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단 두 번의 만남으로 서로의 약지를 얽고 혼약을 맺었다. 낭만에 무르고 철없는 청춘들은 우리를 보며 운명을 몽상하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이해가 섞인 관계로는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 아닐 수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른 아침부터 수레를 끌고 돌아온 종복이 해가 구릉에 걸치도록 밖에서 서성이다가 급기야 고개를 떨구고 껌뻑 졸아도 대문 빗장은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숙부는 손님도 없는 외당에 자리를 지켜가며 가죽 장갑의 겉면을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지참금을 한참 웃도는 위로 명목의 비용을 이미 받고도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결국 그가 직접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숙부는 그제야 마당 한편에 수레 자리를 내주었다. 종복은 성미 고약한 주인마님이 행여 변심할까 나무 상자를 서둘러 내렸다. 대관절 어느 누가 처가도 아닌 처가의 사돈에게 이런 패물과 금품을 써주겠냐만 양재희는 끝까지 정성스러웠다.
아내 될 사람을 키워주신 노고에 비하면 형편없이 부족하단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내내 언행에 신중했고 공손해서 그로 인해 숙부를 대단히 착각하게 했다. 이 혼약을 바탕으로 한 거래에 있어서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나를 사기로 결정한 쪽은 양재희였지, 숙부가 아니었는데. 고를 때와는 딴판인 그가 감쪽같아서 하마터면 나조차 믿을 뻔했다.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그의 팔 안쪽에 단단히 묶여 이 사기극 같은 관계가 과연 무엇으로부터 출현 되었는지 회상한다.
⌜그는 아직 길지 않은 결혼 생활 중에도 아내와의 첫 만남을 자주 상기하곤 했다. 그는 화랑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기묘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홀로 앉아 작품이 아닌 전시회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하던 그녀를 관람하는 일은⌟
화랑에서 모두가 지성인의 차림을 하고 허울 좋은 말투를 섞어가며 쓰는 관람인들은 작품이 어떤 경로로 흘러왔는지 궁금하지 않고 그저 얼마나 파격적인 모습인지에만 오로지 관심을 썼다. 머리가 붙어 지내는 쌍둥이는 나와 가장 오래 화랑을 지킨 애들이었다. 얼룩이 꽃처럼 전신에 찍힌 여자는 뱀처럼 하지가 붙은 여자가 선박에 실려 팔려 간 후에 새로 들어왔다. 그들이 관람하는 우리는 저마다 불행의 출처를 안고 있는 별종들. 들추려고 만든 옷을 스스로 밀쳐 벗는다. 이곳에서 옷은 흥미를 유발하는 용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두터웠고 견고했다. 겹겹이 쌓은 옷이 본질을 잃을수록 입 안으로 저속한 말을 굴렸다.
‘아가씨, 정말 참기 힘들 때는 물어요.’
울음으로는 도저히 삶이 해소되지 않을 때마다, 살고 싶은 열망이 주저앉을 때마다, 죽고 싶은 고비를 쌍둥이는 가끔 그렇게 욕을 물고 넘겼다고 익살맞은 새같이 재잘거렸다. 딱히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양재희는 이런 나를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다. 모서리가 둥글게 녹은 나의 증오는 대부분 잘 삼켜졌고 유순하게 눈망울만 깜빡이는 분노가 언젠가 잘못 튀어나와 사람을 물면 그건 양재희가 아니라 숙부일 테니까.
화랑은 초목들마저 비정형으로 서로 얽혀 심어져 있었지만 관람인들과 별종 사이에는 유독 빨간 줄이 가로질렀다. 누구도 넘을 생각 안 하던 그걸 훌쩍 뛰어넘은 건 양재희 뿐이었다. 차마 숙부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
‘창주로 내려가시게요?’
‘그래야지. 네가 출가하게 되었으니 대도에는 미련 없다.’
숙부의 낙향은 자연스레 내 혼사일로 맞추어졌다. 그가 이 집에 기거하며 이 집이 소유한 종복을 부리고 이 집의 것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보호인의 자격으로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보호받을 사람이 없는 빈집에 기거할 만한 명분이 숙부에겐 없었고, 천로 역시 외부인이 가산을 축내는 것을 둘 만큼 순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어느새 돌아와 있을 숙부의 모습이 선연했다. 실제로 그는 화랑 옆에 번듯한 집을 구매하기도 했었다. 한 사람의 인륜대사가 푸줏간 고기처럼 저울에 매달려 경매 붙여진 날이었다. 꽤 높은 값을 부르는 남자를 보며 그 애를 생각했다. 언젠가 이런 나도 돈을 주고 구매했던 한 사람의 인생을. 이제야 부끄러워졌다면 악착스러울 정도로 반듯했던 등은 진작에 굽어 나는 더욱 흉한 몰골로 살았을 거다. 그런데 한참을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나에게 팔려 와야 했던 걔 하나가 마음에 참 지독하게 걸렸다.
그 애는 여전히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줄 안다.
세상에 귀하고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두고 멍청하게.
경매에서 최종적으로 낙찰 받은 남자는 예주의 어느 명망 있는 귀족이었다. 가솔들은 주로 본가에 기거하지만 본인은 타국을 돌며 예술품을 사들이는 일을 한다고 들었다. 남자의 손에서는 아교로 바싹 굳은 안료 냄새가 났다. 양재희는 이보다 매끄럽고 묵직한 향이 났던 것 같은데, 그 앤 무슨 향이 났더라. 홀연히 사라졌다가 뒤돌아보면 어느새 문을 두들기던 빈가라는 또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면 왜인지 숨 쉬는 게 힘들었다. 그날 벌어진 옷깃 안에 몸을 한참이나 보던 양재희는 그 후로 다시 화랑을 찾지 않았고 나도 사는 법에 골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쳤다는 뜻이다.*
⌜가지고 싶은 마음과 베풀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를 즈음에는 그는 이미 아내와 두 번째 만남을 끝낸 이후였다. 전시회장에서의 만남이 둘의 우연이었다면 두 번째 만남은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왜 이렇게 말랐어.”
요사이 이 집안사람들은 종비고 가마꾼이고 할 것 없이 아가씨 태가 부쩍 좋아졌단 말을 달고 다녔다. 꼭 누구 들으란 것처럼 담장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에도 숙부는 싫지 않은 내색이었다. 가짓수가 줄어드는 찬에 내심 안쓰럽게 여기던 유모도 혼일을 당기자는 남자의 서한을 곁눈으로 확인하더니 우리 아가씨가 크게 사랑받겠다고 기뻐하며 기껏 들여온 상을 내갔다. 그렇게 내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음식들은 개밥으로 던져졌다. 전에 없이 온화해진 주인마님 덕분에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웃음 안 낀 얼굴이 없었다. 개들마저 나날이 살이 붙어서 아랫목에 배 뒤집고 졸며 귀여움을 받는데 나라고 그러면 안 될 법이 있나. 처마 밑에 아무렇게 누워 방치한 몸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대답이었다.
“사랑받고 싶어서요.”
도드라진 뼈가 잠깐 오르락내리락하다 금세 가라앉았다. 이로써 내 거짓말은 생애 두 번의 전적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쁜 짓은 길이 잘 든다는 숙부의 말이 맞았다. 그러니까 내가 올바른 길로 가지 않을까 봐 부단히 노력했던 훈육들도, 모두 이해했다. 숙부를 이해하지 못한 건 그였다. 내 앞에 그어져 있던 빨간 선을 주저 없이 넘었을 때처럼, 기다렸다는 듯 내 거짓말에 동조하는 양재희는 곁에 앉아 두 손을 뻗는다. 파랑이 유난히 깊었던 날씨가 비를 내렸다. 거꾸로 마주한 세상은 하늘이 땅이 되어 펼쳐져 있었고 비는 땅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너 역시 다시는 등 뒤로도 그리지 못할 것이다. 너를 고스란히 맞고 사랑하려 했던 마음에 얼룩이 번진다.
창백히 얼어붙은 숨을 그와 나눠 가지는 동안 번진 얼룩은 지워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다가, 마침내 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