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팔홍문 터 (서울시 중구 순화동 216-2)
조선의 이지남(李至男, 1529~1577)과 그 부인 등 3대에 걸쳐 8명의 자손이 효자, 충신, 열녀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8개의 정문(旌門)이 있던 자리
일제에 들어 정려각 자리가 철도부지(경성역)로 지정되면서 종로구 운니동으로 이전 봉안하다가(년도 미상) 파주시 적성면 마지리에 충현공 한돈오(忠顯公 韓惇五)의 사당과 8정려각을 함께 신축하여 봉안하였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1968년 남양주시 진건면 신월리에 충현공 묘역에 8정려각을 재건하였으나 붕괴되어 1984년 8월 18일 김포시 감정동에 13정려각으로 확장 복원되었고, 여기에는 터만 남았다
강희맹 집터 (서울시 중구 순화동 216-2)
♤ 강희맹(姜希孟)
조선 초기 문신이다(1424 ~ 1483), 서울 출생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하며, 농학자이며 화가이기도 하였다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私淑齋)·국오(菊塢)· 운송거사(雲松居士), 시호는 문량이다
돈녕부 지사 강석덕(姜碩德)의 차남이자 소헌왕후의 조카이며, 문종, 세조와 이종간이다
(강석덕은 세종의 아랫 동서 - 세종은 강희맹의 이모부 이다)
1447년(세종29) 문과 친시에 을과1등으로 급제했으며, 세조 때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고 예종 때 남이를 죽인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성종 때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등을 지냈다
그는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으며, 그가 죽은 뒤 서거정에 의하여 유고가 편찬되었다
저서로 <사숙재집> <촌담해이> 등이 있다
강희맹묘 및 신도비는 시흥시 하상동에 있다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이 있다
묘역 왼쪽 아래에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
(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는데, 서거정이 비문을 짓고 박증영이 글씨를 쓴 것이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87호 지정되었다
♤ 강희맹과 시흥 관곡지(官谷池) 연꽃
연못은 조선 전기의 농학자인 강희맹이 세조 9년 명나라 에 다녀와 중국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를 채취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씨를 심어 재배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안산군의 별호를 1466년 세조 12년부터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는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의 집 가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 소유가 되어 관리되어 오며 사유지이다
관곡지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은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한 담홍색을 지니고 있는게 특징이다
순청 터 (서울시 중구 순화동 216)
도성(都城)의 도적(盜賊)과 화재(火災)를 방지하고 시간을 알리며 경계 및 각 성문 순번에 대한 추첨 (抽籤) 등을 맡았던 관청
야간 순찰은 자시(子時, 오후 10시)경부터 인시 (寅時, 오전 4시)경까지 실시하였다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1469년 세조 때 좌순청과 우순청 을 두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 내무아문 산하의 경무청 소관으로 바뀌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篇)에 따르면, 좌청 (左廳)의 구역은 종각(鐘閣)에서 동쪽으로 혜화문(惠化門)•흥인문(興仁門)•오간수문(五間水門)•광희문 (光熙門) 등이고, 우청(右廳)의 구역은 종각에서 서쪽 으로 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 •창의문(彰義門)• 숙정문(肅靖門) 등이었다
칠패시장 터 (서울시 중구 칠패로 36, 봉래동1가 48-2)
♤ 칠패시장(七牌市場)
조선 후기 서울에 있던 시장으로, 지금의 남대문시장 의 전신으로 서소문(일명 소의문) 밖에 있었다
언제 설치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17세기 후반의 서부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남대문 안쪽에 선혜청의 창고가 설치된 것을 계기로하여 도성 밖의 외어물전
(外漁物廛), 경주인(京主人)의 거주지역(지금의 서울역 부근) 등과 연결되어 도성 바로 밑(지금의 봉래동 일대)에 시장이 이루어져 칠패로 불렸다
주로 한강 연안의 마포, 서강을 거쳐 들어오는 곡식이 나 생선이 서소문을 통해 이곳으로 모였는데, 특히 여러 가지 생선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칠패의 어물상들은 금난전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서울 주변의 사상도고들과 결탁해 안전하게 어물을 구입하 고 판매하였다
즉, 칠패의 어물상은 광주의 송파(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 일대)와 도봉산록의 누원점(樓院店), 그리고 칠패를 연결하는 유통체계를 갖추어 삼남지방 에서 유입되는 어물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포천의 송우점(松隅店)에서 누원점을 거쳐 칠패에 이르는 통로를 통해 동부지역, 특히 원산지방 에서 들어오는 어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칠패의 난전 도고상인들은 독점한 어물 의 가격을 자의로 조절할 수 있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자, 이 부를 기반으로 점차 시전의 어물상을 압도해갔다
일제의 조선 침략으로 남산 일대에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 거주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칠패시장은 남대문 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지만 대신 일본인을 위한 시장 으로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다
♤ 칠패(七牌)
조선 후기 훈련도감(訓鍊都監)이나 어영청(御營廳) 등이 한성부를 8패로 나누어 순찰하던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어영청의 칠패가 남대문 밖에서부터 청파와 마포, 용산지역의 순찰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남대문 밖에 칠패의 초소인 복처(伏處,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밤에 지키던 곳) 가 있었기 때문이다
패(牌)란 40~50명 규모의 작은 부대를 말한다
(지금으로 보면 소대 정도 될까요?)
우리가 1조, 2조 할 때 '조(組)'는 일본식 표현이다
그 전에는 이를 '패(牌)'라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라는 말이 일반적 으로 쓰이게 되었고, '패'는 깡패, 패거리 등 주로 나쁜 집단을 뜻할 때 사용되었다
한양도성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南大門)구간
현재 한양도성 숭례문 구간에서 도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세 군데 있다
밀레니엄 서울힐튼과 SK남산빌딩 뒤쪽의 성벽,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올리브 타워로 이어지는 길가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있으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아랫부분에서 50m 정도의 성벽을 볼 수 있다
정미의병 발원터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9길 42, 서소문동 120-23)
♤ 정미의병(丁未義兵)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하여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이에 대항하여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3명의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최후의 저항을 시도 해보지만, 끝내 무산됐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위에 앉힌다
고종의 강제 퇴위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해 진행된 군대 해산이 이런 반발 심리에 불을 붙인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자결하자, 분노한 병사들이 무장봉기 를 일으켰으며,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각종 무장봉기 가 일어났다
특히나 이강년과 신돌석 등이 주도하는 남부지역 에서의 의병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북부 지방에서도 홍범도, 안중근과 같은 인사들이 활발히 투쟁을 펼쳤다
게다가 기존까지의 의병 활동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 으로 한 유림들이 주도했던 것과 비교해서 정미의병 은 신돌석, 홍범도와 같이 평민 출신들이 두드러지는 활약을 선보였고, 그 덕분에 기존과 비교해서 훨씬 강한 민중의 호응을 얻을수 있었다
정미 의병의 활동이 격화되어가자, 일본은 대한제국을 합병하기 이전에 의병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을 결심을 하게 되고 문자 그대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해버린다
일본은 1909년 2천 여명의 군인들을 동원해서 남한 대토벌작전을 감행했고, 거의 만 명이 넘는 무수한 민간인들이 의병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결국 한일 합방 무렵이 되면 한반도에서는 일본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무장 조직이 실질적으로 소멸 됐으며,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 소수의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로 이주해 독립군을 구성 한다
♤ 정미7조약(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제3차 한일협약)
1907년 7월 24일 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늑약
(丁未七勒約)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협약(第三次韓日協約)이라고도 한다
정미협약(丁未協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제2차 을사늑약(第二次乙巳條約) 등의 별칭이 있다
<내용>
이충순자결 터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88, 순화동 7)
♤ 이충순(李忠純)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1902년 7월에 육군보병 참위
(參尉)로 임관되었다
1905년에 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비밀각서에 의하여 한국군마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8월 1일 시위대(侍衛隊)가 전격적으로 해산 당하자 이를 거부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여 미리 파견된 일군과 경성에서 접전하던 중 크게 부상을 당하였다
적에게 사로잡히게 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즉석에서 자결하여 체포당하는 수모를 받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소의문 터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58-6)
♤ 소의문(昭義門 - 소덕문昭德門 - 서소문西小門)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던 서남향의 간문으로 소덕문·서소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이 원래의 위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광희문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처음 세울 때는 성문과 문루 를 갖추어 소덕문이라고 했다
1422년(세종 4) 주변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할 때 소덕문도 함께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38년(영조 14) 석문, 즉 홍예를 개축할 때 왕이 문 이름을 고치라는 명령을 내렸고, 1744년에 소실된 문루를 완성한 뒤 소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성곽보다 약간 높게 석축을 쌓고 가운데에 통행을 위한 홍예를 내었으며 그 위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구조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문루를 세웠다
그 주위에는 벽돌로 담을 두르고 양 옆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처형장 중 한 곳이었는데 특히 1800년대 중반 이후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새남터성지, 절두산성지 등과 더불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특히 새남터성지에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들이 다수 처형된것과 달리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평신도들이 주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소의문 지역에 도로와 경의선 철도를 낸다는 명분으로 소의문을 헐어버렸다
그렇게 1914년 헐려버린 이후 이 지역은 "서소문이 있었대" 정도만 남게 된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략 지금의 서소문역사공원 주변 경찰청 앞 사거리에서 한 블럭 더 들어간 샛길 분기점이 소의문이 있었을거라 추정되는 지역이다
시위병영 터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 서소문동 58-9)
♤ 시위대(侍衛隊)
1895년(고종 32) 5월에 조직된 군대로, 왕과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던 부대이다
그러나 창설된지 불과 3개월 만에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어 훈련대 에 편입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을 러시아식으로 개편 하면서, 1897년(고종 34) 9월 30일 시위대를 다시 조직했다
그러나 1905년 4월 일제에 의해 축소됐고,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됐다
시위대 해산식은 1907년 8월 훈련원에서 있었다
당시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해산식 강행에 분개하여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후 대대장실에서 권총으 로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봉기했고 제2연대도 이에 호응했은나, 불과 2시간 만에 패배하고 말았다
시위대는 일제에 저항해서 싸운 유일한 중앙군이었으 며, 시위대의 무장봉기는 이후 의병전쟁으로 발전해 항일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시위병영터는 박승환이 대대장으로 있던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이다)
수렛골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89-11, 순화동 6-5)
수렛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 숙박시설이 몰려
있었으므로 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요즘으로 하면 택시승차장 인가???)
그리고《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수렛골에는 방이 좁고 많지 않아 젊은이들은 대청마루나 수레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렛골은 중종(中宗)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 순화빌딩 뒤에는 동화약품 건물이 있었고, 그 북쪽에는 평안교회가 있는데 이곳이 인현왕후 민씨가 태어난 곳이다
인현왕후가 태어난 집은 1984년까지 있었으나 재개발이되면서 헐리었다
《한경지략》에는 수레골에는 인현왕후 민씨가 태어난 집터가 있고, 1761년 영조(英祖)가 이곳에 행차하여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仁顯王后誕降舊基)이란 여덟 글자를 친히 썼으므로 이를 비석으로 세워 놓았다고 하였다
이 비석은 언제 없어진지 알 수 없고, 한때 정원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평안교회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89-11, 순화동 6-9)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교회로, 1951년 5월 이북 출신 피난민이 부산 보수산 중턱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평양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1953년 서울 중구 충무로3가에 교회를 설립하여 교회 확장에 힘썼으며, 1956년 평양교회와 서소문동의 서문교회가 통합하여 ‘평안교회’로 개칭하였으며, 1959년 교회당을 적벽돌 2층으로 증축하였다
1964년 현재의 순화동 대지 442평을 매입하여 1967년 교회 건물을 완공시켰으며, 다음해인 1968년에 교회의 부속건물인 교육관의 신축도 추진하였다
1974년 교회당의 종각지붕 개수를 비롯하여 교육관의 증축, 1985년 본당과 교육관의 보수 공사, 2005년 본당의 리모델링 등 지속적인 교회 건축물의 보수 공사를 통한 관리를 하고 있다
동화약방(同和藥房) (서울시 중구 순화동 5-1)
이곳 순화동 5번지는 원래 조선 숙종의 비(妃)인
인현왕후 가 탄생한 곳으로 1897년에 설립된 민족 기업인 동화약방 이 들어섰다가 1931년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법인체를 만들고 1962년 2월 이후 동화약품공업주식 회사로 상호 를 변경하였으며, 2009년 다시 동화약품주식 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까스활명수’의 아버지 윤광렬 동화약품 명예회장은 광복군 5중대장 출신이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동화약방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聯通府) 터 (서울시 중구 순화동 5-1)
1919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취하고, 국내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조직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서울연통부가 있었던 자리
♤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聯通府)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13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연통부와 교통국을 은밀히 조직하여 국내외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그 중 서울연통부는 일제와 싸우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알리고 나라 안의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고, 전달하였다
그러나 1922년 서울연통부의 활동은 일제에 의해서 저지됨으로써 주춤해졌다
♤ 민강(閔橿)
1884년 충북 청주 출신으로,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한 궁중 선전관 민병호의 아들이다
당시 궁중에서 쓰이는 생약 비방을 서양의학과 접목해 탄생한 활명수는 우리나라 제약사의 기원이기도 하다
국운이 기울던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홍량(金鴻亮)·김동삼(金東三)·오상근(吳尙根) 등 80여 명과 함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지하공작 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서소문 밖 조갯골에(蛤洞)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을 쏟았다
1919년 3·1운동 때는 이에 참가, 활동하였다
또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홍면희(洪冕熹) 등과 함께 서울·인천 등지에서 대조선 임시정부의 조직을 위한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 고, 이에 따른 연락 및 준비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23일 국민대회(세칭 한성임시 정부 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본경찰에 잡혀 곤욕을 치렀다
또한,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하는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여 포고문·선언문의 인쇄를 책임맡아 활동하였다
대동단은 그 해 11월경 이강(李堈 - 의친왕, 義親王) 을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이 사실이 일본경찰 에 발각됨으로써 1년6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1924년 교민단의사회(僑民團
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으로서 교포계몽과 후세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같은 해 3월부터는 항일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더욱 대단한 사실은 민강 사장의 사망 이후 경영권을 잡게 되었던 동화약방의 경영자들이 초대 민강 사장의 정신을 이어받아 5대 사장이었던 보당 윤창식은 조선산직장려계 라는 조직의 총무활동을 하다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고, 추후 신간회와 보린회에 대한 금전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또한 7대 사장이어떤 윤광열 명회회장은 보성전문학교(현재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일본에 강제징집이 되었지만 탈출하여 상하이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광복군 중대장을 맡았다
♤소의학교(昭義學校)
1907년 9월 인재 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경현(全景鉉)·민강(閔橿)·장경관(張敬寬) 등이 주민들과 뜻을 모아 한성 서소문 밖 조개골[蛤洞]에 초등 교육기관인 소의학교(昭義學校)로 설립하였다
초대 교장에 전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취임 하였다
설립 당시 수업연한은 4년이었고, 7∼8세에서 20세 전후의 학생 90여 명이 재학하였다
교과목은 국어·한문·일어·산술·지리·역사·수신(修身: 도덕)· 이과(理科: 자연)·체조·창가 등을 가르쳤으며, 13년 동안 10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0년 봉래동(지금의 서울 중구 만리동)으로 교사
(校舍)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3년제 을종(乙種) 상업학교 로 개편하여 소의상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22년 4월 지역 유지와 천주교회의 후원을 받아 수업연한 5년의 갑종 상업학교로 개편하면서 교명을 남대문상업학교로 변경하였다
1923년 3월 소의상업학교로 전환 이후 제1회 졸업생 32명을 배출하였으며, 당시의 교원 수는 11명이었다
1928년 예수성심학교의 중등과를 흡수하여 신학과를 병설했다
1929년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으며, 1931년 동성상업학교로 개칭하고 5학급을 설치 1938년 11월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이 설립되어 학교의 운영을 맡게 되어 노기남 대주교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4년 일제의 교회탄압에 의해 신학과가 폐지 되었다
1946년 6년제 인문계로 개편하면서 동성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50년 5월「교육법」개정에 따라 3년제 동성고등학교와 동성중학교로 개편되었다
초기의 교명인 ‘소의(昭義)’는 시대를 앞서가는 밝음 과 의로움을 상징하며, ‘동성(東星)’은 동녘의 샛별로 세상을 일깨우고 광명으로 인도함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