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닦이 소년
김진주
고아원에서 나온 여섯 식구는 갈 데가 없었다. 어머니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여동생을 업은 채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큰오빠는 양은솥과 자질구레한 옷가지들을 등에 지고, 작은오빠와 언니와 나는 그 뒤를 오리 새끼들처럼 따라갔다. 허허벌판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지 다리 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선 먹을 물이 있고 비를 피할 수 있어서 갈 곳 없는 우리 가족에겐 임시 거처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어머니는 비바람을 덜 맞을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모난 돌을 치우고 모래를 깔아 평평하게 고른 뒤 납작한 돌을 주워 식구들이 누울 만큼 방바닥을 만들었다.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바람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마음도 모르고 어린 나는 이 상황이 소꿉놀이하는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큰 돌을 양쪽에 나란히 괴고 우므러진 양은솥을 올려놓았다. 온 식구가 주워 모은 물살에 떠내려온 나뭇가지가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옹기종기 앉아 버들가지를 꺾어 만들어 놓은 젓가락만 바라보았다.
우리의 살림살이는 맏이인 큰오빠가 책임을 졌다. 아버지가 있었지만 밖으로만 나돌고 집에 들어오는 날은 없었다. 가장은 15살의 오빠였다. 구두 통을 메고 날마다 먼지가 풀썩거리는 흙길을 다니며 벌어온 푼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달 밝은 밤에도 어두운 그믐밤에도 우리는 이제나 저제나 오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늦으면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돌바닥에 나란히 눕혀 놓고 어두운 개울가를 서성거렸다. 별일 없으면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오빠가 방망이 국수를 사왔기 때문이다. 굶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배고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치면 조용히 잠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오빠는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그 노랫소리에 담긴 속마음을 알기보다는 그저 굶지 않는 게 중요했다. 어두워지면 오빠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순간에는 숨소리만 났고 어머니가 자갈 밟는 소리만 났다. 오빠는 어머니에게 신호를 주는 뜻인지 먼 곳에서부터 큰소리로 노래를 하며 왔다.
노랫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가까워지면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반가움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울음 섞인 음성으로 변했다. “큰애야 이제 오냐?" 어머니의 짧은 한마디는 연민의 소리였다. 아무 탈 없이 돌아온 아들을 보며 내쉬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세상이 어수선하던 그때는 구두 닦는 일도 자리다툼이 심했다. 싸움을 하고 죽도록 맞고 구두 통까지 빼앗기는 날이 허다했다. 오빠가 들어오기까지 어머니는 늘 노심초사했다. “예, 어머니. 삼사월 진진해를 넘기고 돌아오는 아들입니다."라고 웃으며 고달픈 하루를 웃음소리에 감추었다.
오빠는 자신이 못나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고생시킨다고 괴로워했다. 방망이 국수를 위해 하루종일 구두를 닦으며 겪는 험한 일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은 돈 벌이가 시원찮아 이것 밖에 못 벌어왔다고 미안해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어미 아비를 잘못 만나 네가 이런 고생을 한다며 가슴을 치며 울었다. 우리도 덩달아 훌쩍이며 눈은 오빠가 들고 있는 방망이 국수에게로 쏠렸다.
국수를 받아 든 어머니는 늦은 저녁을 서둘렀다. 양은솥에 물을 붓고 불을 지폈다. 불을 때는 어머니 옆에 다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타오르는 불길에 우리 마음도 달아올랐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국수 끓는 냄새에도 웃고 웃었다. 실컷 먹지는 못했지만, 온 식구가 주린 배를 채웠다. 방망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방망이 국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맛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빠의 어깨를 짓누르며 하루하루 버텨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황금빛 햇살이 다리 밑을 비추고 햇빛에 반사된 개울물에 눈이 부시던 아침이었다. 매번 국수로 끼니를 때우다 꽁보리밥이 담긴 양푼을 중간에 놓고 빙 둘러앉아 막 먹으려던 차였다. 학교 가던 한 아이가 다리 위에서 우리를 빤히 내려 보며, 다리 밑에 거지들이 밥 먹는다고 고함쳤다. 그 소리에 다른 아이들까지 몰려와 놀려댔다. 깔깔거리며 침을 뱉었다. 돌을 던지며 마른 흙을 걷어찼다. 흙이 밥그릇에 쏟아졌다. 물끄러미 밥그릇만 보고 있던 오빠가 거지가 따로 없으니 얼른 학교에 가라고 했다. 그 말에 거지새끼가 뭐라고 한다며 아이들의 놀림이 더 심해졌다.
발길로 찬 흙덩이가 갓난 동생 얼굴에 떨어졌다. 우는 동생을 뒤로하고, 모욕감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아니면 아이들에게 겁주려고 그랬는지 오빠가 돌을 움켜잡았다. 몇 번의 팔매질이 서로 오갔는데도 달아나기는커녕 심해지기만 했다. 오빠의 기세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세차게 던진 돌이 지나가던 운전사 이마를 때렸다. 피가 났다. 화가 단단히 난 조수가 차에서 내려 누구냐고 소리쳤다. 몹시 화가 나 얼굴빛이 붉게 변한 남자에게 다리 밑에 있는 거지가 던졌다고 일러바쳤다. 뛰어 내려오는 조수가 흥분한 황소 같아 잡히면 죽을 것 같았다. 오빠는 정신없이 개울을 따라 도망쳤다. 운전사와 조수는 악착같이 뒤쫓아 갔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두 사람은 뛰면서도 저기 저놈 좀 잡아 주시오라고 목청껏 외쳤다. 어린 오빠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이내 잡히고 말았다.
오빠는 운전사와 조수에게 번갈아 가며 얻어맞았다. 온몸이 짓밟혀 어머니와 우리가 도착했을 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가냘픈 두 팔로 얼굴을 감싸 쥐고 신음을 내며 돌밭에서 뒹굴었다. 누구 하나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구경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어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사정 이야기를 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붓고 멍이 들고 피가 흐르는 아들을 감싸 안고 어머니도 같이 자갈밭을 나뒹굴었다.
그들이 진정되자 어머니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고아원의 사정으로 여섯 식구가 이곳으로 왔고, 아들이 구두닦이 한 돈으로 산 보리쌀로 겨우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지나가던 아이들이 거지라고 놀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애원하며 빌었다. 사정을 듣고 나서야 운전사와 조수는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빠의 흙투성이 옷을 털어 주고 피도 닦아 주며 미안하다고 했다. 치료하라고 돈을 쥐어 주면서 열심히 살라고 위로하며 떠나갔다.
오빠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울고 싶었을까. 매 맞은 핑계로 참았던 눈물을 토해 냈다. 그 통곡은 여섯 식구가 어엿한 방에서 지내지 못하고 한데에서 생활한다는 게 자신의 탓인 것처럼 들렸다. 오빠도 놀기 좋아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 나이였다. 자기 어깨에 생계가 달려 있고 하루하루 구두를 닦아 생활을 이어가는 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끙끙 앓던 오빠가 억지로 일어났다. 어머니가 쉬라고 연신 말렸다. 그래도 오빠는 괜찮다며 나갈 준비를 했다. 다리를 절었다. 구두통을 메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개울을 철벅 철벅 건너갔다. 어머니는 말없이 오빠가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아마도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시간이었으리라. 똑같은 다리 밑에 사는 또래들은 잔심부름이나 하며 뛰어노는데, 오빠의 삶은 언제나 전쟁 같은 나날이었다. 멀어져 가는 오빠를 보며 나는 오래도록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 장소는 아니지만 다리가 있는 강가를 찾았다. 햇살이 쏟아진다. 근근이 끼니를 때우던 그때도 햇살만큼은 우리에게 공평했다. 다리 밑에 설 때면 그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하다. 게딱지만 한 집도 없이 지지리 가난하게 살았던 나날들. 지울 수만 있다면 강물을 떠서 지난날의 얼룩진 마음을 씻어내고 싶다. 그래도 헛간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오빠 덕에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다.
어릴 때 일은 흐릿하지만, 다리 아래서 살았던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우리의 지붕이었고 등불이었던 오빠는 이른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구두닦이 소년이었던 오빠가 부른 한 서린 노랫소리가 강 물결을 타고, 내 눈물의 물결을 타고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