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
노천명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소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삼천리 9호>(1940. 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서정적
◆ 표현 :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남사당 → 사당 복색을 하고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춤을 파는 사내.
* 초립 → 관례한 남자가 쓰던 매우 가는 풀줄기로 엮은 갓.
* 조라치 → 취라치. 군중(軍中)에서 소라를 부는 취타수의 하나.
*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 남사당의 고충과 비애가 묻어 있는 표현.
여자로 분장한 화자의 모습이 완전히 여자로 동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 나는 집시의 피였다 → 유랑인의 '근원적 슬픔'이 담긴 표현으로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를 나타냄.
*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 떠돌이의 비애.
*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화자의 삶의 애환.
◆ 제재 : 남사당
◆ 주제 : 남사당 사나이의 애환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여자로 분장한 사나이의 비애
◆ 2연 : 남사당패 사나이의 비애
◆ 3연 : 떠돌이 인생의 서글픔
◆ 4연 : 새벽길의 애환이 교차되는 감정.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남사당이란, 꼭두쇠라고 불리는 우두머리를 비롯하여 40 ~ 50명으로 구성된 놀이패로, 전국 각지를 떠돌며 춤과 웃음과 노래로 삶을 영위하던 집단이다. 이 시에는 유랑 인생의 애상이 그려져 있다. 화자인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따로 설정된 가공의 인물인데, 어린 시절 남장을 하고 다녀야 했던 시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볼 때 묘한 느낌을 준다. 화자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이며, 저녁이면 향단이 등의 배역을 맡아 여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자신을 서글프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랑 인생의 생업인 바에야 어쩌랴. 더욱 한스러운 것은, 이런 놀이판이 끝나고 길을 떠나야 하는 처지이기에 인연을 두고 정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 역시 젊은 나이이기에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 고운 처녀'를 만날 때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한 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새벽이 되면 짐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새로운 동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작가소개]
노천명 : 시인
출생 : 1912. 9. 2. 황해도 장연
사망 : 1957. 12. 10.
학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영어영문학
경력 : 1955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55 서라벌예술대학 강사
~1951 부역의 혐의로 9,28 수복 후 투옥
1938 조선문학예술동맹 참여
작품 : 도서, 오디오북, 기타
<정의>
1911~1957. 시인·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京城)으로 이사, 진명(進明)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신동아(新東亞)』 1932년 6월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조선아동예술연구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같은해 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잡지 『여성(女性)』(조선일보사 발생)의 편집을 담당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고, 잡지 『신세기(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고, 그해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決戰文化大講演會)에 참가하여 시를 낭독했다. 그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았고, 후방인 '총후(銃後'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시작 - 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매일신보』 1941.12.12)를 기고했다. 1942년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기원(祈願)」(『조관(朝光)』 1942.2),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한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2.19)·「노래하자 이 날을」(『춘추(春秋)』 1942.3) 등의 시를 썼고,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라는 주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여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와 「출정하는 동생에게」(『매일신보』 1943.11.10)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에 발표한 「병정」(『조광(朝光)』 1944.5) 및 「천인침(千人針)」(『춘추(春秋)』(1944.10)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944년 12월에는 '가미카제[神風]특공대'로 나가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모·미화하는 「신익(神翼) - 마쓰이오장[松井伍長] 영전(靈前)에」(『매일신보』 1944.12.6)와 「군신송(軍神頌)」(『매일신보』(사진판) 1942.12 ) 등의 시들을 썼다. 이외에도 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강조한 「싸움하는 여성」(『조광(朝光)』 1944.10)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2월,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두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했다.
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서 1946년까지, 이후 부녀신문사의 편집차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수필집 『산딸기』를 출간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및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참가와 같은 부역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9·28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거,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고 가톨릭에 입교, 영세를 받았다.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었다」를 발표했고, 1953년 「영어(囹圄)에서」와 같이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옥중시들을 담은 세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발간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했고, 수필집 『여성서간문독분(女性書簡文讀本)』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에는 미발표 유작시를 포함한 네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가, 1960년에는 170여 편의 시를 모은 『노천명 전집 : 시편』이 간행되었고,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노천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29∼26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노천명(盧天命)』(이숭원, 건국대학교출판부, 2000)
『친일문학작품선집 2』(김병걸·김규동 공편, 실천문학사, 1986)
『국민문학(國民文學)』
『동아일보(東亞日報)』
『매일신보(每日新報)』
『신동아(新東亞)』
『신시대(新時代)』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네이버 지식백과] 노천명 [盧天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