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있는 서삼릉은 인종 부부의 효릉 외에도 인종의 친어머니 장경왕후(1491~1515)의 희릉, 철종(재위 1849~1863)과 부인 철인왕후(1837~1878)의 예릉 등을 가리킨다. 그래서 서삼릉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삼릉은 탄생부터가 지극히 정치적이다. 1506년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재위 1506~1544)은 조강지처(단경왕후·1487~1557)를 일주일 만에 폐출시킨다. 단경왕후의 아버지(신수근·1450~1506)가 반정 가담을 거절한 죄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조강지처를 내친 중종이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이 장경왕후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515년 2월 25세에 아들(인종)을 낳고 일주일 만에 산후증으로 승하한다. 승하한 장경왕후의 능(희릉)은 태종(재위 1400~1418)의 무덤인 헌릉(서울 서초구)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당대의 권신 김안로(1481~1537)가 장경왕후의 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당시 김안로는 정적인 정광필(1462~1538)이 희릉 조성의 총책임자였다는 사실을 걸고넘어진다. “정광필 때문에 희릉이 잘못 조성됐으니 반드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정광필은 이 일로 유배형을 당하고 희릉은 고양 원당(현 서삼릉)으로 이장된다.
그리고 1544년(중종 29) 승하한 중종이 희릉의 서쪽 언덕에 묻히는데 이것이 정릉이다. 또 불과 9개월도 지나지 않은 1545년(인종 1) 인종이 효성이 가득 찬 유언을 남기고 승하한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장사 지내 달라”는 것이었다. 인종의 유언으로 효릉이 들어선다. 하지만 시퍼렇게 살아 있던 중종의 세 번째 부인(문정왕후·1501~1565)이 그냥 있지 않았다.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1565)은 봉은사 주지 보우 등과 선릉(성종 및 정현왕후릉·서울 강남구) 근처에 명당이 있다는 말을 퍼뜨리면서 정릉(중종릉)을 그곳으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종-장경왕후가 아니라 중종-문정왕후가 함께 묻혀야 한다는 계략이었다. 그렇게 정릉은 고양(서삼릉)에서 선정릉(선릉+정릉·서울 강남구)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남편과 같이 묻히겠다던 문정왕후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남편의 무덤을 옮긴 그곳이 길지가 아니라 흉지였다. 이장지로 결정된 곳은 지세가 낮았다. 해마다 정릉의 재실까지 물이 차올랐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백성이 비분강개했다”고 고발한다. 이 때문에 1565년 승하한 문정왕후는 남편과 만남을 이루지 못한 채 멀리 태릉(서울 노원구)에 묻혔다. 결국 남편과 세 부인은 서울 강남 정릉(남편 중종)과 양주 온릉(단경왕후), 고양 희릉(장경왕후), 노원 태릉(문정왕후) 등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중종의 무덤을 옮긴 결과는 더욱 참담한 재앙을 낳았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 4월 13일 왜적이 선릉(성종릉)과 정릉(중종릉)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선조수정실록>은 “(중종의) 정릉에서는 형체가 완전한 시신이 수도(隧道·묘의 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옥체(중종의 몸)가 아닌가 하여 양주 송산에 이안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릉뿐 아니라 선릉, 즉 성종(재위 1469~1494)과 정현왕후(1462~1530)의 무덤에서 불에 탄 뼛가루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뼛가루가 중종이나 성종 부부의 것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이것을 ‘이릉(二陵)의 치욕’이라 하는데 왜란 이후 윤안성(1542~1615)이 포로귀환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단에게 지은 시가 있다. ‘왜적이 훼손한 이릉(선릉과 정릉)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가 자라지 않는다(二陵松柏不生枝)’는 회한에 가득찬 내용이다.
인종은 조선 임금 가운데 최단 기간(8개월여) 재위했다. 반면 세자위에는 너무 오래 있었다. 여섯 살 때(1520) 세자 책봉 이후 25년 만인 1544년이 돼서야 왕위에 올랐다. 인종의 공식 사인은 ‘지나친 효도’였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병에 걸리자 곡기를 끊었고, 부왕이 승하하자(1544년 11월 15일) 뜰아래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 다섯 달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쇠약해진 인종은 승하하기 전날(1545년 6월 29일) 마지막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1482~1519)의 관작을 복구하라”는 특명과 함께 현량과(과거 없이 천거하는 제도)를 회복하라고 지시했다. 인종은 이튿날(1545년 7월 1일) 승하했다.
인종의 죽음은 석연치 않았다. 사실 인종에게 어려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가 있었따. 새어머니(문정왕후)다. 문정왕후는 친아들(명종·재위 1545~1567)을 옥좌에 올려놓기 위해 혈안이 됐다.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1547)·윤원형(?~1565) 형제도 인종을 끊임없이 해코지했다. 1543년(중종 38) 1월 7일 세자궁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연려실기술>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세자의 침소가 밖에서 잠겨 있었다”고 고발했다. 이때 세자가 누구(문정왕후 측)의 짓인 줄 알고 부인(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한 뒤 조용히 타 죽겠다고 했다. 그러다 세자 처소를 찾은 귀인 정씨(1520~1566)의 손에 이끌려 현장을 빠져나왔다.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인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일화가 주목을 끈다. 1545년(인종 1) 4월 인종의 건강이 악화하자 김인후가 스승의 자격을 내세워 “약제의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김인후가 어의의 처방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문정왕후의 악행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하루는 인종에게 “이제 홀로 된 첩(문정왕후 본인)과 약한 아들(훗날 명종)이 어떻게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느냐”고 괴롭혔다. 인종은 무더운 날, 맨땅에 오랫동안 엎드려 왕후의 노여움을 풀어주었다. 문정왕후가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상극인 닭죽을 바쳤고, 독이 든 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1548년(명종 3) 8월 30일자 <명종실록>은 의미심장한 기사를 전한다. 내관들끼리 한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관 김준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인종께서 돌아가신 것은 김충후와 석씨 등의 소행이야.”
<명종실록>은 해괴한 말을 내뱉은 내관 김준을 추국했다는 사실만 기록했다. 인종의 죽음이 의문사였음을 시사해준다. 인종의 승하를 전한 <인종실록> 1545년 7월 1일자가 심금을 울ㄹㄴ다. “인종이 승하한 날 궁벽한 곳에서 달려온 선비와 도성민까지 모두 제 부모를 잃은 듯 통곡했다. ‘이제야 태평시대가 열리겠다’고 기대했던 백성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삼릉에는 인종·인성왕후, 장경왕후, 철종·철인왕후 등 삼릉만 모신 게 아니다. 3기의 원(園)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 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중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1612 ~1645)의 소경원이 눈에 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1645)한 지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4일 만에 급서했다. <인조실록> 1645년 6월 27일자는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면서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고 전했다.
또 서삼릉에는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1482)의 회묘도 있다. 원래 회묘는 경기 장단군에 있었는데 연산군 즉위 후 묘소를 서울 동대문 회기동으로 이장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직후 제헌왕후로 복위되면서 회릉으로 승격됐다. 그런데 1506년에 중종반정 이후 다시 회묘로 격하되고 그후 463년 만인 1969년 서삼릉으로 이장됐다.
어디 그뿐인가. 서삼릉 한편에 조성된 태실 54기 역시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한 뒤 전국의 길지를 선정해 태반과 탯줄를 봉안하는 공간을 말한다. 그런데 일제가 1929년 전국 곳곳의 길지(명당)에 봉안돼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 54위를 서삼릉에 집단 이주시킨 것이다. 일제는 특히 새롭게 조성한 왕과 왕자(공·옹주 포함)의 공간을 ‘한 일(一)’ 자 형태로 구분했다.
멀리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 자 형태다. 땅 밑도 마찬가지다. 원형 모양의 시멘트 관에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를 날 일(日)자 형태의 시멘트 덮개를 씌웠다. 왕조의 만세 안녕을 기원하며 봉안한 조선왕가의 태를 죽음의 공간인 무덤(서삼릉)에 묻어버린 것이다. 서삼릉은 이렇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사연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