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 월평 詩
신의 뜻은 가난한 이의 친구
방민호
신대철 <대륙종단열차>
김이듬 <변기 막힌 날>
이순희 <따뜻한 이름>
박현수 <그저 열심히>
1. 교황 말씀과 정약용의 시가 서로 통한 것
오늘 아침 신문 <세계일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교황 프란치스코 1세가 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링 아르헨티나 추기경은 신의 뜻은 '빈자의 친구'가 되라는 것으로 했단다.
이 분은 추기경일 때도 작은 아파트에서 손수 밥을 지어먹었고 버스를 타고 다녔으며 추기경복보다는 보통 신부복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교황에 취임하며 축복을 전할 때 교황이라는 말 대신 로마 대주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번에 취임식을 할 때도 묵었던 호텔의 숙박료를 직접 계산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앞으로 '아랫사람들'이 꽤나 힘들 것도 같다. 윗분이 그렇게 청빈과 겸허를 앞세우는데, 아랫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 있을 게 불 보듯 뻔하다 하겠다.
사람이 자신의 신분에 맞게 처신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와 이번 새 교황의 행동방식이 전혀 모순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인식 자체에 어떤 결함은 없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젯밤, 나는 월평을 위해 월간지들을 뒤져보았다. 이름난 계간지에 실린 작품들이라고 해서 좋다고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고, 월간지나 계간지 한 권을 읽어도 선택할 만한 시 한 편 없는 책이 있는 것도 지난번과 다를 바 없었다.
《시인》이라는 시전문지를 읽는데, 거기 다산 정약용의 시들이 번역되어 있다. 박석무, 정해렴이 펴낸 《다산시정선》(현대실학사, 2001) 두 권 가운데에서 뽑은 것인데, 이 가운데 참으로 그 내용이 곡진하다 할 만한 시들이 있다. <신광하의 집이 무너졌다네(破屋歎 爲白澤申佐郞作)> <굶주린 백성(飢民詩)> <아름다운 벗을 그리워하다(猗蘭 美友人也)> <돌모루의 이별(石隅別)> 등이 특히 그러했다. 이 가운데 하나를 그 일부만 인용해 본다.
인생이 풀이라냐 나무라냐/물이랑 흙으로만 갈아갈거나.
힘껏 일해도 초목만 먹고 살라니/콩과 조 그걸 먹어야 하는데
콩과 조 귀하기 보배 같으니/혈액과 생기가 어떻게 기름질쏘냐.
야윈 목은 구부러져 따오기 모습/병든 살결 주름져 닭 껍질이네.
우물 있어도 새벽 물 긷지를 않고/땔감 있어도 저녁밥 짓지를 않네.
팔다리는 그런대로 움직이지만/걸음걸이 맘대로 못하는구려.
너른 들판 찬바람이 많은데/기러기 슬피 우는 저녁에 어디로 가나.
고을 사또 어진 정사 행한다고/사재 털어 구제해 준다는 말에
엉금엉금 고을 문에 다다라/입 쳐들고 죽가마 앞으로 간다.
개돼지도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걸/사람으로 엿처럼 달게 먹으리요.
어진 정사 행하기는 바라지 않았지만/재물 털어 구제함도 어림없구나.
관가재물 남이 엿볼까 꺼리리니/우리가 굶주리지 않을 수 있으리요.
관가의 마구간에 살지고 아끼는 말은/진실로 우리의 살갗이라네.
슬피 울며 고을 문을 나서니/아찔하고 핑 돌아갈 길이 까마득하다.
누런 잔디 언덕에 잠깐 나아가/무릎 펴고 보채는 아기 달랜다.
고개 숙여 서캐를 잡고 있자니/두 눈에선 눈물이 왈칵 쏟아지네요.
—정약용 <굶주린 백성> 중에서
대통령도, 시대도 바뀌었지만 지금 사람들의 삶이 어려운 것은 누구나 안다. 세상이 밝아져 먼 곳에서 일어난 일도 한 시간, 일 분 만에 내 귀에 와 닿는 때다. 그러나 오늘 우리 문학은 세상일에 참 둔감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한때는 너도나도 민중시를 쓰고 환경생태시를 썼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시인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참 자세히 모른다, 둔중하다고 말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나는 생각한다. 관념에 흐르기 때문이다. 상황과 사태에 천착해서 실로 구체적인 경험을 얻고 그것을 자기 마음에 비추어 자기 자신만의 시상을 얻지 못하고 남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발부리가 어떤지 생각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며 저것이 시적이야, 하고 감상이나 신념을 제시하는 데 만족할 뿐이기 때문이다.
2. 삶의 문제가 숨 쉬고 있는 대륙을 목도하다
신대철 시인의 <대륙종단열차>는 내가 직접 잡지에 투고해 달라고 청탁한 것이다. 물론 어떤 시가 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분이 평소에 자신의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시는 쓰지 않는 분임을 알고 있었다. 몽골에서 전화를 받으신 신대철 선생이 보내온 시가 바로 이 <대륙종단열차>다. 먼저 이 시를 인용해 본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모래폭풍 속에서
기적 소리가 다가온다.
모스크바, 울란우데, 울란바토르, 자밍우드, 북경
칸칸이 커튼 내려진 창 사이로
그늘진 유리창에 뺨 붙인 채
초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이들,
옆얼굴이 옆얼굴을 지우며 스쳐간다.
아무도 손 흔들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
울란바토르 중국 대사관 앞에서는
중국을 규탄하고 해방을 외치는 소리 들끓고
초원을 향해 굴러가는 아우성,
대륙종단열차 꽁무니에 매달려가던
아우성도 해와 함께 허공으로 뚝 떨어져나간다.
사방을 둘러봐도 메마른 늪지와 구릉과
나날이 늘어가는 팻말 박힌 초원뿐
초원의 아우성을 향해
앞서가던 몸과 질질 끌려가던 마음이
서서히 뒤바뀌면서 몽골인들은 초조해진다.
열차가 사라진 뒤에도 침묵이 흔들린다.
대륙이 덜커덩거린다.
하다, 메르겐, 하다, 메르겐, 신의주
—신대철 <대륙종단열차>(《문학의오늘》봄호)
나는 이 시를 보고, 과연, 하고 속으로 감탄하고야 말았다. 이 시의 비밀은 맨 마지막 연에 있다. 여기 나오는 '하다'와 '메르겐'은 모두 사람 이름이다. '하다'는 중국 네이멍구 몽골족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하다 15년을 복역한 반체제 인사이고, '메르겐'은 최근에 중국 네이멍구 광산 개발로 인한 소음과 분진, 그리고 초원 파괴에 항으하다 한족 트럭에 치여 죽은 유목민이다.
나는 1996년에 혼자 중국에 여행 갔다 네이멍구 자치주의 서울 후허하오터까지 기차를 타고 간 적이 있다. 베이징에서 열 시간 이상 갔던 것 같다. 그때 그 기차에서 역무원이 먹을 것을 팔러 올라온 행상 남자의 등짝을 후려치는 것을 보았다. 또 젊은 청년이 기차 좌석을 통째로 차지하고 누워 가는데, 우르르 몰려 들어온 탄광 광부 같은 어른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서 가는 것도 보았다.
<대륙종단열차>를 읽어 보면, 아직도 중국 네이멍구 자치주의 문제들은 끝난 것 같지 않다. 중국과 몽골, 그리고 북한 신의주, 신대철 시인은 몽골에 오래 체류하면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마치 카메라 기법 같은 그 어조에 우리가 모르고 있던 삶의 구체적 '진실'이 흑백사진처럼 강렬하게 포착되어 있다.
3. 체류의 기억들에 관하여
요즘 시인들은 외국에 많이 나간다. 외국 가는데 여권도 잘 안 나오고 비자 받기는 더 어려웠던 옛날은 갔다. 펜클럽 회원만 외국에 가는 게 아니고 누구나 적절한 명분과 목표를 가지고 레지던스 프로그램 같은 것에 신청해서 나가 살아보기도 하고, 문학교류 행사 같은 것을 통해서 잠깐씩 바람을 쐬고 들어오기도 한다.
나 역시 잠깐이지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하게 되어 프랑크푸르트와 본 같은 독일 도시들을 다녀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본 대학에서 한국문학의 특질에 관해서 대학생들 앞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후베 교수라는 분이 한국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그곳의 유일한 교수였다. 나는 내가 아는 한 성실하게 한국문학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나 나중에 후베 교수는 퍽이나 냉정하게 질문했다. 한국 소설이 과연 중국 소설이나 일본 소설과 다른 게 무엇이냐고 말이다. 일본이나 중국 소설을 안 읽어 본 게 아니고 또 일본 쪽이라면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조금씩은 섭렵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 이 분의 질문은 꽤나 냉정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더 자세히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입장이 궁색해지는 법이다.
김이듬 시인이 베를린에 갔던 모양이다. 아니, 지금도 거기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베를린의 대학생들 앞에서 강의했다니 어떤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거기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필시 내가 마주쳤던 당황스러운 상황에 그녀 역시 직면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불 꺼진 방이 편하다 —김이듬 <변기 막힌 날>(《시에티카》2013년 상반기)
혼자 먹는 저녁과 말 붙이지 않는 이웃들 텅 빈 우체통
오지 않는 전화에 아무 느낌이 없다
여기 오래 살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베를린 변두리 작은 방에서
나는 이곳이 아무렇지도 않다
십오 주 동안
창 밖의 사과나무가 변하는 동안
진초록이 옅어지다 엷어지다 연두가 아니라 붉은색이 되는구나
그 사과가 하루하루 붉어가는 동안
해는 짧아진다
오늘 낮은 더웠다
눈동자가 하늘색인 한국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시에 나오는 정화수를 설명하는데, 그게 정화조에 담긴 물이냐는 질문에 장독대 어쩌고 하다가 시간이 끝나버렸다 내가 칠판에 우물을 그린 후, 그 물이 정화수가 되는 신비를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어도, 여기 애들은 정확하게 시계를 보고 나가버린다
목이 타서
정화수라도 마셔버릴 것 같은데
수도에서 석회수만 나온다
슈퍼 입구에 수박을 쌓아놓고 팔던데, 못 사 먹고 있다
수박이 사과 크기 정도라면 좋을 텐데
통째 썰어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게
이 시로 보건대 역시 독일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일면을 가졌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랑비가 제법 내려도 우산 쓰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다. 가죽점퍼 같은 거 걸치고 그냥 묵묵히 걸어 다닌다. 그때 생각했다. 동물도 그렇지만 인간도 종마다 비를 좋아하는 종족과 싫어하는 종족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국 사람들 그냥 비 맞고 다니는 사람들 별로 없다.
일본 사람들은 메이지 시대부터 독일 철학을 열심히 수용했다. 덕분에 칸트 철학 같은 것은 일본 철학이나 교육의 토대를 이루다시피 했다. 독일 사람들도 일찍이 일본을 알아서 일본문화라면 유럽의 재패니즘을 체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한국의 문화를 그렇게 진지하게 설명하려 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라고 할 것이다.
어쩌면 이 갈증은 내가 몇 년 전에 겪었던 당황스러움과 마찬가지로 초심자의 것이라고나 할 수 있다. 문화의 차이, 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나 표현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성찰해 보게 한다.
4. 고양이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에 관하여
나는 고양이를 즐겨 시의 소재이자 주제로 삼는 사람의 하나다. 고양이 하면 으레 황인숙 시인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에게 그렇게 친근했던 개와는 멀어지고 고양이가 대세인 시대가 되고 말았다.
고양이는 참 문제 많은 동물이다. 도대체가 자기중심적이기 짝이 없다. 없을 땐 찾고 있으면 그만이다. 배가 고프면 주인이 필요하지만 배부르고 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야속하고 얄밉기 짝이 없는데, 제가 필요해서 다가올 때면 그 아양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에 방금 전 일을 금방 잊어버리고 또다시 이놈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고양이를 사용하는 한 가지 용법 가운데 하나는 자명종 대용으로 쓰는 것이다. 밥주는 시간에 밥이 제게 떨어지지 않으면 일단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주인의 가슴 위에 올라가 앉는다. 그래도 피곤한 주인이 소식이 없다? 제 딴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침내 주인의 볼이며 입술이며 가리지 않고 핥아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고양이 하나 기르면 지각할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이순희 시인의 <따뜻한 이름>은 고양이를 그중 잘 사용한 예를 제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이 시를 읽어보자.
우리집 고양이는 컴퓨터 앞의 의자가 제자리에요
이른 새벽 즐겁게 고양이가 데워놓은 따뜻한 의자에 앉으면
고양이의 체온이 느껴져요
의자에서 잠을 자던 녀석이 쫓겨나서 시무룩하지만
그 이름 한 번 불러주자
숨소리가 달라져요
몸에 데워지는 소리 같아요
따뜻한 의자는 미소를 찾아주지요
요즘 미소를 잃어버린 당신은 점점 싸늘해지고
뒷목은 뻣뻣해지고 어깨도 굳어졌어요
사람들은 예전의 그 따스한 미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원래부터 당신이 차가운 사람이라 생각하게 된답니다
당신은 당신대로 세상이 차가워져서
자신도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자, 당신에게 따뜻하게 데워진 의자를 드리니
이제는 미소를 되찾고
세상의 이름 한 번 불러주세요
세상의 숨소리도 달라지고
세상의 몸도 따뜻하게 데워질 것이에요
—이순희 <따뜻한 이름(《문학과창작》봄호)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당신"이라고 부르는 어떤 차가운 사람을 향해 자기 집 고양이의 체온을 나누어 주겠노라고 한다. 고양이의 에고이즘은 자기 자리, 자기 용변 보는 곳을 확실하게 해두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이 고양이가 새벽 내내 덥혀놓은 자리를 차고 앉아 컴퓨터를 하는 화자. 그러나 이 화자는 자리를 뺏고 마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시를 쓴다. 이 고양이의 체온을 나누어 주겠노라고. 몸을 좀 덥혀 보라는 것이다. 아니, 이 몸으로 은유화 된 마음을 한번 따뜻하게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당신"에게 물질을 건네고 있지는 않으나, 확실히 사람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야겠다. 자, 어떻게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고양이의 체온이라도 나눠주면 된다. 따뜻함을 나눠주려는 그 마음이 세상을 그렇게 따뜻하게 만든다.
5. 열심히만 하면 되는 일도 있나?
박현수 시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다. 바로 며칠 전에 대전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이광수의 평론 <문학이란 하오>와《 무정》에 관한 논문을 하나 완성해 놓고 이것을 가지고 함께 떠들 사람이 필요햇다.
그렇게 해서 생각난 게 이 박현수라는 사람이다. 대뜸 전화를 해놓고 내가 참 굉장한 발견을 했노라고 했더니, 아니 당신도 그러냐, 나도 한 달 전쯤 그런 일이 있었더라고 했다.무슨 일이냐 했더니, 만해 한용운의 <십현담 주해>를 놓고 이리저리 불교니 깨달음이니 만해문학에 관해서 생각하는데 작동 안 하던 컴퓨터가 다시 작동하듯 머릿속이 환해지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아니, 당신도 그렇단 말이냐. 그러면 우리 술이라도 한잔하며 자축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그럽시다. 그럼. 말은 이렇게 되었지만 내 거주지는 서울이고 이 시인은 대구가 네 식구 거느리고 사는 곳이다. 어떻게 하느냐.
궁리 끝에 우리는 대전에서 만났다. 만나서, 이광수가 어떻고, 한국문학의 근대 이행이 어떻고, 만해가 어떻고, 만해의 <십현담 주해>, 김시습의 주해가 수준이 어떻고, 잔뜩 이야기하고, '광천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다.
내가 이번에 읽은 그의 시는 바로 이런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가방을 뒤지고
윗주머니에 손을 찔러보고
속주머니를 만져보고
앞뒤 바지 주머니를 두드려보고
수신호하는 야구감독처럼
알기 힘든 행동으로
물결이 다음 물결을 만들듯
하나의 몸짓이 다음 몸짓을 일으켜
그저 열심히 여기를
만지고 저기를 두드리며
춤을 추듯
아래를 두드리고 위를 만지며
일순, 갈 길을 잃은 생이
—박현수 <그저 열심히>(《시에티카》2013년 상반기)
"갈 길"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자신이 그것이 제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시집을 네 권, 다섯 권을 내도, 어디서 시집 내자는 소리 한 번 안 나오는 사람도 그것이 제 운명의 길이라고 생각하면 가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시업의 길이다.
학문의 길도 그와 같다. 밥 벌어 먹고사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또는 사람은 다 생명을 타고나 제각기 주어진 수량만큼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뭔가 핑곗거리가 필요한 것이니, 그것이 바로 "갈 길"이라 할 것이다.
이 시는 그 "갈 길"을 찾아야 하는 사람의 구도적 자세를 보여준다. 화자는 지금 "갈 길을 잃은 생"이다. 그러나 간다. 가기 위해서 찾는다. 만져본다. 뒤져본다. 뭔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쳐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단한 움직임이 "갈 길 잃은 생"에 무엇인가를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고 있는 이 막막한 상태. 그러나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다음엔 안 가던 컴퓨터가 작동하고 캄캄한 복도에 형광등이 일제히 켜지는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일 것이다.
—월간 『유심』 2013년 4월호
방민호
문학평론가 ․ 시인.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4년 《창작과비평》 평론, 2001년 《현대시》 시로 등단. 저서로 《비평의 도그마를 넘어》《납함 아래의 침묵》《문명의 감각》 등과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 유심작품상, 김환태평론상 등 수상.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첫댓글 생각에 생각을 머물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