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함양군 서상면의 백운산,
함양군 서하면의 대봉산,
함양군 안의면의 기백산
[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함양군 서상면의 백운산(좌)과
함양군 서하면의 대봉산(우)
[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 도중의
등구사 갈림길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
[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삼봉산(1187m)
[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함양군(좌)과 산청군(우)
[사진 우측의 높은 산이
황매산이다.]
[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법화산(993m)
[오도재~오도봉] 구간
등산로에서 바라본
구름에 덮힌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1915m)
오도봉(悟道峰, 1,039m) 정상에서
이성수
오도봉(悟道峰, 1,039m) 정상에서
이성수
오도봉(悟道峰, 1,039m) 정상에 있는
이정표
삼봉산(三峯山, 1,187m) 정상에서
이성수
삼봉산(三峯山, 1,187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
삼봉산(三峯山, 1,187m) 정상에서
이성수
삼봉산(三峯山, 1,187m) 정상에서 바라본
오도봉(좌, 1039m)과 법화산(우, 993m)
삼봉산(三峯山, 1,187m) 정상에서 바라본
법화산(좌, 993m)과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우, 1915m)
삼봉산(三峯山, 1,187m)에 관한
안내문
[삼봉산~등구재] 구간 산행로 도중의
창원산촌생태마을 갈림길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
[삼봉산~등구재] 구간
산행로 도중의
소나무숲길
삼봉산과 백운산의 중간에 있는 고개인
등구재에 있는
이정표
등구재에 관한
안내문
지리산 둘레길의 통과지점이기도 한
등구재
[등구재~백운산] 구간
산행로 주변의
야생화
[등구재~백운산] 구간
산행로 주변의
야생화
백운산(白雲山, 902.7m) 정상에서
이성수
백운산(白雲山, 902.7m) 정상에 있는
이정표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삼봉산(좌, 1187m)과 법화산(우, 993m)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6장의 사진은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금대산(847m)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천왕봉~반야봉] 연결 지리산 주능선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삼정산과
그 뒤로 보이는
지리산 주능선(좌)과 [만복대~덕두산] 연결 지리산 서북능선(우)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등구재로 이어지는 지나온 능선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삼봉산(좌, 1187m)과 법화산(우, 993m)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올라가야 할
금대산(847m)
[백운산~금대산] 구간
산행로 도중의
전망바위
[전망바위~금대산] 구간
산행로에서 뒤돌아본
백운산(902.7m)
[전망바위~금대산] 구간
산행로에서 뒤돌아본
백운산(좌, 902.7m )과 삼봉산(우, 1187m)
[전망바위~금대산] 구간 산행로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백운산(위)과 전망바위(아래)
금대산(847m) 정상에서
이성수 등산 배낭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지리산 서북능선, 백운산, 서룡산, 투구봉
[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8장의 사진은
금대산(847m) 정상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삼봉산(좌, 1187m)과 법화산(우, 993m)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법화산(좌, 993m)과 와불산(우, 1214m)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와불산, 지리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좌로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영신봉, 덕평봉, 형제봉, 토끼봉, 삼도봉, 반야봉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지리산 주능선, 삼정산, 지리산 서북능선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지리산 서북능선, 백운산, 서룡산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지리산 서북능선, 백운산, 서룡산, 투구봉, 삼봉산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금대산(847m) 정상에 있는
이정표
금대산(847m) 정상에서 바라본
창암산과
그 뒤로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
금대산(847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지리산의
(좌로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삼신봉, 촛대봉, 영신봉
금대산(847m) 정상에서
줌으로 더욱 확대촬영한
지리산의 (좌로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금대산(847m) 정상
[금대산~금대암] 구간
산행로 도중의
석문
[금대산~금대암] 구간
산행로 도중의
기암
2024년05월11일(토요일) 함양군 [오도봉&삼봉산&백운산&금대산&금대암] 산행기 회비 44,900원 4월17일 송금필, 10열 C좌석 예약 산 : 함양군 [오도봉&삼봉산&백운산&금대산&금대암] [코끼리를 타고 코끼리 전체를 자세히 볼 수 없듯 지리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지리산 인근의 봉우리, 바로 함양의 삼봉산과 금대산이다. 서쪽에는 백두대간이 길고 긴 병풍을 치고 있고, 남북으로 각각 지리와 덕유가 첩첩이 벽을 두르고 있는 산의 고장 함양땅에서 삼봉산과 금대산은 사실 명함 내놓기가 좀 쑥스럽다. 산세로 봐서 거망산이나 황석산에 비할까, 해발고도로 남덕유산에 갖다 붙일까. 어디 하나 뚜렷하게 내세울 것 없는 삼봉산과 금대산이 전국 산꾼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까닭은 바로 조망의 산, 다시 말해 '지리산 전망대'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삼봉산과 금대산보다 지리산 주능선에 더 가까이 위치한 삼정산도 지리산 전망대라 할 수 있다. 허나, 너무 턱 밑에 있어 일부 봉우리가 인근 봉우리와 겹쳐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산꾼들은 "삼봉산과 금대산에 서면 서쪽 끝단의 노고단을 제외한 지리산 주능선의 모든 봉우리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주요 계곡들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산행코스의 들머리이자 함양읍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오도령 정상에 새로운 볼거리인 '지리산 제일문'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리산 제일문 산신각은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마당 중 하나인 가루지기전의 변강쇠와 옹녀가 전국을 떠돌다가 마지막에 정착해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행코스: [오도재~오도봉~삼봉산~등구재~백운산~전망바위~금대산~금대암~당흥 버스 정류장] (약 12km) 일시 : 2024년 05월 11일(토요일) 날씨 : 높은 구름이 낀 맑은 날씨 [함양군 마천면 최저기온 11도C, 최고기온 24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5시간48분 소요) 07:07~10:49 "엠티산악회" 버스로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4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오도재로 이동 (282km) [3시간42분 소요] [오도재는 경상남도 함양군의 마천면 구양리와 함양읍 구룡리 사이를 넘는 고개이다. 오도령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유랑의 고개이자 함양사람들이 남쪽의 남해와 하동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 지리산 벽소령이나 장터목으로 가려면 넘어야 했던 생존의 길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함양)과 『천령지』에, "오도재[悟道峙]는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다. 1716년에 승려 탄천(坦天)이 쓴 『등구사적기(登龜寺蹟記)』에도 지리산에 들어와 머물 곳을 찾으려고 오도치(悟道峙)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1807년에 지리산을 유람하였던 남주헌(1769~1821)의 『지리산산행기(智異山山行記)』에도 벽송정(碧松亭)을 거쳐 오도치(悟道峙)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나온다. 『함양군지』에는 "지금의 휴천과 마천의 경계에 있다. 삼봉산이 동쪽으로 내달은 것이 이 고개이다. 높이는 773m이다. 유호인(俞好仁)의 시가 있다."라고 하였다. 『영남지도』(함양), 『광여도』(함양), 『1872년지방지도』(함양)에서 오도치가 표기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오도재의 길목에 오도봉(悟道峯)을 표시하였다. 이 길을 오르게 되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김종직, 정여창, 유호인, 서산대사, 인오대사 등 많은 유학자들과 수행자들이 넘었던 고개라고 한다.] [오도재(悟道峙)는 삼정리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청매 인오조사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면서 득도한 연유로 오도재라 불렀다고 한다. 오도재 정상의 남쪽에 위치한 지리산 전망대 입구에 청매(靑梅) 인오(印悟)조사의 시비가 있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깨달을 각(覺)이 12번 나오는 그 유명한 '12각시'다. 인오조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끈 분이다. 그는 마천면 삼정리의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였는데, 틈틈이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모아 함양 장터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고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어 누구든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이 고개를 넘어 장터를 오가던 어느 날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오도재의 오도(悟道)는 '도를 깨우치다'라는 뜻이다. 오도재는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가장 단거리 코스로, 2004년 개통하여 도로의 기능뿐 아니라, 재를 넘어 뱀같이 구불구불하게 난 길은 새로운 명물로서,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오도재 정상 바로 아래에 지리산 주능선(노고단~천왕봉)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드넓은 지리산 조망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 아니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으면, 속세의 모든 근심을 잊고 호연지기가 절로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거 오도재 정상에는 방장 제1문이 2개 있었으나, 나무로 된 문은 6.25전쟁 때 불타고 없어졌으며, 돌로 된 문의 일부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 2005년 초에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 제1문의 표지석과 바위에 새겨진 방장 제1문에 관한 칠언시를 찾아냄으로써, 지리산 제1문의 역사성이 증명되었으며, 함양군에서는 2006년 11월 1일 지리산 제1문을 오도재 정상에 새로이 준공하였다.] [현재 오도재 정상으로는 1023번 지방도가 통과하고 있다. 마치 뱀이 스르륵 지나간 자리 같기도 한 오도재 구간의 이 도로는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야간 차량궤적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2006년 건설교통부에서 주관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오도재 정상에는 지리산 제1문이 거대한 성루처럼 서 있고 고개의 남쪽 사면에는 지리산조망공원 휴게소가 조성되어 있다. 함양군 함양읍에서 마천면으로 가는 길은 지리산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으로 향하는 길인데 이 길로 가려면 오도재를 넘어야 한다. 오도재는 옛날 내륙지방 사람들이 지리산 장터목과 벽소령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로 남해와 하동의 물산들이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던 육상 교역로였다.] [경남 함양 지리산 가는 길, 지안재와 오도재…돌고 도는 고갯길…인생길 닮았구나 영남일보 기사 입력 : 2024-05-03 07:53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명징하게 구속된 속도를 의식적으로 지키고 있다.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량이 뜸한 시골길에서도. 몇몇 차들이 바쁜 아침처럼 꽁무니를 보이며 쌩하니 멀어지면 속도계를 본다. 내가 너무 느린가. 그러다 난데없는 커다란 오토바이가 나를 앞지른다. 헬멧 아래 삐져나온 백발의 머리칼이 긴 강물 같은 잔상을 남긴다. 그 하얀 물결 따라 함양읍 구룡리 옥녀봉 아래에서 '지리산 가는 길'로 들어선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직선 길을 지나 팔령천을 건너고 조동마을을 스쳐 이제 꼬부랑길을 천천히 오른다. 저 앞에서 굽이마다 아슬아슬 기울어지는 오토바이는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지만 넘어지지 않고, 멈추지도 않고, 고갯마루를 넘어 사라진다. 남겨진 고갯마루에 사람들이 서 있다. ◆지안재 느리게 여섯 번 반을 굽이돌아 고갯마루에 올라 멈춘다. 고개는 지안재다. 함양읍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2004년에 개통됐다. 워낙 경사가 급한 산길이라 안전을 위해 구불구불 완만하게 돌아가는 도로를 낸 것이 지금의 지안재 모습이다. 재 아래 조동(棗洞)마을은 대추나무가 많다고 대추지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팔령천을 사이에 두고 제한(蹄閒)마을과 조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안재는 제한치(蹄閑峙)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가파른 고갯길에 '말발굽도 쉬어간다'는 뜻이다. 제한은 조동마을의 자연부락으로 옛날 역(驛)이 있었던 곳이다. 제한역은 조선 세종 때인 1438년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경상도 함양의 새 역은 '제한'이라 칭한다'라는 기록이다. 동쪽의 사근역(沙斤驛)과 서쪽의 인월역(引月驛)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아마 제한역은 두 역 사이에서 임시로 쉬어가는 역할을 하다 세종 때 정식 역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역 주변에는 역참 관원들에게 딸린 식솔과 물자공급 등을 위한 촌락이 형성되어 제한촌이라 했다. 제한촌의 뒤에 있는 고개가 제한치다. 제한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기 쉬운 지안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진다. 역명은 대개 지명을 따르는데 이곳만은 거꾸로 역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즉 역로는 제한역에서 지안재가 아니라 팔령천을 따라 팔랑치 너머 인월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지안재에서 말발굽을 쉬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꾸역꾸역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고개를 올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거듭거듭 그리하여 오솔길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침내 지금의 길이 났을지도 모른다. 길이 닦인 지 벌써 20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멈추어 쉬어 간다. 지안재는 오도재 아래의 작은 고개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안재'라 따로 구분해서 부른다는데 함양 쪽에서는 그냥 통칭 '오도재'라 부른다. 나는 함양사람도 아닌데 2007년 처음 이 고개를 넘고는 십수 년을 오도재라 했다. 이후 '지리산 가는 길' 따라 지안재를 넘고 오도재를 넘은 것이 족히 예닐곱 번이건만 지안재의 모습은 잊지 못하면서 이름은 자꾸만 잊었다. ◆오도재 사방으로 바짝 좁혀진 골짜기로 든다. 청단풍과 홍단풍이 계절을 뒤죽박죽 엉켜놓은 산길을 따라 더욱 높은 오도재로 향한다. 오도재는 삼봉산과 법화산 사이, 능선의 고도가 낮아지는 잘록한 안부(鞍部)에 있다. 함양에서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 그리고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다. 옛날 지리산골 마천사람들은 함양장날마다 나뭇짐을 짊어지고 이 고개를 넘었다.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와 하동 등지의 소금과 해산물도 이 고개를 넘어 내륙지방으로 운송되었다. 잿마루에 '지리산제일문'이 우뚝 서 있다. 현판은 함양 출신의 명필가 정주상 선생의 글씨라 한다. 문 아래에 함양 방향을 조망하는 전망대와 매점, 화장실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 입구에 청매(靑梅) 인오(印悟)조사의 시비가 있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깨달을 각(覺)이 12번 나오는 그 유명한 '12각시'다. 인오조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끈 분이다. 그는 마천면 삼정리의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였는데, 틈틈이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모아 함양 장터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고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어 누구든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이 고개를 넘어 장터를 오가던 어느 날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오도재의 오도(悟道)는 '도를 깨우치다'라는 뜻이다. '지리산제일문' 옆 숲속에 산신각이 있다. 두 여인이 앉아 치성을 드리는데 아름다운 수목들 사이로 볕뉘가 어른대어 어쩐지 가슴이 미어진다. 가야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은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국하고 9만 대군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가 잠시 머문 곳이 조동마을 아래 구만동이고, 대궐터를 잡은 곳이 오도재 넘어 추동이다. 그리고 다시 보다 깊은 칠선계곡으로 피란한다. 구형왕의 왕후인 계화부인은 오도재에 올라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후 성황당이 생겼고, 지나는 길손들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냈다. 그 자리에 지금 산신각이 있다. 그녀들의 비손 위에 나의 기도를 슬쩍 얹고는 발걸음도 살금살금 숲을 빠져나온다. 여섯번 반 굽이도는 지안재 도로 2004년 개통 오도재 잿마루에 관문 '지리산제일문' 들어서 조선 청매인오 선사 고개 넘나들다 큰 깨달음 '지리산조망공원' 웅장한 지리산 능선 한눈에 오도재를 넘어 조금 내려가면 '지리산조망공원'이다. 지리산 산신인 마고할미가 천왕봉을 머리에 얹고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녀 너머로 지리산의 능선이 한눈에 담긴다. 조 아래가 추동, 저 아래가 마천, 천왕봉 너머는 하동과 구례다. 김종직과 정여창과 김일손과 유호인 등이 이 고개에 멈추어 지리산을 노래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청매선사 등 승군이 이 고개에 머물렀다. 이 고개의 동쪽 산청 땅에 구형왕의 무덤이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은 무력, 무력의 손자는 김유신이다. 어느 날은 안개였고 어느 날은 비였고 어느 날은 멈추었고 어느 날은 스쳤다. '지리산 가는 길'은 맥락 없이 자꾸만 이어지는 이름들의 길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시간들의 길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감쪽같이 잊어버릴 이름들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가끔 생각날 시간들이다.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함양IC에서 내려 톨게이트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함양 방향으로 간다. 주차장사거리에서 24번국도 남원 방향, 난평삼거리에서 지리산, 남원, 마천 방향으로 가다 '지리산 가는 길'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지안재 넘어 오도재에 이른다.] 10:49~10:59 경남 함양군 휴천면 월평리 산 123-20 번지에 있는 오도재(해발 773m)에서 지리산 제1문, 전망대에서 바라본 함양읍 방향 조망 풍경, 조선시대 유명인사들이 지리산을 주제로 지은 詩를 새긴 詩碑, 오도령 수호신위 산신비, 구형왕의 왕후인 계화부인이 제단을 쌓고 선왕들의 명복을 기원하던 자리에 세운 산신각 등을 사진촬영 [오도재는 판소리 변강쇠가(가루지기타령)의 배경지로 의미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유랑민이었던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의 품인 오도재 인근에 정착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변강쇠가에 나오는 지명인 등구마천 가는 길은 오도재 길과 일치한다. 변강쇠는 옹녀가 나무를 해오라고 하자 산에서 등구마천의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다가 저물녘에 나무 장승을 뽑아간다. 이 때에 둥구마천 백모촌에 여러 초군 아이들이 나무하러 몰려 와서 지게 목발 뚜드리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농부가(農夫歌), 목동가(牧童歌)로 장난을 하는구나. (중략) 사면을 둘러보니 둥구마천 가는 길에 어떠한 장승 하나 산중에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하여, 벌목정정(伐木丁丁)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저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이내 신세 불로이득(不勞而得) 좋을씨고. 동리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 수궁가, 적벽가와 변강쇠가(변강쇠타령)의 판소리 6마당을 정리하였다. 변강쇠타령은 가루지기타령, 횡부가(橫負歌), 송장가, 변강쇠전이라고도 한다. 변강쇠가는 온달설화와 같은 상여부착설화(喪輿附着說話), 아홉 번 결혼한 여자의 이야기인 구부총설화(九夫塚說話), 장승 동티의 민속적 금기(禁忌)와 시체를 가로지는 관습적 사실 등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가루지기는 옛날에 평민이나 천민이 상여 없이 시신을 거적에 말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던 치상(治喪) 방식이었다. 잡놈이라 배척받는 부평초 같은 변강쇠는 남쪽 지방의 유랑민이고 과부 운명을 팔자로 타고나서 마을에서 쫓겨난 옹녀는 북쪽 지방의 유랑민으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어도 유랑할 수밖에 없다. 옹녀는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변강쇠는 옹녀가 모아놓은 작은 재물까지 다 탕진한다. 결국 이 부부는 유랑 생활을 그만두고 지리산에 머물게 된다.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서 장승을 빼어 오고 장승을 패서 장작을 만들어 아궁이에 군불로 땐다. 변강쇠는 자다가 장승 동티로 장승처럼 선 채로 죽는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전반부 1/3 분량의 내용이다. 작품의 후반부 2/3의 분량은 옹녀가 변강쇠의 초상을 치르는 과정이다. 옹녀는 초상을 치러 주는 남자와 같이 살겠다며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초상을 치르러 온 유랑민 남자들도 차례로 변강쇠의 시체에 붙어서 죽는다. 이윽고 굿판이 벌어지고 시체들이 분리되며 초상을 치르게 된다. 시체들의 초상을 치른 한양의 재상댁(宰相宅) 마종(馬從)인 뎁득은 옹녀 곁을 떠난다. 옹녀는 유랑민의 처지로 어떻게든 정착하여 살아보려는 백성이었다. 지리산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백성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생명의 땅이었다. 변강쇠전의 중심 테마는 외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 일부 나타난 음담패설은 변강쇠와 옹녀의 원초적 본능을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변강쇠가는 조선 시대 후기 유랑민들의 비극적 생활상을 희극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변강쇠가 장작으로 패서 불 땐 장승은 봉건 시대의 윤리와 사회 질서를 상징할 수 있다. 장승처럼 서서 죽은 변강쇠의 시체는 어쩌면 우뚝 서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하는 새로운 장승이 아닐까?] 10:59~11:51 오도봉(悟道峰, 1,039m) 정상으로 이동 [천 년의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지리산 명당 함양 연화봉 등구사(登龜寺)의 역사 문화 찾기 여행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24.01.29. 시민기자 : 이완우(lwanwoo) 전북 남원시 인월면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까지 이어지는 20.5km의 지리산 둘레길 3코스 구간은 등구재(登龜峙)를 지나면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기 좋은 산길이다. 함양에서 지리산 가는 길의 관문인 오도재(悟道峙)를 넘으면 곧 지리산 조망공원에 이르는데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펼쳐지는 장엄한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렇게 등구재를 넘거나 오도재를 넘어 찾아가는 '등구 마천' 지역은 예로부터 지리산으로 향하는 으뜸 나들목이었다. 등구 마천 큰애기는 곶감 깎으러 다 나가고, 지리산에 줄 박달은 처녀 손길에 다 녹는다' 이 민요의 가사처럼 지리산 어귀의 '등구 마천'은 곶감으로 유명하였다. 이곳 처녀들이 늦가을이면 곶감을 깎아서 박달나무 막대에 매달았다. 고전문학 판소리 '변강쇠가'에서 변강쇠가 옹녀와 함께 '등구 마천'을 찾아간다. 이렇게 '등구 마천'은 지리산의 가는 길이며 험한 산골의 대명사였다. 지리산 계곡에 매서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는 1월 하순에, 감나무 줄기 껍질이 거북 등같이 검게 얼어붙은 '등구 마천'의 등구사(登龜寺)를 찾아갔다. 함양군 '등구 마천'의 오도재와 삼봉산을 잇는 산줄기에 오도봉(1,038.5m)이 있고, 이 산봉우리 남쪽 산자락의 촉동마을 뒤쪽 연화봉(蓮花峰)에 등구사가 있다. 이 절집은 20여 년 전부터 가람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데, 수백 년 동안 폐허로 잡초만 무성했던 빈터의 허허로움은 여전하다. 이곳 지형이 신령한 거북이가 팔괘(八卦)를 등에 지고 연화봉에서 삼봉산을 바라보며 하늘로 기어 올라가는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등구'란 지명이 천 년의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이 등구사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 ?~557, 재위 521~532?)의 전설이 전해온다. 532년에 신라(법흥왕)가 금관가야를 침공했다. 구형왕은 '백성들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며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고,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함양과 산청 지역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 함양군의 지리산 '등구 마천'에 구형왕이 머물렀다가 칠선계곡으로 떠났다. 이 지역은 왕이 떠났으므로 '빈 대궐'로 남아서 폐허가 되었고, 칠선계곡에는 석성인 추성(秋城), 대궐터, 파수대와 뒤주터 등이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촉동마을 뒤 골짜기 연화봉에 등구사가 위치하는 곳을 빈대궐 또는 빈대골이라 부른다. 구형왕은 칠선계곡에서도 다시 산청 왕산으로 옮겨가고, 구형왕릉이라 추정되는 흙 한 줌 없는 커다란 돌무덤을 남겼다.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사후 백년쯤 지나서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595~673) 장군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해발 700여m 고지에 위치한 겨울 등구사의 추위가 매섭다. 등구사의 허허로운 가람 뜰에서 지리산 주능선의 이어진 연봉을 바라본다.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과 촛대봉 등 지리산 주능선의 흐름이 '등구 마천'의 등구사에서는 큰 바다에서 출렁이는 거센 파도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조망을 연출한다. 지리산 '등구 마천'에는 570년대에 진평왕이 10살 어린 시절(왕이 되기 전)에 3년 동안 지냈던 곳이다. 진평왕은 신라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지리산 '등구 마천'에 군자사(君子寺)를 창건했다. 진평왕의 외손주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603~661)는 656년, 군자사가 있는 지리산 '등구 마천'에 등구사를 안국사, 금대암과 함께 세웠다. '등구 마천'의 등구사, 안국사와 금대암 세 사찰은 불교음악인 범패와 인연도 깊다. 범패를 기록한 서적인 「어산청유상록서魚山廳留上錄序」에는 진감선사(774~850)가 도입한 범패가 함양 안국사와 등구사에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범패는 9세기 초반 지리산 하동에서 꽃을 피우다가 9세기 후에는 이렇듯 지리산 '등구 마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에 금대암이 범패 수련 사찰이라는 기록이 지리산 여행 기록인 '두류기행록'에 있다. 이곳 등구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불이 나서 빈터로 남아 있다가, 언젠가 중건되어 15세기에는 지리산 유람기에 이 사찰이 기록된다. 그 후에 다시 폐허가 되었다가 18세기 초에 안국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평평한 지형에 있는 등구사를 재건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 뒤에 등구사가 또다시 폐허 되고 최근 가람의 형태를 되찾고 있어 무상(無常)한 부침(浮沈)을 계속하고 있다. 오랜 세월 폐사지(廢寺址)였던 등구사의 빈터가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예스런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너럭바위 위에 거북이 알 같은 원구형의 바위가 놓여 있다. 등구사 가람에 흐르는 작은 개울을 건너는 연화교(蓮花橋)의 다리 난간에 석조 거북 형상이 있어 눈길이 머문다. 거북은 가락국의 토템이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을 맞이하며 백성들이 구지봉에서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를 지리산 연화봉 거북 지형의 등구사에서 읊어본다. 금관가야의 구형황이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낙동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와 지리산의 '등구 마천' 거북 지형을 찾아온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거북은 김수로왕 때부터 강력했던 가야의 해양 세력 선단(船團)을 상징했던 것이 아닐까? 지리산 '등구 마천' 등구사에는 허허로운 가람의 너럭바위 위에 호젓이 놓여 있는 둥근 바위가 있다. 금관가야 너른 바다를 꿈꾸는 거북이 알처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이곳 '등구 마천'의 물줄기는 금관가야의 고향 낙동강과 바다로 이어진다. 해양을 터전 삼아 대륙으로 소통하고 무역하며 활발히 활동 범위를 넓혀가며, 한때는 역사의 주역이었던 가야의 꿈이 미래에 이 땅에서 되살아나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지리산 '등구 마천'의 등구사 여행은 맥놀이를 거듭하는 범종의 소리처럼 여운으로 오래 남았다.] 11:51~11:55 사진촬영 11:55~12:39 삼봉산(三峯山, 1,187m) 정상으로 이동 [함양 삼봉산(三峯山)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일대에 있는 산. [명칭 유래] 삼봉산은 투구봉·촛대봉·삼봉산 세 봉우리를 합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자연환경] 삼봉산의 산줄기는 크게 알파벳 대문자 ‘T’자 형태를 이룬다. 서룡산-투구봉-삼봉산으로 동서 방향의 산줄기가 이어지고 다시 삼봉산-백운산-금대산으로 남북 방향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삼봉산 정상은 두 능선부의 결절점에 해당한다. 삼봉산의 동쪽 능선부에는 오도재가 자리하고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능선부에는 등구재가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대산 아래로는 지리산 산지와의 사이에 임천이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현황] 함양군 마천면 구양리·창원리,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 일대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187m이다. 삼봉산은 지리산을 시원스레 볼 수 있는 ‘조망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삼봉산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위시해 지리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함양군 마천면의 등구마을과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팔량재를 지나 경상남도 함양과 전라북도 남원의 경계 능선을 따라가다 남덕유산의 산줄기도 볼 수 있어 삼봉산은 지리산과 덕유산, 백운산, 금대산, 기백산 등을 모두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힌다. 삼봉산 산지의 북쪽 사면으로는 삼봉산 국유림경영시범림이 조성되어 있다. 함양에서 삼봉산을 오를 경우 산행은 주로 함양과 전라북도 남원의 경계인 팔량재에서 시작하며 투구봉을 거쳐 삼봉산 정상에서 오도재로 향하거나 남쪽 금대산으로 하산한다.] [삼봉산 정상에는 삼각점과 이정표가 있다. 서쪽으로 가는 오른쪽 능선 길은 투구봉 서룡산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가는 왼쪽 길은 등구재를 거쳐 백운산 금대산으로 이어진다] 12:39~12:44 사진촬영 12:44~13:55 삼봉산과 백운산의 사이에 있는 고개인 등구재로 이동 [등구재의 높이는 해발 650m이다. 삼봉산(1,186.7m)과 백운산(902.7m) 사이에 있는 안부(鞍部; 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에 걸쳐 있다. 아홉 구비를 오르는 고개라는 의미로 등구치(登九峙)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날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는데 함양에서 이 고갯길을 넘어 지리산 성삼재에 이르고 구례까지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고개 양옆으로 흐르는 물줄기들은 남천으로 흘러들어 간다. 고개 바로 아래에 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가까이에 지방도 60번과 1023번이 지나간다.] 13:55~13:59 물을 마시면서 휴식 13:59~14:32 백운산(白雲山, 904m) 정상으로 이동 [정상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서 조망은 힘들고 정상표지석과 삼각점이 산객을 반겨준다] 14:32~14:35 사진촬영 14:35~14:50 [백운산~금대산] 연결 능선 도중에 있는 전망바위로 이동 14:50~14:54 전망바위에서 파노라마 조망 풍경을 사진촬영 14:54~15:02 금대산(金臺山, 852m) 정상으로 이동 [금대산 암봉 정상에 올라서자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왼쪽 끝에서부터 상내봉 새봉 쑥밭재, 두류봉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벽소령 형제봉 반야봉 만복대 고리봉 세걸산 바래봉을 거쳐, 지리산 대종주의 마지막 봉우리인 덕두산까지, 반야봉이 가리고 있는 노고단만 빼고는 다 보인다. 게다가 광점골 국골 칠선계곡 백무동계곡 광대골 등 눈 밝은 사람이라면 지리산 주요계곡들의 흔적까지 일별할 수 있다.] [한 승려가 입 벌린 채 구경했다는 지리산 제일 전망대 함양 금대산 금대암의 역사 문화 탐방 기행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23.12.11. 글 : 이완우(lwanwoo) 12월 중순인데도 봄날처럼 따뜻한 날씨였다. 지리산 자락의 경남 함양 금대산(金臺山, 851.5m)으로 오르는 산길 길섶에는 쑥부쟁이의 연보라색 꽃이 반갑게 남아 있었다. 함양 마천면은 예로부터 지리산 가는 으뜸 관문이었으며, 지리산을 조망하는 이름난 전망대가 많았다. 오도재 위의 삼봉산과 마천의 임천(瀶川)을 내려다보는 금대산 등, 이 지역은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에서 지리산을 전망하기 좋은 지형이다. 함양 마천면의 금대산은 임천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어서 산줄기로는 지리산 주능선에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금대산에 있는 금대암과 안국사 등의 사찰을 지리산 절집으로 기록했다. 임천강 물줄기의 근원을 지리산의 만복대 반야봉과 노고단 등의 지리산 주능선으로 보았고, 지리산의 개념을 산줄기와 물줄기를 통합하여 이해한 것이다. 함양 금대산은 '지리방장 제일금대(智異方丈 第一金臺)'로 알려져 왔다. 지리산에서 이곳 금대산 또는 금대암이 으뜸가는 전망대라는 의미이다. 부처가 앉는 자리인 연화대를 금대라고 하는데,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 정토에서 공덕이 으뜸인 자에게 앉게 하는 자리를 금대라고도 한다. 마천면의 임천 옆 도로에서 건너편 도마 마을의 그림처럼 펼쳐진 다랑논 논배미를 보며 금대암까지 2.5km의 임도를 올라갔다. 이 임도의 중간 지점에 안국사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다. 금대암 가는 임도는 경사도가 만만치 않으며 산줄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금대암에 이르면 암자 앞에 높이 40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고 수령이라는 전나무가 눈에 띈다. 이 전나무가 지리산의 기상을 표상하는 듯하다. 나한전 옆에 집채만 하게 우람한 너럭바위 윗면은 천연 좌대(坐臺)로서 이곳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는 조망은 장엄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의 지리산 주능선과 서북능선이 함양 마천면을 중심으로 활처럼 휘어져 생동감 넘치는 전망이 펼쳐졌다. 금대암에는 도선 국사의 일화(逸話)가 전해온다. 그가 지리산 여러 곳을 돌아보며 수행하면서 이곳 금대암 너럭바위에 이르러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을 보았다. 그는 사흘 동안이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그 전망에 감탄했다고 한다. 도선 국사는 이곳에 머물러서 이 바위 옆에 나한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 관리나 선비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에는 함양에서 지리산의 유산(遊山)을 출발하는 사례가 많았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에게 유산은 심성 수양의 실천과 탐구의 과정이었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두류기행록'에 의하면 그가 이곳 금대암을 방문(1489년 4월 16일)하여 승려들의 범패 수련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당시 한 승려가 물을 긷고 있었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어 반쯤 시들었어도 매우 붉었다. 승려 20여 명이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속도가 매우 빨랐다. 금대암이 범패의 정진 도량이라고 한다. 그 법이 정일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한다고 했다. 함양 금대산 지역은 신라의 정치 세력과 관련이 깊다. 태종 무열왕 때인 656년에 이 산에 안국사와 금대암을 함께 창건하였다. 이곳 금대암에서 임천 건너 내려다보이는 군자리에 있었던 군자사(君子寺)는 태종 무열왕의 외조부인 진평왕이 어린 시절 3년간 머물렀던 잠저 터이다. 군자사는 천년 사찰로 조선 시대 중기까지 건재하였고, 금대암과 군자사는 지리산 유람을 시작하는 거점이었다. 조선 시대에 선비나 관리들은 금대산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조망하고, 금대산을 내려가 군자사에 며칠씩 머물기도 하였다. 유서 깊은 천년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군사사터를 금대암에서 가늠해 본다.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의 '유두류산기'에 그가 지리산을 유산하며 군자사에 머물렀던 기록을 남겼다. 대전(大展)과 방옥(房屋)이 모두 매우 크고 화려하다. 절 서편에는 새로 지은 별전이 하나 있는데 금빛과 푸른빛으로 화려하게 단청하였고 '삼영당(三影堂)'이라 한다. 이 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과 청매(靑梅) 세 대사의 진영(眞影)이 있다. 금대산 정상은 금대암에서 0.7km 능선 길을 올라가야 한다. 함양 마천면 지역은 노출된 바위와 기반암이 검은색이 짙은 석질이 좋은 마천석 화강암이다. 산 능선에 돌출한 검은색 화강암 바위들은 품격이 출중하다. 산 능선 산길 양쪽에 집채만 한 바위가 비스듬히 맞대 산길이 천연 방장을 이루고 있다. 비바람을 피하며 머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되겠다. 금대산 산마루에 커다란 바위들이 모여 앉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가깝게 등구 마을이 보이고, 오도재가 보였다. 휴천면으로 흐르는 임천강이 보이고, 천왕봉 아래 칠선 계곡이 보였다. 지리산 천왕봉, 중봉, 제석봉에서 반야봉까지 생동감 넘치는 기상으로 주능선이 이어지고 있다. 금대산 정상에서 백운산(白雲山, 903m)으로 향하는 1km의 능선 길은 돌출된 바위와 울창한 숲을 지난다. 백운산 정상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지리산 조망이 쉽지 않았다. 지리산은 청산으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데, 백운산은 흰 구름이 오고 가고 있으며 한가로웠다. 금대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산마루 구간은 지리산의 동부능선에서 서북능선까지 잘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힌다. 백운산에서 손에 잡힐 듯한 풍경으로 오도재와 삼봉산을 조망하고, 금대산으로 되돌아왔다. 금대산에서 안국사 방향으로 내려오는 지름길은 조릿대 군락 사이로 오솔길이 선명했다. 조릿대 잎이 숲속 바람에 흔들리는데, 습기 머금은 오솔길의 황토색 토양은 먼지 없이 깨끗하였다. 금대산을 내려오면서 내내 생각해 보았다. 금대산이 지리산의 드높고 맑은 기상을 품고 싶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염원이 서린 산이 아니었을까? 금대산과 금대암의 시대를 초월하여 금빛으로 빛나는 '금대(金臺)'에서 속세의 인연으로는 태종 무열왕의 사위가 되는 원효 대사의 정토 사상이 연꽃 향기처럼 피어나고 있는 듯했다. 지리산 여느 산줄기의 등산은 수려한 지리산 자연의 풍광에 더하여 역사와 설화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인문학적 유산(遊山)으로서 의미가 새롭다. 임천강변의 우람한 '지리방장 제일금대(智異方丈 第一金臺)'의 표지석은 지리산 제일 전망대로 여겨지는 금대산 탐방의 설레는 시점이며 뿌듯한 종점이었다.] 15:02~15:10 금대산 정상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포함한 파노라마 조망 풍경을 사진촬영 15:10~15:32 금대암(金臺庵)으로 이동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 함양 금대암(金臺庵) 한국농어민신문 기사 승인 2022.11.01. 17:58 신문 3438호(2022.11.04) 16면 글 : 조용섭/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이사장] 정토사상 서려있는 지리산 으뜸 절집 지리산 북쪽 산자락의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전북 남원시 산내면 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 길 입구에 세워진 ‘지리방장제일금대(智異方丈第一金臺)’라는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방장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니 짐작컨대 금대암이 지리산에서 으뜸가는 절집이라는 뜻으로 새겨놓은 듯하다. 정확히 말하면 금대암은 큰 하천(임천)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는 금대산(851.5m) 자락에 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옛사람들은 금대산도 지리산에 속한 산으로 보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문지리서에도 인근의 안국사와 더불어 금대암을 지리산의 절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금대, 즉 ‘황금(金)자리(臺)’라는 뜻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 조선후기의 고승 경암응윤(1743~1804)은 금대암의 내력을 기록한 「금대암기」에 ‘정토경에 염불의 공덕이 높은 자는 목숨을 마칠 때, 서방의 성인이 금대로 와서 맞이함이 으뜸이요, 은대 등은 그 다음이다’라는 내용으로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즉 사람이 죽어 극락으로 갈 때, 염불의 공덕이 높은 수행자에게는 신중(神衆)들이 삼생상품의 구품연화대 중에서 상생품인 금빛 연화대를 가지고 와서 영접하는데, 이를 금대로 일컫는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금대암은 그 이름에서 불교의 정토사상이 깊이 서려있는 절집임을 알 수 있다. 금대암의 창건 시기는 인근에 있는 안국사와 같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등구사의 내력을 기록한 『지리산등구사사적』에는 행호라는 승려가 등구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657년(신라 태종 연간)에 안국사를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암응윤 역시 ‘근거할 만한 사적은 없으나, 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고승 대덕이 머물렀던 곳’이라며, 금대암이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고찰이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금대암기」에 전하고 있다. 한편 16세기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대암·보월암·안국사 모두 지리산에 있다. 본조(本朝) 중 행호가 창건한 것이다’라며, 조선전기에 활동한 천태종의 고승 행호를 창건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인물인 이규보가 쓴 ‘진각국사비명’에 ‘진각국사가 금대암에서 수도하였다’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집이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사실에 전혀 근거가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법명이 혜심인 진각국사(1178~1234)는 스승인 보조지눌에 이어 수선사(송광사) 제2대 사주(社主)를 지낸 인물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대표적 교과서인 『선문염송』을 편찬한 고승이다. ‘진각국사비명’에 의하면, 국사는 오산과 지리산 등에 은둔하여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 전념했는데, 지리산 금대암에 머물고 있을 때는 ‘대(臺) 위에서 연좌하여 눈(雪)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각고의 수행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렇듯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수행처로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금대암은 조선전기 고승과 성리학자들에 의해 또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 안국사와 금대암의 중창주로 알려진 행호대사는 조선전기 세종임금의 신임을 얻어 판천태종사로 임명된 천태종의 고승으로, 억불의 기운이 점점 드세어지던 시기에 순교한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김종직을 비롯한 조선전기의 이름난 성리학자들도 금대암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1489년 4월 지리산 유람에 나서 금대암에 들른 김일손(1464~1498)은 당시 이곳에서 펼쳐졌던 범패수행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의 「속두류록」에 그려내고 있다. “4월 15일, 한걸음에 금대암에 닿았다. 누더기 승복을 입은 승려 20여 명이 가사(袈裟)를 입고서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이곳은 정진 도량이라고 했다.” 금대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금대암은 이렇듯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들의 흔적과, 치열한 수행 현장으로서의 풍경이 선명하게 서려있는 곳이다. 또한 금대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화대 외에도, ‘지리산 조망의 으뜸자리’라는 공간적 의미로 불러도 좋을 듯하다. 절집 마당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쾌한 파노라마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이름이 지닌 뜻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이다. 절집 마당 아래에는 5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전나무 한 그루가 묵상에 든 수도승처럼 서 있다. 치열한 수행과 바라봄의 환희가 어우러졌을 금대암에서 옛사람들의 흔적과 지리산의 풍경을 읽는다.] 15:32~15:42 함양8경 중 제 2경인 금대지리(금대 앞에서 바라본 장엄한 지리산 조망 풍경)와 함양 금대암 전나무를 사진촬영 [함양 금대암 전나무 함양 금대암 전나무(咸陽 金臺庵 전나무)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전나무이다. 1998년 11월 13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전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푸른 상록침엽수로 추위에 대한 내한성이 강해 전국 어디에서나 자란다. 잎은 길이 4㎝정도의 침모양이고, 꽃은 4월 하순에 피며, 열매는 원통형으로 위를 향하면서 10월초에 익는다. 금대암의 전나무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산맥을 잇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 금대암 입구에 두 그루가 서있다. 나무의 나이는 500여 년 정도로 추정되며, 큰 나무의 높이가 40m, 둘레가 2.92m로 우리나라 전나무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가장 크다. 탁영 김일손이 쓴 기행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행호조사(行乎祖師:1403년)가 다시 세운 금대암에는 오래 된 소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현재의 전나무 두 그루도 당시의 나무로 추측된다.] [함양8경 제 1경 상림의 사계 :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상림의 사계절 풍경 제 2경 금대지리 : 금대앞에서의 장엄한 지리산 조망 제 3경 용추비경 : 용추계곡과 기백산의 뛰어난 경치를 자랑 제 4경 화림풍류 :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과 계곡경치, 남계, 청계서원과 연계하는 선비문화 제 5경 칠선시류 : 지리산 칠선계곡의 경치와 화살과 같이 빠르게 굽이쳐 흐르는 물 제 6경 서암석불 : 벽송사와 서암정사의 고즈넉한 풍경과 경이로운 석불 제 7경 덕유운해 : 남덕유산 아래로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신비로움 제 8경 대봉철쭉 : 백운산으로부터 대봉산까지 이어지는 봄 철쭉의 아름다움] 15:42~16:22 경남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로 1194 번지에 있는 CU 함양마천점으로 이동 16:22~16:35 CU 함양마천점에서 인스턴트 도시락(4,500원)으로 식사 16:35~16:37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당흥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6:37~16:50 휴식 16:50~20:29 "엠티산악회" 버스로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당흥 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역으로 귀경 (299km) [3시간39분 소요] 함양군 [오도봉&삼봉산&금대산] 산행지도 지리산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