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6.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루카13,18-21>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 있지 않고, 본성의 변화에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느님을 향하지 않은 우리의 영이 선을 행한들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 내 영광을 찾기에 자아(에고)를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변화려면 우리는 말씀과 성사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겨자씨이며,
성사는 누룩과 같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은총을 줍니다.
성사에 세례성사라는 입문성사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는 물로 받는 수세, 순교로 받는 혈세, 그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향해 수련하는 화세가 있습니다.
농은 홍유한 선생은 화세에 속합니다.
진리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구도의 정신으로 덕을 쌓으며 기도와 정화를 통해 한국의 최초의 수덕자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글과 조선 5대 교구장이신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님이 블란서로 보낸 서한에서 드러납니다.
프랑스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농은 홍유한 선생님에 대한 글로인해서,
한국은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탄생한 교회임이 입증됩니다.
농은 홍유한 선생이 붙잡은 것은
천주실의과 칠극입니다.
즉, 교리와 수련(기도와 정화)입니다.
교리는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수련(기도와 정화)은 우리를 향주삼덕(믿음, 소망, 사랑)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기도와 정화가 올바른지 아닌지 식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회개가 되는지 봅니다.
2.향주삼덕(믿음, 소망, 사랑)이 점점 커지는 지 봅니다.
3.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친교가 더 깊어지는지 봅니다.
<luke13,18-21>
18 Then he said, "What is the kingdom of God like? To what can I compare it?
19 It is like a mustard seed that a person took and planted in the garden. When it was fully grown, it became a large bush and 'the birds of the sky dwelt in its branches.'"
20 Again he said, "To what shall I compare the kingdom of God?
21 It is like yeast that a woman took and mixed in with three measures of wheat flour until the whole batch of dough was leavened."
참고) 농은 홍유한(?隱 洪儒漢) 선생은 한국천주교회가 창립(1784년)되기 이전에 이미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은수생활을 통해 신앙을 키운 한국교회 최초의 수덕자修德者이다.
1726년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한 농은 선생은 안동의 명문가 풍산 홍씨(豊山 洪氏) 16대손으로 정조 임금의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 집안이다. 선생은 학문과 문벌이 높은 집안에 태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가질 않고 16세 때부터 유명한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다 1750년경부터 순암 안정복(順菴 安鼎福, 1712-1791), 녹암 권철신(鹿庵 權哲身,1736-1801) 등의 동문들과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 ,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하였는데,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깨달은 바가 남달리 커서 1757년경에 한양의 살림을 정리하고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 혼자 18년 동안 <칠극> 에 따른 수계守誡생활을 하였다.
그는 축일표와 기도책도 없이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것만 알고 매달 7, 14, 21, 28일에는 경건하게 쉬며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하였다. 또 금육일을 몰랐으므로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그 동안 정조 임금이 궁중 스승으로 모시려고 두 번이나 청했으나 사양하고 생애 마지막까지 수덕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1785년 1월 30일(음)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 현재 안동교구 관할의 봉화군 봉성면 문수산 기슭에 있는 우곡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묘소가 있는 우곡은 현재 성지로 지정되어 선생의 신앙을 기리고 있다. http://www.nongeun.kr/coding/sub1/sub3.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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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기본은 언어력이다
입시 준비를 하며 지겹도록 들어 온 국영수. 그런데 국어, 영어는 물론이고 수학도 언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학 공식도 언어로 되어 있고, 이들을 동원해 문제를 푸는 과정도 머릿속에선 말로 한다. 그밖의 다른 과목도 마찬가지다. 어디 학과 공부뿐인가. 면접시험은 물론이고 고객 상담에도 언어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창조력의 원천 역시 언어력이다. 왜냐하면 언어력은 생각하는 힘, 느끼는 힘, 상상력과 표현력 등 인간이 가진 정신적 능력의 총집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심코 말을 하지만 ‘말을 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대단한 창조력이다. 우리는 언제나 누구도 하지 못한 ‘새로운 말’을 하고 있다. 연극의 대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머/릿속에 더오른 그대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다.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 한마디도 매번 다르다. 억지로 하는 인사, 의례적 인사, 반가운 인사 등 다양한 변주를 거쳐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말이라는 것이 참 쉽게 나오는 것 같지만 말하는 동안 우리 머릿속에서는 참으로 복잡한 과정이 진행된다. 우선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기획한 다음 전체 구도를 잡고 이야기의 순서를 정한다. 이게 뒤바뀌면 말이 안 된다. 서론, 본론, 결론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물론 문법에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어휘를 쓸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데, 말하면서 적절한 의미의 단어군 중에서 어휘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곤 운동 언어야(言語野)로 하여금 혀, 입술, 구개를 움직여 발성하면서 상대에게 내 말이 잘 들리도록 해야 한다. 이때 목소리 톤과 표정, 제스처도 이야기와 어울리게 조정한다.
또한 상대의 말을 듣고 상대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면서 나의 표현 방법을 바꾸기도 한다. 말하기 능력뿐 아니라 남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 읽고 쓰는 능력까지 포함하면 언어력이란 대단히 복잡하고 거대한 능력이다.
말하고 들으며 다음에 할 말을 선택하는 이 복잡한 과정을 뇌는 100분의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해치운다. 그것도 매일, 매 순간, 머릿속에 저장된 어휘들을 새로 조합해 말한다. 참으로 엄청난/ 기적 같은 창조 작업이다.
언어 중추가 뇌의 넓은 부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각 언어 중추들은 부위마다 맡고 있는 기능이 특수해 이를 다시 연합 조정할 필요가 있다. 언어 중추는 한군데에 몰려 있지 않고 여러 곳에 흩어져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며, 연합야는 이들을 통합 조정한다.
*언어중추는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또한 언어의 기능은 또 더른 대뇌 피질, 즉 1차 청각 영역, 시각 영역, 운동 영역의 발성 영역, 그리고 각회 등과 연관되어 있다.
중요한 몇 가지만 설명하자면, 브로카(Broca) 중추는 운동성 언어를 담당하는데,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말을 못한다. 베르니케(Werniche) 중추는 감각성 언어 중추로서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의 문명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인/간의 언어 능력 덕분이다. 뇌력은 곧 언어력이다. 그리고 모든 창조적 공부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도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 없이는 어떤 생각도 불가능하며 생각없이는 공부도 창조도 불가능하다.
언어력과 창조력이 긴밀하게 작용하는 분야는 외국어 학습이다. 요즘은 외국어, 특히 영어는 가히 열풍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영어를 배우기에 앞서 국어력부터 확실히 길러야 한다는 것이 뇌과학적 견해다.
우리가 영어를 들으면 머릿속에서는 그 말을 국어로 해석하고 답을 일단 국어로 구성한 다음 이를 영역해 말한다. 영어권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영어보다 자국의 언어가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게 마련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상 국어력 없이 영어력은 길러지지 않는다. 아무리 영어가 능통해도 국어력만 못하다. 영어 회화를 할 때도 일단 머릿속의 사고 형태는 국어로 진행된다. 국어 문장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영작도 잘하지 못한다. 영어를 잘한다고 국어 문장을 잘 쓴다는 법은 없지만 국어 문장이 매끄러운 사람은 영어를 배우기도, 자연스러운 영작을 하기도 쉽다.
이렇게 머릿속에 입력된 외국어 단어들을 순간적으로 번역하는 작업도 공부요, 창조다. 공부와 창조적 사고의 기본은 언어력이다. 이는 창조적 전두전야(前頭前夜) 훈련과 직결된다. 말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훈련은 그래서 중요하다.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이시형, 중앙북스, 2011, p.138-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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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절제를 덕행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든 분야에서 무절제에 파괴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에, 절제는 덕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1809, 1838]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2,11-12)
무절제한 사람은 본능의 지배에 자신을 내맡기며, 자신의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51)/
자신도 해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중용’ 또는 ‘신중’이란 단어가 ‘절제’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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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 절제는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창조된 재화를 사용하(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76)/
는 데에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윤리적 덕이다. 절제는 본능에 대한 의지의 억제력을 보장하고, 욕망을 단정함 안에 묶어 둔다. 절도 있는 사람은 그의 감각적 욕망이 선을 향하게 하고, 건전한 조심성을 지킨다. 자신의 정력만 믿고서 탐욕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한다(집회5,2; 37,27-31 참조). 구약성서는 절제를 자주 칭송한다. “네 정욕을 따라가지 말고 네 욕망을 억제하여라”(집회18,30). 신약성서는 절제를 ‘중용’ 또는 ‘절도’ 라고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절도 있고 바르고 경건하게”(티토2,12) 살아야 한다.
잘 산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손상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해야 합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이 사랑은 어떤 불행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만을 섬깁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계략과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모든 사물을 식별하기 위해 깨어 있습니다. 이것이 현명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가톨릭 교회의 습속’, 1, 25, 46: CSEL 90, 51(PL 32, 1330-1331)(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77)/
간추림
->1838 절제는 감각적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잡게 해 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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