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대만 세 번째 퉈장급 스텔스 초계함인 후장함 진수식을 거행
2022년 인도 북부 결혼식장에서 하객 13명 이상이 우물에 빠져 숨지는 참사가 발생
2020년 순천완주고속도로 남원시 사매2터널 안에서 기상악화(블랙아이스)로 탱크트럭이 넘어지면서 31중 연쇄 추돌 사망 5명 부상 43명
2014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에서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하고 있었다. 오후 8시 10분, 폭설로 인해 천장에 15톤의 눈이 쌓여 무대 앞 부분 천장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체육관 내 500여 명이 있었다. 이 사고로 체육관에서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진행 중이던 학생 9명과 이벤트업체 직원 1명 총 10명이 사망하였다.
2014년 내란음모·선동 국보법 위반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석기 의원 1심 선고공판 징역 12년 자격정지 10년 선고, 2015년 대법원 징역 9년 확정, 8년 3개월만인 2021.12.24. 가석방
2014년 배우 황정순 사망
2010년 홍두영 남양유업 창업주 별세
평북 영변 출신인 고인은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해 1964년 남양유업을 세웠다.
전쟁 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비싼 외국 분유 대신 우리 기술로 분유와 우유를 생산하자는 생각에서 설립한 것이다. 홍 명예회장은 국내 최초의 유아용 조제분유인 '남양분유'를 출시했고 71년엔 '전국우량아 선발대회'를 열었다.
77년에는 국내최초 유산균 발효유를 선보였으며 97년엔 전생산 유제품에 1등급 원유를 사용해 유가공 업계의 품질 향상을 이끌었다. 46년간 낙농 산업 외길을 걸어 남양유업을 임직원 3,000여명, 매출 1조원의 기업으로 키웠다.
홍 명예회장은 이런 공로로 철탑산업훈장, 대통령표창 등을 받았다.
2010년 이상화, 여자 빙속 첫 금메달
2010년 2월 17일(한국시간)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단거리 간판’ 이상화(21.한국체대)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리치몬드 오벌에서 열린 2010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1차 레이스(38초249)와 2차 레이스(37초850) 합계 76초09를 기록, 금메달을 따냈다. 세계기록 보유자인 예니볼프(76초14·독일)와는 0.05초 차이였다.
특히 이번 금메달은 역대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부 전 종목에 걸쳐 아시아 선수가 획득한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 여자 3,000m에서 북한의 한필화가 아시아 여자선수 중 처음으로 은메달을 목에 건 뒤로 일본과 중국 선수들이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금메달은 이상화가 처음이다.
이상화는 초등학생 때부터 국내 1인자 자리를 지키며 국내 전국대회와 선수권대회에 나설 때마다 대회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기대주로 꼽혔다. 휘경여고에 재학 중이던 2004년 겨울부터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나서기 시작한 이상화는 500m와 1,000m 등 단거리 전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상화는 올림픽 데뷔전인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500m에서 5위에 올라 아쉽게 메달을 놓치기도 했다. 이어서 그해 1~5차 월드컵 시리즈 500m에서는 1, 2위만 4차례씩 기록하며 국제무대의 강자로 떠올랐고, 이듬해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부상 투혼을 보이며 은메달을 따냈다.
잠시 주춤했던 이상화는 2009년 2월 하얼빈 동계유니버시아드 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어진 월드컵 시리즈에서 경기에 나설 때마다 한국 신기록을 갈아치웠고 자신의 두번째 올림픽인 이번 벤쿠버 올림픽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이상화와 모태범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한국은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녀 500m를 동반 석권한 최초의 국가가 됐다.
2009년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 카지노 파산보호 신청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한때 운영했던 카지노업체인 트럼프 엔터테인먼트 리조트(TRMP)가 2009년 2월 17일 뉴저지주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미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의 트럼프 마리나호텔 카지노와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 트럼프 플라자호텔.카지노 등 3개의 카지노 리조트를 운영하는 TRMP는 벌써 두차례 파산보호를 신청한 적이 있어 이번이 세번째다. TRMP의 자회사 9개도 함께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2004년 회사명이 트럼프 호텔앤드카지노리조트였던 이 회사가 파산보호 신청에 들어가 2005년 현재의 회사명으로 다시 회생하는 과정에서 트럼프는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났고 이후 이사회 의장직을 갖고 있었지만 의장직에서도 지난 13일 물러났다. 그의 딸인 이반카도 같은 날 이사직을 그만뒀다.
TRMP는 경기침체로 카지노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작년 12월1일이었던 5천310만달러의 채권 이자 지급 기한을 맞추지 못한 뒤 채권단과 12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부채의 재융자와 관련한 협의를 벌여왔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해 파산보호 신청에 이르게 됐다.
2008년 코소보, 독립 선언
2008년 2월 17일 오후 3시 55분(한국시각 오후 11시 55분) 발칸반도에 위치한 인구 200만명의 코소보자치주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심 타치(Thaci) 코소보 총리는 이날 발표한 독립선언을 통해 코소보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주권국가임을 선언했다.
독립선언 직후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선 수많은 인파가 맥주 파티를 여는가 하면, 차량들은 축하 경적을 울려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요시프 티토(Tito)가 건설했던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1991년), 보스니아(1992년), 몬테네그로(2006년)에 이어 세르비아와 코소보 등 모두 7개 나라로 분리됐다.
하지만 보리스 타디치(Tadic) 세르비아 대통령은 "독립선언을 용납할 수 없다"며 반발, 향후 지역 정세 불안을 예고했다.
코소보 독립선언은 1991년 유고슬라비아연방 붕괴 후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Milosevic) 정권이 1998~1999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하자 대(對)세르비아 무장투쟁을 거쳐 1999년 유엔보호자치령이 된 지 9년 만이다.
미국은 18일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주요 국가와 일본 등도 코소보를 주권국가로 승인하기로 했다. 이들 나라들은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인 코소보의 독립이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견제하고,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다. EU는 16일 자체 사법·경찰 요원 2000명을 코소보에 파견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EU 27개 회원국 중 소수민족 문제를 안고 있는 스페인·그리스·키프로스와 코소보 난민의 유입을 우려하는 인접국 루마니아·불가리아 등 6개국은 코소보의 안정을 위해 사법·경찰 요원 파견에 동의하면서도 국가 승인엔 유보적이다. 코소보 내에 있는 세르비아계 주민 약 12만명의 반발도 문제다. 세르비아계 1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미트로비차시(市)는 EU의 사법·경찰 요원 수용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코소보 독립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는 러시아다. 러시아는 "코소보의 유엔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고, 그루지야 내 친(親)러시아 성향의 두 자치공화국(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 대한 태도를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뒤 친서방 노선을 택한 그루지야는 2009년쯤 EU 가입이 예정돼 있다. 그런데 두 공화국이 분리 독립하면 그루지야를 후원해온 EU 역시 상처를 입게 된다.
2007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상 받은 박찬욱 감독
2007년 2월 17일 제57회 베를린영화제에서 SF 로맨틱 코미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특별상인 알프레드 바우어 상을 받았다. 베를린영화제 창립자의 이름을 기린 알프레드 바우어 상은 영화예술의 특별한 혁신을 이룬 작품에 수여하는 영화제 8대 본상 중 하나. 1994년에는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 이 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그의 수상소감은 AFP 등 외신들에 의해 일제히 인용되면서, 이날의 ‘베스트 스피치’ 중 하나로 꼽혔다. 함께 시상식에 참석한 객석의 아내를 내내 바라보면서 일에만 몰두했던 ‘감독 박찬욱’에 대한 용서를 구한 뒤, “부디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내 남편은) 영화감독이지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자신의 영화제목을 빗댄 재치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2006년 필리핀 남부 레이테섬 산사태로 2000여명 사망
필리핀 중동부 레이테(Leyte)섬에서 17일 폭우로 인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 주민 200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고 로이터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이날 오전 9시쯤(한국시각 오전 10시쯤) 레이테섬 남부 세인트 버나드의 구인사우곤 마을에서 발생한 산사태는 주민 2500여명이 거주하는 마을 전체를 진흙으로 뒤덮어버렸다. 극소수 생존자들은 “산사태 후 마을 건물 중 불과 몇 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진흙 속으로 사라졌다” 고 말했다.
외신들은 매몰된 초등학교에 학생 수백명이 수업 중이어서, 이들의 희생이 가장 큰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필리핀 적십자사는 사고 직후 성명을 통해, 200여명이 숨지고 1500여명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했다. 남부 레이테주 상원의원 로저 메르카도는 약 10㏊의 피해지역에서 주민 2000여명이 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독일 작가 에른스트 윙거 사망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 옛 중앙박물관터로 이전 개관
1992년 BC 4천년경 한반도 최고인골, 경남 통영군서 출토
1988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준공
남극지역의 대기, 지질, 동식물 분포, 천연자원 등을 조사할 남극 세종기지가 1988년 2월 17일 준공됐다.
'대한민국 남극 세종과학기지'가 정식 명칭인 세종기지는 420평 규모이며 남셰틀랜드 군도에서 제일 큰 섬인 킹조지 섬에 위치하고 있다.
남미끝에서 1200Km,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약1만7천Km 떨어져 있는 남위 62도5분, 서경 58도45분으로 한국과는 지구의 거의 반대편이다.
남극은 천연가스, 석유, 철광석 등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과 크롤새우 등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기상학, 생물학, 지구물리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거대한 실험장이란 점에서 세계각국이 앞다투어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1982년 주5일제 수업, 서울 부산 8개 국민학교 선정
1981년 한국, 수리남과 경제기술협정 체결
1980년 김태식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프로 복싱선수 김태식이 1980년 2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복싱 WBA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를 2회 1분11초 만에 KO승으로 누르고 세계 왕좌에 올랐다. 이날 경기는 한마디로 김태식의 초전 박살전이 적중한 화끈한 경기였다.
김태식은 1회초 루이스 이바라에게 잠시 밀리는듯 싶었으나 2회가 시작되자 이바라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좌우훅을 날리며 파고들어 시작 40초 만에 첫 다운을 빼았았다. KO왕다운 통쾌한 경기였다. 이날 경기로 김태식은 프로통산 13승(11KO)1패,10연속 KO승을 기록하게 됐다. 또 한국으론 박찬희 김상현 등 3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게 됐으며 처음으로 WBC(박찬희) WBA의 플라이급을 함께 석권하게 됐다.
1979년 중국, 베트남 침공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1200Km에 달하는 베트남과의 국경전선에서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중국정부는 이 침공을 `베트남의 국경침범에 대한 반격`이라고 주장했지만 서방측에서는 캄보디아의 베트남군을 견제해 폴 포트정권을 도와 베트남에 경제적 타격을 가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중국군은 대병력을 투입했지만 국경으로부터 10~15km의 산악지대에서 막혀 3월5일부터 일방적으로 철수를 시작해 15일에는 철수를 완료했다. 국경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4월18일부터 베트남 하노이에서 회담을 열었지만 의견대립으로 결렬되자 베트남은 소련에의 의존을 더욱 강화해갔다.
1979년 남북대화단절 3년 11개월 만에 판문점에서 1차 접촉
1977년 임영신 중앙대 총장 사망
1971년 한필성ㆍ필화 남매, 국제통화 실현
“필성 오빠, 필성 오빠” “필화야? 필화야?” 1971년 2월17일, 한필성ㆍ필화 남매가 일본 땅에서 20년 만에 애끓는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같은 도쿄 하늘아래에 있었지만 분단의 장벽은 둘의 만남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필성씨가 전화로나마 동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한계화라는 또 다른 분단의 희생자가 있어 가능했다. 자매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출전한 필화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한계화씨 사연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필화씨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필화가 자신의 친동생임을 확신한 한필성씨는 곧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ㆍ4후퇴 때 18세로 고향인 평남 진남포를 떠난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으니 30세가 됐을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생과의 만남은 북한 조총련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고, 우여곡절 끝에 아사히 신문이 둘의 통화를 주선함으로써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남매는 다시 통한의 19년을 기다린 끝에 1990년 3월8일 일본에서 재회했다.
1966년 프랑스, 과학위성 발사 성공
1964년 가봉 군부 쿠데타 발생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1962년 2월 17일 5.16직후 군사정부가 민주당정권이 계획했던 경제개발계획을 토대로 제1차 5개년계획 (1962~1966)을 확정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농업 생산력 증대 2. 전력, 석탄 등 에너지 확충 및 사회간접자본 충족 3. 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4. 유휴자원 활용 5. 기술진흥 등이다.
따라서 정유, 비료, 화학, 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일본자본을 포함한 외국자본의 의존도가 60%에 이르렀으며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했다.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증가했다
1960년 김포국제공항 종합청사 준공식
유일의 국제공항인 김포공항의 국제선 청사가 1960년 2월17일 문을 열었다.
개관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내외인사들이 참석했다.
통신시설과 난방, 조명등이 현대식 설비도 갖춰졌다.
대한항공의 전신인 KNA를 비롯한 각국 항공사들이 입주했다.
총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3억환 1942년 일본 공군 훈련장으로 처음 건설된 김포공항은 비로소 국제공항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우리나라 공항의 중심이었던 김포공항은 1939년 당시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에 일본군이 1,317미터 규모의 활주로 3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해방이 되자 김포공항의 관할권은 미군으로 넘어갔고,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미 제5공군이 전용 활주로로 사용하였기도 하였다.
휴전이 이루어진 뒤인 1954년부터는 우리나라도 활주로의 일부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김포공항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정부에서는 ICA(미국제협력처)자금에 의존해 1955년부터 계속사업으로 김포공항 확장개량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58년 1월 미군측과 김포공항의 관리권을 단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그동안 임시 국제공항으로 사용해 오던 여의도공항의 기능을 김포공항으로 이관시키면서 대통령령으로 김포공항을 국제공항으로 지정했다.
9월에는 교통부·국방부·유엔군사령부·미공군·미8군 등이 공동으로 유엔군 산하에 '김포국제공항 종합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위원회에서는 총 공사비 9억 7,500만환을 투입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종합청사 신축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계획에 따라 1959년에는 3억환의 공사비를 들여 청사의 일부를 신축하고 활주로를 보강한데 이어, 1960년 2월 17일에는 김포국제공항의 종합청사가 준공되어 이승만 대통령과 조용순 대법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렇듯 우리나라 제일의 관문으로 자리잡았던 김포공항이었건만 늘어만가는 인원과 물류 수송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 2001년부터는 영종도에 세운 인천공항에 그 역할을 상당부분 넘겨줌으로써 40년간의 김포국제공항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57년 소련 핵무장에 대처 나토군 특수훈련개시
1955년 영국, 수폭제조 개시 발표
1955년 보건, 사회 내부통합, 부흥부 신설
1954년 합동참모회의 설치
1954년 포로인수 조인
1949년 한미 우편물 교환협정 조인
1943년 조선교육령 개정
1937년 철도국, 경성역을 여객전용으로 하고 청량리역을 화물역화한다고 발표
1933년 장진강 수력전기회사 설립
1933년 뉴스위크지 창간
1909년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사망
‘인디언 최후의 전사(戰士)’ 제로니모가 1909년 2월17일, 포로로 구금돼 있던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포트실 요새에서 80세로 숨졌다. 이로써 처절했던 인디언 항쟁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품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야틀라이가 원래 이름이었지만, 멕시코 군인들이 기독교 성자 세인트 제롬을 닮았다고 ‘제로니모’로 부르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로니모가 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와 처, 3명의 자식들이 멕시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부터였다. 이때 보인 용기와 결단력으로 그는 아파치족 한 분파인 치리카후아족의 추장으로 우뚝서게 된다. 19세기 후반 지금의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 등 멕시코 접경지역에 주로 살았던 아파치족은 백인들이 “아파치와 싸우느니 차라리 애리조나를 그들에게 줘버리자”고 할 정도로 용맹한 부족이었다.
남북전쟁 뒤 시작된 미국의 서부개척은 인디언들을 강제로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지만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한 인디언들은 수시로 무력항쟁을 시도한다. 대표적인 싸움이 1876년 6월 수우족(族) 추장 시팅 불이 이끄는 인디언연합군이 미 제7기병대를 격파한 리틀빅 혼 전투. 제로니모도 보호구역으로부터 탈출과 체포를 반복하며 미국의 남서부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5000명의 기병대가 5개월동안 2600km나 추적했지만 신출귀몰하는 그를 잡지 못해 기병대가 오히려 공포에 떨어야 했다. 1886년 8월 마지막으로 체포됨으로써 ‘전사’ 제로니모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갔다.
1904년 오페라 ‘나비 부인’ 초연
1904년 2월 17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작곡가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이 첫 공연을 가졌다.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등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푸치니의 신작 발표였기 때문에 객석은 만원이었다. 입장료 수입은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작품 중에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푸치니는 2만 리라의 선금을 챙길 정도로 사람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비 부인’은 공연 시작과 함께 야유와 아우성에 파묻혔고, 결국 관객들의 모욕과 조소를 받으며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초연 이후에 모든 공연은 취소됐고, 푸치니는 선금을 반납해야했다.
‘나비 부인’은 미국 잡지 ‘센추리’에 실린 존 루더 롱의 단편소설(1898년)로 19세기 말 일본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미국 해군장교 핑커튼과 기녀 초초상(초초는 일본어로 나비를 뜻함)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이다. 이후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각색해 1막짜리 연극으로 만들어 뉴욕에서 성공시킨 이후 1900년 런던에서도 공연하게 됐는데 1900년 5월 ‘토스카’ 공연에 맞춰 런던에 체류하던 푸치니가 ‘나비 부인’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푸치니의 ‘나비 부인’은 당시의 오페라들과 달리 동양적 선율에 2막이 1시간 반 동안이나 이어지는 지루한 구성이었고 여주인공의 기모노 의상도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푸치니는 ‘나비 부인’의 초연 1년 전에는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작곡 중에 인후병과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등 어렵게 곡을 완성했지만 출연자들은 처음 접하는 동양의 낯선 문화를 소화해내지 못했다.
관객의 싸늘한 반응으로 실패를 맛본 푸치니는 작품의 일부를 고쳐 3개월 뒤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다시 ‘나비 부인’을 무대에 올렸고 이번에는 열렬한 갈채 속에 성공적인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1894년 스페인 기타연주자 세고비아 출생
1890년 미국 발명가 숄스 사망
1889년 독일 물리학자 슈테른 출생
1871년 일본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출생
186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인 패터슨 출생
1856년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사망
1797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하이네는 일찍이 본-괴팅겐-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주된 관심은 문학이나 저널리즘에 있었다.
1822년 처녀 시집 `시집`을 출간하고 1827년에 시집 `노래책`을 냈을 때 하이네의 명성은 이미 전 독일에 퍼져 있었다. 하이네는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급진적 문학운동을 벌인 `청년 독일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835년 독일 의회는 이들 급진적 문학 그룹의 집필을 금한다고 결의했는데, 집필 금지 작가들의 명단 맨 앞에 하이네가 있을 정도였다.
하이네가 1830년대 후반 파리에 정착하게된 배경도 파리의 혁명적 분위기가 그를 매료시킨 탓도 있지만 `청년 독일파`가 독일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844년 조국을 그리워하며 파리에서 쓴 `독일, 겨울동화`는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한탄하며 쓴 혁명적 장편 서사시다.
1781년 프랑스 의사 라엔네크 출생
1673년 프랑스 극작자 겸 배우 몰리에르 사망
프평생을 연극인으로 살다간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때도 공연기간 중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의 마지막 걸작 `상상으로 아픈 사나이`를 연기하던 중 각혈이 심해 겨우 집에 돌아왔으나 그것이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몰리에르는 예명이고 장 바티스트 포클랭이 본명이다.
1622년 실내장식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중등교육도 파리의 명문 클레르몽 학원에서 주로 라틴어를, 오클레앙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643년 `광명극단`을 조직, 활발한 연극활동을 시작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1656년 루이 14세의 동생 필립 도를레앙이 그를 지원하면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궁중에서까지 그의 연극이 공연됐다.
파리에서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육체는 오히려 더 쇠약해졌고 가정생활도 원만치 않았다. 불행한 가정생활은 그를 더욱더 연극에 내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날 쓰려졌다. 그의 연극은 탐욕이나 위선 허풍 등 인간 내면의 허를 찌르며 관객을 웃음으로 내몰지만 언제나 삶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수반했다. 몰리에르 연극의 특징 중 하나는 극 중에서 비판하는 자나 비판받는 자나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1600년 르네상스의 대표적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화형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가 1600년 2월 17일 로마에서 화형됐다. 교회나 국가는 시민들에게 특정한 생각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이단이라는 이유로 7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1548년 나폴리에서 태어난 브루노는 18세에 엄격하고 완고한 교리로 종교탄압에 앞장서고 있는 도미니크 교단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사제생활을 하며 고대와 자연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결국 가톨릭 교리에 적응하지 못해 1576년 이단혐의로 교단에서 추방됐다. 그후 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는 `자유 사상가`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가는 곳마다 경찰의 감시와 추방령에 시달려야 했다. 제네바, 리옹, 툴루즈, 파리, 옥스퍼드, 마르부르크, 비텐베르크, 프라하, 취리히, 베네치아 그가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도시들이다.
1592년 베네치아에서 이단신문에 회부되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아 이날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인 특징이 강했다. 우주는 무한하고, 신성(神性)은 전우주를 꿰뚫는 생명, 즉 `우주령(宇宙靈)`이라고 해석하고, 인간은 `영웅적 정열`로 이 우주령의 영원한 활동과 결부된 본성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450년 조선 제4대왕 세종대왕 별세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1450년 2월 17일 5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살이던 1408년 충녕군에 봉해지고, 16살인 1412년에 충녕대군에 진봉되었으며 22살이던 1418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우선 국가체제를 완성해 창업의 대업을 매듭짓는 일이었다. 문물제도의 정비와 유교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그것이다. 따라서 세종2년(1420)에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양성과 학술진흥에 주력했으니 조선에 맞는 문물과 제도를 창안하기 위해서도 옛 제도를 연구해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이들이 추진력이 돼 조선전기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낼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시대에는 황희 맹사성 유관 등과 같이 학덕을 겸비하고 균형감각있는 중후한 인물들이 세종의 태평성세를 보좌하였다. 이들은 모두 청백리에 오를 만큼 청렴결백한 인물들이었고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상호협력의 정치풍토를 일궈내었다. 또한 집현전을 중심으로 국가경영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각종서적을 편찬했다. ‘치평요람’ 을 비롯해 유교윤리의 실천서인 ‘삼강행실’,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 와 천문 지리 의서 농서 등의 기술서를 출판해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업적은 한글창제에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세계문자인 한문을 공부해 우리글을 창제 보급한 문화정책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소산이며 문화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한글 창제원리의 우수성은 민족문화 고양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문화의 제고에 기여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