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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
FREE HUGS
그는 2001년 어머니의 죽음 때 문상을 왔던 모든 분들이 살아생전 느꼈던 어머니의 포옹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마저 실명하자 터질 것 같은 가슴으로 피켓에 ‘공짜로 포옹해 드립니다.’ (Free hugs)라 쓰고 길로 나섰습니다.
처음엔 어떤 누구도 그 청년의 포옹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경계하는 눈치로 멀찍이 그를 지나쳐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작은 할머니의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포옹을 하기 시작합니다. 경찰에서 그것을 금지시키자 10000명의 사인을 받아 제출하여 계속 포옹을 하게 됩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고플 때 젖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부드러운 천의 어미 인형에게 꼭 붙어 있었습니다. 할로우는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 따듯한 품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분은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태아에서부터 성장해오면서 타인으로부터 받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 때문에 마귀가 들어오기도 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는 등의 무의식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이 체험한 몇 가지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 중의 한 이야기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 맘대로는 단 하나도 하지 않고 어머니 뜻대로만 살아왔는데, 명문대학 들어가면 나으려나 했더니 대학 들어가도 어머니의 간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이 쌓여가자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는데 다리가 오그라져 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병원에서도 그 원인을 발견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치유의 방법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어머니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름대로는 한 달 동안 어머니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용서가 안 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기도회에 갔는데 갑자기 옆에만 있어도 싫던 엄마가 보고 싶어지더랍니다. 그래서 엄마를 보았더니 그렇게 그래서 옆에 있는 어머니를 안고 미워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청했고 어머니도 자기 욕심이 너무 컸다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때 다리가 펴지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다 껴안고 팔을 벌리시며 우리를 안아 주시지만 정작 그 분은 우리 마음 안에 사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상처받은 우리들을 안아주시기 위해 오늘도 팔을 벌리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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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래(빈첸시오) 신부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거기서 벌어질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을 미리 기념토록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사건의 마지막 순간인 이번 한 주간은 길지 않은 예수님 생의 결론이자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 이루어질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실천하셨던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은 곧 우리의 예수신앙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부활)은 수난과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여 얻는 길이었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에 동참하는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루카 복음의 수난사를 따라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여정을 걸어봅시다.
루카의 수난복음은 최후만찬으로 시작합니다. 최후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빵을 떼고 잔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죽음의 삶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행하라 하신 것은 결국 무엇일까요? 자신을 쪼개고 떼어 나누는 일입니다.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의례가 지칭하는 그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가를 따지며 다툽니다. 스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는 죽음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은 그 죽음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세속적 가치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은 결국 낮은 사람처럼 처신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이 추구하는 하느님나라의 가치관은 제자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최후만찬을 하시고 난 다음 게세마니라는 올리브 산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마시고자 하는 잔은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도 인간적으로 번민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끝내 예수께서는 아버지 뜻에 자신을 모두 맡깁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가기로 작심합니다. 곧이어 제자 유다가 이끄는 일단의 무리가 예수를 체포하러 옵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끌려갑니다. 예수를 성전에 감금하고 지키던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때리며 조롱합니다.
갖은 욕설과 저주를 퍼붓습니다. 예루살렘입성 때 환호하고 찬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제자들은 흩어지고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예수께서는 묵묵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날이 밝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산헤드린 의회를 엽니다. 예수를 끌어내 심문합니다. 의회의 심문요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의회의 결론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의 변명이나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의회는 사형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데리고 갑니다. 지도자들은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반란선동 혐의로 고발합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고서 그가 모반을 꾀할 인물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은근히 빌라도를 압박하며 예수를 처형할 것을 종용합니다. 백성도 아우성칩니다.
“십자가 형이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악을 써가며 고함을 지릅니다.
결국 빌라도는 폭동과 살인죄로 갇혀있던 또 다른 바랍바 예수는 놓아주고 나자렛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넘겨줍니다.
이렇게 예수께 내려진 사형언도는 막힘없이 간단히, 그것도 속전속결로 처리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한 때는 구름처럼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고 그분이 가실 길을 가로질러 찾아 나서기도 할 만큼 사람들의 인기와 총애를 받던 분이 아니던가?
예수를 처단하라고 외치는 백성의 돌변한 모습을 단순히 지도자들의 선동 때문이라든가 순간적인 군중심리와 격앙된 감정 때문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줄곧 외쳤던 하느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가치관, 인생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라, 다시 나라, 하느님사랑과 사람사랑이 둘이 아니다, 원수도 사랑하라, 바라는 대로 해주라, 거룩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등 예수께서 강조하신 것을 수용하고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큰 자기포기가 따르기에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예수께서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실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의 종국적, 근원적 해방과 자유를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단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가치관, 구원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형언도가 내려지자 사람들은 예수께 형틀을 지우고 다른 두 죄수와 함께 사형장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는데 그 가운데는 예수를 보고 통곡하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하십니다. 해골산이라는 형장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세워놓고 다른 죄수 둘도 예수의 좌우편에 세워놓았습니다.
예수를 못박은 자들은 예수의 옷을 나누고 예수를 조롱하며 신 포도주를 권하며 빈정거렸습니다. 또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였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붙여졌습니다.
오후 3시쯤 되어 예수께서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승낙을 받고 시신을 내려 고운 베로 싸고 자신의 무덤에 안장하였습니다. 해가 지면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다른 장례절차를 따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여자들이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이로써 예수사건은 모두 끝났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외쳤던 사랑과 진실과 정의가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실증입니다.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예수의 그 신념이 놀랍고 그것은 마침내 부활이라는 영원한 확인을 이끌어 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부활이라는 희망을 일깨워 주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따라 십자가길 가면 언젠가 부활에 이를 것을 믿습니다.
안동교구 조창래(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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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 베드로 신부
사랑은 당신을 위해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것
모든 것이 끝장 났습니다.
찬란한 태양도 빛을 잃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소리치던 군중의 그 함성도 이슬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적뿐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 오실 때에 기쁨에 넘친 함성은 온 대지에 울렸고, 천사들의 노래는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할 때 당당하던 그 모습이 너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가난한 시골 마을 나자렛에서 묵묵히 일하시는 당신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웃음 속에서 성부의 반기시는 말씀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처량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아니지요? 아니겠지요? 우리가 허깨비를 보는 것이겠지요? 사람보다 못한 벌레 취급을 받으시고 온갖 발길질에 야유를 들으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 받는 이들과 함께 거닐면서 수많은 기적을 베푸실 때 그 놀라운 모습은 어디에 갔습니까? 배를 부서뜨릴 것처럼 보이던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그 힘은 도대체 어디로 살라졌단 말입니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목놓아 불러보아도 아버지마저 외면하시니 정녕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까? 왜 아무 말도 없으십니까?
아버지도 침묵 속에 아무 말도 아니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옷 벗어 나귀 발굽아래 깔고, 성지를 흔들며 우리의 임금님이 오셨다고 소리지르던 군중들의 함성도 이제는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절대 당신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던 베드로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도 이제는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삭막한 땅, 썰렁한 찬바람만 몰아치는 골고타 언덕에는 힘없이 축 늘어진 처절한 당신의 모습만 있을 뿐입니다. 희망도 사라지고 꿈도 사라지고 기쁨도 끊어진 채 해골산 마루턱에 십자가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십자가는 사랑이요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압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과 죄 많은 우리 인간이 하나되는 자리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모아진 곳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봅니다. 인간의 한 운명을 봅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산고의 고통이 있어야 하고, 한 인간이 성장하고 철이 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을 맛보아야 함을 압니다.
그래서 고통과 좌절 속에서 고독과 절망의 어둠 속에서 아버지를 불러 본 사람만이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음을 압니다. 그래야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압니다.
삭막한 언덕 위에 걸쳐있는 두 개의 나무가 교차하는 곳에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짐을 봅니다. 거기에 영원한 사랑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남편의 고통 속에서도 아내의 이해가 있는 곳에, 아내의 고통 안에서도 남편의 이해가 있는 곳에, 자식들의 고통 속에서도 부모의 이해가 있는 곳에는 화해가 있고 사랑이 있음을 봅니다.
주님! 이제사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죽는 것'임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임을,
'당신을 위하여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주님! 언제나 자기를 방어하고 사소한 일에도
누구에게나 지려고 하지 않고
승자의 오만 위에 곤두서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죽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자아에 죽지 않으면
불사신의 사랑에 소생될 수 없음을
예수여! 우리에게는 당신의 굳셈보다는 약함이
무한한 약함이 필요합니다.
저주를 당해도 항거치 않고
넘어뜨림 당해도 비난치 않고
죽임 당해도 원망치 않는
사랑에 찬 약함이 필요합니다.
지옥의 죽음도 이길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약함이
이웃에게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늘 머리를 쳐드는 나의 오만을
당신의 약함으로 부드럽게 해주십시오.
안동교구 김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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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종 신부
십자가를 질 각오
오늘은 주님의 성지주일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2000하고도 한 번째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준비운동에 들어가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부가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장난치신다고 꾸중하실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우리 자신들이 매 년 하는 행사의 하루를 지나고 있는 듯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게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순 제4주일 때에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강론을 이런 대화식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잠시 재현해 보겠습니다.
"얘들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지가 얼마나 되셨지?"
"2000년요".
"그런데 어제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매달려 있으시기 힘드시다고 내려오고 싶으시데드라".
아이들 묵묵부답.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려오시려면, 누가 대신 매달려야 하는데, 매달릴 사람?"
묵묵부답.
"그럼 내가 매달릴까?"
아이들 전체가 큰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예!!!"
그 대답을 듣는 순간의 아연함이란 말입니다.
저 녀석들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서도 그렇게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과 솔직히는 일말의 서운함도 함께 들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건을 계기로 저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신자도 아닌 아가씨들의 악세사리의 일종으로 자리잡고 있는 십자가. 그 가녀린 목이나 귀에 달랑거리고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저 아가씨가 저 의미를 알면 십자가 목걸이, 귀걸이는 다시는 안할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점점 커져가는 교회의 첨탑과 그 안을 장식한 화려하고 커다란 십자가를 볼 때도 과연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저토록 크고 화려한 십자가로 계속해서 성전을 꾸미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우리는 공부 잘 못하고 말썽부리는 아이의 부모들이나, 술로 날을 지새우는 남편이나, 늘 잔소리 심한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볼 때, '아이구 내 팔자야!'를 속으로 되뇌면서 그래도 이게 내 십자가라면 지어야지 라고 말하곤 합니다.
언제부터 팔자가 십자가가 되었는지 그 유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질 각오'라는 구호가 생긴 유래는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고 외친 것은 예수님 당시, 힘으로써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젤롯당'(열성당원)들의 슬로건이었습니다. 이는 로마 집권자들의 손에 정치범으로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당시 로마정권이 반로마 항쟁가들만 십자가에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곁에서 함께 처형된 소위 '강도들'은 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집권자들에 대한 항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집권자들은 언제나 안정을 희구하고 새 것을 싫어하며, 어떤 형태로나 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상을 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함'은 죽기를 각오로 하라는 지상명령에 진군나팔로도 읽혀집니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계, 새 가치관, 새 윤리관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됩니다.
이런데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부산교구 정필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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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오늘 들은 루가복음서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하는 일이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인하고 죽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별하는 최후만찬에서 유언을 남기십니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또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 잔은 그대들을 위해 쏟는 내 피로써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식탁에서 서로 다툽니다. 그들 중에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툽니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부터 줄곧 다투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남을 지배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런 강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그대들 가운데 시중드는 사람처럼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 자녀의 처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곳에는 폭력과 좌절과 죽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곳에는 사랑과 희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지배하지 않고 섬겨서 생명이 자라게 합니다.
효도, 부부애, 우정, 이런 것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모두 섬겨서 생명을 보살피는 인간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돈 몇 푼을 받기로 하고 스승을 잡아 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자 신변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스승을 모른다고 공언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쉽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돈 몇 푼이 소중하여 이웃을 배신하고 버립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찾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패거리의 영달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이 지닌 이중성을 신물 나게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는 일을 예사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던 이교도 지배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식민지에서는 로마총독만이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란 선동죄로 총독에게 고발합니다.
‘우리고 보니 이자가 우리 민족을 이간하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 하였습니다.’
유다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거슬려 선동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런 고발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정치범이 되었습니다.
점령하고 통치하는 로마 총독이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는 정치적 반동분자입니다.
식민지 유다의 지도자들은 오늘 점령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로마제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그 생명을 없애 버리기 위해 그들이 평소에 가졌던 민족적 자존심마저 버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 판단하고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은 죄인을 미워하고 벌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사랑하고 자비하신 분이었습니다.
유다교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권위에 감히 도전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권위와 그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준 제도였습니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다반사로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맞서는 자들을 미워하고 짓밟고 죽입니다. 미움은 남을 먼저 죽이고, 자기 자신도 영원히 죽는 악마적 힘입니다.
루카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로데에게 보낸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조롱한 다음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이어서 복음서는 말합니다.
‘전에는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 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
헤로데는 젊었을 때 로마에 유학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 주변 인물들과 친분을 유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총독인 빌라도는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날 예수님을 결박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제삼자를 함께 미워하고 짓밟으면서 쉽게 동료 의식을 갖습니다. 흔히 제삼자에 대한 우리의 입방아는 우리끼리 동료 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다교 지도자들과 군중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빠를 택합니다. 바라빠는 폭동과 살인죄로 체포된 인물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은 폭동과 살인을 범한 자보다 더 괘씸한 죄인입니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권좌에 앉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분노를 느낍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사람을 미워하고 벌하고 죽이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시면, 그들 안에 소용돌이치는, 미워하고 죽이는 힘을 정당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라고 확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도 용서하고 살리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느님도 과연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살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면, 우리도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을 넘어서 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라고 기도하고 숨을 거두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살리시는 분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살리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살리셨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재물과 권위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소중히 지키는 수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자비와 미움의 힘을 동원합니다. 섬김과 용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여 행하는 성찬은 이 섬김과 용서를 인류역사 안에 살아 흐르게 합니다.
그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섬김과 용서를 몸짓으로 역사 안에 현실로 살아있게 합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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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환 신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오늘 전례에서는 영광과 수난, 찬미와 배신이라는 상반되는 두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찬미 받으시고, 군중들은 임금님께 드리는 환호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은 결박당하고 매 맞고 고문당하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처절한 모습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던 예루살렘 군중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부추김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무서운 군중으로 변합니다.
본당에서 수난 복음을 봉독할 때 신자들이 목청껏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을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던 적이 있습니다. 좀 전에 구세주가 오신다고 열광하던 바로 그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나 봅니다.
그러나 저를 더욱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 배신과 고발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이 외침은 당장 오늘날의 외침으로 변합니다. 남들은 잘도 살더니만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는데 나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침묵하고 계신 예수님을 나는 고발하게 됩니다.
이런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는 힘없는 예수님은 하느님도 아니니 십자가형에나 처하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첫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에 관하여 매질하는 자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기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둘째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신분이면서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나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통의 잔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발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신 길을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이 들고 고통스럽게 여겨질 때 신세 한탄이나 하느님을 원망하고만 있다면 2000년 전의 예루살렘 군중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방식 즉 십자가의 길을 이해할 때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고 이때 우리의 참된 신앙은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까?
부산교구 이장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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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완 신부
이 사람은 정녕 의로운 분이셨다
오늘 전례의 성대한 입당식에 나오는 복음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하게 환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지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미사의 복음에 가서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기인데 여기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친 것입니다. 인간의 변덕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돋보이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로마군대의 백인대장이 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정녕 의로운 분이셨다.”라고 말합니다.
백인대장의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던 율법학자와 경건하다는 바리사이들과 대립하여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던 예수님을 사람들은 결코 곱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분수를 모르는 놈”이라고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와중에서 예수님의 의로움을 고백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도 백인대장과 함께 예수님을 의로운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로움을 보고 있는지요?
우리 사회에는 정부의 불의를 고발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 재개발이라는 것 때문에 박탈당한 생존권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다 죽어간 사람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고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과 복직을 위해 단식하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의롭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의로움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의로움을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을 때 인간의 그 변덕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의롭게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바로 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다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로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김두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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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희 신부
제3의 시선
체코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평온한 삶을 살던 한 개인이, 그가 속한 공동체, 집단,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곡해되어지고 소외되어지다가 결국 제거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그의 저서 <변신>이라는 소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그레고르라는 젊은이, 그의 할 일은 가난한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이 거대한 벌레가 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너무도 당혹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가족들이 그런 벌레가 된 자신을 애써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면서 자신이 그레고르라고 항변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애절한 몸짓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인한 침묵으로 외면합니다.
결국 벌레로 변한 자신을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을 외면하는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미미한 슬픔을 느끼며’ 힘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이쯤해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단지 ‘사람이 벌레로 변했다’ 황당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의미를 되씹어보면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 모두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성주간을 여는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에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깊은 일대 드라마틱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 역사의 현장에서 난무하는 수많은 말과 댓글, 여론에 의해 짓눌려서 그 책임의 소재를 물을 길 없이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수난기를 낭독하면서, ‘결코 나라면 그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라며 ‘그들의 시선’이 아닌 ‘제 3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봅니다. 과연 그럴까?
눈에 보여 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말이나 댓글, 때로 눈빛으로라도 ‘여러 사람이 한 사람 죽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한 개인의 삶을, 한 집단이나 민족의 삶을 잔인하게 짓밟고 유린하면서도 ‘이것이 바로 세상이다’로 여기게끔 하는 분위기와 여건 속에 우리는 실제로 당하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때로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때로 침묵하는 방관자의 모습으로 서있는 건 아닐까?
성주간을 시작하며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몸이 머물러야 할 곳,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제 3의 장소, 제 3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바로 ‘그분’께 있음을 고백하며, 신앙인의 눈으로 우리 모두 거듭나기를 간구합니다.
전주교구 서석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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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는 평화방송∙평화신문과 함께“감사와 사랑 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주제로부활 기간동안은“내 곁에 있는 이를 사랑합니다”로 정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이나 동료 등은 자칫 쉽게 지나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자주 사랑의 정을 표현하도록 권고합니다.
사실 한 번도 사랑의 정을 표현하지못했다면 용기를 내어 문자를 보내거나 편지를 쓰거나, 혹은 직접 사랑을 표현하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또한 미소를 짓고 먼저 인사하기를 실천사항으로 정했습니다. 쉬운 일같지만 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사만 잘 해도 우리 주변의분위기는 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이를포용하고 끌어안는 것입니다. 특히 나와 다른 생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흔히 우물안 개구리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거나 식견이 좁은 사람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절대적이라 생각하면 다른 생각과 사고를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극단적인 경우는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는 같이 공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만을 절대화하는 사람은다른생각을가진이들에게때로는적대적이됩니다.
오늘 수난 복음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크게 환영하며‘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노래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열심히 환영했을까요?
유다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고대하던 구세주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전능하신 힘을 지닌 구세주였습니다. 이제 그들의 구세주가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다윗 왕조의 위대함을 세상에 다시 한 번 드높일 것이라 한껏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때 오늘날의 슈퍼스타가 부럽지 않을 인기를 누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얼마 후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들이 완전히 돌변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릅니다. 예수님을 영웅처럼 떠받들던 바로 그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다분히 철저하게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폭력과 무조건적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주장하셨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크게 기대를 걸었던 유다인들은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죽이려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우리들도 그때 그 군중처럼 예수님께 오직 현세적인 행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요? 사순절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셨는지 말입니다.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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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신부
“호산나!” 환호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아우성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라는 이중적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 주일의 전례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를 통해 우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네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했던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무섭게 외치는 복음말씀을 듣습니다.
미사 전에는 성지를 들고 성가를 부르며 행렬하면서 기쁨에 잠기지만, 미사 동안에는 예수님의 처절한 수난사를 들으면서 전율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다고 하는데, 나귀는 사실 ‘말(馬)’을 갖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사람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짐승이었습니다.
그리고 말(馬)은 군사적 용도로 많이 사용되어서 그런지 힘과 전쟁을 상징하는데 비하여, 나귀는 서민들의 평화와 겸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사가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겸손한 메시아’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즈카 9,9-10 참조).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세우시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였던 ‘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 지혜의 기준에서 보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런 ‘메시아’의 모습은 오늘 제2독서(필리 2,6-11)에 나오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제1독서에 나오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도 참조).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주간인 성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우리 자신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처럼 변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어, 성당 안에서는 참회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고, 생활 현장에 들어서면 언제 성당에 다녀왔느냐는 듯이 헛된 욕심 때문에 가족과 이웃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갈 때에는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며 신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는 ‘언제 그렇게 열성적이었느냐’ 할 정도로 쉽게 하느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냉담중에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야말로 예수님을 향해 박수치며 환호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쳤던 군중을 닮아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까지 묵묵히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묵상하면서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약한 믿음이 굳세어 지도록 복된 성주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서울대교구 김영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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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학교 입학한 아들을 주일학교에 적응시키려고 잠자는 아이를 깨워 함께 9시 학생미사를 참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 신부님의 강론을 보게 되니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