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우수 고교에 가다 2_충남 대산고
배워야 할 것의 본질 충실하니, 학습 경험 개별화 가능해졌다
취재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사진 이창주
편집부가 독자에게 ... 동선마다 눈에 띈 환영 인사에 폭풍 감동 충남 대산고 송광자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성균관대에서 진행한 ‘교사와 함께 하는 정보 공유 컨퍼런스’자리에서였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이끌어가는 영어 수업 이야기가 무척 인상 깊었죠. 학교를 찾은 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환영 인사였습니다.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할 교실과 인터뷰 장소까지 동선마다 환영 인사를 붙여놓으신 대산고 선생님들의 마음 씀씀이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이 따뜻함이 일상적으로 전해져서일까요? 만나는 학생마다 어찌나 웃음이 많은지, 방문한 저희도 전염되고 말았습니다. _정애선 기자 |
충남 서산에 위치한 대산고를 찾은 19일 ‘인종학살(Genocide)’을 주제로 진행해온 2학년 영어과 프로젝트 수업 발표가 한창이다. ‘세계의 인종학살 기념관’을 모티프로 저마다 열심히 준비한 8개의 부스를 학생들이 돌아가며 설명하고 듣는 방식.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부터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 르완다의 대학살까지 대륙도, 주제도 다양했다.
외고도, 국제고도 아닌 일반고에서 학급 학생 전체가 이처럼 자유롭게 영어로 말하고 이해하면서 동료 평가까지 진행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동료 평가에서 전 항목에 5점 만점을 준 남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다.
“진짜 준비 잘했죠? 우리 반 친구들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얼굴 가득 뿌듯함을 머금은 채 답한다. 한 시간 동안 왁자지껄 진행되는 발표로 교실은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수업에서 소외되는 학생이 없다.
수업 변화의 출발, 지필평가부터 바꿀 것!
수업이 변화되어야 할 이유에 확신을 얻었지만, 고3은 한계가 있다고 느낀 송광자 교사는 지난해 학년부장을 자원해 1학년 수업을 맡았다. 이 프로젝트 수업 속 학생들은 송 교사에게 1학년 때부터 ‘훈련’을 받아왔다. 수업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평가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지필평가에 손을 대기로 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98% 이상이 학생부 교과나 종합 전형으로 지원해요. 고3 담임을 3년 동안 맡으면서 성적 분포를 분석해보니 모의고사 성적보다 실제 수능 성적은 무조건 떨어지더라고요. 다른 역량을 아무리 갖췄어도 서울대 지역 균형 선발 전형의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또 활동으로 대학에 간다는 인식이 생기다 보니 학생들이 수업보다 활동에 압도되더라고요. 한데 종합 전형에서는 내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내신 경쟁은 굉장히 치열해요. 예전의 평가는 교과서 두세 단원을 배우면 그 안에서만 시험문제를 냈어요. 죽어라 외우면 내신 1등급은 받을 수 있지만, 수능 1등급은 받지 못해요. 내신과 수능이 다른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인데, 암기라는 방식이 의미 없는 건 아니지만 자칫 잘못된 공부 방식을 심어줄까 걱정이었어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도 수능에 도움이 안 된다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잖아요. 당장 수능을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 수능도 잘 나오는 방법으로 가야 했어요. 지필평가에 답이 정해지지 않은 논술형 문항을 도입했죠.”
중학생 때까지 이런 훈련을 받고 오지 않은 학생들은 당혹스러워했다. 지난해 3월 치른 첫 논술형 답안지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백지였다. 시험을 이렇게 내면 어떻게 하느냐, 불만이 쏟아졌다. 다른 학교 친구들에게 시험문제를 보내보니 다 못 풀겠다고 하더라는 얘기였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했다.
“단어 100개를 더 외우는 것보다 자기 생각을 글과 말로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런 시험 방식은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거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얘기했어요. 선생님은 3월부터 어떻게 평가할지 정확하게 안내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에 맞춰 공부해야 한다, 사교육을 받지 말라고는 얘기 안 하겠다, 단 받더라도 제대로 가르치는 곳에서 배워 와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도 도움이 안 될 거라고요.”
송 교사가 이렇게 확신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to 부정사가 형용사적 용법인지, 부사적 용법인지’ 묻기 전 이를 이용해 글을 쓰고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건만 학생들은 본말이 뒤바뀐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영어 평가 기준을 의사소통능력에 뒀다.
“지필평가는 예전 방식대로 두고 수행평가만 바꾸면 학생들은 쓸데없는 ‘노동’이라고 생각해요. 수행평가가 지필평가에도 도움이 되고, 그것이 곧 내신 성적을 변별한다는 걸 깨달으면 학생들은 늘상 해야 하는 공부 방법임을 습관적으로 깨닫죠.”
논술형 평가 저항 없애려면 신뢰성, 일관성 담보해야
지필평가를 정답이 없는 논술형으로 낼 때 교사들이 부딪히는 부담은 평가 기준이다. 특히 평소 성적이 좋았던 학생들의 낙폭이 크면 학부모나 학생들의 저항을 피할 수 없다. 송 교사 역시 이 어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교사 평가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하면 돌파할 수 있다고 봤다.
평가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먼저 지필평가와 수행평가의 기준을 확연히 나눴다. 아직까지는 상대평가 체제이기에, 변별 역시 필요하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은 그만큼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했다. 지필평가는 실력이 확실히 나타나도록 고차원적 문제도 낸다. 반면 수행평가는 협동과 노력에 점수를 준다. 영어를 잘 못해도 열심히 노력해 유창하게 발표하면 만점을 주고, 더 도전하겠다고 하면 기회를 한 번 더 준다. 수행평가만큼은 모두가 만점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학생들이 종종 원하는 친구나 잘하는 친구와 모둠을 꾸리게 해달라고 해요. 잘하는 학생들끼리 모둠을 구성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파트 나눠 각자 해와서 붙이겠다는 얘기거든요. 이건 협업이 아니잖아요. 지필평가에서 다른 친구들이 열심히 안 해 네가 성적을 잘 받았는데, 수행평가에서 다른 친구들이 열심히 안 해 불만이라는 논리는 수용할 수 없다, 선생님은 지필은 공부 잘하는 학생이 유리하도록 설계했다, 한데 수행평가에서 점수를 잘 받고 싶은 너의 욕구를 위해 다른 친구를 이끌어주는 걸 왜 못하겠다고 하느냐고 물으니 모둠 때문에 불만을 나타내는 학생이 현저히 줄더군요.”
송 교사의 얘기를 듣던 한국진로진학정보원 진동섭 이사(전 서울대 입학사정관)는 “잘하는 학생이 못하는 학생을 가르치는 건 잘하는 학생 스스로를 위한 행위다. 대학이 평가를 할 때 지원자에게 동료를 가르쳐봤는지 묻는 이유는 그 경험이 곧 자신의 지식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니 훨씬 발전적이고, 가르칠 때 막히는 부분을 보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공감했다.
영어 평가 기준의 중심을 의사소통 능력에 두기 위해 논술형 평가에서는 내용이 타당하면 점수를 줬다. 8점이라면 내용 점수를 5~6점, 어법은 2~3점으로 두는 식이다. 지금 단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많이 써보는 것이 더 중요해서다. 어법 오류의 점수 차도 몇 개부터 몇 개까지 구간 설정을 해 -0.5점, -1점 등으로 실질 반영 비율을 최소화했다. 일관되게 안내하고 채점하니 이제 학생들은 논술형 답안지에 서툴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써 내려간다.
구술 노트로 어휘 익히고, 정답 없는 자료로 생각 키우기
평가를 설계한 다음 본격적인 수업 준비에 착수했다. 사소한 것부터 바꿔나갔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도 잘 읽지 못하는 원인을 살펴보니 단어를 외우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누구도 발음을 측정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스펠링에만 신경 써 단어를 분절시켜 외우던 것. 뜻을 모르더라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언어 학습의 기본. 단어를 철자로 외우는 게 아니라 소리와 뜻을 매칭할 수 있도록 구술 노트를 쓰게 했다.
스펠링은 틀려도 좋다고 하니 읽는 수업이 조금씩 가능해졌다. 대신 수업 주제를 국제사회 이슈나 세계시민 교육 등으로 진행하며 어휘의 수준을 ‘Genocide’나 ‘Biodiversity(생물 다양성)’ 등으로 높였다.
교과서에 있는 어휘만으로는 수능 준비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이 구술 노트로 익혀나간 어휘와 모의고사 어휘의 일치도도 높아졌다. 이 방법은 실제 학생들의 영어 모의고사 점수와도 연결됐다. 송 교사는 “모의고사 문제는 못 풀겠다고 하던 학생들이 이제는 할 만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확신을 준 것 같다”고 했다.
학습 영어의 또 다른 목적은 사고력과 소통에 있기에 정답이 있는 자료보다 이슈가 되거나 논란거리가 될 만한 자료를 제시했다. 이 자료는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니, 절대적 지식으로 외우지 말고 동의할 수 있는지 관점에서 읽되 반드시 자신의 용어로 정의 내리도록 했다.
지역사회와 연결한 수업도 인상적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 부분의 핵심 역량인 생태 감수성을 키워주기 위해 1992년 지구 정상화 회담에서 나온 ‘생물 다양성 협약’을 수업으로 끌고 왔다. 동료 교사들과 학습 공동체를 하면서 과학 교과에서 이미 접한 주제였기에 아주 생소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수업은 멸종위기 동물을 의인화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꾸렸다.
“이 지역에 갯벌 간척 사업을 통해 공단이 들어섰기에 환경문제가 지역의 큰 이슈 중 하나에요. 하지만 학생들은 이런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더라고요. 마침 근처 가로림만을 찾던 잔점박이물범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이걸 이슈로 모의 공청회를 했어요. 환경부와 발전소, 환경운동가로 역할을 나누고 영어로 각각의 주장을 프레젠테이션한 후 청중이 질의응답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학생들은 이 과정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생물 다양성은 과학 시간에 암기해야 하는 대상이었을 거예요.”
‘할 수 있을까’에서 ‘할 수 있구나’로, 학생들에게 배우다
대산고는 공립 일반고이기에 신규 교사의 비율이 50% 정도로 높고 순환도 잦다. 눈에 띄는 것은 송 교사의 이러한 열정과 노력이 전파의 씨앗이 됐다는 점. 영어과의 경우 올해 첫 부임한 동료 교사들이 함께 채점을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써 내려간 답안을 보며 나름의 수업을 도입하고, 평가 문항에도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고.
현재 연구부장을 맡고 있는 송 교사는 올 초 전 교직원 워크숍에서 영어과와 달리 진도의 압박이 있는 과목들은 강박적으로 프로젝트 수업을 도입하기보다 한 학기에 5차시만이라도 학생 참여형 수업을 시도해보기로 뜻을 모았다고 했다. 수학과의 경우 학습지를 개발해 학생들끼리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간 과정을 발표하기만 해도 과정 평가가 가능하며, 이를 누적해 분석하면 진도와 문제 풀이를 함께 해결할 수 있다. 과학과는 한 학기에 두세 번 실험을 넣기만 해도 3~4과목이 모이면 학생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많은 실험을 경험하는 셈.
교사들이 이처럼 뜻을 모으게 된 것은 ‘우리 아이들이 할 수 있을까’ 의구심에 주저했지만, ‘할 수 있구나’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낯설어하는 학생들에게 배워야 할 것의 본질을 끊임없이 설득해간 송 교사의 노력이 돋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