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서대문정거장 터 (서울시 중구 통일로4길 30, 순화동 1-1)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경성역’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서울역보다 북쪽에 있었던 폐역이다
1900년 개통된 경인선의 시발역은 서대문정거장인데 이곳이 지금의 서울역으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서울역은 당시 남대문정거장이며 초기에는 역(驛)이라 하지 않고 정거장(停車場)이라 했다
인천정거장을 제물포정거장이라 하는것도 잘못이다
서양 사람들은 인천대신 제물포를 많이 사용했지만 경인선(京仁線)의 종착지는 인천정거장이다
남대문 밖에 있는 남대문정거장은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을 대표하는 정거장으로 커지기 시작했으며 1915년부터 경성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1925년 9월 2층의 서울역사가 준공되었다
서대문정거장은 1919년 3월 31일 폐역되었다
폐역 직전인 3월 22일 <매일신보>에서는 "수년 전까지는 일,이등 승객이 남대문보다 많아서 유망한 정거장으로 인정되었더니 최근에 이르러서는 서대문에는 하루에 기차가 몇 번씩 떠나지도 아니하고 다만 석탄과 신탄이 조금씩 풀릴 뿐이므로 예전에 번창하던 자취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게 도었도다" 라며 그 풍경을 전하고 있다
(이 표지석은 원래 서대문경찰서 앞에 있었던 것을
이곳 으로 옮겼다)
♤ 경인선(京仁線)
1896년(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J. R.)가 부설권을 얻어서 1897년 3월 착공(기공)했으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하였다
1899년 9월 18일 제물포 ~ 노량진 33km 일부구간 개통하였고, 1900년 7월 한강철교의 준공 후 경성역(서대문정거장)까지 3km를 더 연장해 경인선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1900년 11월 12일 경성역(서대문정거장)에서 경인철도 완전개통식이 진행되었다
경인선 개통은 근대 교통기관을 도입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운전규정을 제정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경인선은 서울 노량진역에서 인천역간을 운행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당시에 인천 ~ 한성까지 도로로 하루 정도, 인천 ~ 마포까지 수로로 8시간 소요되던 것을 2시간 정도로 단축시킨 대단한 사건이었다
경인선의 1차 착공식이 1897년 3월 22일 우각동역 에서 거행되었고,
2차 착공식은 일본이 부설권을 사들인 이후,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진행되었다
쌀박물관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16, 충정로1가 81-3)
2012년에 개관한 쌀박물관은 쌀에 관한 정보를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다
처음보는 농기구
매통이라 불리는데 벼 껍질을 벗기는 도구로, 위짝에 벼를 넣고 위짝을 돌리면 위짝과 아래짝이 맞물린 사이로 껍질이 벗겨져 나온다
가바(GABA)
사람은 물론 동ㆍ식물, 미생물 등 자연계에도 존재하 는 안전한 신경전달 물질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현미나 녹차에 포함된 성분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가바의 효능이 처음 발견된 곳은 일본이다 (효과, 효능 등은 생략)
쇠머리찰떡이라고 하는데 충청도 향토음식 중 하나로
모두배기 또는 모듬백이라고도 한다
멥쌀가루에 익반죽(뜨거운 물로 하는 반죽)을 하여 경단을 빚어서 팥과 함께 부드럽게 삶아낸 함경도 오그랑떡
떡을 삶을 때 모양이 오그라드는 모양이라고 해서 오그랑떡이라고 이름이 유래되었다
농협박물관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16, 충정로 75-1)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농업발달과정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꾸며놓은 농업종합박물관이다
도시민과 학생들에게 농업의 중요성과 우리의 전통농경문화를 알리고자 1987년 농협이 설립하였다
♤ 벽골제(碧骨堤)
4세기경 백제에 의해 축조된 저수지 로서 우리나라 고대에 만들어진 최대의 저수지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에 있으며 사적 제111호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이사금 21년(330년)에 축조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당시 신라의 영역과 백제의 고이왕 이후 영역확장 기록을 통하여 볼 때,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의 사실을 사가의 착오로 신라측 기사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설로 역사적 검증이 더 필요함)
♤ 고구려 안악3호분(高句麗 安岳三號墳)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한 고구려 고분으로, 벽화와 비문으로 알려진 고구려 고분군의 일부이다
제작년도는 고국원왕 27년(357)으로 추정된다
(이하 상세내용 생략 ㅋㅋ)
조선시대의 과학농법 온실
처음 알았어요 우리 선조들의 지혜.....
뒤웅박
손톱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
그것도 대나무 깎아서 만들었다
이름하여 깍지
성냥, 양초, 참빗, 얼레빗, 분, 바리깡 등등 추억을 호출하는 다양한 물건들도 있고
남포등이던가?
♤ 남포등
석유(등유) 등을 넣고 그릇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유리제의 등피를 끼운 등(燈)으로 양등(洋燈), 석유램프 등으로 불리며, 영어로는 oil lamp, lantern 이라고도 한다
'남포'란 영어 단어 lamp를 구한말식으로 음역한 말이다
이곳은 또한 김종서집터이기도 하다
김종서는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무사들에 의해 아들(승규)과 함께 살해되었고 사서들에서 이름이 모두 삭제되었다
♤ 계유정난으로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닌 '공신의 나라'로 변하였다
수 많은 공신들에게 분배된 것은 권력과 재산뿐만 아니라 김종서, 황보인은 물론이며 세상을 떠난 사육신의 아내를 공신들의 첩이나 노비로 나누어주기까지 하였다
특히 신숙주는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되자 얼마 전까지 자신이 임금으로 모신 단종의 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를 자기 노비로 달라는 주청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차마 질부를 공신의 노비로 주는 행위만큼 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이를 거절하였다
동양극장 터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22, 충정로1가 68)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으로 1935년 11월 배구자와 홍순언(洪淳彦) 부부가 연극 전용극장인 동양극장을 설립하였다
배구자는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춤과 노래를 익힌 예술인 이었고 남편 홍순언은 평양 출신의 재력가였다
두 사람은 배구자 무용단을 조직해 순회공연으로 성공 하면서 흥행업에 눈을 뜬 뒤, 20여만원(홍순언의 재산 4천원과 홍순언이 일본인 와께지마 요로시의 도움으 로 상업은행에서 빌린 19만 5천원을 합한 자금)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하여 이 자리(서대문구 충정로)에 최신식 극장을 세웠다
식민지 현실이라는 시대 상황에 따라 눈물을 자아내는 슬픈 내용의 멜로드라마가 주로 사랑을 받았다
《검사와 여선생》이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홍도야 우지마라 : 원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어머니의 힘》와 같은 신파극, 《단종애사》와 같은 사극이 대표적이다
설립자 홍순언이 1938년에 요절하고, 이듬해 최독견이 19만 원의 부도를 내면서 몰락하게 되었다
동양극장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에 폐관되었으며, 이후 현대 그룹이 인수해 교육장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에 완전 철거 되었다
현재는 문화일보 사옥이 들어서 있으며, 동양극장 자리 에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西大門) 터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1, 강북삼성병원 앞)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 대문으로 이름은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 의 시발점이었으며,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었다
1396년(태조 5) 축성하였다
(당시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고개에 있었을 것이라 추정)
1413년(태종 13) 풍수지리설에 위배된다고 해 숙정문· 창의문과 함께 폐쇄하고 서전문(西箭門)을 설치
(인덕궁 앞 소동小洞에 세움 - 서전문의 위치는 아마도 사직터널 부근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1422년(세종 4)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지었다
(새로 지었다 하여 '새문' 또는 '신문'이라 하였으며, '새문안' 또는 '신문로'라는 지역명이 생겼다)
1915년, 일제는 경성(서울)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 하려했는데 돈의문이 방해가 되었다
(당시 한양의 전차 노선은 마포에서 돈의문,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
(1915년 3월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 1915년 6월 강제 철거가 완료되었다)
이후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처져 염덕기라는 자에게 205원 50전에 팔렸고 나머지 체성의 석재와 주변 성벽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되었다
♤ 돈의문 현판
현재 돈의문의 유일한 흔적이다
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내에 있음) 소장
현판 뒷면에는 '신묘년(1711) 11월 15일 유학 조윤덕이 쓰고, 기사년(1749)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라는 글이 음각되었다
♤ 서울시가 종로구 정동사거리 인근 돈의문박물관을 철거해 공원화하고 새문안로 구간에 지하도로를 만들어 그 위에 돈의문(서대문)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복원되지 않은 돈의문 (서대문)이 120년만에 복원되면 숭례문(남문), 흥인 지문(동문), 숙정문(북문)과 함께 서울 한양 도성의 4대문이 모두 완비된다
경교장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평동 108-1)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일본식 주택으로 민영휘, 김성수와 함께 3대 거부로 일컬었던 금광업자 최창학의 별장이며 1945년 11월 4일부터 1949년까지 김구의 사저이자 공관, 대한민국임시 정부 청사, 한국독립당 본부였다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 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주한중화민국 대사관저 로 활용되었다
2005년 6월 13일 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에 경교장 전체를 복원하기로 하여, 건물 내에 있던 병원 시설들을 모두 옮기고 2011년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3년 3월 1일 개관하였다
로비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건축 당시의 처음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김구선생님 집무실
임정요원들께서 사용한 숙소
1949. 6.26 안두희에게 피격된 장소
김구를 암살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는 1996년 10월23일 인천 자택에서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 이란 몽둥이로 맞아 생을 마감했다
저격으로 피 묻은 혈의(데드마스크도 있다) 배티
비밀 글을 적은 독립운동가의 팬티(눈물겹다 ㅠㅠ)
♤ 백범일지와 이광수
<백범일지>는 친일파 문인 춘원 이광수가 윤문 각색한 작품이다
백범은《백범일지》초간본에서 저자의 말을 남겼다
이 글에서 백범은 “김지림 군과 삼종질 흥두가 편집과 번역, 철자법 수정 등 궂은일을 했다” 고 서술했다
이 문장으로 인해 오랫동안 김지림이《국사본 백범일지 》의 윤문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광수가 윤문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김신이 이광수가 윤문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김신의 말을 들어 보자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친일파였던 춘원이 스스로《백범일지》의 윤문을 자청했는지, 김구가 이 광수의 윤문을 알았는지 등에 관한 사항은 향후 좀 더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이광수가《국사본 백범일지》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아무튼《백범일지》가 전 국민의 교양서로 자리 잡게 된 일등 공신은 아무래도 이광수의 몫으로 돌려야 할 듯싶다
(일지逸志 : 알려지지 않은 개인적인 기록)
4.19 혁명기념회관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17, 평동 166)
1층 로비에 당시 상황의 사진이 전시 되어있다
이곳은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자 4.19 혁명의 원인제공자 이기붕의 집이었던 곳이며, 경무대로 도주한 이기붕 가족은 그곳에서 맏아들 이강석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 동생 등 온가족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마지막으로 그 총구는 이강석 자신에게조차 예외로 하지 않았다
민주혁명........ 촛불혁명(?)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 ㅠㅠ (지금은????)
멸문지화가 되고 만 이기붕의 집은 1963년 정부의 소유가 되었고, 다시 4월혁명 단체에게 증여함으로써 현재는 관련 단체의 사무실 및 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 4.19 때 희생된 사망자 총 186명 중 학생 수는 77명 이다(대학생 22명, 고등학생 36명, 중학생과 소학생이 19명)
♤ 서울의 4.19 발상지(혜화동 동성고등학교 앞)
경기감영 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 평동 164)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 경기감사 또는 경기관찰사 가 있던 관아이다
1393년(태조 2) 설치하였고 1896년(건양 원년) 수원 으로 이전 후 군영(軍營) 으로 되었다가 1903년(광무 7) 한성부가 이전해왔다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뒤쪽에 경기감영 터 표지석이 있고
또, 4번 출구 앞쪽에 순교터 표지석도 있다
물론 경기감영 터는 하나로 현 서울적십자병원 터가 경기감영 터이다
천주교 순교터이자 신앙 증거터이기도 하다
♤ 서울적십자병원
1905년 10월 대한적십자사 창립과 동시에 개원
1907년 일본적십자사 한국본부 소속으로 변경, 동시에 폐원
1923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상설진료소 설치
1926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적십자병원으로 변경
1933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조선적십자병원으로 변경
1942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경성적십자병원으로 변경
1945년 미국적십자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변경
1949년 대한적십자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변경
1951년 대한적십자사 서귀포적십자병원으로 변경
(피난병원)
1953년 대한적십자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변경 (복귀)
적십자병원터에 있던 경기감영은 봉건지배층과 조선민중의 싸움(임오군란 -1882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일본으로, 민비는 경기도 이천으로 각각 도피하였고, 최보현(경기관찰사 - 전임 선혜청 당상) 과 민겸호(선혜청 당상)는 나중에 민중에 붙잡혀 처형 되었다
그야말로 조선민중들이 외세와 봉건지배층을 응징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 민비의 사대주의적 행위(청나라를 향한 도움 요청)와 일본의 개입 등으로 임오군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군홧발에 짓밟히기 시작한다
충정아파트를 시작으로 칠패시장 터를 거쳐 경기감영 터까지 오늘도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돈의문 밖 들러보기 잘 보았습니다. 경인선 증기기관차가 디젤기관차로 교체되면서 서울로 통학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네요. 돈의문 경고장은 가끔은 둘러보는 곳이지요.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