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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15:1-8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수년 전에 이웃나라인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에 큰 재앙이 덮쳤습니다. 중국 쓰촨성에 지진(地震)이 발생해 8만 명 이상이 죽었고, 일본 도후쿠 지방에 쓰나미가 덮쳐 2만 명가량이 죽는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지구 온난화로 전 세계 사람들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크고 작은 재난(災難)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최고로 똑똑한데,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을 때는 짐승이나 곤충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왜 세상적인 복(福)을 주지 않고, 많은 고난(苦難)을 받게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무서운 재앙을 막아 주실 것 같은데, 왜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재앙이 일어나 아까운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보면, 두 번의 큰 재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곱 인(印)의 재앙이고, 다른 하나는 일곱 나팔의 재앙이었습니다.
이 일곱 재앙 중간 중간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라든지, 그 손에 든 책이라든지, 용(龍)이나 바다와 육지에서 올라온 짐승 그리고 승리한 14만 4천의 계시가 나옵니다.
여기서 일곱 재앙이 뼈대라면, 그 중간 중간에 나오는 계시(啓示)는 그 뼈를 채우고 있는 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뼈대가 재앙(災殃)과 심판(審判)으로 되어 있다면, 그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勝利)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만 보면,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無關心)하신 것 같고, 악(惡)한 자들은 세상을 자기 멋대로 쥐고 흔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 성도들에게 무관심하시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악(惡)을 사용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鍊丹)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Ⅰ.불이 섞인 유리 바다 우리 인간이 짐승이나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설명을 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당장 눈앞에 일어나는 일만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사람에게 붙잡히면 죽어라 도망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동물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심각한 병(病)에 걸렸고, 크게 다쳐 치료가 필요한데도 야생동물들은 그런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칩니다.
이런 야생동물들을 고치려면, 설명해서는 안 되고, 강제로 마취 주사를 놓은 뒤 수술하거나,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직 어린 아이라도 말귀를 알아듣기 때문에 의사(醫師)나 부모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의 다른 점은 자신이나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차원적(二次元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일어나는 일만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합니다. 그렇다 보니 어려움이 닥쳤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살려고 발버둥 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분의 눈으로 자신의 문제나 세상일을 보기 때문에 이것이 치료(治療)과정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설명을 듣고, 그분의 뜻에 비춰 자신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는“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1절)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사도 요한이 개인적으로 봤을 때, 다른 성도들은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 유배(流配)되거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의 핍박(逼迫)이 점점 거세지면, 절망할 수 있습니다. 즉‘아, 우리 주님의 위대한 복음은 여기까지이고 이제 복음도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을 보니 주님이 살아 계신 모습으로 나타나시는데, 오히려 더 두렵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요한이 세상을 봤을 때, 그 당시 교회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비참한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 교회는 그분의 보좌를 둘러싼 이십사 장로들이며, 해를 옷으로 입은 영광스러운 여인이고, 하나님 보좌 옆에 있는 천사들이 사자, 독수리, 사람, 소 등의 모습으로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요한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봤을 때, 로마 황제가 모든 사람에게 황제 숭배(崇拜)를 강요하면, 복종해야 할 것 같은데, 성경에는 그것은 용(龍)이 시킨 일이고, 로마 황제는 미친 짐승이고, 괴물(怪物)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내가 하늘을 보니”라는 요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3-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을 읽고, 현재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 눈앞에 일어난 좋지 않은 일들만 보면,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악(惡)한 자들이나, 힘을 가진 자들의 뜻대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의 악(惡)한 자들이나, 힘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쓰시는 엑스트라(extra)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들의 기도(祈禱)대로 됩니다.
사울 왕(王)시절 블레셋과 싸울 때, 이스라엘 용사들 중에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일 동안 골리앗을 통해 욕이라는 욕은 다 얻어먹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올라온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하겠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은 죽을 거라면서 말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골리앗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장수(將帥)로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한 마리의 짐승처럼 보일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양(羊)을 치면서 사자나 곰을 이긴 적이 있기 때문에 골리앗을 짐승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힘을 가진 자와 싸워야 할 때, 우리 힘으로 이기려고 하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바라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이성이 없는 야생동물, 즉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49:20절)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상대방이 짐승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지혜(智惠)로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요한이 하늘을 보니, 크고 이상한 이적(異蹟)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는데, 이것이 마지막 재앙(災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것이 곧 요한계시록의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곱 인봉과 일곱 나팔의 재앙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일곱 대접의 재앙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근본적인 관계는 적대적(敵對的)이고, 원수(怨讐)관계이며, 인간과 이 세상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運命)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 때문에 결코 인간의 죄(罪)를 모르는 체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罪)를 통해 오염(汚染)시킨 이 세상도 심판(審判)하실 텐데, 대신 이 세상에서 어린 양의 죽음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환난(患難)을 당해야 하고, 고통(苦痛)을 받아야 할까? 그것은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미련해서 고난(苦難)이 없으면,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잘난 체하기 때문에 교만(驕慢)의 물이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틈이 생기고, 기회만 주어지면, 세상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난과 고통은 우리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 밀착(密着)시키고, 우리의 교만(驕慢)을 꺾어 하나님께 매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을 이 세상의 악(惡)한 자들을 통해 훈련시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이번에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보게 됩니다.
2절)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유리 바다’는 이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설명하면서 4:6절)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 있는 바다는 바다이긴 한데, 유리 바다입니다. 이 유리 바다는 일체 물결이나 파도가 없고, 절대적으로 조용한 바다입니다.
유리는 투명하기 때문에 그 위에 아주 조그만 얼룩이나 때가 있어도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누구든 감히 이 유리 바다를 얼룩 하나 남기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누군가가 맨발로 이 유리 바다를 건너간다면, 밟는 곳마다 더러운 발자국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수5:15절)...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는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런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내 발에서 신을 벗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요한이 본 것은 그냥 유리 바다가 아니라, 불이 섞인 유리 바다였습니다. 불이 없는 그냥 유리 바다라고 해도 온 세상을 맨발바닥으로 돌아다니는 죄인들은 한 발자국도 건너갈 수가 없는데, 이번에는 불이 섞여 있는 유리 바다였습니다.
불이 붙어 있는 이 뜨거운 유리 바다를 맨발로 건너가면,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거나, 발이 다 타버릴 것입니다.“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은 우리 성도들이 통과해야 하는 고난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여기‘불’은 우리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받아야 하는 고통을 말하고,‘유리 바다’는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환난을 통하여 흠이나 티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순사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목사들에게 나무판에 대못을 잔뜩 박아 놓고,‘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려면, 그 못 위를 걸어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 위를 밟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을 고문(拷問)하는 방법 중 숫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을 그 위로 걸어가게 하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불에 시뻘겋게 달궈진 돌이나 불이 붙은 숫불 위를 걸어가라고 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이 불이 섞인 유리 바디를 건너 환난을 통과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2절)...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 고”노래를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는 모든 성도가 통과해야 하는 마지막 고난인 것입니다. -7- 존 버니언이 쓴 <천로역정>을 보면,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최종적으로 건너야 할 강(江)이 있는데,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은 산자와 죽은 자를 나누는 마지막 강으로, 믿는 자들은 이 죽음의 강을 성큼성큼 건너가 천사들이 나팔 불며 환영하는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사망(死亡)은 우리 믿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가장 무서운 시험(試驗)입니다. 결국 사람은 죽으면서 자기가 믿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 지옥의 불같은 시험을 당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모든 영광된 축복은 죽음이라는 불 시험을 통과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섭씨 40도, 50도가 넘는 광야 길을 40년 동안 걸어야 했습니다. 뜨거운 사막 길을 계속 걸으면서 애굽 땅에서 갖게 된 죄스러운 습관이 하나 둘 씻기고, 거룩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뜨거운 사막을 걸으면서 배운 것은 자기 생명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8:3절)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 그대로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사막에서 만나를 먹고, 물도 없이 반석(磐石)에서 나오는 생수(生水)를 마시며 살았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바람에 이들은 40일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나 걸려 가야 했고, 불 뱀에 물리기도 하고, 땅이 갈라져 죽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때까지 광야를 헤매도록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뜨거운 사막을 걸으면서 무조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이고, 하나님의 구름이 머물면, 끝없이 기다리는 훈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불 사막을 통과 하고 나서 요단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통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이 있고,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설교를 듣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직 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통과하지 못한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부흥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고난의 불바다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이 얼마나 똑똑하고, 유능한가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은 반드시 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통과해야 겸손해지고, 정직해지며, 그분의 손에 붙들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눈에서 엄청난 눈물이 흘러야 하고,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유리 바다에 비춰 보면, 얼룩이나, 때가 보이지 않고, 아직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보는 목회자들이나, 선교사, 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겸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야망(野望)에 찬 사업가의 모습이거나, 말만 그럴듯하게 하고, 실제로는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정치인의 모습이거나, 요란하게 자기를 선전하는 장사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 불이 섞인 바다를 건너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들은 죽을 때도 결코 당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런 연단(鍊丹)의 불바다를 통과하지 않고, 대신 죄(罪)의 불 사막을 통과하게 됩니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정욕(情慾)의 불바다이고, 음란(淫亂)의 불바다이며, 죄악(罪惡)의 불바다를 통과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까지 완전히 죄(罪)로 오염되고 맙니다.
결국 그 배에 성령의 생수(生水)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죄(罪)의 불에 녹아버리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화재(火災)가 일어났을 때, 물을 적신 수건을 입에 대면, 산소가 생겨서 호흡기가 유독가스에 덜 손상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죄악(罪惡)의 독가스는 성령의 생수(生水)가 없는 사람들의 호흡기를 전부 녹여 버리고, 태워 버려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반면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서는 성령의 생수(生水)가 강같이 흐르기 때문에 죄(罪)의 불기운을 몰아내어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 망(亡)하는 길인 줄도 모르고 잘난 체하고, 오히려 고난 받는 성도들을 조롱(嘲弄)하고, 업신여기다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의 지옥(地獄) 불에 땔감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2절)...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짐승과 우상의 수’는 666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안히 살려면, 황제(皇帝)에게 절하고, 표(票)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아무런 생각 없이 황제 상(像)에 절하고, 분향(焚香)한 뒤 표(票)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 성도들은 황제(皇帝)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절하지 않고 분향도 하지 않고, 표(票)도 받지 않아서 집에서 쫓겨나고, 장사를 하지 못하고, 고문(拷問)을 당하거나 죽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짐승에게 절하는 것은 지옥(地獄)으로 가는 표시였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거나, 포기하고, 짐승에게 절하지 않았던 사람은 영생(永生)의 복(福)을 받았습니다.
옛날 그리스 테베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怪物)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그 스핑크스가 낸 질문은 인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영원한 사활(死活)을 결정하는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신(神)에 대한 질문입니다.
즉‘누가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地獄)을 갈 수밖에 없는데, 인생 전체를 탕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7:13절)...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넓은 길로 가는 것은 멸망하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痕迹)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흔적(痕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 증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苦難)을 당한 이런 증거(證據)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분명히 고난(苦難)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마귀(魔鬼)는 몸과 마음을 바쳐 주께 헌신하지 말고, 생각으로만 편하게 잘 믿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는데, 절대 거기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주님이 이 유리 바다에 서 있는 성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황제(皇帝)를 숭배(崇拜)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황제에게 머리를 숙이고, 이 세상의 재산(財産)이나 명예(名譽)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이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건너가야 할 바다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불이 섞인 유리바다입니다.
Ⅱ.승리의 노래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무사히 통과한 성도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는 고난을 이겨낸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3-4절)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 찬송들은 그냥 부르면, 별 의미를 모르지만, 의미를 알면,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위대한 찬양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이 부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노래는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입니다. 이것은 우리 피조물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간증하는 찬송도 있습니다.
이런 노래를 부를 때면, 하나님의 응답이 즉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부르는 찬양 중에서 가장 큰 위력을 가진 것이 곧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후에 부르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찬송가 349장 *나는 예수 따라가는*
이때는 마귀(魔鬼)도 두려워 떨게 됩니다. 고난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통과한 성도들이 부르는 것은 모세의 노래이고, 어린 양의 노래였습니다.
출애굽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있는 바다 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맹렬히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 놓여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조용히 서서 하나님이 오늘 하실 위대한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홍해를 건너고, 바로 왕의 군대는 추격해 오다가 바다가 원래대로 합쳐지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위기를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곧 모세의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모든 제자와 믿는 여인들은 절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부활(復活)하셨고, 제자들을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4:36절)...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때 모두 너무 놀라고 기뻐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우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罪)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악(惡)한 자들을 아예 상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가 마귀(魔鬼)의 졸개이며, 엑스트라(extra)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신기한 것은 하나님이 죽음을 이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해결되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죽어도 지금보다 수백 배, 수천 배 좋은 천국(天國)에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한 고난(苦難)도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苦難)안에 답이 있고, 복(福)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고난(苦難)을 통해 욥처럼 정금(正金)같이 변하고, 하나님과 더욱 하나가 되며, 순결(純潔)하고, 겸손(謙遜)한 자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고난(苦難)을 통과하고 나서“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가장 놀란 것은 예수님이 하신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요란하게 자신을 선전(宣傳)하지도 않으시고, 큰 업적(業績)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매 맞고 죽으셨는데,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인간의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변(變)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우리는 정말 거만(倨慢)하고, 탐욕(貪慾)스럽고, 악(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鍊丹)하셔서 겸손(謙遜)하고, 정직(正直)하고, 약(弱)한 자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변화(變化)시키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주 만이 의롭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의 의(義)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짜 거룩’입니다. 즉 인간의 눈에는 의(義)로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는 거짓과 위선과 얼룩과 죄가 가득한 거룩인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지옥(地獄)불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Ⅲ.하늘의 성전이 열림 요한이 하늘을 보니 하늘에도 성전(聖殿)이 있는데, 그 성전(聖殿)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지성소(至聖所)가 열리면서 드디어 일곱 대접의 재앙이 시작된 것입니다.
5-7절)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기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재앙(災殃)들이 일어나서 아까운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재앙(災殃)들을 보면서 마10:29절)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런 무서운 재앙(災殃)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으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유도 없이 죽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이 하늘을 보니,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를 통과해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주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불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살다가 죽기 전 큰 재앙(災殃)을 당하기도 하고 죽어서는 무서운 지옥(地獄)의 심판(審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런 무서운 재앙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하늘의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온 우주에게 가장 두려운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핵무기 1억만 배의 위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런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은 이처럼 두려운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聖殿)을 통해 인간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지켜 주기를 원하십니다.
인간들의 죄(罪)가 도(道)를 넘게 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재앙(災殃)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욘1:2절)그 악독이 여호와께 상달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지은 죄(罪)나 음행(淫行)의 정도가 지나쳐서 하나님이 도저히 참으실 수 없는 수준이 되면, 재앙(災殃)이 닥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놀라운 점이 바로 이 성전(聖殿)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축복(祝福)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전기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그냥 번개가 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큰 위협(威脅)이고, 공포(公布)이지만 이것을 전기로 사용하면, 모든 것을 편리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성전(聖殿)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墮落)해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지고, 교회가 사람들의 인간적인 교제로 끝난다면, 이 재앙(災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가장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기를 잘못 끊은 바람에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그 회사가 얼마나 형편없는 곳이었는가 하면, 전혀 경험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나 말씀은 최고 수준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히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죄를 많이 지어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쏟아지려고 할 때,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하늘의 성전이 열리면서 일곱 대접이 나옵니다. 성전의 대접은 원래 양(羊)이나 소(牛)를 죽인 뒤 피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대접에 담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두 가지 대접(待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의 기도를 담는 대접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는 대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줄기차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은 그것을 받았다가 심령 부흥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罪)짓고 악(惡)한 짓을 하면, 그것이 진노의 대접에 담겼다가 결국 자기 머리에 부어지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나오는 천사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金)띠를 띠었다고 했는데, 대단한 권세를 가진 제사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지상에서 드리는 예배는 천상의 제사와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이 세상에 임하는 재앙(災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옷을 입은 천사가 재앙의 대접을 가지고 나오는 걸 보면, 심판(審判)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서 공정하게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심판(審判)을 의도적으로 내리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 재앙(災殃)이 내리지 않고, 전쟁(戰爭)이 터지지 않도록 막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이 전쟁(戰爭)을 막고, 심판(審判)을 막으셔도 인간들의 죄(罪)가 너무나 심각하면, 결국 붙들고 계신 손을 놓아 버리는데, 하나님이 포기하시면, 재앙(災殃)이 터지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친척이나 자식, 민족,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재앙(災殃)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젊은 시절 어거스틴은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이를 지켜 본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앰브로즈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만나 제발 예수를 믿도록 권면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앰브로즈 목사는 어거스턴의 어머니에게“당신의 아들은 지금 너무 교만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로 기도해 주는 아들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어거스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즉 누구든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전(聖殿)에 연기가 가득 차서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8절)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하나님의 성전(聖殿)에 제사장이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고, 기도해야 세상이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성전(聖殿)에 연기(煙氣)가 가득 차서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원래 성전에 하나님의 연기가 꽉 찰 때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시고, 그들의 예배가 그분의 뜻에 맞아서 영광으로 임하실 때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만들었을 때나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꽉 차서 제사장들은 감히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꽉 차서 아무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의 때가 지난 것을 말합니다.
즉 세상에서 전도자(前導者)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서 설교할 때,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데, 교만(驕慢)한 마음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의 종들이 아무리 복음을 외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반응(反應)이 없을 때가 곧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임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審判)은 대접(待接)으로 부어지기 때문에 조금도 에누리 없이 그 진노의 잔을 다 마셔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 성공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것은 멸망(滅亡)으로 가는 길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고난(苦難)을 통과하고, 하나님을 붙들어 영적(靈的)인 심령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앞의 이익(利益)과 쾌락(快樂)을 위해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야 하고, 멸망(滅亡)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 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4:16절)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셨는데, 고기 잡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즉 고기를 잡으려면 낚는 기술이 좋아야 하고, 도구도 좋아야 합니다. 특히 낚시할 때는 좋은 미끼도 필요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좀비 인생)을 낚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면,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수십 배,수백 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라 붙들면, 사람을 낚을 수 있고 하나님의 부흥의 축복이 임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심령 부흥과 축복을 오게 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505장 *온 세상 위하여* 성경 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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