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유월이 잊힐리야
김 난 석
해마다 유월이 오면
해마다 유월 그날이 오면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건드리는 게 있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미국 참전용사가 전쟁기념관 전몰자 비문에 몸을 기대
혼자 살아났음을 부끄러워하며
회한에 젖는 모습이 또 생채기를 긁는다
(News1 캪쳐)
하여 지난날의 단상을 다시 꺼내보게 본다.
동작역에 내리다 보면
하얀 국화꽃 한 묶음 사는 사람을 본다
하얀 국화꽃 처럼 하얀 소복을 입고 간다
그를 따라 걷노라면
왠지 콧등이 맵다
육교에서 내려서노라면
하얀 안개꽃 한 묶음 사는 사람을 본다
하얀 안개꽃 처럼 하얀 머리를 이고 간다
그를 따라 걷노라면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길을 따라 걷노라면
구운 오징어 다리인듯 핏줄마저 말라붙은
소주 한 병 사는 사람을 본다
그를 따라 걷노라면
왠지 콧물이 난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현충문에 들어서면
울컹 눈물이 난다
돌아서는 길엔
왠지
왠지 뒤통수가 가려워진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총성을 듣는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골육상쟁(骨肉相爭)의 포연을 본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먼 훗날일
이국시대의 역사를 본다
남북시대가 있었더란다
임진강 사이로 서로 겨뤘더란다
모두 다 내 조국이더란다
하나는 북으로 맹위를 떨쳤더란다
하나는 남으로 용맹을 떨쳤더란다
지금이야 비극을 들여다볼 뿐
유월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부르랴 조국이여!
해마다 유월이 오면
시퍼런 피는 외면하고 싶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아, 해마다 유월이 오면
새빨간 산딸기를 따주던
어릴 적 내 누이를 떠올리고 싶다
유월이여 유월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부르랴
조국이여 내 조국이여!
공직 시절, 현충일이면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추모식에 참여하곤 했다.
그럴 때면 성역(聖域)에 묻힌 영령들의 희생으로
이렇게 편안함을 생각케 된다.
우린 주변의 희생이나 도움으로 건재하다.
그걸 생각해보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일이요
부모님에 대하여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이 몸은 섬길 이 없으니 아쉬움만 남는다.
내 숙부는 상이군인이었다.
9남매 중 제일 똑똑했다는 다섯 째
정전된 지 일 년이 지나도록 그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치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두 다리 전쟁터에서 잃은 채 삼우제를 지낸 바로 뒷날 돌아왔다.
빨간 봉분에 엎디어 통곡한들 부자의 대화는 영영 단절이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부모님 앞에 나타날 수 없기에
갈 데가 없다는 핑게로 부산 어딘가의 정양원에 수용되어있었단다.
그러나 고향소식은 며칠 간격으로 다 듣고 있었나보다.
고향에 돌아오던 날 부산의 노름깡패 몇이 따라붙었다.
알량한 생활부조금을 종자돈으로 노름을 해
함께 한 밑천 잡아보자는 것이었으리라.
숙부는 돈을 대고 노름꾼들은 야바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동의 노름꾼들이 걸려들어 이들에게 모두 털렸으니
자연 비난의 소리가 커져 노름깡패들은 부산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다리 없는 육신으로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생활부조금을 모아 논을 얼마간 사들였으나
농사는 누가 지으며 운신은 어찌 한단 말인가...
내 아버지는 그런 숙부가 불쌍했던지
내 아우를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숙부에게 보냈다.
그래서 내 아우는 지금도 최종학력이 국졸이다.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장가는 들어야 하겠지.
어느 섬 색시였다.
결혼 한 달쯤 전이었을 게다.
나보고 색시 댁에 한번 다녀오라 했다.
사지는 멀쩡한지 염탐꾼 노릇 하라고 한 게 아니었던가.
섬색시는 굴을 따기 위해 바닷가에 나갔다가
거적 같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세수를 하고나니
새물이 났다.
찬찬이 살펴보니 손은 거칠망정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저런 멀쩡한 색시가 어디로 시집을 간단 말인가...
나는 거기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례를 올리던 날
신랑신부가 예복을 입고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서 있으니
참 멀쩡하기도 했다.
나는 기어코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그 몸에서 자식 셋을 낳았으니
어찌 다 부양하랴.
그들은 탈 농촌 바람을 타고 서울 구로동으로 올라와
작은 방 한 칸 세 얻어 새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저것이 서울의 생활인가...
숙부님 댁에 사채모집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결국 제일 믿음이 간다는 사람을 하나 택해
그에게 사채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누가 얼마를 빌려 달라 하면 통장과 도장을 내주고
또 누가 얼마를 가져왔다고 하면 통장을 내주어 입금하도록 했다.
이렇게 연명하며 살기 여러 해,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날
그 심부름꾼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도망쳤다.
그때까지 불어난 돈을 한꺼번에 가져가버렸으니
어디 가서 이를 찾는단 말인가...
결국 화병이었던지 시름시름 하시다가 눈을 감으셨으니
숙부님의 복은 거기까지인 셈이었다.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잘 하는데
둘째 셋째 딸은 고등학교만 나온 후 은행에 다니면서
쉰이 다 되도록 시집을 안 간다고 한다.
제 부모님들의 길을 걷지 않겠다는 것일까...
내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날
나는 시골의 논밭과 가재도구 모두 아우에게 주고 말았다.
아우에 대한 나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 아내는 그런 나를 곱게 봐줄리 없다.
내 사연을 알 리 있으랴.
내 아내는 함경도에 근원을 두고 있어 역시 이산의 아픔이 있다.
그런 사연을 내가 알 리 없다.
나의 경우야 조그만 이야기일 뿐
남북 분단의 슬픔은 어디까지 번져나가는 것인가...
오늘은 어느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종군기장을 단 어느 노인과 마주쳤다.
향군회관으로 가는 길을 묻기에
순간 가슴에 단 기장을 쳐다보았다.
그분도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그분의 가슴께를 매만지며
그게 무어냐고 여쭤보니
때를 기다렸다는 듯 유월을 말씀하셨다.
감회가 많으시겠다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으니
작은 관심이라도 표하고 싶어 어리석은 질문을 해봤던 것이다.
그해 유월의 한국전쟁이여!
이찌 그리 쉽게 잊으랴.(지난 날의 단상)
오늘 그해의 유월 그날을 맞아
서울 하늘 아래 우뚝 선 남산을 바라본다.
역사는 기억하는 만큼 교훈으로 살아나는 것.
범부라고 어찌 이 날을 무심하게 보내랴.
바라보는 산하는 희뿌옇기만 해도
하늘은 유월의 진혼곡을 들려주고 있구나.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을 썼다.
우리는 순국 영령들의 넋을 기려야 하리라.
그해 유월 3천만 중에 2백만의 전사 전상 행불자가 났으니
인구의 10프로에 가까운 목숨들이 화를 입었다.
재산상의 피해야 말해 무엇하랴.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고 60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신이 해이해지면 당나라 군대가 되고 말리라.
카페 대문을 보니 호국 보훈으로 꾸몄다.
게시글을 읽어보니 샛별사랑님도 현충일 추모글을 올렸다.
우리 카페에도 전사상가족, 충렬가족들이 많으리라.
함께 위로의 말도 보내드리자.
2023. 6. 6.
첫댓글 난석님~
사연이 참 기구합니다
전 전쟁통에 태어 났으니
전쟁의 아픔을 모르지요
그리고 울산은 그나마 다행이었답니다
동생분이 좀 안됐지만 그 당시는 무모님의 뜻을 따라야하기에
어쩔 수 없었겠지요
긴 글 잘 읽고 갑니다
지리적으로 울산을 포함한 경상도는 좀 괜찮아시요.
하지만 서해안에 연한 충청도 특히 전라도는 빨갛게 물들었으니 고통이 심했을 테고요.
그래도 용케 살아 남았나보네요.
순국 선열님들에게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어떤 말을 하여도 그 분들의 은혜에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단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부끄럽지 얺는
후손이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정말 모두 총알받이였으니까요.
난석 선배님 조용히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날 것같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지금 편하게 잘 살고있지요
제가 조금이라도
그 희생에 감사할 일은
기도밖에 없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국 영령들을 위해 묵주기도
바치고 카페 방문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몸바친
순국선열들의
영원한 안식을빕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당신들의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
난석선배님 감사합니다.
잘했네요.
하지만 또 힘차게 살아가야지요.^^
가고 또 오는 6월
오늘만이라도 기억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아이구 이뻐라.^^
그런데 청담골 언니가 묻길
울릉도 누구와 갈꺼냐고 해서
뱀 두 마리라 했는데.ㅎ
@난석 역시 선배님은 센스까지 만점요 ㅎ
선배님의 슬픈 가족사에 오늘은 누구보다 뜻깊은날 되시겠어요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도록 조용한 묵념을 10 시에 하렵니다
네에 온 국민이 하나로.^^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 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 잠을 이룬다
그 당시의 슬픈 사연들 다 가지고 있겠지만, 선생님의 사연도 찡하게 합니다.
그런 사연들이 만든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겠다고 휴전선에서 늘상 불렀던 군가를
다시 불러 봅니다. 그래도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저야 조그만 이야기일 뿐이라지만
그런 사연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켰지요.
여러 스토리가 섞여있는 중에
전쟁으로 인한 여러 사람들의 희생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생을 엿보았습니다.
꽃같은 생명을 바친 전우들을 생각하는
현충일 아침글 감사합니다.
함께 그런 사연들을 추념하고 위로를 드립니다.
아침6시에 태극기의 반기를 달았구
지금은 현충일 행사를 보고있네요.
그 한몸 용감히 산화하여 넋이된 님들을 생각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권이야 일부 술렁대더라도
하나로 마음을 모아야겠지요.
숙부님께서 6.25참전 상이용사셨군요. 귀환후 그분들이 겪으신 고초는 이루 말할수 없는것 같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분들과 다치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래야지요.
기정수 님 글도 잘 읽고 내려왔네요.
현충일을 맞는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