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像(좌)과
세상에 빛으로 오심(우)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의
외부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절두산 순교성지
안내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像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관한
안내문
김대건(金大建) - 한국 최초의 신부
출생 – 사망 : 1821년(순조 21) ~ 1846년(헌종 12)
출신지 : 충청남도 당진
본관 : 김해(金海)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조선후기 병오박해 당시의 신부로서,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세례명은 안드레아.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6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 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 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 J. J .J. 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곳에 가면 주말이 즐겁다>절두산성지·김대건 동상… 조선 ‘순교사’ 한눈에
문화일보 기사 입력 : 2006.09.15. 오후 1:11
주말에 서울 마포구 양화진 역사공원으로 나가 한강변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에 한번 빠져 보는 건 어떨까.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5분만 걸어가면 외국인선교사 묘지공원,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가 나온다.
◆한국사랑 앞장선 외국인선교사 묘지공원 = 1600평의 호젓한 묘지, 돌로 된 십자가 밑엔 영어로 된 묘비석이 서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이곳에는 개화기 초기 교육·의료 등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외국인들이 안장돼 있다. 배일운동에 앞장서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베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일가,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하며 조선에 묻히길 소망했던 헤이그 밀사 헐버트 박사,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 크리스마스 실을 최초로 만들며 결핵퇴치 운동에 앞장섰던 셔우드홀 등 17개국에서 한국으로 온 575기의 묘가 조성돼 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타고가던 배가 목포 앞바다에서 뒤집히자 물에 빠진 어린 소녀를 구하려다 익사했다는 사연도 적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이며 고종의 시의였던 헤론이 사망하자 그의 안식처로 고종이 하사했던 땅이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묘역이 됐다. 세월의 흐름마저도 비켜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숭고한 삶과 이들의 묘비에 새겨진 묘비문을 보면 각박한 일상사에 쫓겨 잊고 살던 삶과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교황이 방문해 유명해진 절두산 순교성지 = 개화기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당한 곳으로 사적 제399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찾아와 더 유명해졌다. 병인양요(1866년) 이후 대원군에 의한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양화진 나루터의 누에머리를 닮은 아름답던 잠두봉은 절두산(切頭山)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얻었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주검도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1967년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동상과 순교기념관이 세워졌다. 접시모양 지붕은 순교자의 갓을, 수직벽은 목에 채웠던 칼을 의미한다. 순교 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신 성해실도 있다. 정약종이 지은 최초의 한글교리서인 ‘주교요지’와 초기 천주교도의 필독서였던 ‘천주실의’, 그리고 김대건의 친필 서한도 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고 입장료는 무료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양화진공원과 유람선선착장 = 절두산성지와 외국인묘지 사이에 있던 철로변 사유지를 마포구에서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무·꽃으로 꾸민 아담한 공간으로, 한강 물길이 시원스레 굽어보인다.
절두산~마포대교 사이 둔치에는 길이 2.5㎞의 산책로와 2400평짜리 피크닉장이 올해 초 들어섰다.
마포구는 내년 11월에 절두산성지와 선교사묘지 등 양화진에 얽힌 근대사의 굴곡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4층짜리 홍보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김세동기자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 성당과 박물관의 설계는 서울대 이희태 교수가 맡았는데 절두산 주변 지형과 역사적 의미, 순교정신을 조화롭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미술(聖美術) 제작에는 서울대 교수였던 조각가 김세중을 중심으로 윤명로, 정창섭, 이순석, 최의순,이남규 등의 작가들이 참여해 순교의 역사에 예술적 가치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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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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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종삼 흉상과 박순집의 묘
성 남종삼 흉상과 박순집의 묘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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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종삼 흉상
성 남종삼 순교 사적비
남상교 청덕비
은언군과 송 마리아
묘비
박순집 베드로 공덕비
박순집의 묘와 묘비
성 남종삼 흉상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성모와 아기 예수 조각상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像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像(좌)과
세상에 빛으로 오심(우)
기도처와 성모 마리아 상
성 김대건 신부 동상
성녀 마더 데레사 像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양화진 역사공원
2024년05월07일(화요일)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절두산 순교성지] 탐방기 탐방지 :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절두산 순교성지] 탐방코스: [합정역 7번 출구~(754m)~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125m)~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76m)~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183m)~양화진역사공원~(169m)~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회관~(260m)~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33m)~절두산순교성지~(142m)~십자가의 길(약 1km의 탐방로 도중에 김대건동상과 박순집의묘와 묘비를 경유)~(777m)~합정역 7번 출구] (이동거리 3,519m) 탐방일 : 2024년 05월 07일(화요일) 날씨 : 가는 이슬비가 내린 날씨 [마포구 합정동 최저기온 13도C, 최고기온 1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24분 소요) * 12:50~13:12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이동한 후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옴 [22분 소요] * 13:12~13:17 서울 마포구 합정동 373-39 번지에 있는 서울 합정역 7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46 번지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으로 이동 * 13:17~14:17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탐방 [절두산 천주교 성지와 합정역 사이에 있는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은 합정동 143번지 일대로 미국인을 비롯해 13개국의 외국인 480여 명의 선교사가 안장되어 있다. 이들은 일제 암흑기 한민족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던 선교사들로 당시 세상에서 덜 알려졌던 나라(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서 왔다. 이들은 선교활동 및 한국 사회사업의 유공자들로서 병원과 학교의 설립과 같은 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신분제와 남존여비 관습의 철폐와 같은 무형의 정신세계에서도 한국민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을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대표적인 선교사로는 배설, 헐버트,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이 있다. 선교사묘원에는 홍보관, 야외공연장, 묘역, 봉사관, 양화진홀, 선교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개방 시간 내에는 누구나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3회 선교사묘원을 안내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며 토요일 4회차는 비대면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방문시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려면 미리 예약해야 한다. 현재 한국기독교 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관리하고 있으며, 묘지기념관 교회에 2백여 명의 외국인들이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교회가 세워져 있다. 수도권 지하철 2,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200m에 자리잡고 있다. 이용시간 운영 요일 : 월~토 개방시간 : 10:00~17:00 안내시간 : 월~토요일 AM 10:00, 11:30 / PM 02:00, 03:30 (※ 신정 (1월 1일), 설 연휴, 추석 연휴, 성탄절에는 안내를 제공치 않습니다.) 휴무일 : 일요일 ※신정 (1월 1일), 설 연휴, 추석 연휴, 성탄절에는 안내를 제공치 않습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Yang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 , 楊花津外國人宣敎師墓園) 요약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공동묘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길 46 (합정동 144) 지도 종류/분류 : 공동묘지 면적 1만 3224㎡이다. 조선 말기인 1890년(고종 27) 7월 28일 미국 장로교의 의료선교사(醫療宣敎師)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다 전염성 이질로 사망한 존 W.헤론의 매장지를 구하면서 조성되었다. 당시 서울의 외국인들은 한강변에 가까운 양화진을 외국인의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허락을 받았다. 이후 이곳은 한국을 사랑하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 가족의 안식처가 되었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및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이 묘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에 황폐하였던 묘지는 주한(駐韓) 외국인들의 모금운동으로 새롭게 가꾸어졌지만,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외면당하였으며, 6 ·25전쟁 때에는 이 부근이 격전지로 변하는 바람에 묘지석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고, 일부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명칭도 양화진외인묘지(楊花津外人墓地), 경성구미인묘지(京城歐美人墓地)로 불리다가 1986년 10월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변경되었고, 2006년 5월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985년 6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묘지 소유권자로 등기되어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한국선교기념관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총 415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연세대학을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부부와 그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 부부,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한국명 아편설라)와 그의 딸로 이화여전 초대교장을 지낸 앨리스 아펜젤러,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제중원과 기독교서회를 세운 존 W.헤론(한국명 혜론), 평양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홀(한국명 하락)과 그의 부인으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운 로제타 홀(한국명 허을), 숭실대학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1862~1931, 한국명 배위량), 한말에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한국명 배설),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외교활동을 펼친 호머 헐버트(한국명 흘법) 등의 묘가 있다. 1992년에는 윌리엄 홀의 아들이자 한국에 결핵요양원을 처음 세운 셔우드 홀이 안장되었다.]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 안장 주요 인물 명단 가나다 순. 본인 대신 가족이 안장된 경우 ☆ 표시. 게일, J.S. - 한국학 연구활동, 성경 번역활동 ☆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은 1863년 캐나다의 온타리오州에서 출생했다. 토론토대학에 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부흥 전도사 무디(Dwight L. Moody)를 만났다. 1888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889년부터 해주 일대에서 선교 활동 시작했다. 1890년부터 그는 성서공회 전임 번역 위원이 되어 3년에 걸쳐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후서>, <요한 1서>를 번역하는 동시에 한국성교서회 창립 위원이 되어 문서 종교의 기틀을 잡았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私譯으로 성경전서(신.구약)을 출판하였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사과지남> 등을 번역 출판하는 한편 <한영대사전>을 편찬했다. 1900년에 연못골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01년에 연동여학교와 예수교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03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창립 위원이 되어 그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892년4월7일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asabeth, 별명: Hattie) 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첫 부인 해티(Hattie)는 1908년3월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14)에 안장되었다. 그후 1910년4월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8년에 은퇴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1월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게일번역성경(Gale version of the Bible) 한국 선교 초기에 성경번역을 하던 3개의 성서공회(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미국 성서공회, 대영 성서공회)가 있었는데, 이들은 여러 해 협력하여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힘쓰다가 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철수하고 대영 성서공회를 통해 재정적인 도움만 주었다. 1901년에는 신약전서가 완역되었고 1904년에는 그 교정판이 나오게 되었다. 구약전서는 1910년 4월 2일에 완역 출판되었다. 성경 번역위원인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세 사람은 번역이 끝나기까지 555회나 회합했다. 처음 출판하던 해에 800권이 팔렸다고 한다. 그 후 게일 목사(Rev. J.S. Gale)가 성경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게 구어체로 번역했고 그것을 1925년에 출판한 것이 「게일번역성경」이다. 이때 출판비는 평신도 사업가 윤치호 씨가 담당했는데, 위원회 간의 합의를 얻지 못해 성서공회에서 출판하지 못했기에 사비로 출판한 것이다(곽안전, 한국교회사 147쪽). 수년 전, 영국에 있는 그의 딸이 번역 당시 철필원고를 서울 연동교회에 기증해 와 현재 연동교회 사료실에 전시·보관되어 있다.] 레이놀즈, W.D. - 성경 한글번역 활동.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전주신흥고등학교의 전신이 되는 학교를 설립. ☆ 윌리암 데이비스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李訥瑞, 1867-1951)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햄덴 시드니 대학 재학 중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외국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축구 야구 정구 등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892년 5월 5일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들은 미국 남장노회가 선교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이때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선교사가 함께 내한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본부를 설치하였다.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언어학자와 성서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1911년 독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191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와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인 등으로 폭 넓게 헌신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李訥瑞)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성서 번역가·교육자·신학자다. 한국 이름은 이눌서(李訥瑞)다. 미국 남장로교회(PCU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소속의 선교사로 1892년 조선에 들어온 이후, 호남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0년에 출판된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의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어학교사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기독교신학연구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51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어트에서 사망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3년에 채 한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첫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다. 1894년에 한국 땅에서 태어난 레이놀즈 선교사의 차남 존 볼링 레이놀즈는 1920년 교육선교사로 한국으로 돌아와 사역하며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70년 76세에 소천한 후 형이 묻힌 양화진에 안장됐다.] 팻시 보링(Patsy Bolling) 선교사 1868년 9월 28일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국적 현모양처로서 대외 활동보다 가정에 충실했으며 남편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출생 당년에 사망한 W. D. 레이놀즈는 레이놀즈 부부의 맏아들로 1893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같은 해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존 볼링 레이놀즈(Reynolds, John Bolling, 李保璘) 레이놀즈와 팻시 보링의 둘째 아들로 1894년 9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20년 남장로회 교육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 광주와 전주 신흥학교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시립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70년 3월 20일 테네시에서 75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미국은 제2고향이고, 한국이 제1고향”이라고 하면서 한국을 많이 사랑했다. 평생 김치를 좋아했고, 애국가를 매일아침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죽음이 가까워지자 양화진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화장한 유해를 그의 부인이 연로하여 한국에 올 수 없어 소포로 보내졌다. 우체국 검열과정에서 유해가 ‘화공 약품’으로 오해받아 함부로 취급되고, 유골이 흩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선교사의 헌신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그렇게 외롭게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 묻혔다. 하관식에는 원일한(언더우드 3세) 장로 부부 등 몇 분이 참석하였다는 것을 이강필 소장의 증언으로 알게 됐다. 무어, S.F. – 신분차별을 받던 백정들에게 선교활동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한국명 : 牟三悅, 毛三栗) 선교사는 1860년 9월 15일 미국 일리노이 그랜드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했다. 1889년 몬타나 (Montana)대학을 마치고,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1892)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무디의 부흥운동을 통하여 감동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선교사를 지망했다. 무어 선교사도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1892년 8월 16일 부인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함께 한국을 향하여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했다. 배편으로 호놀룰루와 일본의 요코하마, 부산-인천을 경유하여 목선으로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1892년 9월 21이었다.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걸어서 성안으로 갔다. 남대문에 도착해보니 이미 성문은 닫혀 있어 성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성벽 아래쪽에 개구멍이 있어 브라운 아들은 거기로 기어 성안으로 들어갔으나 어른들은 체구와 체통 때문에 시도조차 못했다. 하는 수 없이 6m 되는 높은 성벽에 로프를 걸어 벽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선교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어를 배우는 일부터 착수했다. 한국어 선생을 두어 매일 방문하도록 하여 공부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 이외에 마펫(Moffett)선교사의 성경공부 반을 도왔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성경을 장과 절까지 말하며 척척 외우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그들이 각 처로 흩어져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자로 일할 것이므로 신학반 인도는 더욱 기대를 부풀게 하는 일이었다. 어서 빨리 한국어에 능통하여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마 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급속히 늘었다. 약 반년이 지난 1893년 3월 19일 주일에는 한국인들과 쉬운 말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예배순서에서 한국말 기도를 담당했다. 1893년 6월, 곤당골 높직한 곳에 2층집을 지어 터를 잡았다. 무어 부인은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아낙네들에게 재봉틀도 보여 주어 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환심을 샀다. 약 9m 깊이로 판 우물에서는 다른 집보다도 수질이 좋아 이웃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선교활동을 하면서 어느 해에는 100명에게 세례를 집례 하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 백장(白丁)을 대상으로 많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예배하도록 하는데 전력하였다. 1896년 에비슨 선교사와 협력하여 신분 철폐와, 천민의 권익 보장을 위해 고종 임금에게 탄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복장제한(服裝制限) 제도를 철폐하여 양반과 천민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데 기여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으로 인하여 그를 가리켜 “백장 해방운동의 지도자”라 칭호가 붙여졌으며, 사랑의 사도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천민 층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1893년 3월 19일 승동(곤당골)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대현교회, 동막교회 등 25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1906년 7월 12일에는 그리스도 신문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장티푸스로 인하여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15년간의 선교사역을 중단하고 1906년 12월 22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부인 로즈 엘리(Rose Ely)선교사는 남편이 별세한 뒤 얼마동안 한국에 머물다가 1907년 11월 18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무어 부부는 3남 1녀의 자녀가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전면 묘비에는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Devoted servant of Jesus Christ Beautiful in character and spirit, unselfish in his love for the Korean people)'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이 6·25 전쟁 때 총탄으로 파손되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선교사 묘비 후면 묘비에는 우리말로“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백정 박성춘①…스스로 신분을 해방시키다 김현민 기자 아틀라스뉴스 기사 승인 : 2023.04.21. 14:44 내무아문에 진정서, 백정도 갓과 망건 착용 허가 얻어 내…만민공동회 연설도 조선시대 백정은 인간대우는커녕 개·돼지보다 더 더러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도살업을 주로 하던 이들은 일반백성(常民)들처럼 상투를 틀지 못했고, 두루마기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름을 지을 때 인(仁)·의(義)·예(禮)·지(智)·효(孝)·충(忠)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수 없었고, 이름이 아예 없거나 만석(萬石)·억석(億石)·무검(武劍)·소개(小介) 등과 같은 좋지 못한 글자로 지어야 했다. 천인은 일곱 종류로 분류해 승려, 광대, 무당, 점복, 기생, 피장, 백정을 칠반천인(七班賤人)이라고 했는데, 그중 백정이 가장 낮은 대우를 받았다. 노비보다 못한 존재였다. 백정은 갓과 망건은커녕 털모자도 쓸 수 없었다. 양민과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공공집회와 장소에는 허가 없이 출입할수 없었다. 일반인의 집을 방문할 때 문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취해야 했고, 길을 걸을 때 일반인과 같이 걷지도 못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었다. 상민과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천인과 결혼할 때도 남자가 말을 타고 여자가 가마를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백정의 신부는 비녀를 꽂지도 못했다. 초상이 나도 상복을 착용할수 없었다. 양반은 물론 상민도 백정에 대해 린치(私刑)을 가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19세기말, 서울 종로 바닥에 박가라고 불리는 백정이 있었다. 이름도 없었고, 아버지가 백정이니 그 아들은 당연히 백정이었다. 종로의 상가에 고기를 운반해주고, 동네 허드렛일을 하던, 천하디 천한 박가가 1998년 10월 26일 종로에서 열린 독립협회 주최 만민공동회에 관민대표로 등단해 연설을 했다. “나는 대한(大韓)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無知沒覺)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갱민(利國更民) 길이라면,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可)하다고 생각합니다. 차일(遮日,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힘이 부족하나, 많은 장대를 합치면 대단히 강해집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감히 사람들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하던 백정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했다. 한양 인구 20만명이던 시절에 만민공동회엔 1만명이 모였다. 조선 역사 초유의 대집회에 백정이 종삼품 고관대작들과 나란히 연단에 올라 그들을 타이르는 듯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친 것이다. 백정 박씨가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설 때 이름을 갖고 있었으니, 박성춘(朴成春)이다. 그는 일자무식임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편견에 포물을 열었다. 그는 자신도 고종황제에 충성을 할 자격이 있음을 선언했다. 백정이지만 상민, 양반들과 힘을 합쳐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는데 기여하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박성춘이 만민공동회 연사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실로 당당한 백성이 된 것이다. 대한제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꾼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에서 이미 신분제 차별을 철폐했다. 박성춘은 지신이 속한 백정 신분을 면천해 달라고 정부에 건의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매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선 노예해방 과정에서 남북전쟁(1861~65)이 일어나 나라가 갈라지고 군인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30년후 조선에서는 유혈사태 없이 신분해방, 즉 면천(免賤)이 이뤄졌다. 박성춘이 그 중심에 있었다. 박성춘은 출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1862년경에 서울 관자골(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결혼을 해 봉출이란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만큼은 자신처럼 무식함을 면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에 서양사람들이 주간학교를 만들어 글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사람이 하는 학교였으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서양사람이 한다니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보냈다. 미국 장로교 소속 새무얼 무어(Samuel Forman Moore, 1860-1906)) 선교사가 1893년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하층민, 특히 최하층 백정들을 선교하기 위해 학교를 연 것이다. 곤당골은 고운담골의 준말인데, 지금의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근처다. 선교사 무어는 백정 출신 남자아이 6명을 받아 주간학교를 시작했고, 박성춘의 아들 봉출도 미국 선교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어느날,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려 심한 열로 사경을 헤맸다. 봉출은 스승 무어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어는 고종의 주치의(侍醫)였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을 데리고 박성춘의 집을 찾아갔다. 조선시대에 임금의 몸을 만지던 시의가 백정을 돌보는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박씨를 치료해 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다. 박씨는 임금의 주치의가 거지보다 더한 대우를 받던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1년후 세례를 받아 “봄을 이루다”는 의미로 성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들도 봉출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상서로운 태양”이라는 의미로 서양(瑞陽)으로 개명했다. 박성춘은 세례를 받을 때까지 자신이 백정이란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신분이 드러나자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요구했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다. 신분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양반들이 떠나가자 박성춘은 동료 백정 임씨, 원씨, 이씨 등 4명을 곤당골교회로 데리고 나왔고, 백정 조합사무실에 나가 복음을 전파했다. 1895년 가을이 되자 백정들의 전도로 곤당골교회의 교인 수가 세례교인 43명, 원입교인 14명 등 57명으로 증가했다.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을 얻었다. 1898년에 경기지방에만 백정 신자가 132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 차별 폐지가 발표됐지만 오랜 관습으로 인해 백정에 대한 관습적 차별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박성춘은 백정 계급을 대표해 유길준이 대신으로 있던 내무아문에 탄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이 무어의 회고록에 남아 있다. “당신의 비천한 종들인 우리는 500년 남짓 백정 일을 생활수단으로 살아왔습니다. 매년제(매年祭) 때마다 조정의 요구에 순응해 왔지만 우리는 항상 무보수였고, 가장 천대받는 칠천민(七賤民) 중 하나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다른 천민 계층은 도포와 갓과 망건을 쓸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심지어 지방 관과의 아전들은 돈까지 뜯어가곤 합니다. 만일 그의 요구에 불응하면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때로는 관가에 잡혀가서 놀림을 당하고 욕을 먹으며 억지로 일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어린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그런 고통이 있으며 그 외에도 우리가 당하는 수없는 천대를 어찌 말로 다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보다 낮은 계층인 광대조차 갓과 망건을 쓰는데 우리들만 유난히 허용되지 않고 있어 그 한이 뼈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 비천한 충복들이 갓과 망건을 쓰고 다닐 수 있으며 또한 관가에 붙어사는 관리들이 이후 다시는 우리를 부려먹지 못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박성춘이 요구한 것은 백정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상투를 틀고 갓과 망건을 쓰도록 허용해달라는 것이었다. 무어 선교사는 애비슨을 불렀다. 1895년 청일전쟁 기간에 콜레라가 만주에서 한반도로 남하했고, 애비슨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콜레라 방역에 힘쓴 결과 콜레라를 퇴치했다는 공로를 인정받고 있었다. 조선 조정도 애비슨은 무시하지 못했다. 무어 선교사는 애비슨에게 “당신이 치료한 박씨가 백정들의 위해 건의문을 냈으니, 백정들을 위해 유길준에게 진정서를 하나 써달라”고 했다. 박성춘의 탄원서와 애비슨의 진정서에 대한 내무아문의 회신이 무어 선교사에게 전달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의 소원을 허락한다. 갓과 망건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포를 입어라. 그리고 평민의 신분을 누리라. 그리고 주의해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외모만 갖추도록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너희들의 내적인 행복을 생각하라. 만일 관가에서 아전들이 너희들을 억압하려고 하면 싸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이 교서를 보여주도록 하라.” 이로써 백정들은 일반인과 동등하게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조치는 바로 백정들도 일반인과 동일한 인격체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 상민이 양반이 되는 것과 백정이 망건과 갓을 쓰는 것이 신분차별에 대한 가장 큰 한이었다. 박성춘은 백정의 한을 푼 것이다.] 벙커, D.A. - 배재학당 운영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선교사 D. A. 벙커는 1853년 8월 10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이 한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국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했다. 미국 공사 푸드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 신학교에서 벙커,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두 여성(엘러스, 길모어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 했다. D. A.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고관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7년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했다. 육영공원이 폐쇄 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국 감리회 소속의 선교사로 활동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 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通政大夫 戶曹參議”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矯導所) 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등과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운동을 펴는 한편,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고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선진 외국에서 시행되는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 고문제도의 폐지,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 인권 보호를 건의했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과 과학, 철학, 역사 등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옥중 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당시 투옥되었던 신흥우의 아버지(申冕休)는 “옥중(獄中)에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예전에도 없는 일이다. 죄를 범하고 오랫동안 갇혀 있을 때에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워 책이나 읽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내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는 ‘獄中開學顚末’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1890년 6월 한국성교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목회 활동도 했다.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기구로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자신의 선교사역을 계속하면서 성서 보급을 위하여 미국성서공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한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면서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0년 한국에 잠시 방문하였으며,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별세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그 부인은 남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 4월 8일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민족운동 지도자 D.A 벙커 방거(房巨)라고 불렸던 D.A.벙커는 1853년 미국에서 출생, 1883년 오벌린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벙커는 우리나라의 초빙교사로 발탁되어 왔다. 조선 왕실은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갑자기 대두되는 근대 교육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미국에서 교사를 초빙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초빙된 온 교사가 벙커, 헐버트, 길모어 선교사이다. 그들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애초 계획했던 시기를 접고 1886년 5월초 미 국무성에 소집되었고, 태평양을 건너 7월4일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벙커가 가르치던 ‘육영공원’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관립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1886년부터 1896년 육영공원이 폐교될 때까지 벙커는 그곳에서 9년간 영어교사로 지냈다. 그 뒤 감리교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배재학당 교사가 되고 학당의 학감까지 올랐다. 학감으로 있을 때 그는 종래의 암기식, 주입식 교육방법을 폐지하고 공개식 고시 방법으로 새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과 과정을 많이 신설했다. 벙커는 우리나라에 도착한 이듬해(1887년)에 애니 앨러즈(Annie Ellers)와 결혼했는데, 앨러즈는 1886년 광혜원의 의사로 왔으며 얼마 뒤 명성황후의 시의로 채용되었다. 벙커 부부는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살아온 선교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1894-95년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1894), 명성황후 시해(1895), 아관파천(1896) 등 한민족의 고난상을 직접 목격해왔다. 그리고 1896년 독립협회운동, 독립문 건립, <독립신문>의 창간 등 근대식 민권운동도 직접 목격했다. 아니 단순 목격자가 아니라 그 민권운동의 동역자이며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 운동의 주역을 맡았던 서재필, 윤치호 등은 모두 벙커와 동지였고, 배재학당의 강사들이었으며, 학당 학생들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니 벙커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한편 독립협회도 강제 해산되어 이상재, 홍정후, 남궁 억, 정교 등 이상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수감되었고 이승만, 양홍묵, 신흥우 등 벙커의 제자들도 만민공동회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이로써 당시 한성감옥서엔 벙커의 지인들로 만원이 되었다. 벙커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정부 당국에 죄수들의 처우 개선, 야만적인 고문 제도 폐지, 자주 방문하여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이로 인해 벙커는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감옥에 무상출입하며 차입도 하고 위로도 하며 예배도 드려 주었다. 그 결과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등이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그는 한국 교회 연합운동에도 크게 공헌했는데, 1905년 국내의 선교사들 약 150명이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단체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를 지향할 당시 회계와 서기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 연합운동이라면 언제나 예외 없이 앞장섰다. 1912년 신흥우에게 배재학당 교장직을 넘겨주기까지 6년간 교육사역에 열성을 다한 벙커는 그 후 감리교선교부 소속 선교사로서 만년을 조용히 전도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26년 7월4일 75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30년 한국을 잠시 방문했으나 1932년 11월26일 80세로 샌디에이고에서 별세했다. 벙커는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1933년 4월8일 정동교회에서 고별예배를 드린 후 양화진에 묻혔다. 그 뒤 부인도 타계해 벙커의 묘와 합장됐는데 부부의 묘비에는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라는 비명이 새겨졌다.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 부인 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 미국 미시건주 버오크에서 1860년 8월 31일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출생하였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으로 와 달라는 알렌(H. N. Allen, 安連)의 요청과 한국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다음 해(1887년, 27세 때) 미국에서 함께 내한한 육영공원 교사 D. A.벙커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시의(侍醫),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은퇴하여 귀국했다. 그 후 다시 내한하였다가, 1938년 10월 8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애니 엘러스 선교사는 가냘픈 여성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제중원 의사로 열심히 봉직하여, 왕실과 고관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성 환자 치료와 간호에 주력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던 알렌 의사와 협력하며 황후의 옥체를 진료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業精至善 施療衆民)로 그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 통정대부(堂上階 通政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명성황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그의 글인 ‘閔妃와 西醫’라는 제목에서는 “나는 1888년 3월부터 여관(女官)의 직임을 띠고 나의 본직인 의사로서 황후의 옥체를 시위(侍衛)하게 된 것을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는 왕비에게는 손을 대고 진맥(診脈)도 못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했다. 이 같은 과정은 1895년 한국학연구지 에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제목의 글에 자세히 발표되었다. 전택부는 “알렌은 고종황제를 진찰한 적은 있으나 황후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댈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대궐에서 기별이 오기를 황후께서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알렌은 그 증세를 물은 다음 짐작해서 약을 지어 보냈다. 며칠 뒤 또 기별이 나오기를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다른 약을 지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또 병세를 들은 뒤에 짐작해서 다른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보냈다. 또 며칠 뒤에 내시가 나와 약효가 전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느냐?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알렌은 용기를 내어 황후를 직접 진찰하기 전에는 약효를 낼 수 없으니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엘러스가 궁중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진찰했다”는 것이다. 당시 왕비를 진찰하려면 손목에 실을 감아 병풍 뒤로 연결하여 진맥(診脈)하던 시절에, 엘러스는 참으로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으로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청진기를 들이댔다. 1886년 9월 14일은 황후가 현대 의술에 의한 최초의 진단을 시도한 날이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가 설립한 경신(儆新)학교와 엘러스가 세운 정신(貞信)여학교는 한국 장로교단 최초의 남매 학교이다. 경신사(고춘섭 편저)에 따르면 “1887년 언더우드학당에 고아 몇 명이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목욕을 시킨 다음 새 바지저고리를 입히고 머리를 곱게 빗어 땋아 주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는 과정에서 한 아이가 여자임을 발견하고 언더우드는 기겁을 했다. 곧바로 제중원 여의사 엘러스가 거주하는 옆집으로 보내 정동여학당의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정신백년사(박광현 편저)’에는 “1887년 6월 엘러스 선교사는 정동 소재의 제중원 사택에서 한명의 고아(5살, 정례)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얼마 안가서 그해 겨울에는 3명으로 늘었다. 이것이 정동여학당의 시초이고 이 자리가 바로 현재의 정동 1번지이다.”라 했다. 그는 정신여학교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으로 1888년 9월까지 봉직했다. 그 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게 되어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기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1926년,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재차 내한했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8일 서울 정동 그레이 하우스에서 별세하여 10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경성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은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 학교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 베델, E.T. - 대한매일신보 창간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Bristol)에서 출생하여, 머천트 벤처러스 학교(1885-1886, 현재 West of England)에서 수학했다. 1888년 도일(渡日)하여 코베에서 동생 허버트와 ‘베델 브러더스 무역상’을 설립하여 상업에 종사했다. 1900년 5월 26일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과 결혼하여 외아들 허버트 오웬(Herbert Owen Chinki Bethell)을 낳았다. 양탄자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하여 사업을 확장(1901-1904)하였으나 같은 업종 일본인 경쟁회사의 방해와 3차례의 고소로 인하여 사업에 실패했다. 1904년 3월 4일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지의 특별 통신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3월 10일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왔다. 그는 1904년 4월 16일자 신문에 경운궁(慶運宮) 화재를 일제의 방화로 다룬 “大韓帝國 宮中의 廢墟化, 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 제호의 기사를 처음이며 마지막 특종 기사로 실었다. 그리고 1904년 4월 16일 해임되었다. 해임 사유에 대하여 베델은 “크로니클지의 지시는 그 신문의 편집 방향이 일본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내가 보내는 기사도 친일적인 것이어야 한다.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직접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은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베델선생 서거 95주년 기념대회 자료) 그 후 1904년 7월 14일, 대한매일신보 창설자 및 사장으로 취임하여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대한매일의 한글판과 영자지 창간호를 냈다. 이 신문은 항일 투쟁의 대변자 기능을 담당했다. 특히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1910년 8월 30일 일제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매일신보로 개제(改題) 되었다. 그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My fight for Korea is heaven ordained.)"라고 했다. 일본의 침략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인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08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선동과 일본에 대하여 적대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두 차례 재판에 회부되었다. 상해로 끌려가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6개월의 근신과 4,000만환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 벌금은 한국인들이 대납했다. 그 후 계속되는 언론 탄압과 영국 정부의 압력, 신문사 간부들의 구속과 경영난 등으로 1908년 5월 27일 신문사에서 물러났다. 후임 발행인은 만함(Marnham)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심장병)되어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1909년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고종황제는 그의 죽음에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天下 薄情之 如斯乎)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양기탁(梁起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국의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大英男子 大韓衷, 一紙光明 黑夜中, 來不偶然 何遽奪, 欲將此意 問蒼窮)”이라는 한시를 썼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고 유언했다. 일생을 항일 투쟁에 바친 우리 민족의 벗이며 은인이었다. 양화진에는 "大韓每日申報社長 大英國人 裵說之墓"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 뒷면에 쓴 추모의 글은 일제가 망치로 쪼아 지워 버렸다. 8.15 광복 후 전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1964년 사적을 다시 적어 옆자리에 건립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베델의 부인 마리 모드는 신문사가 자금 난에 허덕일 때 사재를 헌납하고 남편이 별세한 뒤에는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오직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인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輓詞)와 조문(弔文), 남들은 휴지라고 하는 빛 바랜 남편 발행 신문만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외아들과 손자에게 베델의 항일투쟁사를 가르치며 평생을 ‘한국사랑’으로 살다가 1965년 7월 2일 90세로 별세했다. 양화진에 베델 부부가 합장되기를 희망해 본다.] [언론인이었던 베델(Bethell, Ernest Thomas)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원래 베델은 영국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1904년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베델의 조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부동항을 얻는 것이 주목적)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도 일본을 편드는 기사를 싣는 것이 유리했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베델은 양기택,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총합소로 대한매일신보사는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더욱이 1908년 4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베델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짜내었고,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에서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서 3주간 금고형에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심신이 약해진 그는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별세하였다. 1910년 양화진 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해방 후 19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 비를 세워 양화진에 보존되어 있다.] 베어드, W. M. - 숭실학당 설립 ☆ [윌리엄 M.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는 1891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평양에서는 장로교 최초로 숭실대학을 설립하였다.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찰스턴)에서 출생하였고, 1885년 하노버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888)했으며, 하노버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학위를 받았다. 1891년 2월 1일 인천에 도착한 그 해 9월부터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1895년에는 대구로 옮겨 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고, 1896년 서울로 옮겨 경신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1897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에 취임한 후 1906년 9월 감리교와 연합하여 숭실대학으로 발전시켰다. 근로와 자조 정신을 교육 목표로 삼았으며, 네비어스(Neveus) 방법을 한국 실정에 맞게 자립(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자족(Self-Support)에 기초한 선교 정책을 입안하였다. 숭실대학장을 사임(1916. 3. 31)한 뒤에는 교재 발간 등 문서선교에 치중하였다. 1931년 11월 29일 장티푸스로 평양에서 별세하여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자리에는 가족들에 의하여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윌리엄 마틴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년 6월 16일~1931년 11월 29일)는 숭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이다. 베어드의 한국식 이름은 '배위량(裵偉良)'이다. 베어드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로, 1891년에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97년에 평양에 이주한 그는 숭실학당을 개설하고, 이를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대한제국으로부터 인가)으로 발전시켰다.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개교식에 참여한 지 한달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평양에서 별세했다. 한국에 온 지 40년만이었다. 그의 시신은 당시 보건법에 따라 화장된 후 평양 숭실학교 구내의 장지에 안장되었다. 1895년 전도여행 중에 윌리엄 M 베어드 선교사의 한 살 된 첫딸 로즈가 숨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양화진 묘원에 베어드 가족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윌리엄 베어드의 첫 아내 베어드 A. 아담스 (Baird, Annie Laurie Adams, 1864-1916) 1864년 9월 16일 출생하여 1883년 웨스턴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하노버 대학(1884)과 워시번 대학(1885)을 졸업하였다. 1890년 11월 18일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였다. 1891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安愛梨(理)라는 이름으로 부산 대구지방에서 남편의 선교활동을 도왔다. 평양에 있는 숭실학당, 외국인학교, 여자성경학교, 숭의여학교 교사 혹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5남매의 현모양처로서 찬송가 "440장(멀리 멀리 갔더니)" 창작을 비롯하여 한국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평양에서 1916년 6월 9일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기념비가 있다.] [평양성경학교장 베어드, R. 피터롤프 (Rose May Fetterolf, 1881-1946) - 윌리엄 베어드의 두번째 아내 1881년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하여 브룸스버그대학을 졸업하고, 1918년 8월 7일 시카고에서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고 같은 해 선교사로 내한하여 裵路使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 출판위원과 성서번역에 공헌하였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평양 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었다. 1946년 11월 13일 일리노이에서 별세하였다.] [재령지방 선교사 베어드 2세 (Baird, William M. Jr. 1897-1987) 윌리엄 M. 베어드와 첫 아내인 아담스의 아들로 1897년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4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裵偉林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1929년 라이스트(Reist Anna L.)와 결혼하고, 1939년 건강문제로 평양에 이주하여 1940년 11월 귀국하였다. 1987년 8월 5일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 기록되어 있다.] [강계성경학교장 리처드 H. 베어드 (Richard Hamilton Baird 1898-1995) 1898년 9월 1일 평양에서 윌리엄 M. 베어드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8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Golden Stockton)과 함께 내한하였다. 裵偉就이라는 이름으로 강계지방에서 순회 전도하였고, 강계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전도인 양성에 헌신하였다. 1941년 일시귀국 후 1957년 다시 내한하여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총무로 봉직하다가 1960년 귀국하였다. 오클랜드에 거주하면서도 한국유학생 생활과 신앙을 지도하였다. 1995년 1월 1일 별세하여 가족들이 양화진 자리에 안장하였다. 묘역에는 잔디 대신 맥문동이라고 약초로 쓰이는 초화가 심어져 있다.] 브록크만, F.M. - YMCA 설립 ☆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 선교사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 巴樂萬)은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다. 1905년 내한하여 1906년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직업교육 과정은 목공, 철공, 화공, 염색, 그림, 도자기, 제화 등 전문교육이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하나의 새로운 전문직 창출(創出)을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산업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이때의 강연회와 토론회 분위기에 대하여 질레트(P. L. Gillett) 총무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미국에서도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37회의 토론회와 38회의 강연회는 300명 내지 400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강당은 언제나 꽉 찼다.”라고 보고했다.(자료: 한국YMCA운동사) 그 후 브록크만은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민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층을 수용하기 위하여 활동했다. 평양 숭실, 선천 신성, 광주 숭일, 전주 신흥, 군산 영명학교 등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 YMCA를 조직했다. 1910년 6월, 최초의 학생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의 주역을 담당했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령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항일(抗日)과 애국(愛國)을 다짐했다. YMCA 하령회 때문에 그는 105인 사건과 연루되었다.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謀事) 했다는 것이다. 전택부 선생은 이 사건을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신민회 회원들이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YMCA 세력과 학생 Y가 미워서 꾸며낸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자료: 양화진 외인열전)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저다인(L. L. Gerdine) 회장은 강제 사면되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브록크만은 YMCA 사업에 너무 열중하다가 35세 때(1912)에야 친구들의 권유로 R. S. 브록크만 (Mrs. R. S. Brockman) 부인과 만혼(晩婚)했다. 그 후 1916년부터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프린스턴신학교 장(葬)으로 집례되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왔다. 묘비에는 '24년 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인, 친구(For twenty four years in Korea, Seer Builder, Peace Maker, Friend)'라 기록되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양화진에는 브로크만 선교사와 그의 어머니, 딸 등 3대가 안식하고 있다. 어머니는 1915년 75세로 한국에서 소천했고, 딸 바바라 브로크만은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22년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형 플렛쳐 S. 브록크만(Brockman, Fletcher Sims, 1874-1939)은 중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1903년 한국 YMCA 창설 자문위원회 특별 강사로 내한했다.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청년회 창설공로자이다. 1905년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 파송도 주선했다. 그 뒤에도 가끔 YMCA 초빙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에 입국하여 지도자 훈련 등에 참여했다.] 소다 가이치 - 고아원 운영, 아내 우에노 다키와 더불어 단 둘뿐인 양화진의 일본인 안장자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1867-1962)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길에 쓸어져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서울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상재 선생의 감화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였고, 경성(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3·1 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다. 특히 가마쿠라 보육원장으로 수천의 한국 고아들을 양육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많기도 했다. 1943년 가을 부인 우에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원산(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으로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료:전택부,이 땅에 묻히리라,1986)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운동본부장(柳達永), 보사부장관(鄭熙燮), 서울시장(尹泰日)의 조사가 있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일보, 1962. 4. 2 기사)] [우에노 다끼 우에노 다끼(上野, Takiko, 1878-1950)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줄 걸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전택부는 기록했다.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이라는 주요한 시가 쓰여 있다.] ['전쟁 범죄 참회' 촉구한 '일본의 양심' 소다 가이치 연합뉴스 기사 송고시간 : 2020-11-09 07:00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소다 가이치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국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출생했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鎌倉)보육원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속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국민적 참회를 할 것을 순회 역설했다. 95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가마쿠라보육원 자리에 있는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長逝)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 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이곳에 안장된 유해는 모두 417명이다. 묘비의 주인공은 대부분 서양인이지만 유일하게 일본인 이름이 눈에 띈다. 비석 전면에는 십자가와 함께 '孤兒(고아)의 慈父(자부) 曾田嘉伊智先生之墓(소다 가이치 선생 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고아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부인 우에노 다키코(上野瀧子)와 함께 잠든 곳이다. 소다는 젊은 시절 초등학교 교사와 탄광 광부, 노르웨이 상선 선원, 독일 회사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중국 본토와 홍콩, 대만 등지에서도 일하며 쑨원(孫文)의 중국 혁명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나 타고난 방랑벽 탓에 정착하지 못했다. 1899년 어느 날 대만에서 술에 취해 길을 가다 넘어져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 한 한국인이 여관으로 업고 데려가 치료해주고 밥값까지 내줬다. 소다는 남의 도움으로 얻게 된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은인의 나라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1905년 6월 한국에 건너왔다. 소다는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YMCA 종교부 총무를 맡고 있던 월남 이상재를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화돼 개신교에 귀의했다. 4년 뒤에는 숙명여고와 이화여고 영어 교사 우에노를 만나 결혼했다. 그때부터 소다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돼 복음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1911년 9월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조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민족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윤치호·이상재 등 YMCA 인사도 끌려가 고초를 겪자 소다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무고한 사람을 당장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지금의 덕수교회인 경성기독교회 장로 와타나베 도루(渡邊暢) 대법원장에게도 찾아가 "죄 없는 사람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고 따졌다. 1919년 3·1운동 때도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법정에서 이상재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소다는 동족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그를 보육의 길로 이끈 사람은 일본 아동복지사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다케 오토지로(佐竹音次郞)였다. 사다케는 1896년 가마쿠라에 보육원을 만든 뒤 1913년 중국 뤼순(旅順)에 이어 1921년 서울에도 지부를 냈다. 우리나라 근대식 보육원의 효시였다. 사다케는 "지금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간뿐인데,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순수한 박애주의 정신으로 한국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란 말을 듣고 지부 설립을 결심한 뒤 소다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소다 부부는 용산구 후암동의 가마쿠라보육원에서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돌봤다. 그때는 버려진 아이가 거리에 넘쳐났는데, 세계 대공황까지 겹쳐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겨웠다. 소다는 가마쿠라보육원 출신이 나중에 독립운동가가 됐다는 이유로 일제 헌병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3년 소다는 76세의 나이로 함경남도 원산의 일본인교회에 초빙됐다. 서울 일신초등학교 교사이던 부인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혼자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원산의 일본인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본인교회로 대피했다. 소다의 인품이 지역 주민에게도 알려져 누구도 이들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소다는 1947년 10월 원산의 일본인들을 인솔해 서울로 내려온 뒤 귀국을 주선했다. 자신도 전쟁에서 진 일본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인은 고아들을 돌보느라 한국에 남았다. 그는 신일본(新日本)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평화'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 전국을 다니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이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또 가는 곳마다 일본인이 인류에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소다가 귀국한 뒤 가마쿠라보육원은 북한 신의주에 보린원을 세운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이어받아 지금의 영락보린원이 됐다. 부인은 1950년 1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먼저 묻혔다. 한일 간 국교가 없던 상태여서 소다는 아내의 장례를 지켜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본의 한 기자가 1960년 아사히(朝日)신문에 소다의 방한 허용을 촉구하는 칼럼을 싣고, 한경직 목사가 적극 나서 1961년 5월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소다는 영락보린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이듬해 3월 28일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4월 2일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한경직 목사가 장례 예배를 인도하고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 윤태일 서울시장 등이 조사에 나섰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일본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외무상은 조화를 보냈으며 유족 대표로 조카 마스다 스미코(增田須美子)가 참석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두고 일본 정부와 지자체 등은 독일 당국에 집요하게 철거 압력과 로비를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J)는 지난 4일 "일본 정부는 과거의 범죄를 부정하는 행보를 당장 멈추라"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독일에 거주하는 일본인 130명도 철거 명령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소녀상 관할 구청장에게 보냈다. 소다 가이치의 뜻을 잇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다.] 쇼, W.E. - 국내 군종 창설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는 미 감리회 선교사로 1921년 내한하여 서위렴(徐偉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 서울, 대전 등에서 1960년까지 선교와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90년 8월 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1921)을 졸업하였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대원을 졸업(1927)하였다.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하였다. 1938년 무어(J. Z. Moore) 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1941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출국되었다가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함) 외아들 쇼 해밀턴이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자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하였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천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제2묘역 라-6)에 안장되었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 1895-1971) 선교사는 1895년 7월 2일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선교사로 찾아온 사람이 윌리암 얼 쇼(William Earl Shaw)이다.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도 참여하며 군목제도를 처음 도입한 분이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헌신하였다. 또한 대전 목원대의 전신, 감리교 신학원이 설립될 때 창립 이사로 참여하며, 신학 교수로 재직하여 한국의 신학 교육발전에 큰 기여를 해 왔다. 윌리암 얼 쇼( William Earl Shaw, 1890~1967)는 한국을 너무 사랑하였기에 서위렴이란 한국 이름을 가지고 백성들을 섬겼다. 그는 1890년 8월2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서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와 보스턴 신학대학원,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중에는 YMCA에서 활동하며, 후에 미육군에 입대하여 군목으로 임명받고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 그의 아내 아델린 쇼와 딸 메리 제인과 함께 중국 우편 운반선을 타고 내한하여 평양에 거주하면서 선교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때 외아들 해밀턴 쇼가 출생하게 된다. 윌리엄 쇼 선교사는 1926년까지 광성 고등 보통 학교에서 사역 하다가 미일 관계 악화로 서울주재 미 영사관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고 잠시 철수를 하고 1947년 다시 내한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미 육군 군목 신분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는 군종 제도의 창설을 처음으로 정부에 건의 하였고 각교단 대표들 중심으로 군종제도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1951년 2월 한국 정부로부터 군종 제도를 승인받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감리교 대전 신학교 이사 및 신약학 교수로 봉직하며 목회자 재교육 기관이었던 목자관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부인 아델린 쇼는 대전에서 모자관 시설이었던 성화장을 건립하여 전쟁 미망인을 위한 사역을 해왔다. 그의 사역은 자신들 세대에 멈춘 것이 아니고 아들 해밀턴 쇼가 그대로 이어갔다. 아들인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1922~1950, 서위렴 2세)는 맥아더 장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이다. 미국의 해군 장교로 노르망디상륙작전 등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한국에서 해군사관학교(해안경비대) 초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또 해방 후 한국 정부 수립 전 미 군정청(점령지 군사정치 기관) 경제협력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내가 태어난 곳인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돕겠다”며 1950년 미국 해군에 재입대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한국 지리에 밝고 한국말을 잘했던 덕에 해군 소속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수복작전에서 정탐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50년 9월22일 오전 정찰을 위해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접근하던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28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현재 윌리엄 쇼 부자는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해밀턴의 아들 로빈슨 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뒤를 이어 한국에서 장학사업과 법률연구센타등 한국 대학생들을 위한 많은 교류 활동에 이바지 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 가정은 3대에 걸쳐, 한국을 자기 민족처럼 진정으로 사랑하며 헌신했던 가문이다.]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외아들, 윌리엄 해밀튼 쇼(1922-1950) 윌리엄 해밀튼 쇼(Shaw, William Hamilton)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후, 미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내한하여,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였다. 해군에서 제대 후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대학에서 연구하다가 6·25가 발발하자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고, 서울 수복 진두 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어린이공원'에는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1956년 9월 22일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옮겨 놓았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이 새겨져 있다. 2001년 10월 20일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하여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졌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는 1943년 해밀턴 쇼와 결혼하였으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하였다.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하버드 엔칭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은 1952년에 출판된 김말봉의 ‘찔레꽃’ 같은 책들이 있는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한국전쟁중에 나와 우리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책들이기 때문이다.한국전쟁 중에 서울근교에서 전사한 하버드대 중국학 전공 대학원생 ‘윌리엄 쇼 기념도서’라고 찍혀 있다. 쇼의 가족과 친구 5925명이 2-3달러씩 모은 추모기금으로 사들여 기증한 책들이다.] [불멸의 한국사랑 '서위렴'을 아세요? 한겨레 기사 등록 : 2008. 9. 18. 19:11 [한겨레] 한국이름 쓴 미 선교사 아들…'한국전 순직' 추모공원 조성 1922년 당시 평양에 머물던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쇼 1세와 부인인 애들린 사이에서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아버지의 영어 이름과 함께 서위렴이라는 한국 이름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소년은 미국 오하이오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다. 대학 졸업 뒤 해군에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그에게 한국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고심 끝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경 말씀을 따라 미국 해군 대위로 자원입대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군의 측근 보좌관으로 활약했고, 이후 해병대 5연대 소속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서울 입성 약 1주일을 앞두고 서위렴2세는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6년 뒤인 1956년 9월 22일, 그의 친지 등이 성금을 모아 그가 쓰러진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건립했다. 그의 부인인 후아니타 로빈슨은 그때 두 아들을 데리고 아예 서울로 와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면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사회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남편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의 한 자리를 이미 예약해 놓았다. 한국과 그 가족의 특별한 인연은 3대째 이어졌다. 그의 큰아들 로빈슨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학 박사로, 며느리 캐럴은 한국 근대사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그의 행적은 잊혀져 있다. 그의 추모비도 어느새 옮겨져서 은평구 응암동 85-41, 응암어린이공원 마당의 구석에 쓸쓸히 서 있다. 3대에 걸친 윌리엄 가족의 한국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최근 은평구가 추모공원 건립에 나섰다. 은평구는 녹번동 153-1번지 일대 5700㎡ 터에 350억원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18일 밝혔다. 구는 이곳에 추모비를 옮겨 오고, 수변 공간, 휴게시설 등을 만들어서 잊혀진 이름을 시민들이 기억하도록 할 계획이다. 공원은 한국전쟁 60돌을 맞는 2010년 6월에 완공된다. 김기태 기자] 스크랜톤, M.F. - 이화학당(한국 최초의 여학교)과 삼일소학당 설립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선교사는 이화학당(현 이화대학교) 설립자이며,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1885년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사업(교육, 선교)의 선구자중 한사람이었다. 다년간 충실히 봉사하고 그가 선택한 한국에서 많은 좋은 일들의 향기와 기억을 남겼다.”고 에비슨 박사는 추모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윌리암 B. 스크랜톤 선교사(1856-1922) 스크랜톤 대부인의 외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Scranton, 施蘭敦)선교사는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뉴해븐에서 출생하여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다. 루리 W.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여, 오하이오주 개업의사로 활동(1882-1884)하다가,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1885년 5월 3일 내한했다. 한국에서 왕립병원(제중원)의 봉사를 시작으로, 1885년 9월 10일 최초의 민간병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의료 활동을 했다. 제중원에 이어 두 번째 병원이었다. 1886년 6월 병원 시설을 확장했으며, 1887년 고종 임금은 “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0년에는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을 설립했다. 그 후 거주지와 활동지를 상동으로 옮겨,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선교부에서는 미국 감리회 조직을 위해 앞장섰고, 회계와 선교부 관리자로 서울 경기 지역의 감리사로 폭 넓게 활동했다. 성서 번역위원으로 위촉되어 성서사업에도 공헌했으며, 로마서 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190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회선교연회’에서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사임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독자적 의료 활동에 힘썼다. 만년은 일본에서 보내다가 코베에서 1922년 3월 쓸쓸히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코베 캇가노 묘지에 묻혀 있다. 아직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아펜젤러, H.G. - 배재학당 설립 ☆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선교사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추모비는 배재동창회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그는 1884년 미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해외선교부(총무)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27일 아라빅호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잠깐 머물다가 1885년 4월 5일 미츠비시 배편으로 부산을 경유 인천에 그의 부인과 함께 도착했다. 이 때 아펜젤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옵소서'라는 첫 기도를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등 우리 나라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미국 공사(G. C. Foulk)의 권유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H. G. 아펜젤러 선교사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첫째, 배재학당의 창설(1886. 6. 8)을 예시할 수 있다. 배재(培材)학교는 고종 임금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교회의 설립(1887.10.9)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그는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시행하였다. 그리고 벙커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넷째, 성서 번역사업과 '조선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위주의 사회에서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 혜론, 스크랜톤 등과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에 공헌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순직하였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성서 번역에 공적이 큰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마가와마루 호에 탑승했다가 충청남도 오천군 하서면 어청도 앞바다(現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서 다른 선박과 충돌사고가 벌어져 탑승객들을 구한 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향년 44세에 익사했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아펜젤러의 아들 내외와 딸의 묘역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다.] [아펜젤러 추모비, 서천 마량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직 장소가 그동안 알려졌던 군산 앞바다가 아니라 서천 앞바다에 있는 오세이도라 불리던 어청도 부근이라는 최근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근거해 2006.6 아펜젤러 순직 104주년을 추모하며 감리교 충청연회 주관하고 서천군기독교연합회와 서천군이 공동으로 진행 중인 한국최초 성경전래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마량진에서 48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어청도는 1914년 이전에는 행정경계상 충청남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헨리 닫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 선교사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는 1889년 11월 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프랭클린-마샬(Franklin and Marshal)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11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1915년 드루(Drew)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7년 뉴욕대학에서 M. A. 학위를 받았다. 1917년 9월 4일 선친인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한국명:亞扁薛羅) 선교사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인천지방에서 3년간 활동하였다. 1920년 배재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끊임없이 교육시켰다. 1919년 11월 6일 ‘미국감리회한국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년 9월 17일까지 다섯 차례나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찬송가 개정작업에 동참하여 <신정 찬송가》를 1931년 발행하는데 공헌하였다.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미국 뉴욕감리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3년 12월 1일 64세로 별세하였다.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1954년 10월 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되었다. 이화·배재 연합성가대의 주악과 찬송(570장)과 신흥우 박사의 조사 등으로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가 진행되었으며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H. D.아펜젤러 부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 선교사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는 1892년 10월 1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34년까지 봉직한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1866-1945) 선교사의 딸로 1894년 6월 14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평양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중학교와 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亞扁薛羅)의 아들 H. D. 아펜젤러와 미국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917년 9월 4일 남편과 함께 내한하였다.(자료 : 윤춘병,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처음에는 인천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남편을 내조하며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했다. 1941년 강제 출국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세계봉사회 한국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여 1952년 남편의 병 치료차 귀국하였다. H. D. 아펜젤러와의 사이에 3남매(Appenzeller, Alice R., Mary E.)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사후에 다시 내한하여 1962년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선교사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책임자(Hostess)로 봉직하였다. 정년 후에는 나이트(Cecil Knight)와 재혼하여 미국 그렌다르(Glendale)에서 살다가 1986년 11월 25일 별세하였다.(자료 : Donald N. Clark)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7년 1월 19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ppenzeller, Alice Rebecca, 1885~1950)는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의 딸로 한국에서 백인 선교사의 첫 자녀로 출생하여 미국에서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화학당 제6대 교장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학장으로 교육에 헌신하면서 세계적 종합대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검은 색 묘비의 상단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고 하는 교훈적인 글이 새겨져 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에는 물론 전도활동에도 열심을 내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갑신정변으로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에 우선 정박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선교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 한편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집회를 열었고,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당시부터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어 있지 않는 상황에서 목사, 혹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었으나 제중원 교사라는 직함은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좋은 것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고아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86년 2월 14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정부에 설립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여 김윤식의 승인을 얻었다. 고아원의 원장은 조선인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장차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아원 학생들 중에는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에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언더우드의 비서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경신학교의 교사로, YMCA의 지도자로, 중국 망명 후에는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여 입법위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납치되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지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언더우드는 1880년대 후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는데 제1차 전도여행(1887년 가을)은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이었고 제2차 전도여행(188년 봄)은 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제3차 전도여행은 1889년 봄 신혼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강계, 압록강변의 마을 등이었다. 국내의 전도여행의 성과는 지대한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어학에 관심이 많아 다방면의 사전편찬을 주도했다. '한-영문법'이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첫부분은 문법주석이었고 둘째부분은 영어를 조선말로 번역한 것으로 도합 총 425면이었다. 이 책은 1914년에 개정되어 사용되었다. 두번째 책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된 '한어자전'이었다. 처음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사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그는 5년여 동안 단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첫째부는 게일(James S. Gale)의 도움과 한불자전(韓佛字典) 그리고 어학선생 송순용의 도움을 받아 한영부(韓英部)로 둘째부는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도움을 받아 영한부(英韓部)로 편찬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입국 1년 뒤 '마가복음'의 첫 임시번역본을 간행하였다. 1887년 일본 방문에서 헵번 박사로부터 성서위원회 조직을 제안받고 2월 7일 번역의 감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합의하고 4월 11일 위원회의 임시 헌장과 세칙을 통과시켜 상임 성서위원회, 번역위원회, 수정위원회를 두었다. 이때 감리교회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헤론(1890년 헤론 사망 후 게일이 임명됨)이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88년 조선야소교서회의 조직을 제의 이듬해 조직되어 언더우드는 총무로 선출되었고 1890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는데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신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참고한 글 : 이광린,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언더우드의 부인),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e) [언더우드, H.G. -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설립.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 ~ 1921)과 1889년 3월 14일에 서울에서 결혼했다. 언더우드 부부는 조선에서 결혼한 첫번째 외국인이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선교여행으로 평안도 지역으로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했다고 한다.] [언더우드 2세 원한경 원한경(元漢慶)은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 원두우(元杜尤:Horace G. Undewood)의 2세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내한하였다. 1912년 경신(儆新)학교 교사, 조선신학교 교수 및 교장, 1933년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동 학회지(學會誌)에 한국관계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다시 와서 미(美)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전기 학회의 지부를 재발족시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큰아들 일한(一漢)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둘째아들 요한(堯翰)은 복음전도사업 등에 힘썼다. 저서에 《한국의 현대교육 Modern Education in Korea》 《A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등이 있다.] [언더우드 3세 원일한 본명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이고, 원일한은 한국 이름이다. 1917년 10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국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설립자인 원두우(元杜尤:Horace Grant Underwood)이고, 아버지 역시 평생을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힘쓴 원한경(元漢慶:Horace Horton Underwood)이다. 할아버지와는 영문 이름이 같다. 1939년 뉴욕 해밀턴대학교를 거쳐 1955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62년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193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회 파견 선교사로 한국에 와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42년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강제 추방당하였다. 1947년 다시 자원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와 백낙준(白樂濬)과 함께 연세대학교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당시 정보부에서 활동하였고, 1951년 7월 정전협정 때는 국제연합군 수석통역관을 맡아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6~1978), 경신중고등학교 이사(1956), 연세대학교 총장서리(1960)·중앙도서관장·재단이사, 부산 일신병원 이사(1977), 한미교육위원단 운영위원, 한미협회 부회장, 대천수양관 이사장, 대한성공회 이사, 광주기독병원 이사, 광주기독전문학교 이사 등을 지냈다. 잠시의 미국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한국에서 보낸 교육자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合井洞) 절두산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공원에 묻혔다.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인촌문화상, 한미우호협회상을 받았고, 저서로는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2002)가 있다.] [언더우드 2세 원한경의 3남 원요한 기념비 1919.3.30 서울에서 출생하여 1994.3.22.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서거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묘는 미국에 있다. 원요한 선교사는 1947-1991년 까지 44년간 청주 성서학원과 광주 호남신학대학에서 활동 하였다. 원요한의 부인 진 웨치(원진희) 역시 호남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1994.3.22.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서거 양화진에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에이비슨, O.R. - 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설립 ☆ [제4대 제중원 원장, 세브란스 병원 창시자 올리버 R. 에비슨(Avison, Oliver R. 1860-1956)은 캐나다 출신의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어비신(魚丕信)이란 한국 이름으로 세브란스 병원장을 비롯하여 연합의학교 초대교장과 연희전문 교장 등 한국의 의료 개척 선교사(1893-1934)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출생하여 6살 때 캐나다 왼스턴에 이주하였으며, 1887년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내과 및 약리학을 강의하다가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1893년 부산을 경유하여 11월 1일부터 제중원 의사로 봉직하였으며, 1895년 여름에는 서울에 만연된 콜레라 방역사업 책임자로 진력하여 일찍이 상상 할 수 없는 65% 완쾌자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으며, 1899년 제중원에서 수명의 학생을 모아 의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수학 자연과학 농학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한국 의료 선교의 확장을 제창하였다. 이때 오하이오 출신의 석유회사 중역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를 만나 그의 후원금을 가지고 제중원을 구리개(銅峴)에서 남대문 밖으로 이전하여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이때 제중원에 있던 남대문교회도 함께 이전하였으며 그는 교회를 열성으로 섬겼다.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로 개칭하고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1913년부터 세브란스 의전(醫專)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 교장까지 겸직하였다. 1934년 3월 세브란스 의전과 연희전문학교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두 학교 즉 "연세"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1935년 은퇴하고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6년 8월 29일 플로리다 피터스버그에서 96세로 별세하였다. 제자들은 에비슨의 동상을 건립(1928)하였다. [올리버 R. 에이비슨(영어: Oliver R. Avison, 한국어: 어비신(魚丕信), 1860년 6월 30일 ~ 1956년 8월 29일)은 캐나다의 선교사이자 의사이다. 1893년 6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한국에서 체류하며 활동하였다. 제중원의 제4대 원장,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생애 에비슨은 1860년 6월 30일에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1866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1879년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1884년에는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를 졸업 후에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1884년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하여 1887년 6월에 졸업하였다. 의과대학 재학 중인 1885년 7월 제니 반스와 결혼하였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으며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로도 활약하였다. 1892년 9월 선교 모임에서 만난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영어: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어: 원두우, 元杜尤, 1859년 ~ 1916년)로부터 해외 선교의 제안을 받자 교수직을 사임하고 1893년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1893년 6월 가족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부산을 거쳐 8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입국과 활동 제중원 원장으로 부임한 에이비슨은 1894년 제중원의 운영을 두고 조선 정부와 6개월간 협상을 벌여 9월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다. 1904년 9월 제중원을 새로 신축하였고 기부금을 낸 미국인 사업가 루이스 헨리 세버런스(Louis H. Severance, 1838년 ~ 1913년)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으로 이름 변경하였다. 제중원 의학교는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로 불리게 된다. 1908년 6월 에비슨에 의해 조선 최초의 면허 의사인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된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명칭을 변경하며 발전한다. 1915년 조선기독교학교(Chosun Christian College)가 언더우드에 의해 개교하자 에이비슨은 부교장에 임명되었고 1916년 교장인 언더우드가 사망하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학교는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언더우드의 형인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의 기부로 1917년 9월에 현재 연세대학교가 위치하는 대지를 교지로서 구입하였다. 1926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합동에 대한 의견이 피력되었고 1926년 6월에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1934년에 에비슨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1935년 12월 조선을 떠났으며, 1956년8월29일 향년 96세로 미국 플로리다 피터스버그에서 사망했다. 한편, 1945년 5월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예과를 연희대학교에서 모집하기로 하였고, 1957년 1월에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는 통합되어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자녀 고든 에이비슨(Gordon W. Avison, 1891년 ~ 1967년) : 장남, 선교사 더글라스 에이비슨(Douglas B. Avison, 1893년 ~ 1954년) : 사남, 선교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병원장 역임, 서울 양화진외국인묘원에 안장] [제니 바네스 에비슨(Avison, Jennie Barnes,1862-1936) 남편 올리버 에비슨과 아이 셋을 데리고 내한하여 부산 베어드 선교사 집에서 네 번째 아이 더글러스 에비슨을 낳았다. O. R. 에비슨 부부는 모두 10남매를 낳아 일곱을 키웠다. 자녀 중 큰아들 고든(Gordon W.)은 YMCA 선교사(1915-1939)로 북한지역에서 농촌선교를 담당하고, 딸 레라(Lera)도 선교사역(1911-1914)을 담당하였으며, 아들 더글러스 에비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브란스 병원장이 되었다. 제니 바네스는 1862년 2월 23일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열성으로 조력하였다. 언제나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매력 있고 상냥한 표정으로 손님을 접대하였다고 한다. 1936년 9월 15일 74세로 별세하였다.] [더글러스 B. 에비슨(1893-1954) 선교사 2세 부부 올리버 R. 에이비슨의 아들인 더글러스 B. 에비슨(Avison, Douglas Bray)은 부산에서 1893년 7월 22일 출생하였다. 캐나다에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선천지방에서 활동(1920-1923)하고 서울로 전임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소아과 교수, 부학장 및 병원장 등으로 1947년까지 헌신하였다. 1952년 8월 4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임시 안장하였다가 생존시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1954년 유해를 화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장례하고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묘역에는 제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이 건립되어 있다. "더글러스 B. 에비슨 선생은 우리 나라에 나시고 일하시고 여기에 묻히셨다. 20년 동안 우리 학교에서 몸바쳐 일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셨다.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후학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환자를 대하셨다. 높은 덕 넓은 은혜를 마음에 색이면서 그 유언을 따라 유해를 모신 이 자리에 이 비를 세워 선생을 추모한다. 1953년 8월 4일 세브란스의과대학 동창회 세움"]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 더글러스 B. 에비슨의 부인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은 1898년 8월 10일 캐나다(Claremont)에서 출생하여, 남편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자녀로 다섯 딸이 있으며 1985년 8월 6일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양화진 남편 곁에 합장하였다.] 전옥자 -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의 희생자로 한국계 미국인.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1985년 8월 12일 오후 6시 57분경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소속 보잉 747(기체 등록번호 JA8119) 민항기가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현 부근의 타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 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인원 524명 가운데 520명이 숨진 참사다. 한국계 미국인 전옥자(당시 42세)는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외국인학교를 다니던 아들 크리스토퍼 한가위 킴(당시 16세)와 스콧 한솔 킴(14세)를 데리고 남편이자 당시 오사카 중앙일보 판매 위원장이던 김종욱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 사고 당시 남편 김종욱의 이종사촌 형이자 서울특별시청 뒤에 있는 뉴 국제호텔 회장이었던 김유만이 전옥자의 친정 식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세 모자가 사고기에 탑승했다고 연락했고 전옥자의 남동생 전유식이 도일하여 세 모자의 죽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김종욱의 식구는 1968년 결혼 후 1972년 미국으로 이민해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1977년 귀국하여 외국인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외국인학교 교우 바비킴은 크리스토퍼는 성적이 굉장히 우수했지만 비행기 사고로 비명횡사해 안타깝다고 전했다. 전옥자 씨와 두 아들은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프란츠 에케르트 - 대한제국 애국가 작곡, 기미가요 편곡 [한국 군악대 창설자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ret)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독일 실레지아주에서 출생하여 브레스라우 음악학교와 드레스덴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육군 군악대 대원이 되었다가 해군 군악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군악대 조직의 필요성이 논의되기는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1894년 갑오경장까지로 볼 수 있다. 1896년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겸하여 영국, 독일, 불란서, 오스트리아, 미국 등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귀국하여 서양 문명을 본대로 정부에 보고하면서 새로운 제도인 군악대 설치를 적극 주장하여 1900년 12월 군악대 설치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에서 귀국하려던 에케르트를 초청하여 1901년 2월 7일 내한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국 최초의 군악대 조직과 창설 작업에 착수했다. 악기들을 구입하는 동시에 악사들에게 제복을 입혀 훈련을 시작했다.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을 제일 먼저 시도하였다. 고종 임금 제50회 탄신 기념일인 1901년 7월 25일(양력 9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서양 음악으로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이 연주회에 대하여 코리아 리뷰(1901. 9월호)에는 “고종황제의 제50회 탄신 축하 행사는 적시 적기에 아주 훌륭한 순서로 거행되었다. 이 축하 행사는 한국 발전 역사상 반세기 역사를 앞당긴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는 한 번 연주되고 정식 채용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 제국의 가사는 지금의 애국가보다 간결하다. "샹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영히 번영하야 해돋이 무궁하도록 성디 동방의 문명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우쇼서." 군악대는 27명의 한국인으로 4개월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악기를 다루는 솜씨나 음악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에케르트의 공로가 컸으며 연주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지휘자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그의 제자로 백우용 강흥준 김창희 등이 그의 뒤를 따라 군악대의 지휘봉을 들었다. 늠름한 제복차림, 번쩍거리는 악기들,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 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때 한글로 새긴 은(銀) 기념 메달도 하사되었다고 한다. 이 군악대는 1907년 우리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되었다. 에케르트는 이때 일자리를 빼앗겼으나 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6일 자택에서 별세하여 8월 8일 3일장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카톨릭 신자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일본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작곡자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는 태극장 3등을 수여하였다. 그의 부인은 그가 별세한 지 5년 후 1920년 독일로 돌아가서 1934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한국에서 출가하였다. 맏딸(아마리 에케르트)은 프랑스 외교관 마르텔(Martel, Emile)과 결혼하였으며, 그는 한국에서 불어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힘썼다. 한국에서 55년(1894-1949) 동안 장기간 활동하다가 마르텔도 양화진에 묻혔다.] 위더슨, M. - 고아원 운영 마리 위더슨(Mary Ann Widdowson, 1898-1956) 선교사 마리 위더슨은 1898년 4월 4일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이주하였다. 성장하면서 천성이 온순하고 신앙이 돈독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1926년 약혼하였다. 1927년 가을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먼 길을 외롭게 떠나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결혼했다. 남편(Chris)을 내조하며 선교사로서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1934년까지 7년간 한국에 살았으며 이때 첫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은 고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고아들은 주로 거리에서 데려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전염병의 감염과 위협을 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크리스가 전염병으로 앓게 되고 부인 마리도 발진티푸스로 앓아눕게 되었다. 그는 고열로 헛소리를 하면서 며칠동안 의식을 잃은 일도 있었다. 의식을 회복하고 첫 걱정으로 고아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였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아이들을 잘 보살폈다. 그 후 1934년 2월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봉직하였다. 위더슨 부부는 1953년 1월 19일 한국 전쟁 기간 중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부산으로 다시 돌아 왔다. 6∙25전쟁으로 폐허화된 상황 속에서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 이때 남편은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로 봉직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위더슨 부인은 위암으로 투병하면서 크리스마스 자선냄비 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뿌리며 동료들을 격려했다. 병상에서 글로 써 가정단 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사령관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라고 유언 했다. 그녀는 귀국을 원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수 있다.”고 하면서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면서 1956년 5월 10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땅에 묻히고자 했던 바람대로 그녀의 유해는 1956년 5월10일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특별히 이승만 대통령이 친히 조문, 위로를 하였으며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문객으로 인하여 60여대의 차량행렬이 장례식에 늘어섰다고 한다. 묘비는 1956년 9월17일 건립되었으며 묘비에는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그녀의 남편 크리스 위더슨은 사랑하는 부인을 한국 땅 양화진에 안장하고 묘지 옆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은 뒤 1957년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은 1926년 11월 내한하였다.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정위로 8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2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케냐에서 총무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53년 1월 9일, 한국 전쟁 기간 중 구세군 사령관으로 부산 수영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한하여 사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해군 장교구락부에서 한국기독교연합회와 구세군이 공동으로 주최하며 신익희 국회의장 등이 임석한 환영식에 참가했다. 한국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으로는 첫째 54명의 사관을 배출하고 13개소의 전장부를 신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둘째 19개소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수하고, 7개소의 사회사업소를 개설하였다. 셋째, 서울(아현, 마포, 돈암, 영등포 등), 부평, 춘천, 대구, 부산 등지에 급식소를 신설하여 월 평균 5천명에게 음식을 나눴다. 이밖에 245,673명에게 일반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영동병원을 통하여 입원 및 외래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1956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한국에서 사별하고 1957년 8월 1일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돌아갔다. 웰본, A.G. – 선교활동 아서 G. 웰본(Welbon, Arthur G.) 출생 : 1866. 미국 별세 : 1928. 한국 한국 활동기간 : 1900 ~ 1928 국적 : 미국 소속교단 : 장로교 양화진 묘비번호 : A-51 “북부 영남 오지선교 개척자” 안동과 대구 선교에 헌신 웰본 선교사 부부는 원주, 안동, 대구 등 우리나라 오지에 복음을 전한 선교 개척자이다. 웰본 선교사는 1866년 8월, 미국 미시건 주 이스트맨빌에서 태어나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 있는 매칼레스터대학과 캘리포니아 샌 안셀모에 있는 샌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 10월,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1년 뒤인 1901년 9월, 1899년부터 조선에서 간호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사라 선교사와 결혼했다. 웰본 선교사는 1909년까지 서울 선교부에서 사역하며 원주 선교부 설치에 기여했으며, 1909년부터 8년간 안동 지역에서 활동했다. 특히 그는 간호 선교사인 아내와 함께 농촌과 산촌에서 진료를 통한 선교에 주력하여 경상도 북부 지역 복음화에 공헌했다. 웰본 선교사 부부는 아내 사라 선교사의 건강이 나빠져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년 만에 웰본 선교사는 혼자 다시 내한하여 대구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과로로 별세했다. 두 자녀와 함께 양화진 안장 양화진에는 웰본 선교사와 그들의 6남매 중 태어난 지 10일 만에 사망한 첫째아들 하비와 3살 때 사망한 막내딸 앨리스 등 3명이 묻혀 있다. 아내 사라 선교사는 1925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최봉인 - 대한민국 초대장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토지의 원 소유자이자 기증자이자 묘지기. 양화진 묘원에 묻힌 유일한 한국 국적자. 최봉인은 16살에 혼자 강릉에서 서울로 와 양화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친구의 전도로 故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고 전해진다. 최봉인 장로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가까웠다. 선교사들이 어려운 일이 있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그를 불렀을 정도로 최 장로는 선교사들과 함께 다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선교사들 일기에도 그의 이름이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고. 그가 양화진 묘원을 돌보게 된 계기는 의료선교를 펼쳤던 헤론 선교사의 죽음이었다고 한다. 최 장로는 죽은 헤론 선교사를 자신의 집 뒤에 묻었고, 이후 선교사들의 무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선교사들은 그에게 감검관(묘지기)이라는 직분을 주었다. 1900년대 초, 1년에 묘가 약 80개씩 늘어나자 최봉인은 하인 소작인들과 함께 묘를 관리했고, 묘지회에서 돈을 받았으나 일제 때 선교사들이 다 쫓겨 나간 후에도 긴 세월 동안 수백 개의 묘를 믿음으로 관리했다. 사망한 최봉인 장로도 양화진 묘원에 묻혔다. 캠벨, J.P. - 배화학당 설립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선교사는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21세 되던 1874년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하여 1남 1여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었다. 이 같은 불행을 격은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며 “一生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貢獻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했다. 캠벨 선교사는 그 후 미국 ‘남감리회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1897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며 한국으로 오면서 중국인 양녀(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윤치호의 마중을 받았으며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리드(李德) 선교사 부부가 이미 훌륭하게 선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감리회의 상동병원과 북장로회의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다.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했다. 이때 교사(敎師)는 2명이었고, 과목(科目)은 한글과 한문이었다.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한편 그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춘수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移轉)하여 종교(宗橋)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의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紫橋)교회로 발전했다고 한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11월 12일 별세했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다.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다. (참고자료: 배화백년사, 감리교 인물사전, 종교-자교교회사) 터너, A.B. - 2대 성공회 조선교구장 주교, YMCA 회장, 한국 스포츠의 아버지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한국 성공회 주교 아더 B. 터너(TURNER, Arthur Beresford 한국명: 端雅德, 1862-1910) 주교는 1862년 8월 29일 영국 솔스베리에서 출생하여 1885년 옥스퍼드(Oxford) 키블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896년 12월 2일 영국성공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대성당에서 코프 주교를 보좌하였으며, 공덕동성당과 인천성당에서 봉직하였다. 1904년 7월 초대 주교였던 코프가 사임하여 제2대 한국 주교로 1905년 1월 25일 터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서품되었다. 그는 겸손한 인격과 통솔력을 발휘하며 수원과 진천까지 선교범위를 확장하고 교회의 자립에 힘썼다.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비롯하여 고아원과 학교기관도 자립시켰다.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의 기본 상식과 실업(實業)교육을 실시하고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YMCA 초대(1903)이사, 체육위원회 위원장, 황성기독청년회 회장(1907) 등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 축구를 처음으로 보급하여 한국 최초의 축구선수(이호성 등)를 양성한 인물이기도하다. 1910년 10월 28일 오후 4시 인천 성 누가병원에서 신병으로 별세하여 11월 1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후임 주교 트롤로프(Trollope, 조마가)와는 같은 학교 동급생 관계였다. 터너의 죽음에 대하여 게일(Gale, J. S.) 선교사는 "터너 주교의 죽음으로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14년간 그는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똑같은 아주 친절한 주인이며, 기쁨을 주는 손님이었고, 확고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추도사를 선교 잡지에 게재하였다.] 차드웰, A.E. - 성공회 한국교구 보좌주교, 성공회 한국교구장 서리.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車愛德, 1892-1967)은 1892년 8월 1일 영국 햄스테드(Hampstead)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런던대학과 처선트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에 부제, 1923년 사제로 서품 되었다. 1926년 내한하여 1928년까지 충북 진천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까지는 북한의 배천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는 평양에서 성공회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중국 침략 전쟁을 강력한 항의 성명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차드웰은 1940년 7월 24일 외환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쿠퍼 주교도 같은 해 8월 10일 연행되어 4일간의 구류를 살았다. 차드웰은 1941년에야 석방되어 한국에서 제일 늦게 강제 추방된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한국을 떠난 뒤에는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8·15 광복이 되어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청주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 7월 18일 간첩 혐의로 공산군에 체포된 쿠퍼(Alfred Cecil Cooper, 具世實) 주교가 납북(拉北)되자 그를 대신하여 차드웰이 성공회를 지켰다. 이에 따라 캔터베리 대주교는 공백기의 책임을 차드웰에게 맡기기로 하고, 보좌 주교로 임명하여 1951년 11월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주교 승품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성직자의 확보가 1차적 과제라고 생각하고 긴급히 독신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독신 선교사를 요청한 사유는 선교비의 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빨리 한국어를 습득하고, 적어도 10년간 봉사할 수 있는 젊은 사제를 파송해 주기를 바랬다. 그 후 교회(성공회)들은 차드웰의 목회 지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씻으며 건실하게 성장해 갔다. 여기에는 한국인 성직자들의 노력이 매우 컸다. 차드웰 주교는 1953년 5월 31일 서울 대성당에서 1949년 이래 처음으로 부제성직에 김태순과 윤주현을, 사제성직에 이천환과 김경득을 각각 안수하였다. 그 후 이천환(李天煥)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을 받아 75년간의 선교사 시대를 마감하고 1965년 5월 27일 주교 승좌식을 갖고 한국인 초대 주교로서 서울교구를 창립한 인물이 되었다. 1955년 차드웬은 주일복음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선교 활동에서 출판물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은퇴 후에도 인천성당에서 1년간 봉직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중 체포되었던 쿠퍼 주교가 1953년 11월 14일 귀환하였으나 1955년 1월 16일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사임했다. 그리고 새로운 한국 주교를 물색하여 1956년 1월 17일 아프리카 가나의 교구장이던 데일리(John Daly, 한국명: 김요한)가 한국 교구의 제5대 교구장으로 전임 발령되었다. 차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21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성공회 구역에 안장되었다.]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주교 묘비 전면 묘비에는 “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주님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 붙여 깨끗이 하여 단련하고. 주님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이라 쓰여 있다.] 테일러, A.W. - 기업인, AP통신 소속 언론인. 3.1 운동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인물 [조지 A. 테일러의 아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형 윌리암(William)과 서울 소공동에 “W. W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Overland) 등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한국에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의 영화사로부터 영화(필림)를 수입하여 여러 극장에 대여하였다. 쉐퍼(Sheaffer) 만년필을 포함한 수많은 생활 용품들도 그들의 무역을 통하여 한국에 유통되었다. 앨버트 W. 테일러는 메리 린레이(Mary Linley)와 결혼하였으며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은 서울 종로구 행촌동 1-18번지에 있으며, 아직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건축가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1931.10.25생), 서금순(1937.10.15생) 증언(2005.7.20)에 의하면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아직도 방음(防音)이 잘되고, 현관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둘레 6.8m, 높이 23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1-10)로 지정되어있다. 이 터는 임진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 승리한 권율(權栗, 1537-1599)장군의 소유였으며, 1920년 앨버트 테일러가 구입하여 “즐거운 세상의 궁전(Palace of Earthly Delights”이란 뜻의 “딜쿠슈아(Dilkusha)"로 명명하여 1923년 건축되었다. 전망이 좋고 집이 잘 지어져 주한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으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여주인 메리 부인은 연극배우로 런던에서 연극을 했고. 1917년 앨버트를 만났을 때는 상하이, 요코하마 등 극동 무대에서 활약했다. 서울 외국인학교 공연과 외국인 축제 때에는 연극 지도에 앞장섰다.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1942년 그립숄(Gripsholm) 배편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A. W. 테일러는 8.15 광복후 한국에 남겨둔 재산을 회수하고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살던 “딜크슈아”는 이미 큰 손실을 입었으며, 불법 점유자들이 살고 있었다. 남기고 간 자산은 은행 계좌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은 캘리포니아 맨도시노(Mendocino)에서 1982년 93세로 별세하였다. 앨버트 부부에게 부르스(Bruce)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여 영국 총영사 제랄드 핍스의 딸 조이스 핍스(Joyce Phipps)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하디, R.A. - 선교활동 ☆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의 남감리교 의료선교사로 1898년부터 함경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했다. 그는 5년 동안 선교에 매진했으나 뚜렷한 열매를 남기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1903년 8월 24일부터 일주일 동안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연합기도회를 인도하다가 ‘아무리 수고해도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는 8월 30일 원산감리교회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자신의 교만과 한국인들을 멸시했던 죄를 공개적으로 자복했고, 그의 회개는 곧 한국인들의 가슴에도 회개의 불을 붙여 원산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는 그 후에도 개성과 서울, 인천 등지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했고,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했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 연합기도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의 기폭제가 됐다. 그는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49년 세상을 떠났고, 양화진에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숨진 그의 큰 딸과 여섯 살에 죽은 둘째 딸의 무덤이 있다. 헐버트, H.B. - 고종 시기 외교활동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訖法 또는 轄甫, 1863-1949)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했다. 1884년 다트마우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재학 중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다. 그는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했다. 학생들이 세계 지리(地理)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 <士民必知>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다.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었다.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시 귀국했다가 1893년 9월 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1901년 <코리아 리뷰>를 창간하고, 미국 감리회 운영의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그는 1906년에 발간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인의 기질에 대하여 “한국인은 합리주의적 기질과 감정이 가장 알맞게 조화되어 있으며, 냉정과 정열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 평온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을 줄 알고, 또한 격노할 줄도 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이 살아갈 방도는 교육뿐이며, 한국을 정복한 민족(일본)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교육에 전념해야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 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한국 YMCA 창설자 헐버트 헐버트는 유능한 한국의 청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 개혁 의식을 불어 넣고, 교육과 계몽 그리고 복음화를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실현하는 방안으로 한국 YMCA 창설을 착안했다. 1903년 3월 7일 YMCA 설립자문위원회에서 위원장과 1903년 10월 18일 창립총회(황성기독청년회) 때에는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한편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5년 10월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한국 병합이 구체화되자 고종황제의 밀사로 워싱턴에 파견되어, ‘한미수호 조약’에 따라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가츠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면담은 실패했다. 또한 1907년 4월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네덜란드 헤이그(Hague) 만국평화회의 파견 밀사로 활동 했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 정치 외교 참여를 일본 정부가 못 마땅하게 여겨 1908년 미국 정부의 소환 형식으로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그 후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지내다가 1949년(8·15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다시 내한했다. 그러나 86세 고령에다 여러 날의 여독(旅毒)으로 1949년 8월 5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그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양화진에 8월 11일 안장되었으며, 1950년 3월 1일에는 건국공로훈장(獨立章)이 추서되었다.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이라는 추모비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는 어록이 있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의 묘비 이 묘비는 1949년 8월 11일 영결식때 제막한 것인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묘비명을 쓸 수 있도록 비석의 가운데 부분을 비워두었었다. 그러나 당시는 건국 초기여서 국내의 여러가지 사정상 추진위원회가 글씨를 미쳐 받지 못했고 그 이후 50년 동안 그대로 비어 있다가 헐버트 박사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1999년 당시의 대통령이던 김대중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새겼다. 가운데 세로글씨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한글 휘호가 김대중의 필적이다.] [미국인 독립운동가 헐버트 죽음을 각오한 길이었다. 1909년 8월 30일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는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품속에 베를린에서 산 호신용 리볼버 권총이 있었지만 그 무게도 불안함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미국의 아내에게는 이미 자신의 유고 시 재산 정리와 아이들의 양육을 당부하는 유서도 남겼다. ‘서울에 가서 남겨둔 집안일도, 책도 정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박사는 서울이 그리웠다. 일제는 2년 전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모자로 박사를 지목했다. 박사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특사증과 각국 원수에게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소지한 채 한국을 떠났다. 당시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서울의 통감부, 일본 외무성 등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미국에 가서는 일제의 침략을 알리는 여론전을 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으로 반한 여론이 상당한 가운데 박사는 뉴욕타임스(NYT) 등을 통해 외롭게 한국을 옹호했다. 황후를 살해하고, 황제를 폐위한 일본이었다. 박사가 미국인이라고 해도 이번에 한국에 돌아오면 신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박사의 한국 입국 뒤 NYT는 “박사가 암살 표적이 됐다”는 전언을 보도했다.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김동진 지음·참좋은친구)를 통해 들여다본 박사의 삶 가운데 한 장면이다. 저자가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2010년) 이후 10년 가까이 자료를 추적해 보완한 박사의 삶이 촘촘하게 담겼다. 유서도 박사의 외손녀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다(Koreans are among the world’s most remarkable people).” 저자가 찾아낸 1949년 7월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지에 실린 헐버트 박사의 인터뷰다. 찢어지게 가난한 작은 신생 독립국 국민을 평가하는 표현이었으니 ‘황당한 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박사는 확신했다. “한국인은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격파해 세계 해군사를 빛냈으며, (조선왕조실록같이) 철저한 기록 문화를 지니고 있다”며 사례를 거론했다. 무엇보다도 “3·1운동으로 보여준 한민족의 충성심(fealty)과 비폭력 만세 항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박사가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할 당시 고종과 박사가 눈물 어린 전보를 주고받았다고 보도한 NYT 1905년 12월 기사도 새로 찾아냈다. 고종은 “나 대한제국 황제는 …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노라. … 최상의 방책으로 미국과 이 조약의 종결을 이끌어내길 바라오. …”라는 전보를 박사에게 보냈다. 저자는 “황제가 늑약이 무효라고 선언한 실체적 증거가 이 전보”라고 했다. 부인 메이 헐버트가 일제의 침략을 고발한 인터뷰 기사도 책을 통해 공개했다. 메이 헐버트는 뉴욕트리뷴 1910년 5월 기사에서 “한국의 상류층은 일본 상류층에게 굴욕을 당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에게 좌우로 두들겨 맞으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증언했다. ‘헐버트의 꿈…’에는 목숨을 걸고 한국을 사랑한 박사의 삶이 드러난다.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한글 전용의 선구자, 한국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민권운동가 등 박사의 다양한 면모를 각종 기고문과 편지, 저서, 회고록을 통해 재조명했다. 박사가 출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의 출간 시기가 1891년 1월이라고 확인하기도 했다.] [헐버트 2세 셸던 헐버트(Sheldon Hulbert)의 묘 셸던 헐버트(Sheldon Hulbert)는 헐버트의 아들로 비문에는 1896년 2월 출생하여 1897년 3월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겨우 1년을 살다가 죽고 말았다. 박수길은 <아리랑을 부른 헐버트>라는 글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던 민요를 서양식 악보로 기록한 것은 헐버트 선교사에 의해서다” 한국학 연구지(Korea Repository)에 ‘Korea Vocal Music’이라는 제목으로 헐버트가 아리랑의 악보와 가사를 실은 것은 1896년 2월에 태어난 아들이 생후 1년 만에 죽게 된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헐버트는 1888년 9월, 한나(May B. Hanna)와 결혼하였으며, 그 부인은 1948년 11월 별세했는데 2남 3녀의 자녀를 낳았다. 성장한 다른 아들 헐버트 2세 윌리엄 체스터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6년 별세하였다. 그리고 3세(손자) 리차드는 2002년 미국에서 죽었으며, 4세(증손자) 킴벌리(KimbAll A.)는 현재 콜럼비아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2004년 8월 5일 헐버트박사 55주기 추모식 때에 양화진을 방문하여 유족 인사를 하였다.] 헤론, J.W.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최초 안장자, 제중원 운영 제중원 2대 원장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惠論)는 1858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파)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다. 헤론 부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그는 1889년 언더우드의 압록강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와 헤론 간에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결국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는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Gale) 선교사와 1892년 4월 7일 재혼하였다. 이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1885년에 출생한 큰딸, Sarah Anne과 1887년에 출생한 딸Jessie Elizabeth)이 있었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해티는 1907년 8월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 왔다. 결핵으로 1908년 3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의 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뒷자리에 안장하였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헤론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긴 사연이 담겨 있다. 헤론이 별세하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헤론 묘지의 관리인은 최봉인(후에 서교동교회 설립교인과 초대장로로 임직)이었다. [셔우드 홀 가족 양화진 홀 가족 묘에는 홀(Hall)가(家)의 삼대(三代) 묘역이 있다. 제임스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을 비롯하여 1991년 10월 5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안장된 메리안 B. 홀도 있다. 제1대 윌리암 제임스 홀(忽)은 최초로 평양의료선교사로서 광성학교를 설립했다. 부인 로제타 홀(許乙)은 맹인 점자교육의 선구자로, 평양에 최초로 병원을 건립했다. 제2대 셔우드 홀은 한국최초 결핵요양원 설립자이며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그 부인 메리안 버텀리 홀도 결핵요양원과 크리스마스 실의 선구자이다. 미국에서 유복자(遺腹子)로 출생하여 어머니(로제타) 품에 안겨 한국에 왔지만 3살의 나이로 양화진에 묻힌 에디스 마가렛과, 또 한 사람은 셔우드 홀의 쌍둥이 중 프랭크가 하루를 살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므로, 여섯 식구가 묘역을 형성하고 있다.] [로제타 홀(제임스 홀 부인), 셔우드 홀, 에디스 마가렛 “하나님, 한국에서 남은 아들과 빨리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 1.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의료선교에 평생을 바쳤던 순교자의 아내 로제타 홀 여사의 고백입니다. 2. 그녀는 한국에서 낳은 아들까지 의사로 키워서 한국의 결핵퇴치 사업에 대대로 헌신했습니다. 자그마치 43년을 이 땅을 위해 봉사를 하신 그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 3. 그녀의 러브 스토리를 알게 되면 더욱 감동적입니다. 4. 로제타 선교사는 조선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암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로제타의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5.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암은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웬 말이냐구요? 로제타도 윌리암 홀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암의 프로포즈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6. 결국 그녀는 1890년 조선 땅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오게 됩니다. 7. 윌리암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선교지 변경을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암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8.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1892년 6월 서울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결혼식이 조선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로제타는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함으로 그때로부터 홀 부인으로 칭함 받게 됩니다. 9. 윌리엄 홀은 청일전쟁이 조선 땅에서 벌어지자 전쟁터가 된 평양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과로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임신 중인 새 생명을 뒤로 하고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조선에 온지 2년 그때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선교에 헌신하여 조선 땅에 온지 2년만에 이국 땅에서 순교한 것입니다. 로제타 홀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고 회고했습니다. 10.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죽자 제임스 홀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아들 셔우드 홀과 며느리 로제타를 애타게 보기 원했습니다. 로제타는 만삭이 되자 출산을 위해 어린 아들 셔우드 홀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거기서 남편 제임스 홀이 자라고 섬겼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11. 남편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아들 셔우드를 본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12. 그래서 1897년, 로제타는 아들과 미국에서 낳은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일이 또 발생합니다. 그녀가 조선에 오고 몇 해가 지난 후 딸이 또 조선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13. 이때 로제타는 딸을 남편의 묘 옆에 묻었습니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자 헌신한 로제타에게 남편과 딸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시련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의 고통에도 로제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남은 내 아들 셔우드와 조선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 14.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들은 한국에서 그 후 오랫동안 사역했습니다. 15.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여자의학교 설립(현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을 설립합니다. 16. 그녀는 활발히 사역을 섬기다가 43년간의 한국 선교사역을 마감하고 1935년 귀국하였습니다. 17. 그 후 로제타 홀은 1951년 미국에서 소천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그 재를 서울의 남편과 딸 곁에 묻었습니다. 18. 양화진에는 지금도 로제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조선을 향한 열정이 숨쉬고 있습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19. 이들의 러브 스토리가 한국 교회사가 되었고 이들 가족의 사랑과 헌신 위에 한국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0. 우리가 받은 복음은 이러한 깊은 헌신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과 탐심으로 우리가 받은 복음의 영광 앞에 자꾸 초라해져가는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 이상갑목사.] 윌리엄 제임스 홀: 아내와 함께 의료 활동을 했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평양 전투로 인해 청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다가 티푸스에 걸려 사망 로제타 셔우드 홀 - 의료활동.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에서 활동한 여의사. 기록상으로 1891년에 조선에서 두번째로 결혼한 외국인 부부이다. 첫번째는 언더우드 부부. 외간 남자와 만날 수 없는 조선여성들을 치료하고 박에스더를 추천하여 유학 보냈으며, 맹인 교육을 위해 최초로 한글 점자를 고안했고 맹인학교를 설립했으며 한국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셔우드 홀 - 의료활동. 위의 홀 부부의 아들. 국내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 도입 [셔우드 홀(Hall, Sherwood, 1893-1991)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0년 6월 평양외국인학교 첫 입학생으로 베어드(Baird) 등 4명과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11년 미국 오하이오 주 마운트 허몬(Mount Hermon)학교를 거쳐, 1919년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졸업하고 1922년 메리안과 결혼했다. 1923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홀츠빌 서퍼크 결핵요양소에서 결핵을 전공했다.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26년 4월 19일 부인 메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ey)와 함께 내한하였다. 1926년 7월 해주구세병원(Norton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부임하여, 의창(懿昌)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운산금광(동양연합광업회사) 담당의사로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1928년 10월 27일 해주 왕신리에 폐결핵 퇴치를 위하여 한국 최초로 ‘해주구세요양원’을 설립했다. 결핵요양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셔우드는 “결핵은 다른 나라에서는 20명에 한사람 꼴인데 한국에서는 5사람 중 한사람 비율로 희생자가 난다. 일단 병균이 침투하면 한국인은 병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결핵은 불치의 병으로 <부끄러운 병>이며, 악귀의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이 운명적으로 받는 벌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요양원은 치료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 목적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거의 불치병으로 인식하는 결핵 환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치료에 확신을 심어주어 효과가 있다. 그는 “시범농장을 통하여 환자들은 지루한 회복기 동안에 육체적으로 덜 힘든, 현대적 영농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치료에 도움이 되고, 특히 농민 환자는 퇴원 후 고향으로 돌아가 현대식 농사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시범농장 운영을 통하여 환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식료품을 제공하고, 퇴원 후 경제적 자립 능력 배양과 영농기술 보급 등의 효과가 있었다. 셔우드 홀은 결핵치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실(Seal)” 운동을 계획하고 1932년 12월 3일 남대문을 그린 ‘실’을 한국 최초로 발행했다. 남대문은 한국의 상징이며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城樓)로 나타낸 것이다. 원래 첫 도안(圖案)은 거북선에 대포를 배치하여 한국의 적(敵)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는 그림으로 제작하였으나. 거북선에 패한 일본의 반발이 문제시되어 변경되었다. 그 후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성공을 거두며 계속 발행되었다. 그러나 1940년, 서기로 표기한 연호를 일본 연호로 바꾸라는 압력 때문에 실 발행 9년차 의미로 로 수정되기도 했다. 이것이 셔우드에 의한 마지막 실 발행이었다. 1938년 5월 1일부터 효과적 결핵 예방운동 차원에서 “療養村”이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크리스마스-실 운동은 시편 번역자 피터스 부부도 동참했다. 1939년 피터스 부인은 부회장으로 피터스 목사는 사업부장을 맡았다. 1940년 8월에는 ‘화진포’ 그의 별장에서 영국 신부(캐럴)를 만나고 동해안 지역 사진을 촬영했다는 협의로 간첩 누명을 쓰고 일제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월 또는 천$ 벌금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1941년 11월 한국을 떠나 인도의 변방 마르다(Marda) 연합결핵요양원에서 결핵 퇴치사업을 계속하다가 1963년 은퇴하였다. 캐나다 밴쿠버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가 1991년 4월 5일 98세로 별세했다.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결핵협회는 1993년 11월 10일 셔우드 홀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양화진에 공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캐나다인 셔우드 홀은 1893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라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 퇴치에 헌신할 것을 결심, 토론토의대 졸업 후 역시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여 1926년 함께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1928년에 근대적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 될 때 까지 결핵환자 치료와 실 발행을 계속했으며, 한편으로는 모범농장을 일구어 새 영농기술을 보급하고 의창학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대에 걸쳐 한국인에게 봉사한 공을 찬양해 1984년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에서는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 대한결핵협회, 한국결핵사, 1998.2.28)] [셔우드 홀 부인 메리안 B. 홀 (1896-1991) 메리안 버텀리 홀(Hall, Marian Bottomley)은 1896년 6월 21일 영국 엡워드(Epworth)에서 출생하여 1911년 캐나다로 이민하였다. 온타리오주 아덴 고등학교 4년제 과정을 3년에 마쳐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킹스턴학교(교사양성과정)를 이수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7년 미국 루츠타운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전교에서 가장 규율이 잘 잡힌 반으로 만들었다. 1918년 4월 유니온대학 재학 중 셔우드와 약혼했다. 1920년 9월 필라델피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22년 6월 21일 결혼하여 켈로그 결핵요양소(Kellogg Sanatorium)에서 함께 결핵 실무를 익혔다. 1925년 8월 15일 미국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출발했다. 메리안 부부는 런던을 경유하여 스웨즈 운하, 아테네, 봄베이, 콜롬보, 싱가폴, 홍콩 등 8개월의 긴 여행 끝에 1926년 4월 10일 일본의 코베에 도착하였으며, 1926년 4월 19일 내한하였다. 해주구세병원과 요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결핵 퇴치와 크리스마스실 발행에 앞장섰다. 1928년 5월 7일‘어머니와 어린이를 위한 복지 클럽’을 시작하였으며, 해주를 중심으로 의료 선교 활동을 통하여 절망에 빠져있던 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해주요양원 설립 10주년 때 기고한 선교잡지(Korea Mission Field, 34-7,1938.7)에는 “요양원 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감회 깊게 시작 당시의 그 어려움들을 되돌아본다. 마치 신비한 힘으로 모든 게 이뤄진 것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꿈’이었고 그 꿈에 성실히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성취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은 친구들을 통해 도와 주셨고, 우리의 온갖 난관은 극복되었다. 이제 이곳은 절망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는 장소가 되었다.”-메리안 B. 홀- 1940년 홀 부부는 간첩 협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10월 25일 변론 기록에는“남자 의사들이 거절한 일도 만삭인 몸에 위험을 무릅쓰고 추운 겨울밤 환자를 보러나가 시골에 앓아 누어있는 청년의 생명을 구했다.”고 메리안을 칭찬했다.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을 떠나 인도에서 결핵사업을 계속하였으며 1963년 은퇴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1991년 9월 19일 밴쿠버에서 95세로 별세하여 9월 25일 리치몬드 사우스 암교회에서 장례식이 집례되고,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와 결핵협회장(葬)으로 10월 5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국민일보 1991.10.7일자 참고)묘비에는 Marian Bottomley-Wife of Sherwood Hall 이라 쓰여 있다. 그리고 자녀들의 이름도 쓰여 있다.] [양화진에는 윌리엄 홀 부부, 윌리엄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과 그의 부인, 윌리엄 홀의 딸 에디스 홀(3세에 이질로 사망), 윌리엄 홀의 손자인 프랭크 S. 홀(태어난 지 하루만에 사망) 등 모두 6명의 가족이 묻혀 있으며, 셔우드 홀 박사 공적비가 있다. 에디스 홀 - 위의 홀 부부의 딸로 윌리엄 홀의 유복자이다. 1895년에 태어나 3세에 사망했고, 부모 곁에 묻혔다.] 찰스 르젠드르(Charles LeGendre) 장군 - 프랑스 태생의 미국 군인, 일본 제국의 외교 고문이 되어 일본의 대만 병합을 도와 일본 훈장까지 받았으나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온 후로는 180도 달라져 대한제국을 돕다가 189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이선득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있다. [샤를 기욤 조제프 에밀 르 장드르(프랑스어: Charles Guillaum Joseph Émile Le Gendre, 영어: Charles William Le Gendre, 1830년 8월 26일 ~ 1899년 9월 1일)는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나 미국에 귀화하였다. 1872년부터 1875년까지 일본의 외교 고문으로 있던 중 1890년에 조선 공사였던 김가진의 도움으로 조선에 와서 내무 협판이 되었다. 그는 일본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여 조선의 국가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이선득(李善得)이라는 이름을 썼다.] [찰스 르젠드르(Charles LeGendre) 장군 - 양화진에 묻힌 미국 장군 찰스 르젠드르(Charles LeGendre) 장군은 동 아시아 대격변의 한복판에서 파란만장하게 살다 한국 땅에 묻힌 미국의 외교관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샤를 기욤 조제프 에밀 르 장드르(Charles Guillaume Joseph Emile Le Gendre)이며, 아시아에서는 리산더(李仙得, 李善得, 또는 李讓禮)라는 중국식 이름도 사용하였다. 르젠드르는 미국의 남북 전쟁 참전 용사로 중국 주재 영사(1866 - 1872)를 거쳐 일본 정부의 외교 고문(1872 – 1875)과 한국 정부의 내부협판(내무차관) 겸 황제 고문(1890 – 1899)을 지냈다. 초기 인생 르젠드르는 프랑스 리용 서남부의 작은 도시 울랭에서 1830년 8월 26일 유명한 화가, 조각가이며 미술학교(Ecole de Beaux-Arts) 교수인 장-프랑수아 르 장드르(1796 - 1851)와 아리시 와블(1799 - 1878)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나 당시 전형적인 명문가의 자녀들처럼 고전 교육을 받았다. 르젠드르는 랭스의 왕립 대학에서 군사 교육을 받다가, 최종적으로는 파리 대학을 졸업했다. 우수한 학생이었던 그는 재학 시절에 지질학에 강렬한 흥미를 가졌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저술한 '타이완 기행'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생애에서 여러번 이 지식을 이용하여 광산 채굴을 하거나, 개발 관련 사업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24살이던 1854년에 뉴욕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윌리엄 뮬록(William Mulock)의 딸인 클라라 빅토리아 (Clara Victoria , 17살)와 브뤼셀에서 결혼했다. 르젠드르는 결혼 직후 미국으로 옮겨가 미국 시민이 되었다. 1856년 2월 그들의 외아들 윌리엄 찰스(William Charles)가 뉴 저지주 뉴아크(Newark)에서 태어났다. 남북 전쟁 시절 1861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벌어지자, 변호사로 활동하던 르젠드르는 제51 지원 보병 연대에서 병사 모집을 담당하다가 1861년 10월 29일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그후 노스 캐롤라이나 전투에 참가하였고, 1862년 로아노크 섬 싸움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168 센티미터의 단신이었으나 용맹한 군인이었다. 1862년 3월 14일 뉴 번 싸움에서 중상을 입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르젠드르는 군을 떠나지 않았고, 같은 해 9월 20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1863년에는 제9 군단에 배치되어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863년 3월 14일 대령으로 진급하며 제51 연대장이 되었다. 버지니아 황야 싸움에서는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Grant) 장군 휘하에 있다가, 1864년 5월 6일 르젠드르는 다시 중상을 입었다. 이번에는 얼굴에 총알이 관통하여 왼쪽 눈과 코의 일부를 잃었다. 아나폴리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그 동안에도 남군 최후의 도시 공격을 막기 위한 준비를 도왔다. 그후 뉴욕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제9 군단의 병사 모집을 도왔다. 1864년 10월 4일에 명예 제대 하였으며, 1865년 3월 13일 준장으로 명예 진급 하였다.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영토 야욕 영국은 아편 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9월 초 함대를 보내 타이완 북부의 지롱(基隆)과 서해안 중부의 우치(梧棲)를 점령하려다 모두 실패하였다. 이것이 제국주의 강국의 타이완에 대한 최초의 침략 행위였다. 두 차례에 걸친 아편 전쟁(1차 1839 - 1842, 2차 1856 - 1860)에서 영국에 크게 패배한 중국은 많은이권을 넘겨 주게 되었다. 난징(南京) 조약(1842)으로 상하이, 닝포, 푸저우, 샤먼, 광저우의 5개 항구를 조약항(treaty port)으로 개방한 것이 그 출발이다. 조약항이란 유럽의 강국들이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타이완, 한국 등 아시아 나라들에게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여 외국 무역에 개방하도록 한 항구 도시를 일컫는다. 중국은 1844년에 미국과 왕샤(望厦) 조약, 프랑스와 황푸(黃埔) 조약을 영국과 같은 조건으로 맺었다. 이후 중국은 줄줄이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조약항의 증가되어 1943년 폐지될 때까지 백년 동안 80개가 넘는 조약항이 생겨났다. 왕샤 조약은 마카오 북부의 왕샤에 있는 푸지 선원(普濟 禪院)의 관음당(觀音堂)에서 1844년 7월 3일 초대 주중 미국 공사 케일레브 쿠싱(Caleb Cushing)과 청나라 량광(兩廣) 총독 아이신교로 키옝(愛新覺羅 耆英, 한어음 아이신쥐에루오 치잉)이 조인하고 이어서 미국 의회의 통과와 대통령 존 타일러(John Tyler, 10대)의 비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정식 명칭은 '아메리카 연방과 중화 제국 사이의 평화, 우호, 무역 조약'이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치외법권(미국인에 대한 영사 재판권) 2. 조약항에서의 무역에 고정 관세 3. 조약항에서의 토지 매입, 교회-병원 건축의 권리 4. 중국어 학습의 권리(외국인에 대한 중국어 학습 금지 법의 폐지) 5. 미국의 최혜국 대우 6. 12년 뒤에 조약을 개정할 권리 한마디로 말하면 조약항은 중국 땅이로되 중국의 주권이 거의 배제되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조약의 공식 이름과는 거꾸로 내용이 엄청나게 침략적이고, 적대적이고, 편파적인 국가 폭력이었다. 1854년 7월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에서 화친 조약을 맺은 뒤 지롱에 10일 정도 머물면서 실종된 수병을 수색하고 지롱 근교의 탄광을 조사하였다. 매슈 페리(Matthew Perry) 준장은 귀국하여, 타이완이 미국이 동 아시아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 삼기에 적당하여, 마치 플로리다 반도와 유카탄 반도에 둘러싸인 멕시코 만을 통제하는 쿠바와 같은 존재라고 보고하고 점령할 것을 주장하였다. 타이완 점령의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페리의 보고는 유럽 강국들의 주목을 끌어 타이완에 대한 관심을 단숨에 높여놓았다. 1857년 4월 중국 주재 미국 공사 피터 파커(Peter Parker, 1855 - 1857)는, 1000만 달러에 타이완을 매수하자는 미국인 상인 기드온 나이(Gideon Nye)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부에 여러 차례 강력히 타이완 획득을 촉구하였다. 파커는 1857년 4월 2일 마카오에서 영국의 홍콩 총독 겸 중국 주재 공사 존 바우링(John Bowring), 프랑스 공사 알퐁스 드 부르불롱(Alphonse de Bourboulon)과 모임을 갖고, 미국은 타이완을, 영국은 저장(浙江) 앞바다의 저우산(舟山) 군도를, 프랑스는 한국을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다. 파커는 미국이 행동하기에 앞서 영국이 타이완을 차지하게 될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거부하였다. 이때 신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1857 - 1861, 15대)은 남북 사이의 심각한 분열을 맞은 가운데 파커 대신 온건한 윌리엄 리드(William Reed) 펜실베이니아 대학 역사학 교수를 공사로 임명하였다. 1857년 가을 미국 정부는 아시아에 미국의 보호령을 두자는 모든 모의를 금지하였다. 1858년 6월 제2차 아편 전쟁 중에 톈진(天津) 조약이 맺어지며 아편 수입이 공인되고, 청 정부는 타이완의 지롱, 탄수이(淡水), 안핑(安平), 다거우(打狗, 나중의 가오숑 高雄)를 잇따라 개방하였다. 남북 전쟁(1861 - 1865)의 발발로 미국의 동 아시아 개입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미국 선박들은 그 동안에도 끊임 없이 상업 활동을 위하여 타이완에 왔다. 1861년 말 미국 선박 이스캔데리아는 가오숑에서 쌀을 싣고 샤먼으로 돌아가다가 타이완푸(臺灣府, 현재의 타이난 臺南) 북쪽에서 좌초하였다. 선장 프랭크 루더스(Frank Ruders)는 현지 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18000 달러 어치 화물은 현지인에게 모두 약탈 당하였다. 샤먼 주재 미국 부영사 하트 하이어트(Hart Hyatt)는 중국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1862년 말 미국 선박 러키 스타가 면화 80000 달러 어치를 싣고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가던 중 강풍을 만나 탄수이 가까운 곳에 대피를 요청하였으나 화물을 약탈 당하고 선장 찰스 넬슨(Charles Nelson)과 아내, 그리고 선원들이 납치되어 1주일 동안 억류되었다. 결국 영국 부영사 조지 브론(George Braune)과 프랑스인 세관원 바롱 드 메리탕(Baron de Meritens)이 몸값을 치르고 그들을 구출하였다. 샤먼 주재 영사 시절 1866년 7월 13일 리젠더는 샤먼(厦門, 아모이) 주재 미국 영사에 임명되었다. 7월에 뉴욕을 떠나 리버풀을 거쳐, 유럽, 아시아 대륙을 여행하고 12월에 샤먼에 도착했다. 영사로서 르젠드르는 5개의 조약항 곧 샤먼과 맞은편에 있는 타이완의 지롱, 탄수이, 타이난, 가오숑을 담당했다. 거기서 그는 중국 남부에 흔했던 노예 노동자(쿨리, 苦力)의 불법 거래를 막는 데에 힘을 쏟았다. 1867년 3월 12일 미국의 어선 로버 호가 타이완에서 조난하여 선원들이 타이완 원주민에게 살해되는 이른바 '로버 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공사 앤슨 벌링게임(Anson Burlingame, 1861 - 1867)은 르젠드르를 파견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르젠드르는 푸저우(福州)로 가서 푸지엔-저장 총독 우 탕(吳棠)을 만나 타이완의 현지 당국에게 문제 해결을 지시하도록 설득하였다. 총독은 스스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르젠드르가 타이완으로 가는 것을 허가하고 현지에서 협조하도록 소개장을 써 주었다. 1867년 4월 초 르젠드르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헨리 벨(Henry Bell) 소장을 설득하여 미국 해군 전함 애슈엘럿 호가 타이완으로 가서 미국인 생존자를 수색하도록 하였다. 함대는 4월 18일 조난이 일어났던 타이완푸에 닿았다. 현지 청나라 관원들의 비협조 속에 애슈엘럿 호는 남쪽의 가오숑으로 항해하였다. 4월 24일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해안으로부터 밀림을 뚫고 조사를 한 결과 상륙 작전 능력과 보급품 지원 없이는 안전하게 상륙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함장 퍼비거(Ferbiger) 중령은 수색을 중단하고 그 날 샤먼으로 귀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홍콩 주재 미국 영사 아이작 앨런(Isaac Allen)은 페리와 파커의 주장을 재점화하여, 타이완을 무력이나 매수로 영유할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였다. 앨런은 미국이 동 아시아에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항구나 해군 기지가 없는데, 유럽 강국들은 모두 기지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다른 강국들의 타이완에 대한 야망을 저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벨 제독은 중국 당국의 성가신 허가 없이 자신의 결단으로 미국인 생존자들을 구출하기로 하였다. 1867년 6월 13일 그는 해병대 178명과 대포 5문을 비롯한 중무장으로 원주민 마을을 집중 공격하였으나 수색대가 원주민의 매복에 걸려 참패하였다. 이 일로 벨 제독은 퇴역을 강요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재앙은 르젠드르 장군이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가 된다. 그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다시 타이완으로 가기로 하였다. 리젠더는 타이완 남부에 군대를 파견하도록 총독을 설득하여, 그와 함께 500 명의 청나라 군대가 1867년 7월 25일 타이완으로 원정갔다. 원정대는 또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르젠드르는 직접 원정에 나서기로 하고 벨 제독에게 대포함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그러자 개인 전투함 볼런티어 호를 빌렸다. 르젠드르는 상부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서 9월 4일 타이완에 상륙하였다. 그는 원주민과 그 언어-풍습에 밝은 영국의 윌리엄 피커링(William Pickering)의 도움을 받으며, 타이완 총병 류 밍덩(劉明燈)과 함께 원정대를 지휘하여 타이완 남부의 거친 산악 지대를 뚫고 들어갔다. 그는 마침내 10월 10일 남부 원주민 18부족의 총두목 타우케톡(Tauketok)과 만나, 협박과 회유 끝에 조난한 미국-유럽인 선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약을 구두로 맺었다. 1869년 2월 28일 르젠드르는 다시 타우케톡을 만나 담판하여 조약을 문서로 확인하였다. 이 조약은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국제 조약이 되었다. 청 정부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고, 두 해 전에 이미 많은 병력으로 미국인과 함께 원주민 토벌에 나선 적이 있으므로 스스로 원주민에 대한 관할을 부정한 꼴이 되었다. 르젠드르는 이번 여행에서 북부의 탄수이를 출발하여 곧장 남하하여 타이완푸에 닿았다. 그리고는 타이완 서부의 지리, 지질, 식생, 언어, 풍습 등을 깊이 조사하였다. 그는 표준 한어뿐 아니라 푸지엔과 타이완의 민난어가 유창하고 원주민의 언어들도 이해하였다. 그는 전후로 최소한 8차례 타이완을 방문하여 조사한 결과물로 그림, 사진, 문자 자료를 풍부히 보유하여, 당시에 최고의 '타이완 원주민 지역 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르젠드르는 나중에 메이지 정부의 고문이 되면서 '타이완 기행'을 일본에서 완성하였다. 기행에는 170장의 사진, 일본인 화가 코바야시 에이타쿠(小林 永濯, 1843 - 1890)가 그린 많은 삽화, 자신이 작성한 지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지도들이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침공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1871년 9월 6일 류큐(琉球)의 배가 타이완 해안에서 조난하여 로버 호와 마찬가지로 생존 선원들이 살해되어 66명 가운데 12명만 살아남았다. 1872년 2월 29일 르젠드르는 이전에 맺은 조약을 류큐 선원에게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해 타이완으로 갔으나, 임무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와 중국 주재 미국 공사 프레데릭 로우(Frederick Low, 1869 - 1873)가 의견이 대립되는 가운데 청 정부는 타이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일본 외교 고문 시절 1872년 11월 르젠드르는 샤먼으로부터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에 들렀다. 일본 주재 미국 공사 찰스 딜롱(Charles DeLong, 1869 - 1873)이 외무경(외무대신) 소에지마 타네오미(副島 種臣)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소에지마는 곧바로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청나라와의 협상과 조난 선원의 살해를 트집 잡아 타이완을 침략하는 데 그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었다. 소에지마는 그에게 외교-군사 고문 자리를 제의하고, 장래의 타이완 총독 임명을 약속하였다. 르젠드르는 1872년 12월 19일 샤먼 영사를 사임하면서 이 제의를 수락하였다. 청나라 실정을 잘 아는 리젠더는 청 정부의 관할권 불인정을 핑계로 타이완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다. '고문이 된 그는 파격적인 연봉 12000엔을 지급 받고, 타이완 파병 준비를 하였다.' (이토 키요시 伊藤 潔, '타이완' 臺灣) 딜롱은 1871년에 우호 조약을 체결한 중국과 일본이 동맹으로 발전하여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본이 중국에 공세적인 태세를 취하도록 르젠드르가 공작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이때 미국이 그려 놓은 구도가 1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여 아시아 나라들은 서로 적대하면서, 아시아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1872년 12월 소에지마가 우호 조약에 서명하고 조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리젠더도 수행하였다. 르젠드르의 예상대로 청 정부가 배상 책임을 회피하여 교섭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청 정부가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관할을 부정함으로써 직접 파병할 근거를 획득하였다. 르젠드르는 1874년로 예정된 타이완 파병의 준비를 도왔다. 르젠드르는 딜롱의 지원을 받아 개인 자격으로 이 원정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2명의 미국 군인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1873년 10월에 부임한 딜롱의 후임 공사 존 빙엄(John Bingham, 1873 - 1885)이 일본의 군사 문화에 비판적인 데다, 남북 전쟁에 같이 참가했던 르젠드르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견제하는 바람에 1874년 4월 19일 타이완 파병은 일단 연기되었다.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西鄕 從道)가 지휘하는 3600명의 원정대는 1874년 5월 18일 나가사키를 출항하였다. 그후 리젠더는 타이완으로 가는 길에 중국에 도착했다가,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 조지 수어드(George Seward, 1863 - 1876, 중국 주재 공사 1876 - 1880, 전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의 조카)에게 체포되었으나 워싱턴 국무부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원정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는 1874년 타이완 파병을 준비하면서 이후 일본이 제국으로 나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방략을 아울러 건의하였다. "북쪽은 사할린부터 남쪽은 타이완에 이르는 일련의 열도를 영유하여, 중국 대륙을 반달꼴로 포위하고, 나아가서 조선과 만주에 발판을 마련하지 않으면,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동 아시아의 시국을 제어할 수 없다." (고토 신페이 정전 後藤新平正傳) 이는 일본 정부에 커다란 자극을 주어 타이완 영유의 야심을 구현하는 데 다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일본의 대륙 정책은 거의 리젠더의 이 건의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이토 키요시 伊藤 潔, '타이완' 臺灣) 타이완 정벌이 일본 뜻대로 이루어진 뒤, 르젠드르는 1875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욱일중광 훈장을 받았다.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 해 말에 고문을 사임하였다. 르젠드르는 1890년까지 일본에 머무르며 외무경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의 개인 고문을 맡았다. 한국 정부 고문 시절 1890년 3월 르젠드르는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와서 황제의 고문이 되었다. 당시 정부는 각 부문에 고문을 초빙하여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근대화와 대외 교섭을 처리하는 동시에, 그들의 모국을 우방으로 삼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르젠드르와 묄렌도르프(Paul-Georg von Möllendorff 穆麟德), 데니(Owen Nickerson Denny 德尼),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柏卓安),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idgeby Greathouse 具禮, 양화진에 묻힘),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山島, 벤자민 프랭클린의 외손자)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르젠드르는 정부에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여 예산-회계 제도 실시, 조세 제도 개혁, 노비제 폐지, 수출 상품 개발, 지폐 발행을 행할 것을 제안하는 등의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는 또 개인적으로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각처에 광산 채굴권을 확보하고 다수의 공장 경영권을 장악하는 영악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또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외교 고문 시절의 인맥을 활용하여 김옥균, 박영효 등 일본 망명자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일본 내부 사정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르젠드르 장군은 1899년 9월 1일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르젠드르의 저술에는 '중국을 다루는 방법', '진보적인 일본' 등과 정보 보고서인 '타이완 기행' 등이 있다. 역사적 배경 미국은 1776년에 독립한 뒤 36년 만에 벌어진 미국-영국 전쟁(1812 - 1815)에서 이기고, 또 46년이 지나서 영국의 간섭으로 일어난 남북 전쟁(1861 - 1865)을 잘 마무리하였다. 아메리카는 드디어 유럽의 간섭을 뿌리치고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급성장(연 100% 이상)하는 가운데, 실질적으로 대국으로 탄생하는 때였다. 또 1850년에 캘리포니아를 영유하여 태평양에 닿아 변경(미개척지)이 없어졌고, 황금 쇄도(Gold Rush, 1848 - 1855)가 끝나 침체에 빠진 캘리포니아 경제에 아시아 시장이 필요해졌다.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58킬로미터 폭의 베링해 건너 아시아가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이 되었다. 태평양 국가가 된 미국은 바다 너머로 군사력을 투사하여 아시아에서 상업적 이익 추구에 나섰다. 러시아는 17세기 중반 흑룡강(黑龍江,아무르강)까지 진출한 이후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일대를 청나라로부터 획득하였다. 그 해 블라디보스토크('동쪽 정복'의 뜻) 건설을 시작하였다. 1872년에는 아무르강의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던 해군 기지를 이곳으로 옮겨 태평양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강옹건(康雍乾) 성세(1661 - 1799) 138년이 지나자 세계 최강의 제국에서 무력한 '잠 자는 사자'로 전락하였다. 그 무력함이 온 천하에 자드락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더러운' 아편 전쟁(1840 - 1842)이었다. 뒤이은 태평천국의 난(1850 - 1864)은 4000년 이어온 왕조 체제를 사실상 쓰러트린 마지막 일격이었다. '중국 역사의 공식'대로라면 청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서 질서를 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청 정부는 스스로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잔명을 50년 가까이 간수하였다. 사자는 하이에나와 늑대들의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일본은 1192년에 시작되어 700년 가까이 이어온 막부(幕府) 체제가 무너져내리고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가 이루어졌다(명치 유신 明治 維新, 1868). 이에 앞서 1853년에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우라가(浦賀) 만에 정박하였다. 그는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밀라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3대) 대통령의 국서를 전달했으며, 이듬해 함대를 끌고 다시 출동해 에도(江戶) 만에 정박하고 일본과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였다. 미국의 위세에 눌려 우왕좌왕하면서 조약을 맺은 막부 정부의 허약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고 이는 막부 몰락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서양 열강의 몰려옴과 더불어 왕조 쇠퇴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1800년대에 들어 와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한 동학교는 민중의 내우외환의 두려움 속에서 폭발적 성장을 이루었다. 1866년의 한국-프랑스 전투(병인양요), 1871년의 한국-미국 전투(신미양요), 그리고 일본과의 운양(雲揚)호 전투 등은 몰락의 박차였다. 르젠드르의 유산 르젠드르는 미국이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펴고 아시아 정세가 어수선한 가운데 아시아로 몰려 들던 야심만만한 미국인 모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좋은 면으로는 아시아 근대화에 약간 기여한 자들이고, 나쁜 면으로는 아시아 근대에 크나큰 불행의 씨앗을 뿌린 자들이었다. 1871년 르젠드르가 동 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은 일을 벌였다. 그가 류큐 선원 살해 사건(무단사 사건)의 해결책으로 일본 정부에 타이완 파병을 제안하고,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고문으로 초빙한 것이다. 아무런 프로그램도 없이 갑자기 출범하여 분열되고 허둥대던 일본 명치 정부에 국가 전략의 바탕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아기들의 묘비 앞에서 기자 : 우성규 미션탐사부 차장 더미션 기사입력 2022.12.22 07:34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아기들의 묘비가 모여 있다. 묘원의 남서쪽 가장 낮은 자리, 연희전문을 설립한 언더우드 가족과 세브란스병원을 세운 에비슨 가족 묘역 인근이다. 무릎 높이의 자그마한 비석엔 ‘Infant’란 표기가 대부분이다. 정식 이름으로 불리기 전 태어나자마자 죽은 경우가 많다. 부모인 선교사를 따라 한국에 와서 태어났지만 열악한 위생과 건강 상태로 곧바로 천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던 아이들, 순수한 영혼들이 묻힌 곳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1890년 존 헤론 의료 선교사가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내한 5년 만에 이질로 사망하면서 조성됐다. 이후엔 선교사의 아기들이 잇따라 묘원에 이름을 올린다. 1893년엔 RA 하디 선교사의 딸 마리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같은 해엔 WD 레이놀즈 선교사의 한 살 된 아들이, 1894년엔 윌리엄 M 베어드 선교사의 한 살 된 딸이, 역시 같은 해 CC 빈튼 선교사의 아들이 한 살 나이에 숨졌다. 선교 초창기인 1900년 말까지 양화진에 묻힌 17명 가운데 10명이 4세 이하 영유아였다. 선교사들에게 자녀들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부모는 선교사로서 신앙적 결단에 의해 머나먼 조선 땅에 자의로 왔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넘어 목숨까지 잃어야 했는가.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 선교사로 내한해 1903년 선교사연합사경회 회심 체험으로 원산 대부흥의 주역이 된 RA 하디 선교사는 1909년 여섯 번째 딸 마거릿을 잃고 시신을 양화진에 안장하며 앞서 1893년 죽은 언니 마리의 이름도 새겨 넣었다. “한 생명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기록도 남겼다. 충북 선교의 개척자인 FS 밀러 선교사는 두 아들과 아내를 양화진에 묻었다. 1898년 첫아들이 출생 8개월 만에 사망했고, 1902년엔 둘째 아들이 역시 출생 하루 만에 숨을 거뒀다. 첫째에 이어 둘째 아들마저 잃고 충격을 받은 부인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6월 숨졌다.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시 밀러 선교사를 두고 조선인들이 수군거렸다. ‘예수가 누구라고 조선까지 와서 이 고생인가.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눈빛에 밀러 선교사는 1905년 자신이 작사한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노랫말로 답했다. 프랑스의 근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작곡한 위풍당당 행진곡 ‘마을의 점쟁이’ 곡조에 가사를 붙인 찬양이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 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 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부모는 앞서간 자녀를 자신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이태원 참사로 생때같은 자녀를 앞세우게 된 부모들이 국회를 찾아가 눈물과 울분을 터뜨리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창원시의원은 유족들을 향해 ‘시체 팔이’를 주장하며 2차 가해를 진행했고, 여야는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참여를 정치적 조건들로 연계하며 한때 진상 규명을 늦추기도 했다. 유족 대표들이 나서 “예산안 처리와 이상민 해임건의안이 이태원 국정조사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절규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자녀를 가슴에 묻은 유족들조차 보듬지 못하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백해무익한 싸움일 뿐이다. 하루빨리 유족들의 뜻대로 참사에 대한 명확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책이 마련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우성규 미션탐사부 차장] * 14:17~14:18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46 번지에 있는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으로 이동 * 14:18~14:19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을 사진촬영 * 14:19~14:20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46 번지에 있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로 이동 * 14:20~14:21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를 사진촬영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법적 소유주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서 2005년 7월 10일에 창립되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한국 기독교의 두 성지인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 사유화되는 것을 막고, 한국 기독교 100년의 신앙과 정신을 잇고, 한국 기독교 200년을 향한 바른 길닦이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창립되었다. 또한 100주년기념교회는 여러 교단과 기관의 연합체인 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창립되었기에 특정한 교단에 가입할 수 없는 연합교회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독립교회이어야 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 14:21~14:22 서울 마포구 토정로 2 번지에 있는 양화진역사공원으로 이동 * 14:22~14:23 양화진역사공원을 사진촬영 [양화진(楊花津) :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지역의 한강 북안에 있었던 나루터. 양화도(楊花渡)라고도 하였는데,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예전에 서울 근처의 중요한 나루가 있던, 다섯 군데의 강가 마을. 한강, 용산, 마포, 현호(玄湖), 서강(西江)을 이른다)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이 지역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으며, 한말 역사의 변천과 함께 많은 흔적을 남겼던 곳 중의 하나였다. 즉, 야소교도(耶蘇敎徒)가 박해를 당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고,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관할 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속하였으며, 서울에 편입되면서 서대문구에 속하였다. 1944년 서대문구에서 분할하여 마포구가 신설될 때 마포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과거 교통 · 경제 · 군사상 중요한 기능을 차지하였던 양화진 지역은 현재 양화대교가 가설되고 강변도로와 지하철 2호선이 설치되어 있어 여전히 교통상 중요 지역의 하나이다. 특히, 김포공항 · 강화 · 인천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상에 있어 과거와는 다른 형태이나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 14:23~14:25 서울 마포구 토정로 4 번지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회관으로 이동 ['꾸르실료(Cursillo)'는 스페인어로서, ‘과정·코스(course)’를 뜻하는 ‘Curso’와 ‘짧다(short)’는 의미의 접미사 ‘-illo’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번역하면 ‘단기과정(a short course)’이라는 뜻인데, ‘짧은 시간에 갖는 회심의 여정’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꾸르실료’라고 할 때에는 꾸르실료 3박4일의 프로그램을 이야기하지만, ‘꾸르실료운동’이라고 할 때에는 꾸르실료 이전, 3박 4일의 꾸르실료, 꾸르실료 이후를 모두 포함한다. ‘꾸르실료’의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꾸르실료운동’이다. 꾸르실료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꾸르실료운동이 ‘환경(세상)의 복음화’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목적을 가진 교회운동이기 때문이다. 꾸르실료운동은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방법에 따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의 복음적 삶을 통해 각자가 속한 환경을 복음화하게 한다.] [꾸르실료운동의 역사 꾸르실료운동 태동기의 현실 스페인은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 거룩한 성인 성녀들이 태어난 가톨릭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부터 말까지 있었던 3번의 내전으로 혼란과 무질서에 쌓여 있었다.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페인이 직면한 문제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풀어내려는 젊은이들의 그룹이 나타났다. 그들은 무질서 안에서 발생한 죄로 인해 비그리스도적인 환경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사회적 모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비그리스도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스도화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고 새롭게 쇄신해 나가자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기 위해 스페인의 주보성인인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대대적인 순례를 시행하기로 했으나 또다시 발생한 내전으로 중단되었다. 1939년 내전이 끝난 후, 스페인 가톨릭 청년연합회는 “10만 명의 젊은이들을 산티아고로!”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성지순례를 준비하며, 순례자들을 이끌고 갈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 교육이 꾸르실료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모든 교구에서 ‘상급 지도자 순례를 위한 꾸르실료’를 실시했고, 각 교구의 모든 성당에서 ‘순례 지도자를 위한 꾸르실료’가 실시되었다. 마요르카 교구는 ‘상급 지도자 순례를 위한 꾸르실료’를 실시한 첫 번째 교구였다. 꾸르실료운동의 시작 1948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의 성지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에르바스 주교와 에드와르도 보닌 등은 성지순례를 위한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이었던 꾸르실료를 교회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실시했던 모든 꾸르실료를 평가하고, 중요한 요소들을 정리하여 마침내 1949년 1월 7일, 마요르카의 성 오노라또 수도원에서 세계 제1차 꾸르실료를 실시했다. 꾸르실료운동은 1950년대 초반에 남미로, 1957년에 미국으로, 1960년대 초반에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는 미국을 통해 꾸르실료운동을 받아들였다. 초창기의 모습과는 달리, 교계제도 내의 성직자 주도적 성격이 강했던 꾸르실료운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년~1965년)를 통해 본래의 모습인 평신도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게 되었고, 현재는 평신도와 성직자가 협력하는 신심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꾸르실료운동은 처음에는 남성 청년만을 대상으로 했다가, 차츰 장년 남성과 여성들에게도 실시하였다. 최초의 여성 꾸르실료는 1953년 콜롬비아에서 개최되었다. 전 세계로의 확산과 교황청의 인준 전 세계로 퍼져나간 꾸르실료운동은 1970년에 ‘크리스천 생활의 꾸르실료 라틴아메리카 그룹(구:OLCC, 현: GLCC)’이 설립된 이후 국제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1980년에 꾸르실료운동의 세계기구(OMCC: Organismo Mundial de Cursillos de Cristiandad)가 설립되었다. 1989년에는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아시아·태평양 그룹(APG)이 설립되었다. 1963년,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꾸르실료운동을 교회 내 신심운동으로 인정하면서 꾸르실료운동의 주보성인으로 성 바오로 사도를 정해주셨다. 또한 1966년에는 로마에서 개최된 제1차 꾸르실료 세계대회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 교황은 여러분을 믿습니다.” 라는 말씀을 남겨주셨다. 꾸르실료운동은 교황님에 의해 사목적으로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실시하는 평신도운동으로 인정받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명백히 인준을 받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04년, 교황청 평신도평의회는 OMCC를 “그리스도교 꾸르실료 체험을 조정하고 촉진하며 전파하는 사적 법인 조직”으로 인준하는 교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꾸르실료운동은 사목적으로뿐만 아니라 교회법적으로도 인정받는 평신도운동이 되었다. 2014년 12월, 교황청 평신도평의회는 OMCC의 정관을 인준했음을 확인하였다. 현재 전 세계 60여개 국가에서 꾸르실료운동을 실시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이 OMCC 회장국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4년 7월부터 1998년 5월까지 OMCC 회장국이었다.] * 14:25~14:30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회관을 사진촬영 * 14:30~14:36 한국순교 성인시성기념 교육관을 거쳐서 서울 마포구 토정로 6 번지에 있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이동 * 14:36~15:00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을 탐방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의 신앙과 얼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개관한 박물관이다. 절두산 순교성지 안에 있는 곳으로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1967년 10월 순례 성당과 박물관을 포함하여 절두산순교기념관을 개관하였고, 2008년 8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와 근현대사의 관련 사료와 순교자 유품 등의 유물 5000여 점을 전시를 통해 공개하고 있으며, 지하의 성인 유해실에는 순교 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건립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고 내부를 재단장한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은 2022년 [서울특별시 건축상]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용시간 : 9:30~17:00 휴무일 : 월요일 운영 요일 : 화~일 모든 단체(10명 이상)는 반드시 방문 2주전에 예약해야 함 이용요금 천주교단체: 자율적인 봉헌금 기타 단체: 국내외 1,000원 ※국내단체 중 2주 전에 예약한 단체는 관람료를 면제] [절두산 성지와 순교자 글 : 김창환 1. 양화진은 어떤 곳이었나 양화진은 한강도, 노량도, 삼랑도와 함께 한강의 주요 나루로서 이곳을 건너면 양천-부평을 거쳐 인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양천-김포를 경유하여 강화로 통하는 길이 이어진다. 특히 양화진은 서울에서 강화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 피난로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조선 시대 내내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조선 정부는 초기부터 나루 관리를 담당하는 도승을 두고 진선을 배치하여 나루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만전을 기하려 하였다. ▶통행의 길목 한강의 5대 나루로서 정비된 양화진은 단지 강을 건네주는 나루였을 뿐 아니라 루였을타고 강화, 배천 등지로 갈 수 있는 교통의 기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중종 때의 사례를 보면, 양화진에서는 배 한 척에 행인 1백여 명이 승선하고 나루를 건너기도 하였다. 황해도 지방으로 가려는 일부 사람들은 걸어서 가는 불편을 피하려고 양화진에서 루였을타고 떠나기도 하였고, 황해도 쪽에서 서울로 진입하려는 사람들도 배편으로 거슬러 와서 이곳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조선 후기 간선 도로 제9로의 노선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노선 상선에 일찍부터 양천, 김포, 강화, 부평, 인천 고양, 양주, 한양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발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의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분주하게 오갔다. 더구나 이곳은 결절지(結節地)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대륙에서 남으로 진출하고자 하면 압록강, 대동강을 건너 개성을 지나 장단, 파주였을거쳐 일이 방면, 또에 벽제 방면으로 나누어져 이곳에 이 북에서몽고의 침입이 그러했고 후금의 침입이 그러했다. 한편 남에서도 북으로 진출하고자 하면 부산, 목포 쪽에서 각기 대구, 전주를 지나 대전쪽으로 향하는 경우에는 천안, 수원을 지나 이곳을 통해 북진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니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러하였다. 이렇듯 양화진은 통행의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검문소이며 운송 기지 양화진은 검문소로서도 그 역할이 막중하였다. 특히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변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위정자들은 반역자나 범죄자 등 위험 인물을 단속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는데, 나루를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는 이런 우범자들도 끼여 있었다.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그 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루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화진 인근에는 그러한 운송선을 점검하는 점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진입하려는 배들은 행주 염창항 부근에 있던 험한 여울 때문에도 양화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염창항 부근에는 19세기에 들어 갈대가 우거지고 모래가 쌓여 큰 배가 잘 다니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양화진의 책임자는 그들 선박을 안내할 의무도 있었다. ▶뱃놀이의 명소 양화진은 한강의 여러 나루 중에서도 그 주변 경관이 특히 빼어나 뱃놀이의 명소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산악 지대에서 굽이굽이 흘러 온 한강은 송파진, 두모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물살이 거칠었지만 용산, 마포를 지나면 유속이 완만할 뿐 아니라 수심도 깊지 않아 강물이 맑고 깨끗해서 뱃놀이나 고기잡이를 하기에 좋았다. 더욱이 북쪽 언덕에 있는 잠두봉의 소나무와 남쪽 나루터 옆에 우뚝한 선유봉은 서로 마주보며 절경을 이루고 있어서 숱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인근 망원동에는 세종 7년 효령대군이 별장을 마련하고 정자를 지어 풍류를 즐겼고, 성종 때는 월산대군이 자주 여기에 머물면서 문신들과 시회를 열기도 했다. ▶처형·제사·진휼 하던 곳 양화진은 때때로 특별한 장소로도 활용되어 처형장 또는 제향의 장소, 흉년 때 백성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왕조의 위정자들은 죄인의 잘못을 널리 알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할 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을 처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장터가 처형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는데, 칠패 난전이 있던 남대문 밖 염천교, 경강상인의 근거지였던 용산의 새남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장날에 사람들이 잔뜩 모인 가운데 죄인의 목을 잘라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양화진 역시 그러한 의미에서 처형장이 되었다. 나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며 배를 기다리느라고 머무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일파가 크게 숙청되었는데, 그 우두머리 윤임을 양화진에서 효수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영조 때는 금주법을 어긴 죄인이 노량진 나루터에서 효수된 바 있다. 근대에 이르러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일본, 중국 등지로 망명하다가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를 양화진에서 다시 효수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앞서 병인박해 때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잠두봉 아래에서 처형되는 바람에 지명까지 절두산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병선의 훈련장 양화진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곳이 병선의 훈련장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해양을 어떻게 방어할지에 대해 고심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서 조운을 못하게 되자 국가 재정이 위태로워졌을 뿐 아니라 민심이 흉흉해지고 정세가 몹시 불안해지는 바람에 결국 고려 왕조가 쇠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 정권을 잡은 조선 왕조로서는 왜구를 조속하게 진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수군을 정비새로 병선을 증강시키는 데 힘썼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태종, 세종, 문종에 그대로 이어져 일정하게 수군이 정비되고, 상당수의 병선이 건조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의 수군은 5만여 명에 이르렀고, 병선은 8백여 척이나 되었다. ▶군사 진영이 되다 사람들이 오가는 통행의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나루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차츰 군사 기지로서 주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30년(1597년) 9월에 대사성 김우옹은 한양은 넓고 커서 방어하기가 곤란하므로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여러 나루를 방어의 거점으로 해서 일본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조선에 다시 침입한 왜군이 전투에서 패하여 물러나는 바람에 이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2. 양화진 개시장(開市場)으로 주목받다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뒤 1876년 2월, 조선은 일본과 병자수호조약, 흔히 강화도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하였다. 개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전통 사회 전반에 여러 가지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그 이전과는 달리 외국인들 주로 상인이나 선교사들이 국내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양화진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던 곳이었다. 양화진은 이미 병인박해(1866년) 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었고,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때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서 개항 이후에도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양화진은 인천에서 배로 서울에 들어오는 경인 수운의 종점으로서, 인천의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개시장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인천으로부터 100리가 되는 지역 안에 서울 도성이 포함되므로 일본은 자기 나라 상인들이 도성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세력을 서울까지 뻗치기 위해 도성의 초입에 있는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설치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10월, 톈진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에도 제4조에 한성과 양화진에서 개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청나라와 맺은 조약에서 양화진을 개시할 수 있다고 규정한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맺은 조약문에도 “한양의 경성과 양화진 또는 그 부근의 편리한 다른 장소”를 개시장으로 개방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영국·독일(1883년)·이탈리아·러시아(1884년)·프랑스(1886년)·오스트리아(1892년)·벨기에(1901년)·덴마크(1902년)에 이르기까지 조약 제4조에는 개시장의 하나로 반드시 양화진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일본은 양화진보다 마포 쪽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외교 통상을 담당하고 있던 묄렌도르프의 지적을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일본이 조사한 결과 마포가 양화진보다 개시장으로 더 나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마포는 거주지를 찾기가 다소 어려울 뿐, 포구에 크고 작은 배들이 많고 도로도 양화진보다 넓으며 번창한 시가를 이루고 있었다. 개시장으로 양화진을 포기할 생각을 하자 일본은 개시장의 대상지로 마포와 더불어 용산을 떠올렸으며, 즉시 이 두 지역에 대한 조사와 측량을 진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양화진·마포·용산 가운데 개시장을 설치하는 문제를 주한 외교 사절들과 협의하였다. 1884년 6월 4일 일본·미국·영국·청나라 대표들이 조선 정부의 대표와 함께 양화진·마포·용산을 직접 답사한 결과 용산을 개시장으로 결정하였고, 정부에서도 10월 6일 그렇게 확정지었다. 이로써 양화진에 개시장을 설치하는 문제는 일단락되었는데, 용산이 양화진보다 도성에 가까워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상업 활동을 하는 데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일은 조선에서 개시장을 설치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열강을 내세워 그들의 주장을 관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외국과 체결된 조약에서 관행적으로 “한양의 경성과 양화진 또는 그 부근의 편리한 다른 장소”를 개시장으로 개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곤 하였다. 3. 양화나루 잠두봉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서울 楊花나루와 蠶頭峰 遺蹟)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에 있는 사적 제399호로 지정된 양화나루와 잠두봉 일원을 말한다. 한강의 이 지역의 교량으로는 서북쪽에 길이가 약 1.2km인 양화대교, 동남쪽에 역시 약 1.2km 짜리 당산철교가 서로 약 400m 간격으로 놓여있다. 양화나루 또는 양화진(楊花津)은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잠두봉 절두산 천주교 성지(切頭山天主敎聖地) 또는 잠두봉(蠶頭峰)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에 있는 천주교 순교 사적지이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 곳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楊花津)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양화나루 옆의 봉우리인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여 1만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다.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4. 신자들을 양화진에서 처형하다 (절두산) 병인양요로 박해가 심해졌던 1866년 10월 23일(음력 9월 15일)부터는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니라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10월 23일에는 이의송(여정, 프란치스코)·이붕익(천조, 베드로)·이의송의 처 김이쁜(마리아)·감한여(베드로)·최경원(야고보), 10월 25일(음력 9월 17일)에는 김중은(베드로)과 박영래, 11월 11일(음력 10월 5일)에는 김진구(재구, 순칠, 안드레아)·최수(서방, 베드로)·김인길(요셉)·김진(베드로), 11월 16일(음력 10월 10일)에는 강명흠(베드로)·황기원(안드레아)·이기주(바오로)·김진의 처 김큰아기(마리아), 11월 20일(음력 10월 14일)에는 이용래(아우구스티노)·원후정·박성운(바오로), 11월 24일(음력 10월 18일)에는 성연순(전순)·원윤철(사도 요한 또는 베드로)이 각각 절두산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박내호(사도 요한)와 유 바오로(또는 마오로)도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였고, 1867년 음력 8월 2일에는 강 요한과 조 타대오가 이름을 모르는 5명과 함께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절두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던 동안에는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신자들의 처형이 행해지지 않았다. 당시 참수를 받은 신자들은 모두 절두산에서 처형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1866년 10월 23일부터 신자들의 처형지를 갑자기 절두산으로 옮긴 것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맞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도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도왔고,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최선일·최인서· 심순녀 등 3명의 신자들이 물길 안내인으로 고용되어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 오는 것을 도왔다. 그뿐 아니라 장치선, 송운오, 이성의, 이성집, 박복여, 김계소 등의 신자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몰래 프랑스 함대로 찾아가 천주교 박해 상황과 조선의 군사들이 전등사로 대거 집결한다는 군사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하였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해 올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이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기면서 포고한 글에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절두산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일은 병인박해 기간 내내 계속되지 않았다. 1867년 음력 8월 2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절두산에서 참수당한 신자들의 예를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아울러 1868년 윤 4월 7(음력)일부터는 다시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병인양요로 박해가 심해지다 이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10월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감영이나 진영이 있는 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워 각처의 교우촌을 약탈하거나 유린하였다. 이처럼 박해가 확대된 데에는 서양 선박이 조선에 들어온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첫번째 사건은 1866년 4월과 8월에 유대계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려다가 좌절된 일이었다. 특히 오페르트는 두 번째로 들어왔을 때 아산만 상륙이 좌절되자 강화도까지 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 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이 있었고, 9월 2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감사 박규수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불타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9월 12일자로 예문관 제학 신석희가 지은 <병인 척사 윤음>을 조야에 반포하였다. 세 번째 사건은 바로 프랑스 함대가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범한 ‘병인양요’였다. 이 중에서도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직접 조선 해안을 위협하고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사건으로, 위정자에게 서양 세력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에 앞서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는 그곳에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조선에서 선교사가 학살된 소식을 전하여 보복을 결심하도록 하였다. 로즈는 조선에 원정하기 위해 9월 18일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최인서·심순여 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삼아 세 척의 군함으로 체푸를 출발하였으며, 9월 26일에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갔다가 체푸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병인양요인데, 이때에는 조선의 상황을 정찰하려고 돌아본 것이었다. 제2차 병인양요는 10월 11일 로즈가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10월 14일에 강화도 갑곶진을 거쳐 이튿날 강화읍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에 있던 은괴와 많은 서적·물품들을 빼앗아갔으며, 로즈는 선교사를 처벌한 사람들을 문책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10월 26일과 11월 9일에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벌인 싸움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11월 21일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더 극심해졌다. 조정에서는 우선 11월 21일에 천주교 신자들을 남김없이 찾아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앞으로는 천주교 신자를 잡으면 먼저 처형한 후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의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6. 절두산 순교자 약전 기록으로 확인되는 절두산 처형자 29명 가운데 5명은 이름조차 밝혀져 있지 않고, 최경원과 박영래는 이름만 겨우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이는 모두 22명이다. 이 22명 가운데 최수·김인길·김진·원후정·성연순은 심문 과정에서 배교하였다. 즉, 최수는 1856년에 천주교를 학습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배교하였다고 진술하였고, 김인길은 1865년 음력 12월에 세례를 받은 이래 계속 학습하다가 1866년 음력 2월 병인박해 때 체포될 것을 겁내 배교하였다고 밝혔으며, 김진도 천주교를 배운 지 3년이 못되어 배교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원후정도 천주교를 식충에 비유하여 배교하였으며, 성연순도 천주교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익숙하게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책을 보지도 않았으며, 입으로 강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19명은 용덕을 발휘하여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였다. 1). 김한여 베드로: 김한여는 서울 양사동(낙산)에서 살았고, 비단짜는 일로 유명하여 궁궐에 드나들며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기해박해(1839) 때 체포된 그는,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된 후 오랫동안 신앙과 멀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신앙을 되찾으려는 생각이 있었고, 그 결과 회개하고 주교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았다. 이후 김한여는 사람들을 가르쳐 입교시키거나, 자신의 집에 공소를 예비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발생했고, 김한여도 1866년 9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신문 중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자백했으며, 그로 인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사형 집행을 위해 양화진으로 끌려갔는데, 가는 도중 목이 말라 술 한 잔을 청하였다. 이에 호송하던 포교가 “죽으면 다시는 술을 못 먹겠다.”고 하자, “천당에 가서 천일주를 먹을 것이다.”라며 기쁜 낯으로 형장으로 가, 1866년 9월 15일 최경원(야고보)와 함께 대략 60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2). 이의송 프란치스코: 이의송(혹 이여정)은 황해도 신천의 양반으로, 여정은 그의 자(字)이다. 그는 의안대군(태조의 8자)의 후손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신천에서 종기 의원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사망하면서 몇 년 후 과부 김 마리아를 후처로 얻었고, 이후 배천[白川]으로 이사하였다가 1857년에 다시 서울로 옮겨 차동에 거주하였다. 상경한 지 2년 후인 1859년, 이의송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을 만나 천주교를 배우게 되었고, 1862년에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후 이의송은 책자와 묵주, 십자패 등을 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자주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신자들이 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특히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와 함께 황해도 지역을 순회하며 12개 이상의 고을에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얼마 동안 형의 집에서 살았던 이의송은, 병인박해가 심해지면서 1866년 9월 8일 가족을 데리고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사돈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형을 신문하여 이의송의 거처를 알아냈고, 결국 이의송은 부인 김 마리아, 아들 이붕익(李鵬翼, 즉 이천조 베드로)과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었다. 우포도청으로 끌려온 이의송은 신문 중에 ‘오랫동안 천주교를 힘써 공부했기 때문에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아내와 아들에게도 ‘정신을 수습하여 실수하지 말라’며 여러 번 당부하였다. 그 결과 이의송은 그의 처자와 함께 1866년 9월 16일 양화진에서 46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3). 김중은: 서울 낙산 근처에서 살며 상의원 소속의 비단을 짜던 장인인 능라장의 우두머리로 생활한 김중은은 18세 때 부친에게 배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하고 풀려났으나 1863년 음력 4월부터 다시 교회로 돌아와 베르뇌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으나 이번에는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교우들을 고발하지 않았으며, 비록 매를 맞아 죽더라도 절대로 배교할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6년 음력 9월 17일 효수형을 받아 5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4). 김진구: 서울 성 안쪽의 남대문 앞에 살며 선혜청 사령을 지낸 김진구는 1846년 음력 9월에 훈장 정의배의 주선으로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교리를 배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49년 음력 3월에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베르뇌 주교가 머물고 있는 홍봉주 집에서 매년 한 차례 고해성사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자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으며, 이미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외에는 고발할 선교사가 없다고 진술하였고, 천주교는 여러 해 동안 힘써 공부해 왔기 때문에 배교할 수 없으니 속히 죽기를 원할 뿐이라고 대답한 뒤 1866년 음력 10월 5일 효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5). 김큰아기: 김진의 처인 김큰아기는 평양에 사는 유성률 집에서 천주교를 배우다가 1863년에 남편을 따라 상경하여 청석동에서 살며 천주교를 학습하여 1864년 음력 9월 최형 집에서 베르뇌 주교에게 마리아라는 세레명으로 세례를 받은 뒤 계속 힘써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김진과 함께 안주로 내려갔다가 남편이 붙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자수하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는 자신이 구하는 것이 없고, 또한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함께 죽임을 당해 한결같이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천당에 가고 싶으며,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진술한 뒤 1866년 음력 10월 11일 효수형을 받아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6). 강명흠: 서천 황석두 집에서 서양 의학서를 빌려다 본 것을 계기로 하여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강명흠은 뒤에 신창현 북면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즉, 1862년 12월 이덕경의 지도로 교리를 배워 다블뤼 주교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덕경의 주선으로 서양 신부의 복사 일을 맡아 보면서 매년 은 10냥을 받았고, 1865년 봄에는 이덕경의 집에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칼레 신부를 만나기도 하였다. 병인박해로 1866년 2월에 붙잡혀 홍주와 공주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배교하였으나 두 번째 심문을 받을 때는 자신이 세례를 받은 사실과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한 사실 등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며, 더 이상 천주교를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1866년 음력 10월 11일 효수형을 받아 5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7). 이기주 바오로: 이기주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862년에 조학영(趙學英)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1851년경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에게 천주교를 배운 뒤 대세(代洗)와 세례명을 받았으며, 얼마 뒤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이기주는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1866년 10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신문 중에 “15년 동안 믿어왔기 때문에, 죽더라도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1866년 10월 10일 강명흠(姜命欽, 베드로) ․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등과 함께 28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8). 황기원: 황석두의 조카인 황기원은 20세 후에 서천 산막동에 있는 황석두 집에서 교리를 배워 서울 남문 안 홍봉주 집에 머물고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집에 머물고 있는 페롱 신부의 복사 일을 하였으며, 다블뤼 주교와 프티니콜라·죠안노·랑드르 등 여러 신부들을 두루 만나보았다. 1866년 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페롱 신부를 피신시킨 뒤 가족들을 데리고 일을 마무리하다가 체포되어 홍주를 거쳐 공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부친도 붙잡혀 왔다. 그가 배교하면 부친과 함께 석방하겠다는 관장의 말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말았다. 그는 배교하고 풀려난 것을 날마다 절절하게 뉘우치면서 다시 체포되면 남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하곤 하다가 1866년 음력 10월에 다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처음에는 배교한 뒤 다시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으나 두 번째 심문 때는 그가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자백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6년 음력 10월 10일 효수형을 받아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9).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이용래는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황석두(黃錫斗, 루카)의 조카사위이다. 그는 1859년경 황석두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이어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860년에는 아내 황 마리아와 함께 홍산 부덕리(富德里)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9월에 체포되었다. 홍산관으로 끌려간 이용래는 얼마 뒤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 살려는 마음에서 천주교를 학습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였으나, 두 번째 신문에서는 “배교하지 않고 죽는 것이 이치상 당연하다.”고 하면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 결과 이용래는 1866년 10월 14일, 45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10). 박성운: 서울 남문 밖 전생서 앞에서 살며 짐꾼으로 일을 해 생활한 박성운은 박순집의 조카로 죽은 뒤에 천당에 간다는 설을 조부로부터 듣고 귀가 솔깃하여 천주교를 배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를 믿은 지 8, 9년이 된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음력 10월 11일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자백하고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고 말한 뒤 음력 1866년 10월 14일 효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1). 원윤철 사도요한: 원윤철은 원동지라고도 불리며, 고종의 유모였던 박 마르타의 시아버지이다. 그는 1862년에 자암에 사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원윤철은 많은 신자들과 교류했고, 또 주교의 명령대로 자신의 첩을 내보내는 등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9명의 성직자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에 교우들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배를 보냈는데, 원윤철도 이 일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장사지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된 원윤철은 1866년 10월 15일에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았다. 신문 중에 그는 “상종한 교우로 아현의 최인서(崔仁瑞, 요한)와 연동(蓮洞)의 박원장(朴元長, 요한)”만 언급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발설하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3일 후인 1866년 10월 18일 “천주교를 믿었고, 서양인들과 통섭(通涉)했다”는 죄목으로 양화진에서 81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12). 박내호사도요한: 박래호(래호는 字)는 황해도 신천의 향족(鄕族)이며, 문장과 글 솜씨가 뛰어났다. 그러나 가산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다른 사람의 과거를 보아 주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0년에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면서부터는 과문(科文)을 그만두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여, 아내와 딸, 누이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박래호는 1862년에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듬해 첫 고해성사를 받은 뒤로는 외교인에 대한 선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신천에서 박해가 발생하자, 그는 잠시 송화로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신천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두 차례 베르뇌 주교를 모셨는데, 주교가 신천을 방문한 1865년 1~2월 사이에 그는 신천 회장으로 임명된 듯하다. 1866년 1월 서울에서 성사를 받고 돌아 온 박래호는,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서흥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처자를 데리고 상경하여 교우 집에 기숙하며 짚신을 팔아 생활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되면서, 박래호는 공덕리에 집을 얻어 숨어 지냈는데, 9월에 벼슬살이하는 비신자 친척이 고발하면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박래호는 9월 초 신발을 팔러갔다가 길에서 체포되었고, 포도청으로 끌려간 후 1866년 10월경 40여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순교하였다. 13). 유 바오로: 유 마오로는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나 처음에는 적절하고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하였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는, 산골짜기로 이사하여 교우들과 함께 살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마오로는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 살면서 박해를 맞이했다. 그는 박해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에 박해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마오로는 포도대장의 신문에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히 밝혔으며, 그 결과 46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장남 유 안드레아(배론 신학교의 신학생)는 1868년에, 둘째 유 요셉은 1879년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14). 강 요한: 충청도 신창 어촌 사람인 강 요한은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워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자녀들을 잘 교육하여 훌륭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동네 교우들도 잘 인도하자 다블뤼 주교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해마다 신부를 영접하여 교우들의 영적인 생활을 도왔고, 병인박해 때 리델·페롱·칼레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는 부인과 16세 난 아들이 있었는데, 부인은 친척에게 맡기고 아들은 머슴으로 들여보내면서까지 신부를 구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1867년에 그의 이름이 탄로되어 신창에서 체포되었는데, 지니고 있던 신부의 편지가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가족과 이별하면서 자신은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라고 밝히고, 만일 그들도 나중에 잡히면 천주를 위해 순교하라고 당부하였다. 처자에게 밝힌 대로 그는 1867년 8월 2일 68세의 나이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15). 조타대오: 충청도 신창 남방재 사람인 조타대오는 선대부터 천주교를 배워 착실히 믿었다. 이러한 집안 내력으로 그도 일찍부터 교리를 배워 타대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우들이 다 그를 칭찬할 정도로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7년에 신창에서 강 요한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끌려가면서 서로 사랑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격려하였다. 서로 격려한 대로 그는 1867년 8월 2일 65세의 나이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뒤에 포교가 교우들을 체포하면서 “너도 조타대오와 같이 하여라”고 하였다고 한다. 16). 김이뿐 마리아: 김 마리아는 황해도 서흥 사람으로 과부가 된 후, 신천의 종기 의원이었던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의 후처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음이 순량하여 부부 금실이 좋았으며, 자식들을 사랑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갔다고 한다. 그 후 배천(白川)으로 이사한 김 마리아 가족은 1857년에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차동에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1859년 남편 이의송이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했고, 이어 김 마리아와 자식들도 남편에게 교리를 배운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외교인인 시아주버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던 가족은, 박해가 심해지면서 1866년 9월 8일 경기도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사돈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시아주버니를 신문하여 김 마리아 가족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냈고, 결국 김 마리아 가족은 봉천에서 체포되었다. 우포도청에 수감된 김 마리아는 신문 중에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그 결과 남편 이의송, 아들 이붕익(李鵬翼, 베드로)과 함께 1866년 9월 16일 양화진에서 55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7). 이붕익 이천조베드로: 이붕익(혹 이천조)은 황해도 신천의 양반으로, 의안대군(태조의 8자)의 후손이다. 그는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붕익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붕익은 마음이 어질고 순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배천[白川]으로 이사하였고, 1857년에는 다시 서울로 옮겨 와 차동에 거주하였다. 상경한 지 2년 후인 1859년, 아버지 이의송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고, 1862년에는 베르뇌 주교(Berneux, 張敬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에 이붕익도 아버지에게 천주교를 배워 1862년에 형과 함께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붕익은 마음을 다해 신앙을 실천했으며, 아버지를 도와 자신의 집에서 공소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발생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박해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이붕익은 아버지와 서모(庶母) 김 마리아를 모시고 1866년 9월 8일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처남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그의 삼촌을 잡아 신문하면서 이들의 거처가 알려졌고, 결국 이붕익은 부모와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우포도청으로 끌려온 이붕익은 매우 심한 형벌을 받았다. 이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형벌을 통해 배교시키려는 포장(捕將)의 의도였다. 그러나 이붕익은 비록 정신이 혼미해지기는 했지만, 끝내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그 결과 그의 부모와 함께 1866년 9월 16일 양화진에서 24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7. 절두산 순교자들은 몇 명이었을까?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까지 합쳐 1만 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수천 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수백 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그 수를 크게 늘려 잡은 데는 병인박해 기간 내내 천주교 신자들을 그곳에서 처형했다는 점과, 국왕의 재가를 기다리지 말고 체포하자마자 해당 지방관이 처형한 다음 보고하라는 ‘선참후계’에 따라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재판 없이 그곳에서 처형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알아보았듯이 병인박해 기간 내내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처형했을 뿐이다. 또한 선참후계 조처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이 절두산에서 마구잡이로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선참후계의 처형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해당하는 조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로 보고하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를 단속하는 데 선참후계의 형식을 따르게 했지만, 도성과 인접해 있는 절두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에 선참후계의 논의가 있었고, 국왕이 이를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이런 조치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군함이 조선을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난 10∼11월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처형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 기간에 양화진, 강화 등 서울 부근에서 최소한 6차례 이상 3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었으나, 이때에도 매번 국왕의 윤허를 받고 처형하였다. 이와 같이 근거가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절두산에서 1만 명 또는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또한 1865년 당시 천주교 신자는 모두 2만 3천 명이었고,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신자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까지 합쳐 약 8천 명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그러한 주장이 크게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몇 명 정도일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29명을 가지고 그 근사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확인한 수치로 기준을 잡으면 전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310명이고,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466명이며,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모두 29명이다. 이와 같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들의 비중을 무명 순교자들까지 합친 전국 순교자 수인 8천 명에 대비시켜 계산해 보면,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모두 2,843명으로 추산되고,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77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까지 합친 절두산 순교자들은 177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8. 순교 장소는 어디였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장소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절두산 꼭대기이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노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하면, 절두산 꼭대기에서 칼로 신자들의 목을 쳐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리거나 한 오랏줄에 여러 명의 교우들을 결박하여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밀어 버려 죽이기도 하였고, 창호지를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려 숨 막혀 죽게 한 다음 그 시신을 강물에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웠고, 뒤에 다시 그것을 헐고 기념관과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옛 노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를 신자들의 처형지로 보는 설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절두산 꼭대기는 수십 명의 관계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하여, 군민을 많이 모아놓고 목을 베어 뭇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에는 합당하지가 않다. 또한 그 설은 대대로 절두산 근처 동리에서 살아온 노인들의 증언과도 전혀 다른데, 그 증언에 의하면 사형 집행 장소는 절두산 꼭대기가 아니라 양화진 바로 앞 길가의 평지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측 자료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증언한 교회측 자료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이나 《치명일기》의 어디에도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 꼭대기로 표현한 것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사형 집행 장소를 ‘양화진두’,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사형 집행 장소는 후대의 옛 노인들이 증언한 불확실한 내용보다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정부측 자료 또는 병인박해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인들의 증언을 모아 놓은 교회 측 자료들을 이용하여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정부측 자료에는 한결같이 “양화진두”에서 군민을 많이 모아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진두’는 ‘나루터’를 뜻하므로, 사형 집행 장소는 양화진두, 곧 양화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부측 기록은 교회측 자료에서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아울러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목을 베었고 머리를 매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던 만큼 신자들의 순교 장소는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로 오늘날 절두산과 꾸르실료 건물 사이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9. 절두산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 기념 성당의 제대 쪽 양 끝에 설치되어 있는 돌계단을 몇 단 내려가면 10평 남짓한 지하실이 있다. 이 지하실에는 높이 약 6척의 화강암으로 된 서양식 유해 안치소인 성해실이 있다. 이 성해실은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에 대비하여 마련한 것이다. 1968년 2월 15일 교황청 시성성은 10월 6일에 시복될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사하고 또 유해를 분배할 수 있도록 서울 절두산 기념성당으로 옮겨 모시는 일을 윤공회 주교에게 위촉했다. 이에 따라 이미 발굴된 시복 대상자들의 유해가 차례로 절두산 기념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절두산 기념성당 성해실에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베르뇌, 다블뤼 주교의 유해, 볼리외, 도리, 브르트니에르, 오메트르, 위앵 신부의 유해, 남종산(요한), 최형(베드로), 장주기(요셉),우세영(알렉시오), 손선지(베드로)의 유해와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 허계임(막달레나)․ 이영희(막달레나), 이정희(바르바라), 최경환(프란치스코), 이호영(베드로)의 유해 등 16위의 순교복자 유해가 안치되었다. 그 뒤에 순교복자들의 유해가 추가로 발굴됨에 따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앵베르 주교의 유해, 모방․ 샤스탕․ 김대건 신부의 유해, 김성우(안토니오)의 유해와 병인박해 순교자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유해, 이명서(베드로), 한재권(요셉),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황석두(루가)의 유해 등 10위의 순교복자 유해를 추가로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26위 순교복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절두산 기념성당의 성해실은 1984년 103위 한국 성인의 탄생에 맞추어 새로 단장되었다. 즉, 시성식이 있기 한달 전부터 성해실을 대폭 개조하여 27위 공동 묘소를 만들었다. 유해는 순교 연,월,일 순으로 배치하고, 윗줄 6처는 비워두었다. 후에 초기 순교자들이 시성되면 모시기 위해서 이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103위 성인이 시성되면서 기념관에 유해가 모셔진 26위 순교복자들도 모두 시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시성식을 거행하기 전인 5월 3일 내한 첫 순서로 시성될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절두산 기념성당 성해실을 방문하여 순교자들의 유해에 참배하였다. 또한 1986년 여름 이원순 교수에 의해 미리내 무명 순교지 묘지에서 이윤일(요한)성인의 묘가 확인되어 1987년 1월 21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추가로 성해실에 모셔졌다. 그리고 무명 순교자 한 분의 유해도 추가로 성해실에 모셔졌다. 이 무명 순교자의 유해는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가운데 한 분이다. 명동성당 지하실에서 유해를 관리하는 도중에 이름표가 분실되어 무명 순교자로 된 것이다. 1984년 시성식 때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복자 모두가 시성되었으므로 이 무명 순교자는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절두산 성해실에는 전국에서 발굴된 성인 28위의 유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셔지게 되었다. 이들 순교 성인들은 세계 모든 가톨릭 교인들의 공적인 공경을 받게 된다. 세계 각국의 교인이나 교회가 이들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쓰며, 종교적 수호자로 모시고, 천주에 대한 전구자로 모시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하여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어김없이 절두산 기념성당을 드리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절두산 기념성당은 한국천구교회와 교인들에게는 물론이고 국민 전체에게도 대단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절두산 기념성당에 유해가 모셔져 있는 순교성인들 가운데는 한국 교회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유해는 국내는 물론이고 이탈리아,미국,독일 등 세계 각국의 교회에서 공경하기 위해 분배해 갔다. 10. 계속되는 성지 수난 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건립하고 순교 유물을 수집하는 등 절두산 성지를 조성하는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성지를 훼손하는 일도 잇달아 일어났다. 1969년 서울-인천 간 강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한강변으로 나 있는 절두산 성지의 출입 도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이에 교회측에서는 서울시에 제안하여 합정동에서 절두산 성지로 통할 수 있는 넓이 4m, 길이 34m 규모의 지하 도로를 건설하여 자동차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 지하 도로가 2차선 고속도로의 폭이 끝나는 지점까지만 놓여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교회측에서는 또 다시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 지하도 연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사실 교회에서는 이 공사에 대한 예산이 따로 서 있지 않았으나 본당 신자들의 정성어린 모금 덕분에 지하 도로 연장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공사를 하면서 지하 도로 위에 생긴 땅에는 약 350평의 주차장을 만들었고, 지하 차도에서 주차장에 이르는 약 11m의 길을 닦아 놓았다. 이렇게 하면서 강변로 진입로까지 길을 마련해 놓으니 기념관 앞이 제법 쓸모 있게 다듬어졌다. 이렇게 하는 동안 절두산 종합 개발 계획이 마련되었다. 절두산 주변의 한강 모래펄 3천여 평 가량을 매립하여 성지를 확장한다는 대사업이었다. 이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강바닥까지 수직 15m 높이로 흙을 메워나갔는데, 차바퀴가 흙 속에 빠지고 넓게 흙이 쌓여도 1년 내내 불도저를 임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나서서 인력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절두산 서편 공사를 시작할 때에는 서울대교구로부터 공사를 포기하라고 종용받기도 하였고, 자갈 채취를 하는 이들에게서 폭력에 가까운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 당시 강에는 자갈 채취선이 있었는데, 이 공사를 하게 되면 자갈 채취선의 운반로가 차단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성지 확장 공사의 책임을 도맡고 있던 구본홍 박사는 만취된 노무자들에게 붙들려 한강 깊숙이 끌려 들어갔다가 무사히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를 마치기까지 3년여 동안 한 사람의 사고도 없이 개발 사업을 완공할 수 있었다. 개발 사업을 마침으로써 처음 1,381평이던 절두산 성지는 4,300여 평으로 늘어났다. 두 차례에 걸쳐 매립 공사를 하고 대지를 매입한 덕분이었다. 이때의 사업으로 마련된 제방 1,247평과 제방 위 연안 2미터 폭의 보행길 365평은 규정에 따라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절두산 성지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서울시에서는 1981년 양화대교를 확장하면서 입체 교차로를 신설하여 절두산 순교 성지의 서북쪽을 차단시켰고, 지하철 2호선을 계획하면서 성지 서쪽 광장 중간을 계획 구역에 포함시켰다. 결국 1983년 12월에는 지하철 당산철교가 개통됨으로써 절두산 성지가 동서로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철을 고가 철교로 만들면서 방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개통한 지 10년이 지나 방음벽을 설치할 때까지 교회가 입은 어려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지를 동서로 나누어버린 당산철교 위를 1분 30초 내외로 통행하는 전동차가 내는 굉음과 진동은 성지 참배나 미사를 비롯한 교회의 정상적인 활동을 어렵게 했고, 성지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1986년 10월 서울시가 한강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오늘의 한국 천주교 역사를 있게 한 순교자들이 목숨을 던진 성지 바로 앞 절벽 밑 수면을 흙으로 메워 한강 둔치를 만들었다. 게다가 한강 둔치를 만들면서 진입로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성지 마당은 성지 동쪽 끝에 진입 도로가 마련될 때까지 5년 동안이나 한강을 찾는 시민들의 주차장이 되었고,절벽 밑 수면을 뭍으로 바꾸어 절두산이 갖는 의미를 영원히 반감시켜 놓았다. 그리고 1996년 말 개통을 목표로 성지 바로 앞 한강변에는 고속 고가 도로를 건설하여 성지를 밖에서도 조망할 수 있는 절두산의 가시권마저 완전히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양화나루·잠두봉을 포함한 절두산 성지 일대는 삼면이 도로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강에 면한 이름난 명승지요, 갖가지 애환이 얽힌 사적지이며, 국내외에서 연간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한국의 대표적 성지인 절두산 일대는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며 분진 속에 살아야 하는 최악의 조건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성지에 진입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가져와 순례자가 현저하게 감소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 당국은 절두산 일대가 종교적 성지일 뿐만 아니라, 한강 북로의 명소로서 많은 시민이 이곳을 공원처럼 찾던 실정을 감안하여, 새로이 추진하게 된 한강 종합 개발 사업에서 지상 도로이던 대건로를 지하 차도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르면 지하 차도 윗부분의 땅을 성지의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고 기념관과 수목들은 소음과 공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 지하 차도 건설은 성지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 공사를 진행하면서 교회가 정성을 쏟아 조영한 절두산 성지의 광장은 물론 출입 도로마저 차단하였다. 그리고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수년간 그곳을 건설 시공재를 놓아두는 장소로, 건설 중장비 차량의 주차 작업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절두산 성지 일대의 교회 재산은 적지 않은 손해와 큰 불편을 겪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오랜 동안 가꾸어온 ‘성인의 광장’에 있는 제반 시설물과 잠두봉 일부는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1990년에 들어 고층 아파트 건설 붐이 불면서, 한강 도로변에 고층 아파트가 마치 병풍을 펴놓듯이 줄지어 건설되는 이상 현상이 생겨났다. 이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한강변의 자연과 경관뿐만 아니라 문화재의 훼손과 파괴가 날로 심해졌으며 종종 사회적으로 시비가 벌어지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절두산 부근도 예외가 아니어서 1996년에는 마침내 절두산 성지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도 고층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낡은 주택을 개량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주민과 건설업자들이 19층 가까이 되는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고층 아파트가 절두산 성지 북쪽 도로에 줄줄이 들어선다면, 절두산 성지 일원은 북변에 고층 아파트가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게 되어 잠두봉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와우산, 북한산의 스카이라인이 완전히 가려지고, 성지는 좁은 지역에 갇힌 외로운 고도처럼 되어 현대적 문화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즉, 잠두봉 일원 사적의 문화적 가치도 결정적 훼손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교회에서는 성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유적을 훼손하게 되는 개발 사업은 교회 스스로 삼가는 한편,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정부 당국이나 민원에 의해 유적이 훼손되는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를 막자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잔는 결의를 다지게 일대의 현재의 형상을 더 이상 훼손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1997년 6월 17일자로, 서울특별시장에게 ‘절두산 순교 성지 일자로 지정’을 신청하였다. 절두산 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성지에서 100m 이내의 건물은 문화재 보호법과 건축법에 의해 고도 제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서울대교구에서는 의 형날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명의로 문화재 행정의 최고 부서장인 문화 체육부 장관에게도 같은 취지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1. 절두산 성지 설명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객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둘렀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되었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월 22일 부인 김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66년 10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과 순교 기념관(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건립을 시작해 이듬해 10월 봉헌식을 가졌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27위의 성인과 1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를 모신 지하 성해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순교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 이가환 ·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광장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또 박물관 아래 광장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일행이 앉아 쉬었던 ‘오성바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흉상, 십자가의 길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 형제 · 삼촌 · 고모 · 형수 · 조카 · 장모 ·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공적비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에 모셔졌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유해 일부는 2001년 인천교구 갑곶 성지로 이장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 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 15:00~15:02 절두산순교성지 김대건동상으로 이동 * 15:02~15:03 절두산순교성지 김대건동상을 사진촬영 [김대건(金大建) - 한국 최초의 신부 출생 – 사망 : 1821년(순조 21) ~ 1846년(헌종 12) 출신지 : 충청남도 당진 본관 : 김해(金海)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조선후기 병오박해 당시의 신부로서,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세례명은 안드레아.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6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 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 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 J. J .J. 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 M. N. 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 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19년 11월 유네스코는 제40차 총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확정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곳에 가면 주말이 즐겁다>절두산성지·김대건 동상… 조선 ‘순교사’ 한눈에 문화일보 기사 입력 : 2006.09.15. 오후 1:11 주말에 서울 마포구 양화진 역사공원으로 나가 한강변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에 한번 빠져 보는 건 어떨까. 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서 5분만 걸어가면 외국인선교사 묘지공원, 절두산 천주교 순교성지가 나온다. ◆한국사랑 앞장선 외국인선교사 묘지공원 = 1600평의 호젓한 묘지, 돌로 된 십자가 밑엔 영어로 된 묘비석이 서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이곳에는 개화기 초기 교육·의료 등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외국인들이 안장돼 있다. 배일운동에 앞장서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던 베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일가,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하며 조선에 묻히길 소망했던 헤이그 밀사 헐버트 박사,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 크리스마스 실을 최초로 만들며 결핵퇴치 운동에 앞장섰던 셔우드홀 등 17개국에서 한국으로 온 575기의 묘가 조성돼 있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타고가던 배가 목포 앞바다에서 뒤집히자 물에 빠진 어린 소녀를 구하려다 익사했다는 사연도 적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이며 고종의 시의였던 헤론이 사망하자 그의 안식처로 고종이 하사했던 땅이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묘역이 됐다. 세월의 흐름마저도 비켜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숭고한 삶과 이들의 묘비에 새겨진 묘비문을 보면 각박한 일상사에 쫓겨 잊고 살던 삶과 죽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교황이 방문해 유명해진 절두산 순교성지 = 개화기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당한 곳으로 사적 제399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찾아와 더 유명해졌다. 병인양요(1866년) 이후 대원군에 의한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양화진 나루터의 누에머리를 닮은 아름답던 잠두봉은 절두산(切頭山)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얻었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주검도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1967년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동상과 순교기념관이 세워졌다. 접시모양 지붕은 순교자의 갓을, 수직벽은 목에 채웠던 칼을 의미한다. 순교 성인 28위의 유해를 모신 성해실도 있다. 정약종이 지은 최초의 한글교리서인 ‘주교요지’와 초기 천주교도의 필독서였던 ‘천주실의’, 그리고 김대건의 친필 서한도 볼 수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고 입장료는 무료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양화진공원과 유람선선착장 = 절두산성지와 외국인묘지 사이에 있던 철로변 사유지를 마포구에서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무·꽃으로 꾸민 아담한 공간으로, 한강 물길이 시원스레 굽어보인다. 절두산~마포대교 사이 둔치에는 길이 2.5㎞의 산책로와 2400평짜리 피크닉장이 올해 초 들어섰다. 마포구는 내년 11월에 절두산성지와 선교사묘지 등 양화진에 얽힌 근대사의 굴곡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4층짜리 홍보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김세동기자] * 15:03~15:04 절두산순교성지 십자가의 길 입구로 이동 * 15:04~15:24 [십자가의 길(15처)~성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상~성인 남종삼의 순교사적비~남상교의 청덕비~은언군과 송마리아 묘비~한국천주교회의 증언자 박순집의 묘와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성녀 마더 데레사상~한국 순교성인 시성기념 교육관]의 동선으로 절두산 순교성지를 탐방 [승리의 팔마를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 : 최봉자 수녀 작. 2001년. 그리스도교에서 `팔마(Palm)` 는 죽음을 넘어 이룬 승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순교자들에게 당신이 거둔 승리의 영광을 주는 장면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절두산 순교 기념탑 십자가 : 1962년 순교자현양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이 탑은 낙뢰로 훼손되었으나 탑의 일부인 십자가는 남아서 보존되고 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 절두산에서 치명하신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념비를 조각하여 세웠다. 절두산의 순교자 중 13위가 현재 `이벽 요한세례자 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을 기다리고 있다. 형구 돌 : 조선시대에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도구 루르드 성모상(초 봉헌) :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에서 발현(1858)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본 따 조성되었다. 1979년 9월 26일 복자 축일 미사가 끝난 뒤에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에 의하여 축성 봉헌되었다.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 성당과 박물관의 설계는 서울대 이희태 교수가 맡았는데 절두산 주변 지형과 역사적 의미, 순교정신을 조화롭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미술(聖美術) 제작에는 서울대 교수였던 조각가 김세중을 중심으로 윤명로, 정창섭, 이순석, 최의순,이남규 등의 작가들이 참여해 순교의 역사에 예술적 가치를 더했다.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 전뢰진 작. 1972년. 정부 주도로 출범(1966)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민족의 귀감이 되는 인물 15인을 선정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하여 세워졌다.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공로를 인정받은 김대건 신부는 종교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상 건립 대상 인물로 선정되었다. 오성바위 :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블뤼안토니오 주교, 오에트르 베드로신부, 위앵 루카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될 때와 다시 한양에서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라고 전해진다. 척화비 : 1871년부터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성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상 : 병인 박해때 순교한 남종삼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9년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프란치스코가 기증하였다. 남종삼은 1984년 시성되었다. 남상교(성인 남종삼의 아버지)의 청덕비 : 현풍현감, 충주목사, 동지돈령부사 등을 역임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병인박해 순교자이자 남종삼 성인의 부친이다. 현풍현감으로 지낼 당시 그의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려 세운 비석은 1974년에 절두산으로 이전되었다. 은언군과 송마리아의 묘비 :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의 부인 송마리아는 천주교인이었다는 이유로 신유박해때 사약을 받았으며, 이 사건은 귀양 중이던 은언군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 묘비는 둘을 사면하여 철종 2년에 세웠다.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 : 김세중 작,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위해 방한하였던 교황 바오로 2세의 절두산 순례(1984년 5월 3일)를 기념하여 제작하였다. 성녀 마더 데레사상 : 임송자 작. 2018년. 가난한 이들의 벗, 마더데레사 수녀의 절두산 순례(1985년 1월 29일)와 시성(2016)을 기념하여 세웠다. 한국 순교성인 시성기념 교육관 : 사무실, 성물판매소, 봉헌초, 순례도장, 박물관 학예연구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의 산티아고, 절두산 성지순례 소재지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 휴관일 : 매주 월요일 휴관 가는 법 :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왼쪽 양화진길 도보 10 분. 간선버스 602, 603, 604, 706번, 지선버스 5712, 5714, 6712, 6716, 7013A, 7013B, 7612번 합정역 하차. 마을버스 마포07번 종점(절두산 순교성지) 하차 사이트 http://www.jeoldusan.or.kr 이용 시간 :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매일 오전 10시, 오후 3시(월요일 제외) 미사 목차 ‘머리를 자른다’는 뜻, 절두(切頭) 이름 없는 순교를 기억하며 1킬로미터의 순례, 850킬로미터의 가르침 그날의 절두산을 떠올린다. 그들은 묵주도 쥐지 못한 빈손으로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겠지. 성스러운 땅의 기운은 종교와 무관하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천천히 묵상하듯 거닌다. 여느 길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성지의 평온이 그 길에 가득하다. ‘머리를 자른다’는 뜻, 절두(切頭) 어떤 길과 땅은 그곳만의 진한 분위기를 갖는다. 사람과 건물이 새로이 들고나도 장소에 깃든 상징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 번 드리워진 상징은 땅의 일부로 녹아들어 어느덧 그곳의 전부가 된다. 그곳을 걷는 것은 그 의미 위를 걷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대표적이다. 성 야고보(산티아고)의 무덤에 경배하기 위해 가는 순례의 길. 중세기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의 가교 역할을 한 이 길은 성 야고보의 순례와 순교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시간이 흘러 그 길은 이제는 종교와 무관하게 사람들을 부른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순례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과 마주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성 야고보의 순교지로 그 종착점의 거대한 상징이다. 거대한 대성당의 성 야고보의 상이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과 벅찬 보람을 안긴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서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850킬로미터를 걸어 도달하는 길은 아니지만 이름 모를 순교자들의 넋이 깃들었다. 순례의 차등을 어찌 따질까만 무명의 설움과 희생은 성 야고보의 순례보다 한층 숭고해 보인다. 그래서 성지는 절두산의 새로운 이름이다. 절두산은 원래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해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다. 용두봉(龍頭峰), 가을두(加乙頭)라고도 했다. 한강을 향한 봉이라 지명에 ‘머리’(頭)가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풍광이 좋았다. 『동국여지승람』에서 강희맹은 ‘언덕의 발부리가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고 형세도 높아서 호수 가운데 승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예부터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다. 절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용두봉이, 가을두가 절두산(切頭山)이란 끔찍한 이름 하나로 불리기 시작한 건 1866년이다. 병인양요와 병인박해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하는 법령(금압령)을 내렸다. 그로 인해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과 프랑스 선교사 아홉 명이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는 조선을 침공했다. 그들은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정탐한 후 강화도를 공격했다. 병인양요였다. 격노한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오욕을 씻겠다며, 양화진 잠두봉에 새 처형장을 만들었다.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머리를 자른다’는 뜻의 절두(切頭)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다. 다시 머리라는 뜻을 담았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다. 이름 없는 순교를 기억하며 합정역을 나와 골목길로 스며든다. 한강변의 외국인 선교사묘원과 양화진 터를 차례로 지난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그 너머에 있다. 언덕에 지어진 순교 기념박물관이 보인다. 천주교회 측은 ‘산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기념관의 설계를 공모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현대건축 1세대인 이희태가 설계를 맡았다. 혜화동성당과 국립극장을 설계하는 등 종교와 문화 분야의 건축에 능한 전문가였다. 그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순교 정신과 전통 미학을 담았다. 기념관은 두 개의 원과 종탑이 주가 되는 상징을 이룬다. 원형의 지붕 아래는 순례성당과 기념관이다. 옛날 선비의 갓을 형상화했다. 그 사이의 종탑은 순교자들에게 채워졌던 목칼을 의미한다. 세계 건축 설계 콘테스트 은상과 대한민국 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빼어난 건축물이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절두산에 지어진 순교 기념관과 성당이다. 절두산으로 들어서는 첫 층계 앞에 ‘절두산 순교성지’라고 쓰인 동판이 있다. ‘SINCE 1866’이라고 적혔다. 순례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곧 길가의 형구돌을 지난다. 엽전 모양의 큰 돌이 세로로 섰고 중심을 관통하는 공간에는 교수형을 위한 밧줄이 있다. 구멍 앞쪽의 밧줄에 목을 걸면 형구돌 뒤쪽에서 잡아당기는 사형 기구다. 그 사용법을 알고 나니 그들의 순교가 더 이상 막연할 수가 없다. 충청북도 연풍 공소에서 1974년에 이전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절두산 순교박물관 입구에 이른다. 성지는 크게 박물관과 성당 그리고 이들 앞에 정원처럼 자리한 십자가의 14처로 나뉜다. 기념관 입구의 계단을 오르기에 앞서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있다. 최종태의 조각이다. 그는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다. 성북동 길상사의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으로도 유명한 조각가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은 절두산의 첫 순교자인 이의승·김예쁜·이봉익의 세 가족을 기린다. 몸통에는 옆으로 누인 머리만 붙었다. 목 부위가 없는 전신상은 절두(切頭)를 말한다. 무수한 사람이 절두산에서 이름 없이 목숨을 잃었다. 봉천동에 살던 황해도 사람 이의승의 가족은 처음 순교함으로 그 이름을 보존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계단을 오르자 왼편으로 회랑과 원주가 나온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추녀다. 이희태의 건축에 자주 등장하는 경회루 모티프다. 회랑을 돌아 오르자 박물관과 순례성당이 단의 차이를 두고 ‘ㄱ’자 형태로 자리 잡았다. 건물 전체의 규모에 비해 성당은 아담하다. 실내는 제단을 중심에 두고 부챗살로 퍼져 있다. 순교정신과 신앙이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매일 순례자 미사를 드리며 순교의 의미를 기린다. 성당과 접한 박물관 입구의 왼쪽에는 이순석의 작품 「빨마」가 걸렸다. 종려나무 가지인 빨마는 승리를 뜻한다. 순교가 가져다준 종교의 자유다. ‘절두산 길’이라는 부제가 그 의미를 부연한다. 총 3천 점 가까운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은 기념관의 2층과 3층을 활용했다. 성당 지하에는 우리나라 천주교 성인 28인의 유해도 모시고 있다. 1킬로미터의 순례, 850킬로미터의 가르침 기념관 바깥의 동쪽으로는 십자가의 14처가 이어진다. 1킬로미터 남짓한 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하기까지의 열네 장면을 그린 동판이 지표 역할을 한다. 김대건 신부 동상을 중심으로 정원을 크게 한 바퀴 돈다. 봄날에는 길 주위로 철쭉이 활짝 핀다. 다양한 나무와 꽃들도 심었다. 그 자리마다에 모두 이름표를 붙였다. 공원이나 생태관찰로로 부족함이 없다. 그 화사함이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나무 그루터기마다에 그려진 고운 장미 문양도 이채롭다. 여러 가지 순교 유물과 조각도 야외에 전시한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순례의 길이다. 산티아고처럼 장대한 길이 펼쳐지지는 않지만 순례의 의미만은 그 못지않다. 신자들은 십자가의 14처를 따라 기도하며 걷는다. 한걸음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은 평정심을 얻는다.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강변으로는 또 다른 김대건 신부의 상이다.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형상이다. 사람들은 김대건 신부의 손을 잡고 기도한다. 동상의 손끝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닳았다. 그러므로 빛난다. 박물관 아래 마리아 상 앞은 촛불 봉헌대다. 순교자를 기리고 소망을 담아 촛불을 밝힌다. 모든 염원은 간절하다. 바람 앞에 위태하지만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을 견뎌내는 힘도 저 같은 염원과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겠지. 조급한 마음은 시나브로 잊혀진다. 시기와 질투 대신 용서와 화해 그리고 마음의 쉼이 자리한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강변의 산 중턱에 자리해 강변의 풍경과 일몰이 장관이다. 방주를 타고 홍수의 시련을 견딘 노아에게 신은 무지개를 선물했던가. 절두산은 순교자의 희생으로 본래의 절경도 회복했다. 기념관 초입에서 당산철교 아래 방향으로는 순교자 기념탑도 있다. 지난 2000년 9월에 세워졌다. 기록에 전하는 28인을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념한다. 기념탑은 세 개의 탑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순교자들의 전신을 부조했다. 오른쪽의 잘린 머리를 형상화한 기념물이 인상 깊다. 왼쪽에는 순교자들의 전신을 부조한 기념탑이다. 순교자들의 머리맡에는 ‘무명인’이라고 적혔다. 이름 없는 순교다. 그것은 잠두봉이 절두산이 된 것처럼, 누에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변태의 과정이요, 인고의 세월이다. 서울의 산티아고, 1킬로미터 남짓한 절두산 성지순례의 길이 전하는 850킬로미터 순례길 못지 않은 귀한 가르침이다.] [박순집(朴順集) 요약 : 세례명 베드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여 순교자들의 시신 발굴에 도움을 주었다. 증언한 내용이 《박순집 증언록》 3책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절두산성지에서 소장 중이다. 출생-사망 : 1830 ~ 1911.6.27 별칭 : 세례명 베드로 출생지 :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으며 성장하였다. 부친 박 바오로는 성 L.J.M.앵베르[池世亨] 주교, P.모방[羅伯多祿] 신부, J.H.샤스탕[鄭牙各伯] 신부 등이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된 몇몇 신자들과 그 시신들을 찾아서 노고산에 안장하였으고, 1843년에는 그 유해를 발굴하여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관악구 신림동 57-1번지)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박순집에게 전함으로써 박해 후 삼성산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고 1901년 10월 21일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바오로는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기에 앞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시신을 찾아내 와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보았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 4대 조선교구장 S.F.베르뇌[張敬一] 주교, S.브르트니에르, 볼리외[徐沒禮], P.도리, 프티니콜라(Petimicolas), 푸르티에[申妖案]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군인으로서 직접 목격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의 집안에서는 조카 바오로, 고모 막달레나, 8촌 바오로 등이 순교하였고,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도 다시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부친 바오로와 백부 바오로, 형 요한과 손 바르바라 부부, 이모부 손 베드로와 손씨 부부 등이 3월에 순교하였고 장모 홍 유스티나가 11월에 순교하였다. 박해 후 그는 교회의 밀사 최지혁,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의 딸 원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프랑스의 여러 신부들을 입국시켰고, 시복 수속 작업이 시작되자. 자신이 경험을 교회 법정에서 진술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다. 그의 진술내용은 시복 재판의 기록 서기를 맡았던 로베르 신부가 필사하여 남긴 《박순집 증언록》 3책에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성지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박순집은 서울 홍제동에 살고 있었는데 1888년 샬르트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을 이 수녀회에 입회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곧 최초의 한국인 수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황월이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고 1890년에 제물포로 이주하여 전교에 힘쓰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 15:24~15:36 서울 마포구 합정동 373-39 번지에 있는 서울 합정역 7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 15:36~15:44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가는 지하철 7호선 열차를 승차 대기 * 15:44~16:00 7호선 지하철 열차를 타고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이동 [16분 소요]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 지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안내도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