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음악…그럼에도 구스타프 말러를 듣는 이유는
[죽은 예술가의 사회-34] 구스타프 말러 (작곡가·지휘자, 1860~1911)
◆ 프로이트를 찾아간 지휘자
1910년 어느 날, 유럽 최고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로이트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가능한 한 빨리 박사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곧 프로이트에게 편지의 주인공이 찾아왔다. 그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의 상처를 고백했다. "저는 고향이 없습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제 딸은 겨우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제 아내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프로이트를 찾은 이 남자는 구스타프 말러, 당대 최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지휘는 생계를 위해 꾸역꾸역해야만 하는 밥벌이였다. 지휘봉을 흔들면서도 그의 머릿속엔 온통 자신이 만든 음표로 가득했다. 휴가를 얻으면 별장에 틀어박혀 작곡에 매달렸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지휘자로서는 인정했지만, 작곡가로선 조롱했다. 그럼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확신에 차서 "언젠간 내 세상이 올 것이다"고 말했다.
◆ 경계가 없는 음악
고전 음악을 깊이 듣다 보면 자연스레 작곡가를 상상하게 된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에는 엄격함과 성스러움이 감돈다. 대위법 원칙을 따르며 수학 문제를 풀 듯 한 치 오차 없이 악보를 그린 바흐. 그의 음악을 들으면 수도승처럼 절제된 삶을 살았을 작곡가가 떠오른다. 모차르트 음악은 맑고 쾌청하다. 천재로 태어난 인간의 순진무구함이 넘실거린다. 쇼팽은 어떤가. 음악을 듣는 순간 극도로 섬세한 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초상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말러 음악을 듣고 난 뒤엔 작곡가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이런 곡을 만든 사람이라면 꽤 복잡한 사람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칠 뿐이다.
고전 음악 중에서도 말러는 진입장벽이 높은 작곡가로 분류돼 있다. 누군가는 말러의 음악을 듣고 깊은 감응에 빠진다. 그들은 말러를 베토벤과 견주며 찬양한다. 하지만 반대쪽에서는 "아무리 들어도 말러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말러 애호가를 좀체 이해하지 못한다. 고전 음악 작곡가 중 말러만큼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은 바그너 정도뿐이다.
말러의 음악엔 경계가 없다. 장엄하게 흐르던 곡이 한순간 통속적인 선율로 바뀐다. 감미롭게 마음을 감싸주는 연주가 금세 장송곡으로 변한다. 교향곡 장르가 가지고 있는 기승전결 구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즉흥적이고 규칙이 없다. 좋게 이야기하면 전위적이고, 거칠게 표현하면 뒤죽박죽이다. 말러는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복잡한 인간이었다.
◆ 우울했던 유대인 소년
말러는 낭만파 음악과 현대음악 경계 어딘가에 있는 인물이다. 말러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분류된다. 동시에 20세기 모더니즘 음악의 문을 활짝 연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변방이었던 보헤미아(오늘날 체코)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럽 주류 사회에서 유대인은 이방인이자 경계인이었다. 말러의 음울한 성격은 유년 시절 크고 작은 차별을 겪으며 형성됐다. 또한 말러는 연달아 형제들을 잃었다. 어린 시절 목격한 가족의 죽음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말러는 일찍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열다섯 살에 빈 음악원에 입학해 정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전업 작곡가라는 꿈을 꿨다. 열일곱 살에 '탄식의 노래'라는 곡을 쓰기 시작했다. 3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 이 곡을 베토벤 콩쿠르에 출품했다. 심사위원 중에는 브람스가 있었다. 다른 심사위원 대부분도 브람스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유럽 음악 구도는 브람스와 바그너로 양분돼 있었다. 둘은 대립하는 관계였다. 빈 음악원에서 말러는 브루크너에게 작곡을 배웠다. 말러의 스승이었던 브루크너는 바그너 지지자였다. 굳이 따지면 적의 편에 속하는 말러에게 브람스가 좋은 점수를 줬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낮았다. '탄식의 노래'는 베토벤 콩쿠르에서 떨어졌다. 의례적인 칭찬 한마디도 못 받았다.
◆ 민요를 장송곡으로 뒤틀었다
콩쿠르에서 낙선한 말러는 좌절했다. 전업 작곡가 대신 생계를 위해 지휘봉을 잡는다. 유럽 곳곳에서 지휘자로서 크고 작은 경력을 차근히 쌓았다. 지나치게 꼼꼼했던 말러는 영화 '위플래쉬'(2014) 속 선생처럼 연주자들을 들들 볶으며 완벽을 추구한 지휘자였다. 단원들은 말러를 싫어했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말러는 본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지휘자로 일하면서도 휴가를 이용해 곡을 썼다. 1888년 그는 첫 번째 교향곡 '거인'을 완성했다. 1889년 부다페스트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의 지휘를 맡았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두 번째 악장까진 그런대로 박수를 받았다.
문제는 세 번째 악장부터였다. 말러는 친숙한 민요를 가져와 불온한 방식으로 패러디했다. 원곡의 따뜻한 분위기를 비틀어 장송곡 버전으로 연주한 것이다. 곧 카바레 풍 대중적 선율도 등장한다. 청중은 말러가 진지한 장르인 교향곡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다고 여겼다. 마지막 악장이 시작되자 청중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초반부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선율에 청중은 혼비백산했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불길한 불협화음이 이어지더니 마지막엔 별안간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며 마침표를 찍는다. 청중은 야유를 퍼부었다. 말러는 초연 이후 광인 취급을 받았다. 말러를 향한 비판 기저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도 큰 몫을 차지했다.
작곡가로서 연거푸 쓴맛을 봤지만, 지휘자로서는 승승장구했다. 1897년 경력은 정점에 올랐다. 말러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총감독으로 지명받는다. 지휘자로서 최고 영예인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출신이 문제가 됐다. 말러가 제안받은 자리는 오스트리아 황실 직속이었다. 이 자리에 유대인이 앉으려 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말러는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하며 기회를 잡았다.
◆ 클림트 그림 속 여인과 결혼하다
말러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교향곡 5번이다. 특히 이 작품 4악장은 영화와 광고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동시에 가장 말러답지 않은 곡으로 평가받는다. 누가 들어도 귀에 감기는 서정적인 선율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은 말러가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작곡한 작품이다. 말러는 사교모임에서 만난 알마 쉰들러라는 여성에게 한눈에 반한다. 교향곡 5번 4악장은 알마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구애곡이다. 1902년 말러는 자신보다 열아홉 살 어린 알마와 결혼한다. 그리고 알마는 말러에게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선사했다.
클림트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키스'다. 찬란한 황금색 옷을 입은 연인이 입을 맞추고 있는 그림이다. 작품 속 여성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이름이 거론된다. 그중에서도 알마 쉰들러는 강력한 후보다. 클림트도 알마에게 반한 남자 중 하나였다. 그는 '키스'가 아니더라도 알마를 모델로 여러 그림을 남겼다.
알마는 팜므파탈이었다. 많은 남성 예술가가 알마를 뮤즈로 삼고 구애를 펼쳤다. 그런 알마와 결혼한 말러는 행복하면서도 불안했다. 언제든 알마가 자신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비극이 잇달아 발생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딸이 병으로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반유대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1907년 말러는 쫓겨나듯 빈 오페라 국립극장 총감독 지위에서 내려왔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부부 관계에 흠집이 났다. 알마는 결국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알마의 외도 상대는 훗날 독일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였다. 말러의 심신은 너덜너덜해졌다. 프로이트에게 상처를 털어놓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프로이트와 상담을 한 이듬해인 1911년 말러는 눈을 감았다.
◆ "언젠간 내 세상이 올 것이다"
말러는 "나는 교향곡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세상은 어떠했나. 말러는 길거리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의 교향곡엔 온갖 세속적인 소음이 섞여 있다. 말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엔 깊은 비애가 깔려 있다. 말러는 형제와 어린 자식의 죽음을 지켜봤다. 그래서 그의 교향곡엔 죽음의 기운이 짙게 서려 있다. 조롱받고, 무시당하면서도 교향곡 10개를 완성했다. "언젠간 내 세상이 올 것이다"고 확신했지만 자신의 눈으로는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세상'은 1960년대에 왔다. 말러의 제자 중에는 브루노 발터가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브루노 발터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다. 1942년 브루노 발터는 독감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새파랗게 어린 지휘자가 대타로 무대에 올랐고, 일약 스타가 됐다. 그는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말러 음악에 심취했던 번스타인은 어둠에 묻힌 작곡가를 다시 꺼냈다. 그는 말러가 남긴 모든 교향곡을 차례대로 녹음했다. 번스타인 덕분에 말러의 교향곡은 빛을 봤다. 말러의 인기는 소나기로 끝나지 않았다. 번스타인 이후 현재까지도 말러는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늘날 말러는 '팬덤'을 거느린 몇 안 되는 고전 음악계 스타다. 말러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러리안'이라는 단어까지 있다. 물론 '말러리안'에게도 말러의 음악은 쉽지 않다. 난해하고, 불안하고, 소란스럽고, 고독하고, 가끔씩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말러의 삶이 그러했듯 말이다. 말러는 좌절하고, 분노하고, 불안에 사로잡혔지만 그럼에도 다시 길을 찾고 앞으로 걸었다. 이 모든 과정을 교향곡 10개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앞으로도 계속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대로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돌아보면 길을 잃은 것 같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불안, 불행,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다. 롤랑 바르트가 적었듯이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아픔의 리듬 속에 갇힌 날, 그런 날엔 피난처라고 생각하고 말러의 음악에 도전해 보자. 무언가가 들릴지도 모른다.
ㅡ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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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