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스물네 번째 이야기(1)】
다시 쓰는 문화 보고서報告書 / 이은화
문화의 보고寶庫–되새기고 새로 새긴 사고思考
프롤로그-문화의 변화을 자극하는 도구, 사유思惟 속으로
지구촌은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일상이 깨진 전쟁터이다. 여전히 미얀마 군부의 폭주는 진행 중이며 아프가니스탄의 포격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고 있다. 러시아에 맞선 우크라이나 지도자의 오래된 간절한 외침은 일상적인 세계의 뉴스가 되었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세계가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습관적인 노력으로 얻어지는 인류의 평화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은 삶을 통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인간의 문화를 축적한다. 그렇게 습관만으로 엮은 삶은 비인간적인 기계적인 삶이 될 것 같지만, 의식이 된 사회적 습관이 현실적인 어려움과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의식적으로 기존의 것을 거부하며 창의적인 의문이 시작된다. 사유를 더하는 삶의 변주를 도모하며 왜 그런지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의문이야말로 창의적 사고를 위한 시작이 아닐까. 그렇게 의심과 의문이 거듭된 사유의 진화는 인간과 다른 생물들을 구별하고 차별을 구분 짓는 영역에서 일어난다.
지구상의 생물들은 진화를 거쳐 왔다. 하지만 수많은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진화 과정이 있다. 유전자 변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정보와 기술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고 지식을 축적하면서 다른 이들이 공유하도록 만드는 독보적인 전달 과정이 그것이다. 이 축적과 저장, 공유의 전달 과정은 언제나 원만하게 진행되지는 않아서 때때로 단절되고 변형되고 왜곡되어 잊혔다가 훗날 새롭게 재해석되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의 지혜를 송두리째 담아 공간과 시간을 넘어 공유하는 두 번째 진화에 이용되는 것이 ‘문화’다.
문화는 인간의 제도나 의식을 포위하고 있는 환경이다. 이는 주위를 에워싼 공기와 같아서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의식하면서 실천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민감하고 예민해서 다양한 사유의 여정으로 예사롭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19세기 이래 인간의 의식과 제도를 폭발적으로 반영하고 집대성한 개념인 자본주의의 성공은 문화의 힘을 덧입은 결과물이다. 문화가 재생산하는 의식적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자본의 논리만큼 사회가 변화를 겪을 때마다 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시대의 사유는 중요해진다. 문화가 사유의 여정과 궤적을 같이 하는 까닭이다.
봉건사회가 무너질 때 그들이 무장한 힘은 뛰어난 시민 정신 때문만이 아니었다. 절대자인 신과 군주 중심의 귀족문화와 인간 중심의 예술문화의 충돌과, 가부장제로 대변되는 봉건제도의 계급사회가 시민들의 확장된 사유와 충돌하게 되면서 사회가 선택한 문화의 힘이었다. 문화는 사회적 억압이 강화되고 정치적 변혁이 지체되면 갈등의 초점은 문화 영역으로 모아지면서 중요한 저항수단이 되어왔다. 가깝게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저항문화가 그러했고, 장기화된 독재에 신음하던 한국 사회의 청년문화와 1980년대 민중문화가 저항의 상징이 된 저변도 그러한 사유와 사고의 변화로 읽을 수 있다. 이렇듯 문화는 의식과 제도로 습관적인 사고에 머물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유로 그것에 맞서기도 하면서 시대의 문화를 창출해 왔다.
인류는 각 시대마다 전략적 모색을 위해 과거로 눈길을 돌려 습관적인 제도와 의식을 차용하게 된다.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그리스의 문화를 향유하고 전파했다. 당나라는 인도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면서 당대의 문화를 완성했고, 바그다드는 이슬람 이전의 지식을 새롭게 집대성했다.
시대와 대륙의 경계를 초월한 인간의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를 빌려 오고 기존 문화와 융합하며,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만들었다. 자기 문화의 우수성을 내세우고 타지의 문화를 배척하는 국수주의 시대처럼 폐쇄된 세계에서도 문화는 새로운 미래를 품었고 그들이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앞당기기도 했다.
문화는 인간의 의식과 삶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이다. 문화 접촉으로 선택지가 증가하면 문화 생산과 발전은 자극을 받는다. 반대로 기존의 체제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대안을 차단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며 문화 융합 실험을 감시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편협한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를 무시하거나 파괴를 용인하고 장려함으로써 스스로 빈약해지거나 몰락한다.
거대 문명과 문화가 스러져 간 것도 변화를 거부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사유는 습관적인 삶에 변화를 제안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조적인 것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아무런 전제와 편견 없이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연히 만들어진 문화는 없다. 생각 없이 만들어진 문화와 의식이 없다면 남겨진 기록과 흔적을 따라 사유를 밝히는 것도 현재의 의심을 해결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사유와 사고의 보고서–문화를 짓는 기억과 기록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우정’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도 심리적 요인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고 탐색한 학자들의 보고서는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주의와 호기심을 항상 집중시켜 왔다고 말한다. 변화에 대처하는 인간의 행동 방식이 문화의 변화를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문화는 다양한 표현 형식과 의미 생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번영한다. 그들이 남긴 흔적은 기록과 기억을 통해 전해진다. 도서관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사유의 역사를 기록으로 쌓아 놓은 곳이다. 인류가 쌓아놓은 인문학이 사는 곳이며 언제든 어디든 전파 가능한 지혜의 창고다.
인문학은 어떻게 인류의 지식의 전 세계적 전파를 가능하게 하고, 문명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지 설명한다. 예컨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중국에 돌아온 현장법사는 지금도 세계와 나눌 대화를 기다리고 있으며, 함무라비 법전은 오늘의 세계법전과 소통할 준비를 끝냈다. 이와 같이 문화를 집단, 국가, 종교, 인종이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유감을 포함한 세계관을 담은 담론이다. 인류가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타인의 것을 능숙하게 재사용했다는 사실은 세계의 문화와 문명이 궤적을 같이 해 왔고, 문화의 교류와 차용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 전체를 이해하려면 로마의 신화적 기원을 이해해야 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로마시대를 아우르는 그림과 건물, 극장을 갖춘 폼페이를 보면서 문화적 접목의 결과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문화 실험의 증거이며 문화 교류의 교과서가 된 셈이다.
문화의 번성은 과거에서 빌려 오는 것뿐 아니라 다른 문화에서 발견한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다. 과거의 문화는 새로운 문화가 자라나는 터전이다. ‘문화 culture’라는 말이 농업 agriculture에서 비롯한 이유도 ‘경작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찾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과 먼 조상을 연결하고 서로를 연결하는 문화로 가꾸어 간다. 그러한 기록으로 채운 문화를 담은 인문학의 집을 자기 이름으로 지은 이가 있다.
문화를 담은 그릇–거대한 기록으로 채운 제국의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역사적 유물이면서 세기의 도서관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의 모든 지식과 문화를 수집하고 보관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교류하였던 곳이었다. 이러한 유물은 지금의 사유와 생각으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방대한 기록과 저장 규모로, 상상만으로도 벅찬 그 시대를 눈앞으로 가져다 놓아 경이로움을 준다.
알렉산드리아는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 3세의 지시로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다. 세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지명과 건축물이 세계를 평정했던 그의 위세를 알려주고도 남는다. 그의 죽음 후에 세워진 왕조는 당시 장군 중 하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번성한 왕조다.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 문화를 융합하면서, 학문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대를 이어 건립한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세계 지식의 총 본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책을 진귀한 보물로 여긴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세계의 모든 책을 수집하기 위해 로도스와 아테네 등지에서 책을 사들이기도 했고, 입항하는 배를 검사하여 책을 압수해 필사하고, 원본은 도서관에 보관하고 필사본을 돌려주었다고도 전해진다. 책은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최대 70만 권의 책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세계의 모든 책을 수집하기 위한 노력과 결실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혜를 담은 책의 가치를 알고 보존한 왕조의 노력은 이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계의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모으는 곳이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연구와 강의. 토론과 함께 번역과 저술하는 곳이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서적을 기반으로 수학, 천문학, 의학, 역사,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발전하게 된다. 이 도서관에서 탄생한 유명한 고대 학자들로는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히파티아 등이 있다. 세기의 학자와 석학들이 모여든 상아탑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지만 역사만큼 시련도 많은 도서관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여러 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장 유력한 설은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령을 받은 해군이 기원전 48년에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있는 배들을 불태웠는데, 그 불이 도서관에까지 번져서 많은 책이 소실되었다고 플루타르코스라는 로마 작가의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지혜의 산실을 태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의 지도자들이 책을 태우는 행위는 과오로 남지만 그가 태우지 못한 것은 책을 향한 학자들의 학구열이었다.
도서관이 파괴된 후에도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세라페이온이라는 신전에서 책을 보관하고 연구했다. 세라페이온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부속 분관으로 그리스와 이집트의 신을 결합한 세라피스 신을 숭배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기원후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세라페이온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때 책들의 운명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나머지 책들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지식의 보고와 사유의 그릇이 통째로 사라진 인류 기억의 파괴는 그 후로도 이어진다.
이름과 터로 남아 전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의 지식과 학문의 상징이었기에 그것의 기억을 위한 재생사업을 도모하게 된다. 2002년에 이르러서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가 주도하며 여러 나라에서 후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은 세계적 재생 프로젝트로 자리 잡는다. 도서관 프로젝트의 재건은 인문학의 재건이다. 기억으로 재생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문화일 테니까.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옛 도서관 자리 근처에 건설되었다. 현대적인 건축과 디자인을 적용하여 건립한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80만 권의 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인터넷과 디지털화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재와 미래의 지식과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유실은 인류사의 가장 뼈아픈 족적으로 남는 기억이다.
오랜 기간에 걸친 파괴에도 살아남은 몇 권의 책은 근대 유럽 문명의 근간을 이룩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잃어버린 사유의 창고가 더욱 큰 아쉬움으로 남는 이유다. 그렇게 도서관은 인류가 쌓은 지식과 그 보존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장소가 된다.
글은 인류에 의한. 인류를 위한. 인류 최고의 문화다. 그럼에도 문화가 가지는 가치는 서열을 따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