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처럼 투명한 영혼을 간직한 사랑...
별로 더운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목 주위가 끈적거린다.
아침에 챙겨 입고 나온 긴소매의 셔츠가 정말 후회되는 날이다.
오늘따라 밖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았고,
그래서였는지 멍하고 무심한 상태로 하루를 지내고 말았다. 이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다섯 달이 되어간다.
나름대로 숙고한 끝에 휴학이 아닌 학교를 그만 두는 걸로 결론 내렸지만
요즘에 와선 잘한 결정인가 싶다.
그때는 이 정도 노력했으면 학교생황에는 최선을 다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내 핑계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들어, 아무렇지도 않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손이 떨릴 만큼 안절부절못할 때가 있다.
친구들이 '얼음 공장 공장장' 이라고 놀릴 만큼
언제나 난 차갑고 냉정한 인간인데...
난 사람이 좋아진다는 걸 이해 못했다.
친구들이 연애에 빠져 있는걸 보고 어떻게 하면 사람이 좋아지느냐고
묻곤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내게도 생겼다.
내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일, 그것도 예상치 못한 사람.
그는 그런 대로 학교 내에선 꽤 알려진 사람
-특히나 꽤 알려진 사람이라니! 난 그런 거 정말 싫어한다-
이었다. 미대생이었던 그는 종종 학교에서 있었던 세미나나 행사의 진행에
참여했었고, 모두에게 친절한 것 같았고, 외모 역시 좀 눈에 띄는 스타일
이었으니까. 뭐, 여자 애들이 호감 갖을 만한 사람이었다.
정작 그를 알게 된 건 우리 과 행사 때문이었는데,
실제가까이서 그를 척 대면했을 때는, 비춰지는 모습만을 앍고 있던 나로 써는
생각과 다른 첫인상에 약간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외적으로 보여진 모습은 인기 관리상 성정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만큼
너무나 말이 없었고, 거의 웃지도 않았고,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이중적인 인간이 나일까 싶어 약간 재수 없어지는...
아무튼 난 학과 활동에 그다지 적극적인 학생이 아니었지만
행사의 일 정이 긴 관계로 그 뒤에도 그를 종종 보게 되었다.
행사가 끝나기 바로 전날 약간 늦게까지 학교에 있다가
과 친구들과 그 카페에 갔었다.
학교 후문 쪽에 있어서 우리건물에서는 멀었지만 내가 좋아했던
약간 맹맹한 콜라를 만들어 주어지 때문에 여름이면 항상 그 카페에만 갔다.
얼음이 많아 독하지 않은 콜라도 졸았지만,
그 카페의 로고가 조그맣게 박힌 투명한 컵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콩알만한 얼음 들! 정말 맘에 들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역시 나의 맹맹한 콜라를 시키고,
아이들의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과 선배 몇 명과 같이 그가 들어와 있는 걸 봤다.
자연스럽게 우리와 합석했고, 공교롭게도 그와 바로 마주 앉게 되었다.
주문을 하고, 먼저 온 우리들과 대강의 눈인사를 한 그가 대뜸 내 콜라 잔을 보며 말했다.
"여기 얼음 예쁘지 않아요? 난 이 얼음 때문에 여기 와서는 꼭 콜라 시키는데."
"네? ....아, 네..."
순간 난 얼른 대답도 못하고, 약간 당황하기까지 했다.
그러고선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간에 그가 '어디가 아픈 게 아니냐' 곤 물었었고,
난 짧게 '아니요' 라고 만 답했다.
단지 얼음이 예쁘다고만 한건데... 어떻게 당황할 수가 있지?
그 때문에 일어난 내 마음의 동요를 믿을 수 없었고,
그에게 빠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불안해졌다.
다음날 오후에 그를 보기 위해, 그리고 어제의 내 동요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에 갔다.
친구 말로는 오전에 그를 잠깐 보긴 봤는데,
그 이후로는 안 보인다고 했다.
행사 마무리를 지으려면 오후에 나타나겠지 하는 생각에
저녁 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동안 그는 보이지 않았다.
미대에 다니는 친구에게 은근히 그의 소식을 물어보기도 하고,
되도록 학교에서 오랜 시간동안 있었고, 그 카페에도 더 자주 갔다.
역시 그를 볼 수는 없었다.
낮에 혼자 카페에 있었다.
오후에 수업이 하나 있었고, 날도 더웠고,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혜미야!"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쳐다보았다.
고등학교 친구 윤아 였다.
서로 다른 대학을 가게 되어 자주는 못 만났지만 가끔 전화통화는 하는 친구다.
"잘 살아? 혼자 있는 거야?"
"어, 윤아 야. 오랜만이야.
그냥 오후에 수업이 하나 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근데 여기까지 왠일 이야?"
"그래? 잘됐다. 같이 좀 앉아도 되지? 내 남자친구야. 이 학교 미대 다녀."
윤아의 남자친구와 인사를 했다. '미대라구?'
미대라는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내 마음으로 들어오려 하는 사람.
아니 이미 깊숙히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를 그 사람의 소식을
혹시 알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내 맘은 떨리고 있다.
겨우 간단한 인사만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난 그 사람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혼자 않아 있어? 너 무슨 일 있니?"
"아... 니..야." 라고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리움에 꽉꽉 메어버린 내 마음이 버거웠었던가 보다.
"혜미야! 너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는 거구나?" 윤아는 자꾸 다그친다.
그의 소식이 너무나 궁금해서... 갑자기 그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과 라면 분명히 그를 알 것이고,
그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설사 모른다 하여도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근데... 지금 그 사람...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
윤아는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난 그만큼 친구들에게도 차가운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누군가를 내 마음속에서 받아 들인다는 건...
그걸 인정한다는 건 있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한 나였으니까...
윤아의 남자친구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일 만큼
가까운 선배라는 사실에 이토록 마음이 아려오는 건 왜 일까?
그저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 일 뿐이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듯 했다.
후배는 모두들 연락이 안돼서 걱정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 사람의
사물함에 가면 혹시 그의 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며 사물함 위치를 일러주었다.
그를 향한 내 사람이 후배의 눈에도 너무나 안쓰러웠나보다.
하지만 그의 사진만으로도 난 지금 조금은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의 사물함 앞에 섰다.
후배가 간직하고 있었다던 사물함 열쇠를
땀이 흠뻑 배인 손바닥에 꽈~악 귀고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단지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좋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꽂아 그의 사물함을 열었다.
나의 눈엔 한없는 눈물만이 흘러내린다.
사방에 붙어있는 나의 사진...
'그도 나를 지켜보고 있었구나... 나 혼자만이 아니였구나...'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사물함엔 나의 사진과 수북하게 쌓인 차표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두 행선지가 동일한 차표들. 문득 차표에 적힌 날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를 만난 날부터 사라지기 전 날의 날짜가 찍혀있다.
혹시나 그 곳에 가면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나만으로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 나서부터 왠지 모를 따뜻한 기운이 날 감싸고 있는 듯 하다.
역에 내였을 땐 이미 날이 조금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기차에서와는 달리 조금 막막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내 안의 그가 날 지켜주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그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그를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안타까운 몇 시간이 지났다.
이렇게 그를 찾는 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난 포기할 수가 없다.
드디어 그런 나를 하늘이 도우신 것 같다.
그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
그냥 무작정 그가 있다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그가 있다는 산 입구에 다 달았지만
이미 밤이 늦어 산을 올라간다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그런 갈등과 두려움조차도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막을 순 없었다.
산 속을 헤메이며 나의 몸은 지쳐가기 시작했고, 이내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 내 곁에 있는 것만 같다...
나를 지켜주는 따뜻한 기운과 같은 느낌...
가늘게 뜬 나의 두 눈에 그가 들어온다.
그토록 보고 싶던 그가 내 앞에 있다.
이마를 쓸어주는 그의 체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이 복받쳐 올라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울었나보다.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고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은 후.
둘러본 그의 작업길 한구석엔 내가 있었다.
너무나 투명하고 맑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내가...
"헉!... 저건... 나잖아..."
"그래, 이제서야 겨우 네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게 된거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
내 영혼까지도 이젠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그는 내게 자신의 영혼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이곳에서 그토록 오핸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그와 난 영원한 영혼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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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나무
얼음처럼 투명한 영혼을 간직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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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7.2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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