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채소가게
정수리
신혼 때 우리는 극도로 가난했다. 남편은 특별한 기술 없이 미싱공장에서 보조로 일했다. 어느 날 도시락을 들고 공장을 찾아갔다가 자욱한 먼지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일하는 남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남편에게 제일 잘하는 게 무어냐고 물었더니 아무 재주도 없다고 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단 한가지라도 잘 하는 걸 사나는 챙겨주셨대요. 잘 생각해 봐요."
순간 남편이 즐기던 컴퓨터 게임이 떠올라
그 방면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얼마 뒤 남편은 한 대학의 컴퓨터 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장 월급은 없고 공부는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남편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대형 슈퍼마켓에서 화장실 청소를 한 뒤 등교했다. 종일 공부하고 다시 청소를 했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채소가게에 갔다. 번번이 적은 돈을 들고 찾아가 감자 몇 알을 사 오던 곳이다. 계산을 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가게 밖에 수북이 쌓인 채 소가 눈에 띄었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시든 채소 버린 거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마음대로 가져가. 어차피 팔지 못하니까. 아하! 토끼 키우나 보지?"
나는 묵묵히 채소를 골라 집으로 가져왔다. 뻣뻣한 배춧잎을 삶아 송송 썬 뒤 기름에 달달 볶아 간장을 살 짝 두르니 훌륭한 반찬이 되었다. 하루쯤 찬물에 담가 두면 시든 채소가 싱싱하게 살아나 신나게 즐겨 먹었다. 반찬 걱정이 사라지니 한시름 던 기분이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채소가게 아저씨가 우리 집 근처로 배달을 오셨다. 작고 남루한 아파트에서 툭 튀어나온 나와 마주친 아저씨는
"새댁, 여기 살아?"
"......"
아저씨는 하던 말을 얼버무리셨다. 내가 살던 곳은 애완동물을 키울 수 없는 아파트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채소가게에 가니 판매대에 시퍼렇고 싱싱한 배추와 당근이 가지런히 쌓였다. 감히 손을 뻗어 가져올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오던 길을 되돌아서 몇 발자국 걷자, 바쁘게 일하던 가게주인부부가 동시에 나를 부르셨다.
"오늘은 채소 안 가져가? 토끼 줘야지 !"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돌아보며 나는 볼멘 소리로 말했다.
"이제 아시잖아요. 제가 토끼라는 걸요. 저렇게 싱싱한 채소를 내놓으시면 저 다시는 못 와요."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가게 아주머니가 달려와 나를 안아 주셨다. 그분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래도 가져가, 새댁은 내가 본 토끼 중 가장 예쁜 토끼야."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빵 터지게 웃었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그 가게를 드나드는 토끼 노릇을 했고, 어느새 채소요리의 대가가 되었다. 남편이 졸업한 뒤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은 날, 가게에 찾아가 작은 선물을 드렸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부부를 닮은 한 쌍의 토끼 저금통이었다.
"부자 되세요, 아주 착한 부자요."
두 분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제 나는 더는 토끼 노릇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분의 따뜻한 배려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
- 글쓴이 : 정수리님
첫댓글 마음에 파도가 이는 잔잔한 감동의 글입니다
채소가게 부부도
새댁도
착한 마음씨에
하늘이 복을 주지 싶네요
즐감하고갑니다...^^*
베풀며 살면 본인이 더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네요^^
두 집 다 서로 좋은 이웃을 둔것 같아요..^^
각박한 세상인데 감동적인 사연이네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