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도소서 무장강도
페라라 ‘바주카포 탈옥’ 사건"
2003년 3월 12일 프랑스 파리 프렌 교도
소에서 탈옥사건 발생. 수사관이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다. 수사관 오른쪽으로
바주카포에 의해 구멍이 난 교도소 철문이
보인다.
바주카포(砲)로 교도소 철문을 뚫은 탈옥
사건이 프랑스에서 벌어졌다.파리 외곽의
발 드 마른 지역의 프렌교도소에서 살인죄
로 수감 중이던 죄수 안토니오 페라라(29)
가 12일 오전 4시30분쯤 교도소 망루에
기총 소사를 가하면서 침투한 4~5인조
공범들로부터 폭발물을 건네받아 감방문을
폭파하고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탈주범 일당들은 교도소 밖으로 나갈 때
바주카포로 교도소 철문들 중의 하나를 뚫은
뒤 미리 준비된 자동차로 도주했다. 탈주
과정에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
만, 전쟁터에서나 사용하는 중화기를 동원
한 탈옥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졌다는 점에서 프랑스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언론들은 이런 대담한 탈옥사건이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라며 구멍뚫린 교도 행
정에 개탄했다. 도미니크 페르방 법무장관
은 오전 7시 사건 현장에 나와 “이번 사건
은 전쟁터에서 쓰는 무기를 동원한 탈옥”
이라고 어이없어 하면서 “범인들이 교도
관들이 대응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탈옥사건 바로 직전인 지난 7일 코르
시카섬의 보르고교도소에서는 살인죄로
복역 중인 죄수 조셉 멘코니가 외부의 공범
들과 함께 가짜 바주카포와 화기로 교도
관을 위협해 감방 문을 열게 한 뒤 도망쳐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다. 멘코니는 지난
1998년 똑같은 교도소에서 한 차례 탈옥
했다가 붙잡힌 전력이 있다
▶2009년 연탄가스 중독 치료장비 만든 윤덕로 교수 별세
연탄가스 중독 치료 장비 만든 윤덕로(尹 德 老)교수 서울
에서사망 (1923년 서울 에서출생~)1969년 국내 처음으로 연탄가스
중독 치료 장비인 ‘고압산소장치’를 개발해 이후 수만 명의 연탄가스
중독환자를 살려냈다. 조종사들의 일산화탄소 중독 예방책을 마련하는 데도 일조했다
‘고압산소장치’ 첫 개발 윤덕로 교수 별세
연탄가스 중독 치료에 평생을 바친 예방의학계의 선구자 윤덕로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사진)가 1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서울대 의대 출신인 고인은 연탄가스 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고압산소장치’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윤 명예교수는 공군 군의관 시절 접했던 외국의 고압산소장치를 응용해 1969년 1인용 고압산소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전국 각지의 병원에 200여 대가 보급돼 수십 년간 사용됐다.
고인은 이후 10명의 연탄가스 중독 환자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고압산소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가 개발한 고압산소장치 1호기는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에 기증돼 전시 중이다.
윤 명예교수는 연탄 사용이 급감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도 서울대병원 인근의 빈민가를 찾아다니며 연간가스 중독사고에 관한 역학조사 등을 벌였다.
제자인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강대희 교수는 “평생 연탄가스 중독 환자 치료에 몸과 마음을 바치신 분”이라며 “환자의 진단부터 치료까지 평생을 발로 뛰어다닌 예방의학자의 표본”이라고 회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서정순 씨와 장남 익진(건국대병원 외과 과장), 차남 태진(울산대 서울아산병원 소아심장외과 과장), 장녀 은진 씨(경기도의회 의장비서)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5일 오전 7시 반. 02-2030-7902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민들에게 사과한다’ 며
본회의장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2003년 세르비아 총리 조란 진지치 피살
세르비아 시민 수십만명이 15일,저격범들의 총격을 받아 숨진 조란 진지치 총리의 운구 행렬을 뒤따르고 있다.
“세르비아… 총성… 암살… 비상사태….” 미국의 이라크 공격 임박설(說)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지구촌 사람들은 2003년 3월 12일 느닷없는 총성에 기겁을 했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나 보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이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할 것으로 알려져 가뜩이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암살된 조란 진지치(Djindjic·50) 세르비아 총리가 괴한들의 총격을 받은 것은 3월 12일 낮 12시45분쯤. 수도 베오그라드 시내의 정부 청사 앞에서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서려는 순간 가슴과 등에 2발의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지만 끝내 목숨을 잃었다.
진지치는 2000년 10월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철권 통치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Milosevic) 대통령을 축출한 주역이었다. 이후 밀로셰비치를 몰아내는 데 함께 힘을 모았던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Kostunica)는 유고연방 대통령에 당선됐고, 진지치는 연방 산하 세르비아공화국 총리로 재직해왔다.
진지치는 이 과정에서 친(親)서방적인 급진개혁과 부패척결을 강력히 추진,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세르비아의 존 F 케네디’ 라는 찬사를 들었으나, 민족주의자들과 밀로셰비치 시절의 기득권층으로부터는 강력한 반발을 샀다. 특히 2001년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을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유엔 전범재판소에 인도함으로써 거센 비난을 받게 됐다. 밀로셰비치를 넘겨주는 대신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경제개혁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이후 밀로셰비치 추종파와 민족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보복 위협을 당해왔다.
진지치는 1952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공화국인 스르프스카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출신 반체제 학생들과 함께 반공운동을 주도하다가 1974년 구속돼 수개월 간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독일로 망명, 1979년 독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귀국 후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강의하다가 1989년 공산권이 붕괴되자 민주당(DS) 창당 멤버가 됐다. 그는 1990년 공산정권 몰락 후 처음 실시된 민주적 총선에서 당선해 의회에 진출했고, 2년 후 민주당 당수로 선출됐다. 90년대 중반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초의 비(非)공산계 베오그라드 시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진지치는 1996년 수개월에 걸친 반(反)밀로셰비치 시위를 주도하면서 민주 야권 지도자로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2000년엔 밀로셰비치를 축출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전범재판소에 밀로셰비치 인도 이후 18개 정당 연합체를 이끌어 청렴하고 실용주의적인 세르비아민주당(DSS)의 코슈투니차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자신은 총선에서 승리해 2001년 1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유고에서 비공산 정권을 이끄는 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진지치는 밀로셰비치의 사법처리와 전범재판 회부, 경제개혁 정책 등을 둘러싸고 과거의 동지였던 코슈투니차 대통령과도 갈등을 빚기 시작, 코슈투니차의 DSS가 연정에서 탈퇴하면서 정적(政敵)으로 돌아섰고, 끝내는 암살 총탄에 비운(悲運)의 운명을 마감해야 했다.
▶2002년 유엔 안보리,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 채택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2일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유엔에서 통과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앞서 코피 아난(Annan) 유엔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점령을 처음으로 ‘불법 점령’이라고 규정했다고 프레드 에크하르트(Ackhard) 유엔 대변인이 설명했다. 이날 밤 12시 직전 통과된 안보리 결의안 1397호는 “2개의 국가로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안전하고 공인된 국경 내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지역의 비전을 확신하고 있다”고 밝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지칭했다.
이날 결의안은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14개국 찬성을 얻어 통과됐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관련 결의안 채택을 저지해온 미국도 시리아가 제출한 결의안 원안 내용을 일부 수정한 뒤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사국 중 유일한 중동국가인 시리아는 결의안 내용이 원안보다 강도가 약해졌다는 이유를 들어 기권했다.
한편 이스라엘은 13일 성명을 통해 “미국이 즉각적인 테러와 폭력 선동 종식을 촉구하는 내용을 안보리 결의안에 포함시킨 노력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은 조지 테닛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중동 평화안과 미첼 보고서를 제 궤도에 올려놓고 중동평화 이행 및 협상이 재개될 수 있도록 즉각적인 휴전과 폭력 종식이 이뤄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톨릭의 2000년간 과오에 대해 참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2일 사상 처음으로 카톨릭이 지은 과거 죄들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이 날 바실리카 성당에서 집전한 용서의 날 미사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11세기의 십자군 전쟁, 13세가의 종교재판 등과 관련한 카톨릭의 실수 등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겸허하게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가 이처럼 포괄적으로 교회의 과오에 대해 용서를 구한 것은 카톨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카톨릭이 교회 역사상 3번째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용서의 날‘로 정한 이날 미사에세 로마 교황청을 대표하는 5명의 추기경과 2명의 주교, 1만여명의 성직자와 신도들이 참여했다.
교황이 밝힌 가톨릭의 유죄(有罪)는 ▲기독교도 사이의 분파 ▲다른 종교에 대한 박해 ▲유태인 박해 ▲여성 억압 ▲인종 차별 등이다. 각 주제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세계사 혹은 교회사에서 논의된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각종 종교전쟁, 피정복 원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개종 요구, 마녀사냥을 포함한 종교재판, 성차별 및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용서의 날 미사는 새 밀레니엄을 맞아 전 인류의 화해에 기여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교황 자신의 22년 재임기간은 물론 교황청 새 천년 기념행사의 정수로 평가되고 있다
▶1994년 영국 성공회, 최초의 여성사제 서품
▶1993년 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북한의 핵시설.
▶1993년 천주교 지학순 주교 사망
▶1992년 대전 도매시장 화재
▶1990년 강호동, 18대 천하장사에 최연소 등극
▶1985년 미-소 군축협상 제네바에서 재개
▶1983년 구소련의 경제학자 예브세이 그리고리에비치 리베르만 사망
▶1979년 칸핀스 베네주엘라 대통령 취임
▶1979년 이란, 중앙조약기구(CENTO) 탈퇴
▶1978년 뮤지컬 `레미제라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
▶1978년 프랑스 총선 우파 승리
▶1976년 정일권 국회의장 피선
▶1973년 9대국회 개원
▶1971년 국군, 서부전선 미2사단 지역 20km, 155마일 휴전선을 국군이 전담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차관, 관리부실업체 정비 지시
▶1968년 모리셔스,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7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집권
▶1966년 인도 식량 폭동 발생
▶1965년 한·미 기관차 도입 차관협정
▶1964년 제6차 한일회담, 2년 만에 재개
▶1963년 울산정유공장 착공
▶ 1962년 오늘,
독감 환자가 서울에만 1백만 명으로 55개 학교가 휴교
전국 3만1582명 A2형독감 시작은 2월22일,
3월14일 독감 첫 사망자발생.
▶1960년 왜관에서 미군 집단린치사건 발생
▶1955년 미국의 알토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 사망
▶1955년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 사망
▶1952년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단행
▶1951년 신문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첫 발표
▶1948년 유엔한국위원회, 가능한 지역의 선거안 재가결
▶1947년 트루먼 독트린 발표
▶1943년 노르웨이의 조각가 바겔란 사망 - 오슬로의 프로고네르 공원의 분수광장으로 유명
▶1938년 독일군, 오스트리아 침공
▶1928년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 출생
▶1925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 사망
ㆍ신해혁명 100돌 ‘추앙받는 國父’
중국이 1911년 10월10일 신해혁명을 통해 청 왕조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혁명의 중심에는 민족·민권·민생을 3대 원칙으로 하는 삼민주의(三民主義)정신이 있었고, 그 이념의 토대를 만든 사람은 바로 쑨원(孫文)이다.
쑨원은 1866년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지금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형을 따라 하와이로 유학, 일찍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된다. 귀국 후 26세에 의사가 됐지만 평범한 의사로 살아갈 순 없었다. 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취급을 받던 중국 상황은 그에게는 너무도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는 혁명운동의 현장에서 몸으로 정치를 배워갔다. 29세 나이로 첫 무장봉기를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긴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미국, 일본, 영국을 떠돌며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고, 서구 국민주권설과 사회계약설 등을 중국 현실에 접목시킨 삼민주의를 완성한다. 그에게 삼민주의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정치·경제적 평등을 인정받으며 영원한 독립국가로 생존할 수 있는 방편이었고 위기의 조국을 구출하기 위한 구국주의였다.
“중국은 수천년간 1등 강국이었다. 하지만 최근 100년간 잠들어 있었다. 중국인이여, 이제 깨어나라.” 1924년 5월 쑨원의 연설이다. 자신의 말처럼 깨어나기 시작한 중국을 위해 그는 신해혁명 이후 다시금 춘추전국시대가 돼버린 중국의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건강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간암 진단으로 병상에 눕게 된 그는 “혁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중국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12일 5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의 묘인 중산릉은 “이곳에 들르지 않으면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지만 너무 크고 화려하게 꾸민 탓에 평생을 절대왕조와 싸운 혁명가의 무덤이 황제의 능을 모방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또 혁명동지들에게 개인적 충성서약을 강요하고 전처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여비서와 결혼함으로써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쑨원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비록 대만에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중국 본토에서는 ‘오성홍기’가 제각각 휘날리고 있지만 그는 중국의 ‘궈푸(國父)’로 최고 예우를 받고 있다. 그의 삼민주의는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독립과 혁명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아직도 유효하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
▶1923년 포노필름(Phonofilm) 기자회견장서 첫선.
▶1920년 이집트 독립선언
▶1917년 러시아체제 폐지
▶1912년 미국 걸스카우트 창단
▶1911년 멕시코의 대통령(1964-70) 디아스 오르다스 출생
▶1910년 독립운동가 이창용 출생
▶1898년 핀란드 역사 소설의 아버지 토펠리우스 사망
▶1890년 러시아 발레 무용가 니진스키 출생
▶1885년 우리나라 최초 병원 광혜원, 제중원으로 개칭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뒷날 `제중원`으로 개칭).
▶1858년 `뉴욕타임스` 발행인 옥스 출생
▶1838년 아닐린 염로를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퍼킨 출생
▶1832년 프리델-크래프츠 반응을 발견한 프랑스 유기화학자.광물학자 프리델 출생
▶1787년 스페인의 극작가. 시인. 비평가 가르시아 데 라 우에르타 사망
▶1685년 영국 철학자 버클리 출생
https://youtu.be/kIE-2onAuL0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b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