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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Russian Federation)
- 동유럽 -
ㄹ러시아 연방 행정구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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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관 : 공식명칭 - 러시아 연방 (Russian Federation)
국가 - 러시아 Russian Federation
위치 - 동부 유럽
인구 - 약 14,444만명 세계 9위[24,02,26]
GDP - 약 2조626억 달러 세계 11위
수도 - 모스크바 (한국과 -6 시간 차)
면적 - 17,098,200㎢ (한반도의 77.4 배)
기후 - 대륙성 기후 날씨 정보
민족 - 러시아인(80%), 타타르인(4%), 우크라이나인
언어 - 러시아어
정부 - 연방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 러시아정교(15%), 이슬람교(10%), 그리스도교
화폐 - 러시아 루블 RUB 환율정보
국가번호 - 7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소련의 체제하에서 러시
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으로 불렸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면적이 미국이나 중국의 2배이다.
러시아 사회의 생활상은 과거에는 획일적이었으나 개혁이 진행되면서 개인의
능력과 책임 및 개성이 강조되고 새로운 생활상이 등장하고 있다.
러시아에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유산이 12건, 자연 유산이 7건이 있다.
자세한 것은 러시아의 세계 유산 참조.
▶ 역사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 벨라루스의 원형인 중세의 루스는, 862년에 노르만인
루리크가 노브고로드의 공이 되어, 그 일족이 동쪽 슬라브인의 거주지역에 지
배를 펼쳐 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연대기에 기록되고 있다. 지배층을 포
함해서 슬라브화된 키예프 공국은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와 비잔
틴 문화를 수용해서, 독특한 문화가 생겼고 동유럽의 동슬라브족은 10세기에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키예프 공국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13세기 초에 몽골
에 의해 정복돼 킵차크 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키예프 루시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모스크바 대공국(1340년~1547년)은 몽골
지배 하에서, 루스가 한에 납부하는 세금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고, 나중에 점
차 실력을 길러서 15세기에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실질적으로 벗어나 루스의
통일을 추진했다.
17세기 초에는 로마노프 왕가의 러시아 제국(1613년~1917)이 수립되었다.
포트로 1세 (재위 1682년~1725년) 때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17세기에는 태평
양 연안까지의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19세기엔 중앙아시아 및 카프카스를 합병
해 유럽·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갖는 대국가가 되어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또, 해외 진출을 위해서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터키 등, 주변국과 전쟁을 일으
켰고, 영국과의 대립이 더 심해졌다. 극동에서는 연해주를 청으로부터 획득하
면서 블라디보스톡을 세우고,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했다.
한편 1867년에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팔았다. 극동에선 일본과의 전
쟁(러일 전쟁, 1904~1905)이 일어났다. 러일 전쟁의 패배로 국내가 흔들린 후,
제1차 세계대전 중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혁명(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
국은 무너졌다.
1917년 1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지도하는 이른바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일체
권력은 노동자·군인·농민의 대표자로써 조직되는 '소비에트(평의회)’에 있음이
선언되고, 소비에트 정부가 출현했고 내전에 의해서 레닌이 지도하는 소비에
트 연방(소련)이 건국되었다.
이어 러시아 제국의 통치 밑에 있었던 여러 민족은 혁명을 계기로 독립했으나,
1922년 12월에는 그 사이 독립하여 성장해 온 4대 사회주의공화국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및 자카프카스 등이 연방조약에 조인함으로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성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여 미국과 냉전을 펼쳤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었는데,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
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대외적으로 '신사고'노선에 입각한 과감한 외교에 나
서 냉전을 종결시키는 한편, 1986년 2월 제27차 당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및 글라스노스트(개방) 노선을 선언하는 등 공산주의 체제의 정치적 부
정부패척결과 경제회생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분출하게 되었는데, 1989년 브레즈네프 독트린
(제한주권론)을 공식폐기했고, 1990년 대통령제 도입하여 고르바초프가 소련
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91년 당중앙위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적
으로 포기 선언, 1991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소련은 붕
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국가들은 독립국가 연합을 탄생시켰다.
러시아 연방의 국명 변경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사임 당일인 1991년 당시
의 러시아 최고회의 결의에 의했다. 옐친 대통령은 1991년 11월 러시아 최고
회의가 부여한 비상대권을 1년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시장경제 정책을 추구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제가 악화됐다. 이를 계기로 옐친은 보수파의
온상인 최고회의와 인민대표 회의의 심한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 이후 옐친은
사사건건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의 견제를 받자 3권 분립을 명확히 하고 대
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1993년 10월 의회를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의회보수파 는 무력저항을 했으나 옐친은 군대 동원해 진압했다.
1997년 1월 교사 50만명이 체불입금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3월 27일
러시아 전역에서 노동자 총파업에 200만명이 참가했다. 정보국장인 블라디 미
르 푸틴이 1999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었으며,
그해 12월 31일 옐친의 하야 선언으로 대통령권한 대행이 되었고, 2000년 3월
러시아연방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
다. 100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러시아는 2013년 겨울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기로 우크라이나의 빅토
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몰락하자, 2014년 3월 18일 주민 투표를 통해 우크라이
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크림공화국을 합병하였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러시아
의 크림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러시아 주요 도시 :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 노보시비르스크 / 첼랴빈스크
니즈니노브고로드 / 예카테린부르크 / 사마라 / 옴스크 / 카잔 / 볼고그라드
로스토프나도누 / 크라스노야르스트 / 하바로프스크 / 블라디보스톡
▶ 경제 : 소련 헤체 후, 옐친 대통령의 주도 아래 시장 경제화가 진행되었지만, 오히려
급속한 인플레이션을 불러, 1990년대 중반에는 경제적으로 침체되었다.
1998년에 러시아 경제에 중대 위기가 오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부터 경제
가 서서히 회복, 고유가와, 루블의 약세, 서비스업 생산의 증가에 힘입어 러시
아의 GDP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 6.8%씩 성장하였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는 아직 G8의 국가들보다 많이 작다.
미국과 유럽은 러시에게 시장 경졔 도입을 주장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경제에
상당한 개입을 하고 있다. 2015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 8,447달러이다.
산업 - 소련은 1928년부터 실시한 계속적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서
미국 다음가는 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일상 생활 용품 등을 생
산하는 경공업이 뒤져, 국민은 오랫동안 내핍 생활을 해야만 했다.
농업 - 소련의 농업은 주로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에서 행해졌다. 러시아의 국
토는 광대하기 때문에, 세계 굴지의 생산액을 갖는 농업 부문이 많다. 예를 들
어 곡물과 가자 생산량은 세계 최대이고, 밀생산량은 세계 3위, 옥수수·사탕무·
해바라기·포도 등은 세계 5위권 안에 속해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농업 생
산의 감소로 농산물의 수입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집단 국영농장의 생
산 감소에서 기인한다.
대부분의 영토는 파미르고원과 북극 사이에 있어 추운 지역이며, 얼어붙은 불
모지가 상당히 많아서 농경지대는 전체 국토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수산업 - 소련 해체 이전 세계 제1위의 어획량을 자랑하였으나 해체 이후 러시
아 국내의 정치·경제·사회적인 불안정과 혼란이 수산업에도 영향을 미쳐 어획
량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1993년에는 446만 1천t으로 세계 제6위에 그치고 있
다. 러시아에서 어획고가 가장 많은 곳은 극동해역으로 전 러시아의 3할을 차
지한다. 주요 어획물은 연어·송어·청어·대구·넙치·게 등이고, 고래·바다표범·물
개 등도 잡힌다.
지하자원 - 석탄 매장량은 약 2,400억t 으로 세계 제1위, 석유는 세계 최대 석
유 생산국으로, 석유 수출량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천연가
스는 채취량에서나 수출량에 있어서도 세계 최대이다. 전력은 1991년 소련의
총 전력 생산량은 1조7,129억kWh 로 세계 제2위, 대부분이 화력 발전이다.
▶ 교육 : 무상·의무 교육은 7세에 시작되어 최소한 8년간 지속되는데, 학령아동의 60%
이상이 10년까지 학교교육을 받고 있다. 대학과정을 수료하는 데는 일반적으
로 5년이 소요된다.
비러시아인 학령아동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교수를 받지만, 러시아어는 중등
교육 과정에서는 필수적인 학과목이다. 러시아의 고등교육은 대부분 러시아어
로 이루어지지만, 소수민족 공화국에 있는 몇몇 고등교육기관에서는 그 지역
의 토속어로 교수된다.
▶ 대한 관계 : 1860년 베이징 조약[北京條約]으로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 일대를 획득
국경을 접하면서부터 조선과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주요관심은 표트르 대제 이후의 남하정책에 따라, 부동항 확보였다.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1876) 체결을 시발로 열강들과 잇달아 외교관계
를 수립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의 지위가 강화되고 영국과 미국의 압력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견제세력의 하나로서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1884년 7월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한·러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갑신
정변으로 수구파와 청의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러 밀약이 인준되었다.
한·러 밀약은 오래도록 소망해온 영흥만 조차를 가능하게 했으나 밀약의 전말
을 탐지해낸 영국은 1884년 4월 거문도를 점령, 이를 제재하고 나섰다.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동아시아 군사정책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
으며, 이후 시베리아 철도부설계획이라는 육군 중심의 방위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다.
3국 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세력을 만회하고 조선 정부의 노골적인 인아거일
정책(引俄拒日政策)이 을미사변을 초래한 뒤, 국제여론은 오히려 일본의 입장
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는 고종을 상대로 끊임없는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했다. 1896년 4월
경원·종성 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 해 8월에는 블라
디보스토크 상인 Y. 브린네르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 유역, 울릉도의 산림채
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관파천이라는 절대절명의 호기를 맞은 러시아
가 조선 정부의 불신을 사게 된 주요원인은 외무장관 S. Y. 비태의 관심이
새로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국제적인 압력과 함께 내부의 금융·
산업 위기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
에서의 패배 결과 일본의 조선 보호를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은 장차 일본의 조
선병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1905년 이후 광복이 이루어질 때
까지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45년 8월 민족의 해방은 찾아왔으나 북위 38°선 이북은 소련이, 그 이남은
미국이 점령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38˚선은 미국이 구상하고 제안한 것이었으
나 잠정적으로 제안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게 된 데에는 소련의 책임 또한 적
지 않았다.
북한을 세력권 내에 편입시키려는 소련의 야심은 결국 북한에 소비에트 정치
체제를 이식시켰고, 소비에트 연방은 위성국가의 수립을 위해 지원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8월에야 대일선전포고를 발
령했다. 함경북도 웅기로부터 평안도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은 자
생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받아들이고 이를 소련에게 유리하도록 개편
한 후 배후조종을 꾀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민족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영국·중국·
소련 등, 4개국이 5년 동안 신탁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의정서가 발표되
었다.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의정서의 원칙들을 강력하게 고수했고,
이러한 비합법적인 자세가 회담 결렬의 주된 이유가 되었다.
점차 격화되어가는 미·소 간의 냉전구조는 남북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정부가 탄생하고, 소련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라는 점령초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정권수립 이후 소련 정부가 제
공한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들은 고스란히 남침준비를 위해 충당되었다. 요시
프 스탈린의 남침계획 승인은 미국의 전쟁 불개입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트
루먼 행정부는 국제연합의 이름 아래 연합국의 참전을 결정하는 강경한 대응
조치를 강구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적극 권유했고,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휴전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1년 6월 소련측에 의해 휴전 제안, 1953년 7월 끝내 휴전협정 조인되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1958년까지 계속된 북한주둔은 소련과 북한의 관계
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후 북한은 친중국·친소련 노선을 거듭하면서
일련의 줄타기 외교를 벌였다. 소련과의 갈등은 요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1인독재체제를 비난하
고 나섬으로써 시작되었다.
1960~61년 중·소분쟁의 격화시기에 북한은 중국을 선택했으나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새로운 지도층이 등장하자 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고
중단되었던 군사원조가 재개되었다. 소련은 1968년 1월 북한이 미국 군함 푸
에블로호를 나포하고 4월 해군 정찰기 ET-121기를 격추시켰을 때 비합리적이
고 무책임한 북한의 행동을 비난했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1969년 세계공산당
대회에 불참하고 1970년 3월의 조·소 공동해양연구를 보이콧했다.
1970년대의 긴장완화와 국제정세의 다원화 속에서 북한은 새로운 대외관계
좌표를 설정했다.
즉,중립적 입장에서 국익을 추구하려는 자주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은 북한의 자주노선과 그 이념적 배경을 이루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변종 정도로 취급했고, 1976년말 이후 대북한 지원을 대폭 격감시
켰다.
소련의 38。선 이북 점령과 북한정권의 수립으로 말미암아 한국과 소련의 관
계는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 채 출발했다.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동맹조약
으로 견제하려는 미국의 반공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상호불신관계
는 제2공화국에서도 지속되었고, 1961년에 시작된 군정에서도 반소·친미 정책
은 강화되었다.
소련 관영통신은 군사정부를 비난했고, 군사정부 역시 소련과의 접촉을 고려
하지 않았다. 제3공화국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소련은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시아의 나토(NATO)라고 규탄했으며,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비난했다. 적대감 속의 한·소 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1년 8월 당시 김용식(金溶植) 외무장관은 소련이 한국에 대해 적대적인 행
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며, 1973년 6
월 23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특별외교선언문을 발표, 공산권에 대한 문호
개방의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고 그들 역시 호혜적인 조치를 강구해주도록 요
청했다.
소련은 1973년부터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들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비공식이
지만 양국의 무역계약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전개되었다.
'2개의 조선'을 고정화시키려는 책동이라는 중국과 북한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는 은밀한 접촉이 계속되었다.
1989년 12월 8일 양국은 서울과 모스크바에 영사처를 개설하기로 합의를 이
루어 1904년 러일전쟁 패권으로 러시아 공사관이 패쇄된 이후 86년만에 공식
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1990년 9월 30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동의했다.
비교적 순탄하던 한·소 관계는 1991년 8월의 보수파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 연
방의 급속한 해체가 진행됨으로써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소련의 해체로 대소 경제협력 30억 달러의 계속집행 여부가 관심을 모았는데,
앞으로의 차관 제공은 각 공화국과의 직접 교섭에 의해 이행보증서를 받은 연
후에 집행하기로 결정되었다. 1992년 11월 1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방한이 이루어져 한·러 기본관계조약에 서명하고 한국전쟁과 KAL기 격추
사건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다.
특히 한·러 군사의정서는 양국 간 군사분야협력을 최초로 명문화한 것으로,
러시아가 북한과 유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군사협력수준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러시아는 1995년 9월 북한에, 1996년 9월로 효력이 끝나는 상
호원조조약(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간의 우
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제1조에 규정된 전쟁시 자동개입조항의 수
정을 요구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북한의 기존 군사동맹관계는 완전히 폐지되
었다.
▶ 여행 정보 : 치안상태 : 불안 / 긴급연락처 : 대사관 7-495-783-2727
전압 : 220 / 230 / 240V 콘센트 2구
1) 러시아는 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QSIJ3jbd7GI < 4:58
2)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진짜 이유!! | 소련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h1w7S0O6K-g < 10:20
3) 소련이 탄생한 진짜 이유!! | 소련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4eWWblMIFhY&t=28s < 9:25
4) 시베리아 횡단 열차 리얼 버라이어티 생존기(직캠)
https://www.youtube.com/watch?v=Lsz20j_C-J4 < 22:12 < 190612
5) [세계테마기행] 순수의 세계, 극동 러시아 1~4부
https://www.youtube.com/watch?v=hhd2ZNyVtV4&t=120s < 2: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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