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날짜 : 2019. 8.24(토)
♤ 구간 :
충정아파트 ➡ 충정각 ➡ 이명래 고약집터 ➡ 성요셉아파트 ➡ 약현성당 ➡ 김정호 집터 ➡ 수제화거리 ➡서소문 역사공원 ➡ 팔홍문 터, 강희맹 집터, 순성 터, 칠패시장 터 ➡ 정미의병 발원터 ➡ 이충순자결 터, 소의문(서소문)터, 시위병영 터 ➡ 수렛골, 평안교회 ➡ 동화약방 터, 서울연통부 터 ➡ 서대문정거장 터 ➡ 쌀박물관, 농업박물관, 김종서 집터 ➡ 동양극장 터 ➡ 돈화문 터 ➡ 경교장 ➡ 4.19혁명기념관 ➡ 경기감영 터
♤ 소요시간 : 6시간 20분(09시 ~ 15시 20분, 점심식사시간 포함)
충정로역 8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길 건너 충정아파트가 보인다
충정아파트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0, 충정로3가 250-70)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30년, 32년, 37년설이 있다)에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豊田種雄)에 의해 지어진 아파트 (지하 1층, 지상 4층)
초창기 건물소유주 토요다(豊田)의 이름을 따 한국식 발음인 풍전아파트로 개칭되었으나 혼용하다가 유림아파트로 바뀐다
[토요다는 건축가 이름일뿐 미쿠니(三國)상사가 지었다]
서울시 건축대장에 따르면 준공일은 1937. 8.29일 이며, 일부 문헌에는 1932년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서울시 건축대장은 등재를 위한 기록일 뿐이며,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재판소로 활용되어 지하실에서 처형소로도 쓰이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트래머호텔 이라고 불리는 유엔 전용호텔이 되었다(이 때까지는 4층이었다)
1961년에 이 건물이 한국 정부에 양도 되었는데, 이후 아들 6형제를 한국전쟁에 바쳤다는 이유로 이승만에게 공로훈장을 받은 김병조라는 자가 이 건물을 불하받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시가로 무려 5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김병조는 이 건물의 5층에 가건물을 설치하고, 건물의 이름도 '코리아관광호텔'로 바꿔버린다
그러나 아들 6형제를 전쟁에서 잃었다는 김병조의 안타까운 사연은 거짓말로 판명 되었고, 희대의 사기꾼 김병조의 구속과 동시에 정부는 김병조에게 불하했던 이 건물도 다시 몰수한다
이후 여러명의 건물주들의 손을 거치면서 이 건물은 계속 호텔로 운영 되었지만, 1975년 건물의 저당을 잡고 있던 서울은행으로 건물의 소유주가 넘어가는걸 막기 위해 건물주는 호텔을 아파트로 용도를 바꿔 개별 분양했고 분양 받은 사람들이 은행과 협상을 벌여 건물을 사들였다
이 때 유림아파트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래의 용도였던 아파트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1979년, 충정로 왕복 8차선 확장 공사로 아파트의 3분의 1 정도(19세대)가 잘려 나가는 수난을 겪게 된다
원래 제일 작은 평수가 15평 정도였는데 이 때 잘려 나가면서 7.5평이 되었다
그러자 잘려 나간 부분에 살던 주민은 복도를 무단 점유하여 살았고 그 때문에 복도와 계단을 다시 만들면서 지금의 괴상한 형태가 되었다
각 층이 9호까지 있는데 2-3호는 그 잘려나간 7.5평, 나머지 1-6호는 16평, 7-8호는 27평, 9호는 30평 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최초 아파트는 1930년 미쿠니
(三國)상사가 회현동에 직원 숙소용(관사)으로 지은 3층짜리 미쿠니아파트이며, 풍전(유림 - 충정)아파트 또한 미쿠니상사가 지었다
도요타(豊田 - 풍전)아파트의 도요타는 건축가 이름 이다]
아파트 간판이 셋이다
내부의 모습
계단과
복도
용도를 알 수 없다(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듯)
공동 화장실?
공동 창고인가?
2008년, 마침내 이 건물은 도시환경 정비구역 으로 지정되어 재개발 대상이 되었으나, 입주자들에게 지급해야할 보상금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결국 재개발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원래 주거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세대와, 1979년 이후 복도를 무단 점유하며 살던 세대, 그리고 사기꾼 김병조가 불법으로 증축한 5층에 살고 있던 세대, 이렇게 세대 간의 갈등이 있었고, 4층 이하의 세대들은 5층 세대에는 토지 지분이 없으므로 이들이 보상 대상이 될 법적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직방, 네이버 부동산 등 부동산 앱 건축대장 엔 4층이라고만 나와 있다)
재개발이 흐지부지 되자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이 아파트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야 된단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다
공한의원을 지나
충정각이 있다
충정각(忠正閣)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2길 8, 충정로3가 360-22)
1902년쯤 한성전기회사의 기사장이었다는 미국인 맥겔란(R. A. McLellan)이 캐나다 건축가 헨리 볼드 고든 (Henry Bauld Gordon, 1855~1951)에게 의뢰해서 1901~1903년 완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215평 대지에 67평되는 건물인데 미국인 소유였다가 한국인→일본인→다시 한국인으로 건물주가 바뀌면서 구한말 개항기, 일제 강점기,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건축물이다
1930년대 한 때 일본인 다카마스가 별채 일부를 증축한 것 말고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북쪽 측면에 9각형 터릿(turret, 첨탑)을 세우고 벽을 따라 지붕을 얹었는데, 20세기 초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하던 건축스타일 이다
지금은 갤러리 겸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운영 중이다
♤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1898년(고종 34) 1월 한성에서 전차, 전등, 전화사업을 위해설립된 회사로 회사의 모든 사업은 미국인 콜브란(Collbran)·보스트윅(Bostwick)과 맺은 도급계약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운영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친미의뢰정책 때문에 가속화되었다
특히, 콜브란·보스트윅과 도급계약을 맺을 때 회사의
전재산과 이권까지도 담보로 제공, 그 소유권마저 박탈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공사비용을 상환하지 못하게 되자, 회사소유권의 일부가 콜브란·보스트윅에게 넘어갔다
1904년 7월 회사의 명칭이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변경되면서 콜브란·보스트윅은 공사 도급업자에서 주도적인 소유자로 부상하였다
그 뒤 1909년 콜브란이 이 회사를 일본의 국책회사인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에 매도함으로써 회사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 한성전기회사 사옥 터
일제강점 이후 1915년~1929년 동안에는 독립지사 를 탄압하는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건물로 사용되었 고, 1930년부터는 체신국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처음 한성전기회사의 전차 부설은 서울 남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홍릉에 이르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공사 진행 중에 시발지점이 새문 밖, 지금의 적십자병원(서울 종로구) 남쪽으로 바뀌게 되었고, 1898년 9월 경희궁(慶喜宮) 앞에서 기공식(起工式) 을 가진 후 결국 미국인의 소유로 넘어간 이 회사는 전차 운행에 필요한 선로 부설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899년 5월 4일 한국 최초의 전차 구간이 정식 개통됐다
이때 건설된 구간은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의 단선 궤도였다
- 1887년 03월(고종 24) :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 점등(경복궁 건청궁)
- 1894년 05월(고종 31) : 경복궁 내 병기창에 제2전등소 준공 (이를 통해 창덕궁에도 최초로 점등 개시)
- 1898년 01월(광무 2) : 한성전기회사 설립
- 1899년 05월(광무 3) : 서울시내 전차시승회 및 개통식(동대문 ~ 신문로)
- 1900년 04월(광무 4) : 종로에 가로등 3등을 점등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점등)
- 1904년 08월(광무 8) : 한성전기와 콜브란의 합작회사
- 1905년 06월(광무 9) : 인천의 일본인 중심 인천전기주식 회사 설립하여 최초의 수력발전소 운산수력 준공 (660마력, 500 kW)
1936년 옛 건물의 모습을 모두 버리고 다시 지었지만 이마저 1936년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지 못하고 원래 2층이던 건물이 4층으로 증축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장안파'가 똬리를 틀었던 곳이 이 건물이다
'장안파'란 말도 건물의 이름에서 나왔으며, 장안파 공산당은 해방 후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로 결성된 정당이다
이명래 고약집 터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2길 10, 충정로3가 360-6)
1906년 프랑스 선교사 드비즈 신부로부터 제조기법을 배워 1920년 이곳에 명래한의원을 차리고 한국 최초의 신약이자 국민상비약이던 종기 치료제 고약(膏藥)을 만들어 유명해진 이명래(李明來, 1850~1952)가 명래한의원(이명래고약집)을 운영하던 곳
이명래 고약은 후에 둘째 사위 김광진(1996년 사망)이명래한의원을 이어받아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약을 제작 판매하다, 이광진의 사위이자 이명래의 외손주사위인 임재형이 가업을 이어받아 운영하였다
경성여의전을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던 막내딸 이용재(李容載, 2009년 사망) 여사는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유진오(兪鎭午, 1906~ 1987) 박사의 부인으로 1955년 종로구 관철동에 명래제약을 설립하여 이명래고약을 대량생산하여 약국에서 판매했다
후에 명래제약은 2002년 부도로 지피제약이 판권을 인수해 고약을 제조 판매하고 있다
♤ 이명래(李明來)
1890년 서울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던 그 가족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충청남도 아산 성당(공세리성당) 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성일론(成一論, 프랑스명 드비즈) 이라는 프랑스 신부를 만나 고약을 만드는 비법을 전수 받았다
이후 이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 고약집을 개업했다
불과 열 여섯의 나이로 종기환자 치료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 해(1906년)를 이명래고약의 효시로 삼는다
1920년 이 곳(중림동)에 명래한의원을 차리고 이전하였다
♤ 이명래고약(李明來膏藥)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 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 냈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은 처음에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 이라고 불렸다
이후 이명래가 이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을 개업했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이 넘도록 의원 이명래의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먹거리 골목과
아기자기한 충정로의 마지막? 골목을 지나
길 건너 약현성당을 향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