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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 홍보실 스크랩 화성답사 70제(題)
안상쇠 추천 0 조회 129 13.09.30 01: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화성답사 70제(題)

 

아는 만큼 보인다 !

 

일반사항

 

1.‘수원 깍쟁이는 발가벗고 팔십 리를 뛴다’ 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2. 화성(華城)은 정조가 지었다. 사도세자의 묘가 옮겨가는 화산(花山)의 

‘화’와 같은 발음을 찾은 것이라고 한다. 화성(華城)의 원래 뜻은 무엇인가?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

 

(가)            화려한 성

(나)            부귀, 장수, 다남자(多男子)의 뜻

(다)            부귀, 장수, 다남자 해 봐야 성가시고, 

덕을 기르는 것이 제일이라는 성인(聖人)의 뜻

 

(라)            성인(聖人)의 치세-왕도정치라는 뜻

 

3. 화성(華城)이란 말의 출전은?

(가)            논어 (나) 시경 (다) 춘추 (라) 장자

 

4. 수원과 화성은 ?

(가)            같은 말이다

(나)            화성은 옛 성곽 일대요, 수원은 현재 도시 전체다

 

5.정조대왕은 왜 화성을 쌓았나?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

 

(가)            새로운 수도로 삼기 위하여

(나)            부도(副都)-위성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다)            노후대책-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내려가 살기 위하여

(라)            탕목읍(湯沐邑)- 정조대왕의 목욕값 대는 도시를 삼기 위하여

(마)            원 수원 읍치 있던 화산( 山) 밑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현륭원을 세웠기 때문에 새로운 읍치(邑治) 건설이 필요했다.

 

6.위 5항 대답이 (가)라면 과연 수원의 국량이 수도를 감당할 만 하다고 생각하나?

 

7.위 5항 대답이 무엇이던 지금 수원은 번영하는 도시다.

 

풍수적으로 ‘용이 뛰고 봉황이 나는 지세’ 에

현대 인문지리로 보더라도 삼남의 물류가 온통 몰리는 관문이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화성을 쌓기 전까지는 별 볼 일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즉 정조대왕 이전 수원에는 어떤 약점이 있었나?

 

8. 위 7항-수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조대왕이 취한 조치는?

 

9.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크게 3가지로 나눈다.

수원 화성은 다음 중 어느 것인가?

(가)            문화유산 - 기념물, 건조물, 유적지

(나)            자연유산 - 숲, 동굴 같은 자연 환경

(다)            복합유산 -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함께 혼합되어 있는 유산

 

 

세계의 문화유산은 (자연유산, 복합유산 빼고) 2007년 7월 현재 851 점이다.

그 중 우리나라에는 7 점이 있다. 북한에 1점-고구려 고분군이 더 있다.

중국 그 거대한 나라에 24점, 일본에 10점, 인도 아대륙에 21점이 있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 40점, 프랑스 28점, 스페인 35 점으로 백인들의 잔치다.

어쨌던 우리나라 7점은 결코 작은 수량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유산을 모두 마음 속으로 손 꼽아 보라.

이 글 말미에 우리나라 보유현황을 적는다.

 

10. 세계의 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은 2007년 6월 현재 158 점이다.

그 중 우리나라에는 6점이 있다. 다음 중 세계의 기록유산이 아닌 것은?

 

(가)훈민정음 해례본 (나) 조선왕조실록 (다) 직지심체요절 하권

(라) 승정원일기 (마) 팔만대장경 (바)조선의궤 (사)삼국사기

 

 

11. 화성은 200년 밖에 안되고 그나마 거의 무너진 것을 새로 복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의 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가)            나라 별로 적당히 할당하는 것이라 우리 몫으로.

(나)            우리나라가 로비를 적극적으로 해서.

(다)            복원이라 해도 완벽한 기록자료-공사보고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정조대왕이 화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서울 (당시 양주)

배봉산 밑 영우원에서 현륭원(현 융건릉)으로 옮기면서부터다.

왜냐하면 당시 수원의 읍치(邑治)가 현 융건릉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12. 화성 성역공사가 시작된 해는?

 

(가)            1789년 (나) 1793년 (다) 1794년 (라) 1795년

 

 

13  화성을 쌓는데 몇 년 걸렸나?

(가)            1년 (나) 2년 10개월 (다)5년 (라)10년

 

14. 화성을 쌓는데 든 비용은

(가)            100만냥 (나) 87만냥 (다) 200 만냥 (라) 500 만냥

 

15. 정조 무렵 쌀 한 가마 몇 냥쯤 했을까?

(위 14항의 답을 오늘 날 물가로 환산해 보기 위한 문제)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과 화성을 여러 차례 방문한다.

 

 

16. 정조대왕은 재위 24년 간 화성을 몇 차례 행차했나?

(가)            66차례 (나) 31차례 (다) 13차례

 

17. 정조대왕은 할 일 없이 괜히 돌아 다닌 것이 아니었다.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올리는 상언(上言-한문으로 작성)과 징과 북을 두드려 행차를

막고 호소하는 격쟁(擊錚)을 현장에서 받았다. 오늘 날로 말하면 민원을

받고 또 해결한 것이다. 정조 대왕 재위 24년간 행차에서 받은 상언과

격쟁은 모두 몇 건이나 되나?

 

(가)  1,000 건 (나) 2,000 건 (다) 3,355 건

 

 

정조대왕 행차 중 을묘년(1795년) 화성행차가 가장 유명하다.

임금의 행차는 ‘행행(幸行)’ 또는 ‘거둥 이라고 하는데

능에 가는 것은 능행(陵幸), 세자의 무덤 원(園)에 가는 것은 원행이다.

을묘년 1795년 당시 사도세자의 묘는 아직 능이 되지 못하고

-현륭원(顯隆園)이었다. 따라서 이때 임금의 행차는 원행(園行)이다.

 

 

18. 정조의 을묘년-1795년 화성행차의 표면상 목적은?

(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갑사(甲祀)-살아 있으면 회갑이 되는 해

(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19. 을묘원행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 까지 8일 간이었다.

이 기간은 다음 누구의 생일에 맞춘 것인가?

 

(가)            아버지 사도세자 (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 (다) 정조대왕

(라) 농번기를 피해서 잡은 날짜다.

 

20. 다음 중 을묘원행(乙卯園行)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답은 다음 중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가)            정순왕후 김씨(영조대왕 비-정조의 할머니)

(나)            효의왕후 김씨 (정조대왕의 비)

(다)            청선군주와 청연군주 (정조대왕의 두 누이)

 

 

정조 대왕은 1795년 윤 2월 9일 세 번째 북이 울리자 창덕궁을 출발한다.

 

21. 정조 대왕은 아침 몇 시에 창덕궁을 출발했을까?

(가) 아침 4시 45분 (나) 아침 5시 15분 (다) 아침 6시 45분 (라) 아침 8시

 

22. 정조대왕의 을묘년 (1795년) 행차를 그린 반차도(班次圖)가 유명하고

청계천 2가 관수교 옆에 타일로 재현해 놓아 시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반차도에 등장하는 총인원 수는?

 

(가) 800 (나) 1779 (다) 3000

 

대왕의 행차는 수원성까지 이틀이 걸렸고 그 노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날-1795년 윤 2월 9일 오전 

 

돈화문앞 -돈녕부 앞길-파자전 돌다리(단성사 앞)-종루 앞길-대광통 돌다리-

소광통 돌다리 -동현(銅峴 구리개)-송현(松峴한국은행 부근)-수각(水閣)돌다리

(구 서울시경 부근)-숭례문-도저동 (桃楮洞:서울역 부근)-여기서 서울역 뒤로

돌아간다 -청파교(갈월동 쌍굴다리)-석우(石隅 돌모루골. 현 남영역 부근)-

율원현앞-만천교또는 만춘주교(蔓川舟橋 너푸내에 있는 다리. 용산역 부근)-

노량 (노들) 배다리-용양봉저정-점심

 

 

23. 위 노정을 보면 오늘 날 국가 상징가로인 세종로-태평로를 지나지 않고

종각에서 광통교, 명동 방면으로 틀어 숭례문으로 나갔다. 왜 그랬을까?

 

(가)            그쪽이 쇼트 컷-지름길이니까

(나)            조선 조에는 종각이 도성의 중심이요, 태평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은 정조대왕이 노들나루를 건너며 놓은 배다리(舟橋)의 그림이다.

 

 

24. 배다리가 놓인 노량-노들나루의 오늘 날 어디 쯤일까?

 

25. 배다리(舟橋)를 건설하기 위하여 동원된 배는 몇 척?

그림에 나온 배를 세어 보라 !

 

26. 어른이 두 팔 벌린 길이를 1파()라고 한다.

척으로 6척으로 오늘 날 미터 법으로는 대략 1.77m 정도다.

위 주교도 배 숫자로 보아 당시 노들나루에서 한강의 폭은 몇 파 정도일까?

또는 오늘날 미터법으로 몇 m 정도 일까?

 

배다리-주교 끝 홍살문을 지나면 기와집이 보이니 노량진 행궁이다.

잠시 쉬어 가는 곳이라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며 현판은 용양봉저정이다.

정조대왕 행차는 이 행궁에서 쉬면서 점심을 든다. 용양봉저정은 동작구 번동 10-30 번지

(시내에서 상도터널로 가다  왼쪽)에 건물 일부가 남아 있다.

 

 

 

 

 

근처 지하도 타일에 벽화까지 만들어 자랑하지만 막상 유적에 가면

자물쇠 채워 두고,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겹겹이 차를 세워 두었다.

들어 가려면  차 타 넘고 담 뛰어 넘는 곡예를 해야 한다.

숭례문 괜히 탄 것이 아니고. 다 탄 뒤 야단스럽게 울고불고 굿은 왜 하나?

 

 

첫째 날-1795년 윤 2월 9일 오후 

 

행차는 용양봉저정을 다시 출발하여 만안현(만냥고개)-장승백이(長牲峴)-

상도동길-번대방평(蕃大坊坪)에서 서남쪽으로 틀어 문성동(시흥대로 입구)

앞길에서 자궁(慈宮) 혜경궁에게 미음다반을 (대추 삶은 음료수) 올리고

시흥 행궁에 들어가 하루 밤을 지난다.

 

 

둘째 날-1795년 윤 2월 10일 오전 

시흥동 행궁-염불교-만안교-안양참-장산우-군포천교(안양교도소 옆길)-

서면천교-청천평-원동천(성나자로마을 부근)-사근평(고려병원부근)-

사근참행궁에서 점심

 

둘째 날-1795년 윤 2월 10일 오후

 

일용현 -지지대고개- 괴목정길-용두앞길(노송지대)-목욕동교-여의교-

만석거-여의경-영화정-대유평-관길야-장안문

 

 

27. 지지대 는 정조대왕이 붙인 이름이다. 무슨 뜻인가?

 

 

 

28.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이 심은 소나무가 유명하고 갈비집도 많다.

그런데 길 주변에 비석들이 많다. 이 비석들은 누가 왜 세웠는가?

 

 

 

29. 만석거-현재 만석공원 안 저수지는 근년 복원한 것이지만 원래 정조가

쌓았다. 또 수원 근처에는 무슨 둔(屯) 이 많다. 만석거 옆 대유둔(大有屯),

서호-축만제(祝萬堤의 서둔(西屯), 현륭원 만년제(萬年堤)의 만년둔(萬年屯)

이 둔(屯)들의 공통점은 ?

 

 

30. 창덕궁에서 화성행궁 까지 당시 릿수로 몇 리(里)인가?

참고로 현재 10리는 4km  이지만 조선 후기는 5.4 km 였다.

 

 

 

화성 내 거리에 대하여

 

31. 장안문 밖 거리 이름에 ‘옛영화역길’ 이 있다. 바로 옛 역참제도의

역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역은 원래 딴 데 있던 것을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면서 옮겨 왔다. 원래 있던 곳은?

 

(가) 양재역 (나) 연서역 (다) 평구역 (라) 봉안역

 

32. 다음 중 조선시대 종루(鐘樓)가 있던 도시는?

(가)            서울 (나) 모든 주요 도시 (라)서울과 수원

 

33 조선시대 서울 육의전을 제외하고 상설시장이 최초로 생긴 도시는?

(가)            평양 (나) 개성 (다) 부산 (라) 수원

 

34. 팔부자거리 이름의 유래는?

 

35. 정조는 수원이 빨리 번영하게끔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특혜를 준다.

그 중 하나가 전매권이다. 다음 중 정조가 수원상인에게 준 전매품목은?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가)            담배 (나) 인삼 (다) 갓  (라) 고추

 

 

화성행궁에 대하여

 

행궁이란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궐이다.

 

 

 

36. 홍살문과 신풍루의 축은 일직선이 아니다. 왜 어긋나 있을까?

(가) 복원이 잘못되어 (나) 일제가 비틀어 놓았다 (다) 원래 그렇다

 

 

신풍루 앞에서는 무예시범이 벌어진다.

일요일은 오전 11시부터 하니 이번 답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37. 신풍루(新豊樓) 이름의 유래는 ?

(가)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나) 황제의 고향

 

….수원의 백성들은 나의 팔과 다리요, 수원은 나의 새로운 고향이다

이제 화성행궁의 정문 이름을 신풍루로 하도록 하라-정조

 

 

 

38. 정조대왕은 무예도보통지란 책도 편찬했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는 몇 가지인가?

(가) 18기 (나) 24기 (다) 36기

 

39. 봉수당(奉壽堂)은 행궁의 정전이다.

왜 전(殿)이 아니고 당(堂)일까?

 

이 질문과 관련하여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혜경궁이 하지 못하고 정순왕후가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라

 

 

 

40. 행궁은 왕의 행차가 없을 때는 수원 유수의 관청이다.

수원 행궁에서 유수의 집무공간은 ?

(가)            유여택 (나) 낙남헌 (다) 복래정 (라)노래당

 

 

다음은 혜경궁의 회갑연 장면을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다.

 

 

 

41. 그림 중 정조 대왕의 위치는 어디이고 혜경궁의 자리는 어디인가?

 

42. 봉수당진찬도 아래 쪽에 악사들이 둘러싸고 가운데 춤을 춘다.

이 춤추는 사람들을 무엇이라 부르나?

(가) 궁녀 (나)여령(女伶) 

 

다음은 사도세자가 들어 갔다는 뒤주와 비슷한 것을 행궁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 간지 8일 만에 숨을 거둔다.

저런 데 들어가 그렇게 오래 버텼다니 믿기 어렵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기왕 뒤주 보았으니 문제 하나 ^^

 

43. 뒤주에 들어간 곳은 창경궁 어디며 숨을 거둔 곳은 어디인가?

(가) 문정전 (나) 선인문 (다) 함인정 (라) 춘당지

 

 

화성 성곽

 

44. 한양성의 주산은 북쪽-청와대 뒤에 있는 백악(=북악)이다.

수원 화성의 주산은 어디인가? 또 수원 행궁의 좌향(坐向)은?

다음 그림을 참고하고 대답하라.

 

 

 

 

45. 화성 성곽의 둘레는?

(가)            3,600 보(步)-4,240m  (나) 4,600 보(步)- 5,744m

 

46. 성곽의 여장(女牆) 또는 성가퀴의 한 구간을 타(朶)라고 한다.

화성에는 총 몇 타가 있나?

(가)            721  (나) 913

 

 

46. 일 타당 수비병 몇 명씩 배치했을까?

 

48. 화성 성곽의 주재료는 무엇인가?

(가) 돌 (나) 벽돌 (다) 흙 (라)나무

 

49. 화성 성곽에 쓴 돌덩이는 총 몇 개인가?

(가)            81,100 여 덩어리, (나)62.400 여 덩어리

(다) 30,200 여 덩어리  (라) 187,600 여 덩어리

 

50. 화성 축성에 의외로 숯이 많이 들어 69,506석 이나 된다.

이 많은 숯을 주로 무엇에다 썼을까?

 

(가)            일꾼들 밥 짓는데

(나)            풀무를 달구어 철물을 만드는데

(다)            건물기초 1m 가까이 묻어 해충들이 건물 근처에 오는 것을 막음.

 

51. 수원에는 동서남북 4곳에 대문이 있고, 수문이 있다.

다음 중 짝이 맞지 않는 것은?

 

(가) 동      창룡문

(나) 서      화홍문

(다) 남      팔달문

(라) 북      장안문

 

 

 

 

위는 화성성역의궤 중 장안문이다.

 

52. 장안(長安)이란 무슨 뜻인가?

 

53. 장안문 옹성 위에 구멍이 다섯 있으니 오성지(五星池)라고 한다,

용도가 무엇일까?

 

54. 위 의궤의 그림과 현장 실물을 보면 다른 점이 있다. 무엇일까?

 

 

55. 치성(雉城)의 치(雉)는 꿩 치다. 왜 ‘꿩성’이라고 했을까?

 

56. 다음 시설물은 용도가 무엇인가?

 

 

 

(가) 제사 지내는 제단 (나) 감시탑 (다) 쇠뇌를 쏘기 위한 시설

 

57. 화성에 commanding post-장대(將臺)가 몇 개 인가?

 

58. 카드 빚에 울쩍해 진 20 대 하나가 2006년 5월 1일 서장대를 불 질렀다.

그런데 서장대가 파괴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몇 번 째인가?

 

(가) 2 (나)3 (다) 4 (라) 5

 

서장대 처음 수난은 1920년 경 농진청 전신 권업모범장 일본인들이

인공강우기를 서장대 옆에서 시험하다 진동이 심해 무너진 것이라고 한다.

 

 

 

 

59. 공심돈의 ‘돈’ 자는?

(가)            (나) 旽 (다)墩

 

 

 

60. 위 사진 왼쪽 ‘서북공심돈’은 화성을 알리는 사진에 단골로 등장한다.

공심돈 오른 쪽 대문의 이름은 무엇이고 방위는 동서남북 중 어디인가?

 

 

 

61. 위 사진은 동북공심돈 내부 통로로 소라처럼 빙글빙글 돌아 올라간다.

진입구 쪽에서 보아 시계방향으로 휘었다. 이렇게 시계방향으로 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62. 동장대는 언덕 위에 있다. 좌우 대칭이 맞아야 하니 이 언덕을 팔달산과

마주 보는 산으로 여기기도 한다. 동장대가 있는 이 언덕을 무슨 산이라고도 하나?

 

(가) 선암산 (나) 선운산 (다) 숙지산 (라) 여기산

 

 

 

63. 아래는 북동포루(北東砲樓)다. 지붕이 오른 쪽은 맞배 지붕이고

왼 쪽은 우진각 지붕이다. 왜 그렇게 지었을까?

 

 

 

 

 

64. 포루(砲樓)와 포루(鋪樓)의 차이는?

 

65. 광교산에서 발원한 버드내-유천(柳川)는 화성을 가로 지른다. 성으로

들어 오는 입구에 화홍문이 있다. 다음 중 화홍문의 기능이 아닌 것은

 

(가) 다리

(나) 수문 

(다) 쉼터

(라) 방어설비

(마) 운하

 

66. 광교산 정기가 방화수류정 용머리 바위 위에 뭉쳐 있다.

그 앞 연못에서 보는 달 구경 용지대월(龍池待月)은 수원 팔경 중 하나다.

매달 보름 악연주회와 시 낭송을 한다. 보름 날 용연의 달은 네 개라는데

다음 중 아닌 것은?

 

(가)  하늘의 달

(나)  용연 물위의 달

(다)  술잔에 뜬 달

(라)  임의 눈동자에 있는 달

(마)  담배 연기 속에 달

 

 

 

봉돈(烽墩)

화성의 봉돈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봉수대와 성벽이 결합되었다.

따라서 이름이 봉수대가 아니라 봉돈(烽墩)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신호를 보냈다.

 

67. 다음 중 봉수대에서 연기를 낼 때 주로 쓰던 재료는?

 

(가) 화약 (나)장작 (다) 염소똥 (라)짚 

 

68. 국경에서 한양 남산 봉수대까지 신호가 전해지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가) 5-6 시간 (나) 하루 (다) 이틀

 

69. 남수문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다. 시민 단체에서는 곧 될 것이라고

꿈에 부풀어 있지만 돌아가는 것 보니 쉽지 않겠다. 북수문-화홍문에는

홍예(아치문)가 7개다. 남수문에는 홍예가 몇 개가 있었을까?

 

 

사진은 화홍문의 아치.

 

70. 북수문-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앞 연못에는 용바위가 있다.

풍수적으로 이에 대치 되는 동물이 남수문에 있었는데 다음 어느 것인가?

(가) (나) 호랑이 (다) 거북

 

이상

 

우리나라 세계의 유산 (World Heritage) 현황

 

세계의 문화유산 :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불국사-석굴암,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세계의 자연유산 :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세계의 기록유산

훈민정음 해례본 ,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하권 (프랑스 소장)

승정원일기 , 팔만대장경, 조선 의궤 (프랑스, 일본 일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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