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문학2호>(1934)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전원적, 목가적, 자연친화적, 관조적
◆ 운율 : 각운의 요소(-요, -소, -오)
◆ 표현 : 시각적인 여백의 효과, 앞선 내용과 급작히 달라져 버리는 시어의 의미,
간결한 종결, 경칭 서술어
◆ 시어의 함축성
* 남으로 창을 내겠소 →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서 살겠다는 건강하고 낙천적인 삶의 태도
일종의 선언으로, 양지(앞쪽, 태양)를 향한 화자의 건강한 삶에의 지향을 나타냄.
* 한참갈이 ― 한참(새참 먹을 때까지의 시간)은 갈 수 있는 땅(안분지족하는 삶의 태도)
* 구름 ― 헛된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 따위(구름이 지닌 변화와 유동성의 속성에 의존)
* 꼬인다 ― 유혹하다
* 웃지요 ― 건강한 체념과 달관의 경지(유머와 관조의 자세)
돈강법(이 시의 주제의식과 격조를 높여주며, 웃음의 의미를 한층 고양시키는 효과)
◆ 주제 ⇒ 평화로운 전원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소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전원에서의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
◆ 2연 : 자연을 즐기며 훈훈한 인정을 나누는 삶
◆ 3연 : 삶에 대한 체념과 달관
→ 이 백(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 중,
"笑而不答心自閑(대답하지 않고 빙긋이 웃어 주니,
마음이 절로 흥겹다)" 와 일치.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3연으로 된 이 시는 시인의 욕심없는 세계가 인생론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고시조에서 볼 수 있는 동양적인 은둔사상도 배어 있으며, 민요조의 소박하고 친근한 가락에다 전원으로 돌아가서 모든 영화와 야심을 버린 삶을 영위하려는 태도를 접할 수 있다.특히,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잔잔한 웃음으로 답하는 모습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초월과 달관의 경지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시적 표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전원으로 향하는 심정이 일종의 체념인가, 도피인가, 자기 위안인가, 해탈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이 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할 것이다. 그가 여유있게 웃을 것이라고 말하는 심리는 슬픔을 잊어버리는 데서 온 것 같지는 않다. 단순한 체념과 극복의 웃음이라면, 작품 전체에 흐르는 건강성과 여유, 관조적 태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화자의 웃음은 대단히 여유로운 웃음이다.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승화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웃음이다.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웃음인 것이다.
[작가소개]
김상용 : 시인, 영문학자
출생 : 1902. 8. 27. 경기도 연천
사망 : 1951. 6. 22.
가족 : 아버지 김기환, 어머니 나주정, 동생 김오남
학력 : 릿쿄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데뷔 : 1926년 시 '일어나거라'
경력 : 1945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강원도 도지사
~1943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작품 : 도서 10건
1902년 경기도 연천에서 출생했다. 시조시인 김오남(金午男)이 여동생이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년 3·1운동 관련으로 제적되어 보성(普成)고등보통학교로 전학, 1921년 졸업했다. 이듬해인 192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7년에 졸업했다. 귀국 후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0년 경부터 『동아일보』 등에 시를 게재했고, 포(E. A. Poe)의 「애너벨리」(『신생(新生)』 27, 1931.1), 키츠(J. Keats)의 「희람고옹부(希臘古甕賦)」(『신생』 31, 1931.5) 등의 외국문학을 번역·소개했다. 1933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1938년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수록한 시집 『망향(望鄕)』을 출판했다. 같은 해 6월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내조적 역할 공고'를 목적으로 조직된 이화애국자녀단(梨花愛國子女團 : 단장 김활란)의 간사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 '국민문학 건설과 내선일체 구현'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에는 「땀의 기쁨」(『반도의 빛[半島の光]』 2월호)이라는 글로 일제가 추진하던 국민개로운동(國民皆勞運動)에 대한 학생들의 근로봉사를 독려하고 교육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해 2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싱가폴(Singapore) 함락을 기념하여 '신가파(新加坡) 함락과 문화인의 감격'이라는 주제로 명사들의 글을 연재할 때 「성업(聖業)의 기초(基礎) 완성(完成)」(『매일신보』 1942.2.19)을 써서 이를 축하했다. 1943년에는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4)를 쓰기도 했다. 같은해 영문학 강의가 폐지되면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을 사임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이 강원도 지사로 임명했으나 곧 사임했고,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보스턴(Boston)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했고,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의 학무처장을 맡았다. 1950년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를 간행했고, 코리아타임즈사의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1951년 6월 22일 부산에서 사망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상용 [金尙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