정말 가기는 가는 건지, 하, 참, 아무리 ‘닭의 모가지’ 어쩌구 해도 새벽이 오는 것 같지도 않고 말씀입니다. 닭 모가지 비틀어놓은 게 언젠데 여태까지도.. 아무래도 닭모가지 잘못 비튼 것일까요? 설마, 닭모가지 잘못 비틀었다고 새벽이 안 온다고요? 그 역시 온전히 ‘내 탓’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하기사, 아니, 기껏해야 어차피 이 글들은 일기 수준밖에 안 되는 꼴이라고, 이렇게 휘갈겨 써도 되는 것일까요? 오늘은 왜 이런 넋두리나 늘어놓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꼴로 ‘고요’ 운운, 들먹이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야심성유휘, ‘밤이 깊으면 별은 더 빛난다’ 그런 말도 있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웠다”는 소리도 있으며, 앞에 말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깡다구도 있습니다만,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쯤에 해당하는 걸까요? 제 눈에는 아무리 잘 봐줘도, 한갓 ‘얼치기’로밖에 안 보이는 무리들은 여전히 활개 치고 있고요. 그들이 아마도 저들 무리겠지요? 저들 역시 괜히 오해받을 짓들은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도 못하는 무지랭이들은 아니겠지요? 별로 튼튼하게 보이지도 않는 인간 하나, 아주 묶어놓고 피 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겠다는 심뽀일까요? 안 그래도 이미 피 다 빠져가는데요! 얼굴까지 누르팅팅 하단 말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안병만과 조규철 패거리 등 저 부패한 무리들을 위시해서, 저들은 자신들이 해온 짓이 탄로 날까 봐서라도, 이 흐름을 더 막으려 할 것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이렇게 야비하게밖에 못 할까요? 겨우겨우 쪼롱쪼롱 흘러가는 흐름 하나도 무서워해야 할 저들이란 말일까요? 이 세상 누구라도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의 흐름 이걸 아예, 안 흘러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대한민국에서 오늘날 이렇게까지 오지도 못했겠지요. 한 인간의 인생을 통째로 다 바친 일이고, 또 누군가가 도도하게 이어갈 일이라니까요!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서, 이 일이 여기서 그치고 말겠습니까? 그야말로 ‘열흘 삶은 호박’ 얘기입니다.
‘사랑’ 말씀에 이어지는 얘기인데, 제가 지금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니지요? 저 부패한 무리들에게 더 이상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고 다독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반성’이라도 좀 할 수 있는 종자들이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꼭 저렇게 ‘광고할 수 없음’이라는 페북 경고 메시지 아니더라도, 저들이 해왔고 하고 있는 짓거리를 두고 하는 얘기지만, 글쎄요, 저들이 과연 알아듣기나 할까요? 또 무슨 꼬투리 잡아서는 ‘신고’해버리고, 페북 활동 못 하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까요? 얼마 전부터 은근히 겁나는군요. 설마 백주대낮에 무슨 위해를 가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나 저들이 제 아무리 어떻게 해봤자, 이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한 인간이 아주 젊은 시절부터, 대학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온 일이라니까요. 이제 와서 달리 어디로 어떻게 갈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제 스스로로 ‘지금, 좀, 징징거린다’는 느낌이 일어나지만, 그나마 앞으로는 이런 주절거림 안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의연하게 가도록 해보겠습니다. 마냥 쓰다 보니 또 주저리주저리 길어져버렸군요. 가만히 찬찬히 적어나가면 진짜 끝도 없이 주절거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여튼 앞으로는 영양가 별로 없는 말씀은 드리지 않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은 제 개인적인 사이트에만 올려야겠습니다. 주절거림에 친구분들께서는 과한 나무람 없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게시한 조지훈의 시 구절이 다시 떠오르는군요.
배신과 질시와 포위망을
그림자같이 거느리고
나는 끝내 원수도 하나 없이
이리 고독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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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6]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참, 그 말이..
요 며칠 역시 페이스북 활동이 원활하지 못해서 좀 씁쓰리합니다. 어쨌거나 이제 내추억보기 세 해를 걸쳐서 추억을 곱씹게 되는 거네요. 처음은 아니겠습니다만.. 매양 이렇게 덧붙이기만 해도 괜찮겠지요. 추억보기 없는 날은, 무한히 게시되는 새 글 가지고 공부하면 될 테니까요. 계속 그렇게 해 온 겁니다만. 어째도 이게 ‘공부’ 맞지요? 스스로 공부될까 해서 주절거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주절거림을 읽어보시는 가운데 배우는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물론 관심이 있어야 되는 일이지만 말씀입니다.
어쨌거나 여전히 ‘갑갑증’이라고 할까, 세상에 대한 무슨 ‘기대’라고 할까, 그런 심정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런 걸림 없이 그냥 홀가분하게 살아갈 일이라고 말로만 그러면서 말씀입니다. 그렇게 홀가분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내가 삶을 ‘고해’로 사는 한, 어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해결돼야, 본문에 나오듯이 정말로 ‘나 자신이 그 사람의 한 부분’일 만큼, 배우자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거 아닐는지요? 여러분 다들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기도 해서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랑”과 “지성”은 등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들 오로지 ‘생각’밖에 모르고 살다 죽는 거라서 말씀이지요. “지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오히려 대충 지식이 좀 많거나 가방끈 길다면 되는 게 ‘지성’인 줄로 알기밖에 더 합니까? 여기서도 최소한이나마 관심이 있어야, 게시되는 글 한번 읽어라도 보겠고, 그로써 자신의 모습을 곱씹어볼 텐데, 애초에 어린 시절 교육부터 그렇게 안 시키니까 적으나마 인간이 좀 된다는 건 더 요원한 일입니다.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거지요. “인생,” ‘단추’ 하나 끼우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래나 뭐래나, 그런 시도 있던데요.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깊이 천착해서, 진짜로 아주 경건하고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교육을 시키지 말아야 한단 말이겠습니까? 역시 종교의 영역이라고도 하겠지만, 오히려 종교에서도 애들을 그렇게 안 가르치지요? 잘 모르는 일이기는 해도, 애들 때부터 참으로 “종교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종교’는 없지 싶습니다. 아니라면 오늘날 ‘종교’의 모습이 저렇지는 않겠지요. 속세와 하나도 다름없이, 더할 나위 없이 타락해 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그 ‘조직’ 사람마저 그냥 ‘그렇겠거니’ 하고 산다고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저렇게 마구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단 말이지요? 역시 “니나 잘 해라!” 그러겠지만, 그러나 실상이 사회의 바탕부터 꺼져 내리고 있는 건데, 어찌 무심코 그렇게 말하고 말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누구라도 뭐라도 어떻게라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들리는 건 세상 무너지는 소리뿐입니다. 시끄럽기가 끝이 없어요.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는 찬사에다가, 부자 나라 됐다며 으쓱거리고, ‘한류’ 어쩌고 잘 나간다고 우쭐거리더니, 기어이 또 사달이 나는 모양입니다. 하나같이 얍삽하고 천박한 거 아닙니까?
세계적으로는 또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그것도 참, 속으로 ‘우리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러고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런 거 아니라도, 이다지도 무너지기만 하는 세상, 진짜로 “지성적”인 흐름은 거의 보이지도 않고 말씀입니다. 인간들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더 이런 꼴들만 보여서야 쓰겠습니까? 그래도 한 20 년 전까지는 대학생들 작문에서도 최소한의 “지성”적인 모습이 보였습니다만, 요새는 아예 ‘수업이 안 된다.’고 한답니다. 오로지 이렇게만 가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고야 말겠습니까?
각 시대마다 이런저런 탄식들 으레 있어왔다고만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뭔가 조금이나마 꿈틀거리는 모습도 안 보일까요? 평생을 걸었어도 다시는 사람 하나 더 만날 수도 없고 말씀입니다. 이런 한탄에 모쪼록 더 모진 소리는 안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겨우겨우 살아가는 건데, 이런 걱정까지 다 해야 하는 판이기도 합니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더 휘둘리는 거고요. 세상은 그만큼 더 시궁창으로 변해가는 것이고 말씀입니다. 그만큼 너나없이 다 죽는 판인데, 마냥 이렇게 굴러가서는 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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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사랑할 수 있다면 ‘완성’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겁니다. 인류사 그 어떤 시대라서 이만큼 “진리”와 “사랑”을 막바로 접할 수가 있었단 말이겠습니까? 하기사, 이 세상 누구라서 그게 쉬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사랑”과 “진리”, 그 외통수 말고는 “삶”에 달리 무슨 뾰족한 수가 없어서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안 가고는 안 될 길입니다. 그렇게 개인으로서 전체가 되는 삶에 대한 가르침이 “가르침”으로서 “으뜸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게 “교육”의 근원적인 영역이겠고, 나아가서는 말뜻 그대로 저 “종교(宗敎, 으뜸 되는 가르침)”의 근본 알맹이 아니겠는가, 그런 말씀이지요.
대한민국에서는 얼마 전에 학문적으로 ‘통섭’이라는 말도 등장해서 유행이다시피 했던 것 같은데요. 당시에는 저한테 상당히 ‘신선’했습니다만, 그게 이런 수준으로까지는 미처 넓어지지 않았지요? ‘학문에 대한 시야를 합쳐보자.’ 뭐 그런 게 본래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내력이었다고는 해도, 그게 인간 각자가 그 의식으로 해서 ‘분리 · 분열’ 되어 있는 마당에 가당한 소리겠습니까? 비약이라고 하시겠지만, 여기서도 역시 저 화이트 헤드라는 철학자의 말, “서양 철학사 2,000 년은 플라톤의 각주다.” 하는 말이 떠오릅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학문’으로서는 “사랑”에 가닿을 수도 없습니다. 도대체 ‘나’를 넘어설 수가 없으니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학문이니 교육이니 종교니 사회니 경제니 문화니 정치니 선거니 투표니 나발이니 해가면서 떠들기는 해도, 결국은 실상으로서 개인들의 ‘분열된 의식’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인생·세상 문제들이 풀릴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솟아날 구멍’은 오로지 딱 하나 ‘나’를 벗어나는 길밖에 없는 거지요. 저마다 ‘인생’이 ‘문젯거리’로 되는 까닭이 바로 각자 이 ‘나’ 때문이니까 말씀입니다. 설령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가, ‘촛불혁명’을 위시해서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칭송 받는다고 해도, 개인들의 “지성”을 일깨우는 교육이 아니라면 앞날에는 또 다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 오백 년’ 쯤 뒤에는 우리 또 다시 ‘촛불’ 들고 광화문에 모여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각자 스스로 깨우쳐야 할 진리가, “하나를 사랑할 수 있으면, 전체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사랑”만이 ‘나’를 넘어서는 행동일 테니까 말씀입니다. 그 바탕에서부터 분열된 각종의 조직종교들이 내세우는 저런 자잔한 ‘사랑’, ‘자비’, ‘박애’ 그런 따위들 말고 말씀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코로나 역병이 도는 이 시절에 종교를 내세우는 거대한 사이비들 때문에도, 우리는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하는 시국입니다. 종교랍시면서 이다지도 저다지도 천 갈래 만 갈래 다 쪼개놓고 달콤하게 하는 소리가 “사랑”이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한반도에는 저러한 진짜배기 “진리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유구하게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런 것이 소위 “저력”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코로나19로 세상이 더 흉흉한 이때.. ‘사실’에만 적절하게 대처하고, ‘두려워하지는 말자’는 얘기나 겨우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길로 코로나가 수그러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돌발사태 외에는, 사람들 많이 사는 서울과 수도권이 제일 위험한 거 아니겠습니까? 역병 극복의 시절, 이런 부분에서도 역시 ‘세계 으뜸’이라는 찬양을 듣는다고는 해도, 그 쪽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근심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대구·경북 사람들이야 이제 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그 분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간호사였는지 의사였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만, 하얀 방호복에 완전 가려진 그대로 벤치에 반쯤 쓰러져 있던 그 고맙고도 애처로운 ‘사진,’ 그 눈물겨운 장면이 우리 ‘민초’들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돌아오는 선거에서 정치가들은 그런 ‘민초’들을 또 어떻게 갈라놓으려 할까요?
문득, 좀 다른 얘기겠습니다만, 세계사에서 볼 때 근·현대 아시아 극동 지역은 참으로 “삶”에 대하여 ‘여유’ 없는 시대를 보낸 것 같습니다. 그게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는지 또는 문명적으로 쫓기는 ‘전환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류사적인 성인(聖人)께서 오신 시대, 자기네 땅에 그 분을 단 한 번도 발을 디디시게 못 한 사람들이란 말씀이지요. 그게 좀스런 중국의 공산 이념 독재 때문이었는지, 허풍선 일본의 폭력문화·사무라이 관습 때문이었는지, 또는 조선후기 부패와 식민지에 세계대리전 운명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쥐꼬리만한 “지성”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공산 독재로 사람들 마구 잡아들이는 사회에, 그리고 무자비 칼잽이들 들끓는 나라에, 아니면 이래저래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 나라에 어찌 오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 “사랑”의 씨앗 한 톨 뿌릴 수가 없었던 거지요.
가슴 아파해봤자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겠습니다. 게다가 항상 들려오는 소리, “니나 잘 하세요!” 무엇보다도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말씀입니다. 그나마 한반도에 다행한 것은, 이 땅에는 오래 전부터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 미약한 흐름이 안 끊기고 그야말로 “전통”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린 거지만요. 그래서 극동 세 나라 가운데서는, 그래도 여기서 한 톨 씨앗에서 싹이 돋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고 말씀입니다. 꼭 우리 세대에서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자라나고 피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들도 다들 우리 따라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질 일이지만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여전히 저 “방호복” 사진이 아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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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0]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사랑” 말씀에.. 작년에는 ‘민초’랍시고 얘기해놨었네요. 그러나 ‘민초’와 “사랑”이 어찌 제대로 연결되겠습니까? 제 아무리 ‘민초’들의 소위 ‘민도’가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가 “인생을 고해”로 살아가는 한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고통스러워 죽을 판인데 거기서 무슨 “사랑”씩이나 베어나오겠습니까? 그때는 아내나 자식 역시 그저 그런 거지요. 하물며 국가나 민족이겠으며 더구나 세계니 무슨 지구촌이니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야 민초들의 “IMF 금모으기”나 “태안반도 기름닦이” 또는 더 오래 전 “동학”과 “국채보상운동” 등등 끝내 독립운동과 촛불혁명까지 눈물겹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그런 일들이 더 못난 사람들과는 뭔가 좀 ‘다른’면이 있음은 분명합니다만, 저 “사랑”은 일상생활의 문제요 ‘인생을 그리 살아라’ 하시는 말씀이라서 말씀입니다. 그럴진대 여기서 이미 더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말한다거나 글 쓴다는 것 자체가 바로 저 ‘잔머리 굴리는 짓’ 아닐는지요?
그러면서도 주저리주저리 참 많이도 궁시렁거립니다, 그려. “세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또 세상이 하도 근본 없이 굴러가는 머리에.. 물론 “세상은 항상 고여서 썩어가는 속성”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달리 이러나저러나 “깊이 병든 사회”라고도 하지만, ‘거기에 잘 적응한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일깨우는 무슨 ‘건더기’나마 좀 있어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설령 그게 오롯이 종교적인 영역이라고 할지언정, 인간으로 한평생 살면서 그저 종교와 첩첩 담쌓고 갈 뿐이라면, 참, 억울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구러 그 옛날 건국이념이라고 했습니다만, “홍익인간”이란 가히 종교적인 심성 아닐 수가 없을 터입니다. 이 세상 많고 많은 겨레 가운데 배달민족은 일찌감치 그런 배경과 차원에서 노닐었다고 우쭐하자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뭐 한두 개 세계적으로 좀 잘 나가는 데 우쭐해 하고 있다면, 그냥 거기 그쯤에서 그치고 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애시당초 뭔가를 가지고 ‘우쭐’해한다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고운 심성은 그만큼 물 건너가는 거지요. 더구나 그건 물질적인 풍요만 가지고 따질 일이 전혀 아니지요? 어떻게 “한류”를 가지고도 “홍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1 년 넘어 베기다 보니, 팬데믹 코로나19는 그저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이 정신 하나도 못 차린 무리들 때문에 가슴 쓸어내리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말씀입니다. 그래도 ‘선도국’이라고 불러준답니다. “샴페인 너무 빨리 터뜨렸다.”고 비아냥거리던 사람들이 말씀이지요. 거기에다가 대한민국 유투브 가운데에는 한번씩 눈물 글썽해지는 ‘국뽕’ 체널도 있고요. 문득, 외국 얘기라 좀 생뚱맞겠습니다만, 여기서 개인에게는 말 그대로 “사랑”이라면, 민초들에게는 그게 “민도”라는 말이 좀 대응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그 절박함을.. 그게 온세상 “민주화”로 이어지는 거라고 볼 수는 없을는지요?
오늘날 국제정세에서도 그야말로 ‘선도국’으로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자면, 세게 민초들의 “민주화”에도 기여할 수는 없을는지요. 더구나 어제 오늘 그 “민주화”에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만큼 애타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대한민국 대사관 앞에 꿇어앉아서 ‘도와달라’고 한다지요? 주제 넘는 말씀이겠습니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한 거보다는 좀 더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을까요? 군부독재로 흐를 텐데.. 오로지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는 마음씨로서 말씀입니다. 최소한 우리보다는 하나라도 덜 죽어나가게.. 제 주제로서는 끝내 그저 헛된 참견밖에 더 되겠습니까마는. 지 꼬라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래도 저렇게 “사랑”을 말씀하시는 거니까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장 저 나라에 무슨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해도.. 참..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일단은 ‘나’에 매인 우리네 정신으로는 저 “사랑”이 어림짐작으로나마 ‘감’이라도 잡히겠습니까? 하물며 ‘나 없음’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어떤 문명·문화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꼴이겠습니까? 그러기에 종교를 내세우고서도 되려 전쟁을 일삼아 온 그들의 역사 아닐는지요? 도대체 ‘종교전쟁’이라는 말은 아예 있을 수조차 없는 겁니다. ‘그럼, 저쪽 말고 이쪽은 짜다라 뭐 그리 진짜 종교적으로 흘러왔냐?’ 하시면 그 말씀도 맞습니다만, 관념적이나 따나 저렇지 않겠습니까, 하는 그런 어려운 말씀이지요. 거기서도 ‘그게 바로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하시면 전혀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역시, 해석이랍시고 더 이상 ‘사족’ 달지 말았어야 하는 걸까요? 스스로 벌여놓기는 했는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입니다. 하기사 “사랑”에 대한 말씀이니까, 세상 그 어디에 해당 안 되는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쯤에서 당장, 삼십육계, 대충 끝내기에 들어가야 할랑가 봅니다. 벌여놓고서는 수습 못 하고 도망가는 거라고 하셔도 변명 못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나로부터 시작해서 가족과 이웃과 동네와 친구와 친척과 지역과 국가와 민족과 세계로 뻗어가는, 온 지구촌 세계만방에 두루 미치는 그런 “사랑” 그런 “홍익” 마음씨의 사람들이 더 많은 겨레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얀 옷 입은 사람들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 앞가림은 하나도 못 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별로 환영받지도 못하는 주제에.. 평생 제대로 된 직장 한번 가져본 적도 없이.. 그러니 완전 ‘삼포·오포·칠포’ 세대의 원조 격입니다. “만포 세대”의 원조군요. 한국외대에서 크리슈나무르티 소개 강의 하나 하다가 그나마 강제로 잘린 게 한평생 다군요. 나이 ‘마흔 즈음’부터 완전 생매장된 채로 딱 콧구멍 두 개만 내놓고 살았는데.. 무려, 인류사 “새로운 성인”께서 오셨다고 그저 이러고 있네요. 누군가는 또 ‘오지랖 넓어도 한참 넓구만!’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의 아주 “전설적인 오지랖”쯤 되겠습니까? 오지랖이나마나 삼천리 금수강산 그래도 ‘좀 나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사회에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 퍼져나가는 일은, 그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데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러니 고여서 썩어갈 수밖에 없는 무리들은 역시 그런 “가르침”의 흐름을 극구 막아서자는 것이지요. 지들 ‘엉망’인 인생으로써 세상을 더더욱 ‘진창’으로 만들겠다는 심보니까요. 저런 가르침에 대하여 말이라도 한마디 하려는 인간이 있다면, 그를 아주 ‘위험한 인간’으로 선전할 것이며, 심지어는 무슨 ‘노빠’ ‘문빠’로 몰아붙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털 없는 원숭이들이 모인 곳, 항상 수구꼴통들이 득세해온 것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아예 인류의 역사라고도 하겠습니다만, 보다 나은 세상이 되자면 그런 사람들 소위 ‘민도’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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