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음식 / 최현섭
“진지 드세요” 내놓는 이의 사랑이다. <밥>의 높임말인 진지(進支). 문헌에 의하면 “진지의 자음은 밥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왕의 밥상과 평민의 모든 밥상을 의미하며 밥상 위에 놓여 진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티브로 한국의 전통 밥상을 상징화하였다.” 청주에는 진지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문화유산 활용사업과 음식 역사 문화 창의 학교를 기획 운영하는 전문기관이다.
진지박물관은 운천동 <구루물마을>이라는 사회적 협동조합이 협업하여 고증을 통해 발굴된 건강한 고려시대의 음식을 메뉴로 선보인다. 청주를 방문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체험하고 선진지 견학도 하고, 요리 교실을 운영하거나 음식 해설사 양성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후덕하고 손맛이 뛰어난 관장의 초대를 받고, 어떤 이야기와 음식이 나올 것인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잠시 기다리다 보니 우리나라의 전통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음식과 버무려 내온다. 충북의 스토리가 있는 진지는 입에 착착 달라붙는 관장의 덕담과 고려시대 음식이 상위에 올려진다. 시대에 걸맞게 고려가요 “청산별곡” 감상으로 시작되었다. 청산은 충북 옥천의 옛 지명이다. 애절함이 깃든 흑백의 춤이 함께하니 금상첨화다. 궁중에서 사용했던 부채를 들고 펼치는 춤사위가 식욕을 돋운다.
동석한 여류 수필가의 <잔칫상의 의미> 시 낭송이 이어졌다.
……
밥 한 그릇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담고 있다.
밥상은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음식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만난다.
삶은 곧 밥의 역사이고
밥은 진솔한 사람살이의 역사이다.
……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며 정갈한 음식이 줄을 잇는다. 건강하고 고급 전통 요리 ‘동아 누루미’가 나왔다. 허균의 유배지에서 저술한 도문대작에 있는 충주의 동아를 재료로 만들었지만, 기다란 박 같은 동아껍질을 벗기고 얇게 썰어 데친 다음 안에 다진 표고 팽이버섯을 만두소처럼 넣고 돌돌 말아 만든 것으로 자극적이지 않아 좋았다. 궁중 ‘대하찜’은 새우, 오이, 죽순, 쇠고기를 잣으로 즙을 내어 버무린 것으로 천, 지, 인의 사상을 담아낸 고소한 궁중 음식이라서인지 입에 잘 맞았다. ‘칠보산도’는 견과류와 죽순, 고사리가 소로 가득 채워진 만두로 맛이 담백하였다.
고려시대 음식은 아니지만 충북의 특산물인 꿩의 살을 발라내어 나물과 버섯을 넣은 꿩 잡채로 스토리화 하고 있다. ‘만이창면’은 꿩 육수를 내어 참깨를 갈아 말아먹는 느릅국수인데 구수하고 달콤한 것이 든든한 한 끼로 손색이 없다. ‘방자 구이’는 고기에 소금만 살짝 뿌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응용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라서 고기보다 채소 위주의 음식이 많았고 고춧가루가 없어 매운 음식이 적어, 건강한 맛이 느껴진다. “직지심체요절”을 한국으로 보내준 프랑스 대표 디저트 피낭시에와 홍차로 마무리하니 개운하다.
음식에 담긴 국가 간의 교류와 역사가 느껴지는 후식이다. 관장의 해설을 들으며 입안에 가득 담기는 맛과 향을 즐기자니 고려시대의 궁궐을 거니는 궁녀가 된 듯 하였다. 요즈음은 요리. 건강, 여행, 등 우리 생활의 소재들로 이야기를 꾸미고 그에 적합한 상품을 선택하고 판매하는 스토리 매장이 늘고 있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즈니스가 성공하도록 지방자치단체의 후원도 늘어난다니 다행스럽다.
이야기가 있는 진지박물관에서 대접을 받고 보니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할 수도 있으나 문득 어머님이 해주시던 우리 집만의 진짓상이 그리워진다. 지아비 없이 홀로 삼 남매를 키우며 자녀들의 건강과 축원을 빌며 특별히 만들어 주신 시모님 음식이지만 솜씨가 없는 나는 요리를 못 한다. 그런 것을 잘 아시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상세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자주 가족에게 해준다. 채 썬 감자를 들기름에 달달 볶아 국물을 내고 밀가루떡을 만들어 수저로 떠 넣어 만드는 맛깔 나는 수제비는 쌀이 없어 못 먹던 시절 한 끼 식사이었다. 날콩가루를 풀어 살짝 끓여 콩비지가 뽀글뽀글 올라 올 때쯤 참기름으로 양념한 김치를 버무려 동동 뜨는 콩국 위에 얹어 끓이는 김치 콩국은 겨우내 고기 없이 보낸 어린것들의 유일한 단백질 보충이었다. 가을에 주운 도토리로 쑨 묵을 채 썰어 말린다. 말린 도토리 채를 불려 고추장 양념으로 볶아먹는 묵볶음은 입맛 까칠하고 병치레 많았던 큰아이의 건강식으로 식욕이 없을 때 제격이요, 갖은 채소로 국물을 내어 끓이는 시원한 대구탕은 겨울철에 태어난 아들 생일상의 별식이다. 시장에서 좌판을 펴셨던 어머님은 싸고 신선한 재료를 구해서 더욱 건강한 식사를 마련하신 셈이다.
바쁜 일상과 사먹는 음식으로 시달린 나의 몸에 어머님 생전에 받아본 김이 솔솔 올라오는 갓 지은 쌀밥과 맛깔 나는 반찬은 든든한 힘이고 외며느리에 대한 은근한 사랑이었다.
삼십여 년 함께한 시어머님의 손맛을 아직도 좇아갈 수는 없다. 삶의 매듭처럼 궁핍했던 시절, 자식들의 건강을 지켜준 당신의 사랑이 가득담긴 따뜻한 음식의 맛을 따라할 수만 있다면 가족을 위해 정갈하게 진지를 차려내고 싶다. 모양도 맛도 따라 갈수 없지만 오늘 저녁 진지상위에 어머님의 그리움도 함께 얹어본다.
첫댓글 동아 누루미, 만이창면, 방자구이.... 이름만 들어도 일품 맛일듯 합니다^^
반갑습니다
슴슴한 맛!
좋아요
작품을 읽으니 침이 고입니다.^^
회장님
오시면 그맛 대접하고 싶어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