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순환성지닌 원융무애 상징…불성과 밀접 | ||||||||
고대 한국인 정신세계가 창조…생명의 순환운동과 상통 우리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장식문양이 많지만 태극 문양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영역에서 애호되어 온 것도 드물 것이다. 능묘의 홍살문, 서원, 향교의 출입문 등 유교 건물을 비롯해서 성문이나 장대(將臺)의 판벽 등의 성곽건물, 부채, 무구(巫具), 악기 등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 태극문양이 존재하고 있다. 사찰에서도 법당을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 서까래 끝, 법당 문의 궁창, 법고(法鼓) 등에 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양, 양주 회암사지, 남양주 봉선사, 춘천 청평사 등 왕실 원찰(願刹)의 태극문양이 눈여겨 볼만하다. 이밖에 해남 대흥사 경내 표충사 대문의 태극, 의성 고운사 우화루 서까래의 태극, 양산 통도사 관음전 정문 궁창의 태극, 밀양 표충사 대광전 정문 궁창의 태극, 양평 용문사 축대 계단 소맷돌, 충주청용사지 정혜원융탑,상주 남장사 칠성각 천장의 태극 등 많은 유례가 있다.
(1017~ 1073)의 태극도형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찰건물에 보이는 태극문양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말하는 음양 원리나 태극도형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태극도설 내용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주돈이가 태극도형을 그리기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태극문양이 사찰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고, 또한 성리학과 관련이 없는 인도, 유럽 등에서도 태극과 유사한 문양을 사용한 예가 있기 때문에 태극문양이 성리학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 장식중 태극문양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 감은사지에서 발견된 이파문(二巴紋) 형식의 태극문양이다. 금당(金堂) 석재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대석에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은 일정한 여백을 사이에 두고 음.양의 양의가 서로 꼬리를 물고 회전하는 바람개비 형태로 되어 있다. 감은사가 신라 신문왕2년 (682년)에 완성된 절이므로, 이 태극문양은 송나라 주돈이가 처음 그린 태극도형보다 약 400년 앞선 것이 된다. 또한 고려 광종 24년 (973년)에 창건된 춘천 청평사 대웅보전 정면 계단 소맷돌 양쪽에 연꽃잎에 둘러싸인 태극문양이 있는데, 이 태극문양도 시대적으로 주돈이의 태극도형보다 100여년 앞선 것이다. 고대에 있어서 태극문양은 사찰뿐만 아니라 왕권을 상징하는 보검, 보관 등에도 장식되었는데, 신라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감장보검의 3태극문양, 고구려 진파리1호분출토 관형금구의 태극장식문양 등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유례는 중국에서 주돈이에 의해 성리학이 정립되고 태극도형이 그려진 시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이미 그와 같은 우주관과 세계관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태극문양은 태극도형을 원조로 하는 장식문양이 아니라 고대 한국인의 정신세계가 창조한 생활 장식문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의 근저를 이루는 이와 같은 역동적인 힘, 창조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 고대인들은 언제나 상징을 사용했다. 경북 고령 양전동과 울주 천전리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에 나타난 3개의 동심원으로 된 문양은 삼라만상이 분화 생성되기 이전의 주원융통(周圓融通)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생각이 옳다면 동심원으로 된 원상은 태극문양을 감싸고 있는 원상, 즉 태일(太一)의 의미와 통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때로 샤머니즘과 함께 중층 구조를 이루면서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와 인간의 길흉화복이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저승은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서 관념되는 혼돈상태이고, 정해진 수명을 가진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다시 이 혼돈상태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고 믿는 것이 사생관(死生觀)의 핵심이다. 죽어서 혼돈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분화.생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生)의 기를 다시 받아 또 다른 생명으로 이승에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유한적인 존재인 사람도 이승과 저승을 오가면서 영원히 생명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속사고로 보면 삶과 죽음이란 별개가 아니라 동일근원(同一根源)에 바탕을 둔 분화와 순환지속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북한산 구복사 암벽에서처럼 신당(神堂)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태극문양을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런 관념의 시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생성의 잠재적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는 혼돈상태는 정지가 아닌 운동성과 순환성을 본질로 한다. 이 운동성과 순환성을 동시에 가진 상징형이 바로 소용돌이 형태인 태극문양인 것이다. 감은사 태극문양의 예에서 보았듯이 고대의 태극문양은 바람개비 날개처럼 생긴 것이 원상 안에서 소용돌이 운동을 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태극도설에서는 이것을 양의(兩儀)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서 돌고 있는 두 개의 구름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문양은 백제 시대의 문양전(文樣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구름은 부동(浮動)의 기체이면서 천변만화의 형태와 내재적 기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무한히 유동하는 우주의 환상적 경지를 구름문양을 통해 표현해 냈다. 〈사기(史記) 율서(律書)〉에서는 “수는 ‘一’로부터 시작하고 ‘十’에서 그치며, ‘三’에서 완성된다”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3이라는 수는 가장 완벽한 수이며, 또한 만물을 낳는 근원의 의미를 가진 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색깔을 보면, 2태극은 청색과 적색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3태극은 여기에다 황색이 추가되어 있다. 2태극의 양의는 각각 음과 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색을 적용할 경우에는 오행상의 음양 관계에 있는 흑색과 적색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흑색과 적색의 관계는 오행으로 보면 수극화(水克火)의 상극 관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피하고 목생화(木生火)의 상생의 관계에 있는 청색과 적색을 취한 것이다. 생생의 가능성을 지닌 혼돈상태를 색으로써 상징화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상생의 관계에 있는 색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태극 문양은 원상(圓相) 속에 적색의 양과 청색의 음이 상하로 상대하면서 회전.순환하고 있다. 양의와 음의가 원상 속에서 서로 의지하면서 맞물려 돌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본시 음과 양은 개별성과 의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면서 상호 일체(一體)를 구현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천지가 한 태극이며, 만물 하나 하나가 모두 태극의 원만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하늘의 달이 천강(千江)에 비칠 때 강에 다 둥근 달이 있는 것과 같이 불성은 어느 곳이든 누구나 차별이 없이 모두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로서 원융무애하고 사멸이 없다는 점에서 태극과 불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
국보 제197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대 조선시대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부도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부도는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부도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하여 감상할 만하다.
이 부도(浮屠)는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인 보각국사(普覺國師)(1320∼1392)의 묘탑(墓塔)이다. 편평한 대지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長臺石)으로 1단의 축대를 쌓고 그 중앙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浮屠)를 건립(建立)하였다.
기단부(基壇部)는 복련(覆蓮)을 새긴 하대석(下臺石)과 안상(眼象) 안에 사자상(獅子像)과 운룡문(雲龍紋)을 새긴 중대석(中臺石), 그리고 앙련(仰蓮)을 새긴 상대석(上臺石)으로 이루어졌다.
탑신부(塔身部)는 반룡(蟠龍)이 감긴 엔타시스의 우주(隅柱)를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창방(昌枋)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각면(各面)에는 무기를 든 신장상(神將像)이 1구(一軀)씩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 처마에 탑신(塔身) 우주(隅柱) 위의 창방(昌枋)머리와 접촉되는 부분이 보머리형을 이루고 있으며 추녀와 사래를 양각하였고 연화문(蓮華紋)을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상단부가 급경사이며 기왓골은 없으나 각 합각(合角)마루에 용두(龍頭)를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 정상(頂上)에는 복련(覆蓮)을 조각하여 상륜부(相輪部)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탑신(塔身) 우주(隅柱)의 엔타시스와 창방(昌枋)의 조각, 옥개석(屋蓋石)의 보머리형 조각, 추녀와 사래의 표현, 지붕 합각부의 용두(龍頭)조각 등은 당시의 목조가구(木造架構)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浮屠)의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고 주위에 탑비(塔碑)와 사자석등(獅子石燈)이 있다.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忠州靑龍寺普覺國師幻庵定慧圓融塔碑)
보각국사지비(普覺國師之碑) (篆題 : 비문 제목은 전서(篆書)로 썼음)
유명(有明) 조선국 보각국사비명(朝鮮國普覺國師碑銘) 아울러 서문이 있음
전 봉익대부 첨서밀직사사 동판회의도감사 서연시독진현관 제학 동지춘추관사(前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同判會議都監事書筵侍讀進賢館提學同知春秋館事)
문인(門人) 화장사(華藏寺) 주□선사(住□禪師)
상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 봄 2월 기해일에, 회암사(檜巖寺)에 행차하여 권근(權近)에게 명하기를,
"수국사(脩國師)가 전조(前朝 : 고려왕조)에서 그 도덕과 행실이 한 세상을 압도하였는데, 내가 즉위하자 죽으므로 몹시 슬퍼하였다. 이제 승도(僧徒)들이 석탑을 쌓아 사리를 안치하고 또 비(碑)를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하니, 너는 마땅히 명(銘)을 지으라."
하였다. 권근은 명을 받고 두려워 감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선사(先師)의 휘(諱)는 혼수(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이다. 본래의 성은 조씨(趙氏)이며, 광주(廣州) 풍양현(豐壤縣)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조숙령(趙叔鴒)으로 헌부(憲部)의 산랑(散郞)이다. 어머니는 경씨(慶氏)로서 본관은 청주(淸州)이니, 모두 사족(士族)출신이다. 선사의 아버지(헌부는 조숙령을 가리킴)가 용주(龍州)의 원으로 나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경신년(충숙왕 7, 1320년) 3월 13일에 선사를 관사에서 낳았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우뚝 서 두 번씩이나 뒤돌아보는 것을 보고 활을 당기려 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돌아보니, 사슴 새끼가 그 어미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선사의 아버지는 곧 '짐승이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무엇이 다르랴.' 하고 탄식하면서 곧 사냥을 그만두었다. 몇 달 안 되어 임소인 용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 어머니는 상(喪)을 받들고 그 어린아이와 함께 귀향하였다. 선사께서 어렸을 때 병을 앓아 점을 친 일이 있는데, 그 점쟁이의 말이 '이 아이는 출가(出家)하여야만 병도 없을 것이요, 위대한 화상(和尙)이 되리라.'고 하였다. 나이 겨우 12세가 되자 그 어머니께서 선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갓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몹시 귀여워하였다.
그리하여 사슴의 모정(母情)에 감동되어 곧 사냥을 그만두었으니, 이는 너의 살리기 좋아하는 인자한 도의가 이미 강보(襁褓)에 있을 때부터 나타난 것이다. 하물며 점쟁이의 말이 그러함에랴.” 하고, 대선사(大禪師)인 계송(繼松)에게 보내 머리 깎고 내외 경전(經典)을 익히게 하였다. 특이한 총명과 지혜가 남달라, 달로 열리고 날로 더하여져 높은 명성을 떨쳤으며, 드디어 그 스승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사년(충혜왕 2, 1341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유생과 석문의 친구들과 날마다 어울려 다녔으나, 자신은 항상 생명의 환화(幻化)가 일정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초연히 명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두었다.
그러다 갑자기 외가 동네에 비명에 죽은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비감(悲感)한 생각이 들어 입산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를 하직하고 떠나갈 무렵에 둥근 해가 선사의 얼굴을 비치는 꿈을 꾸었다. 이미 경사로운 징조임을 깨닫고 곧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으니, 지정 8년 무자(충목왕 4, 1348년) 가을로 이때 선사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음을 다잡고 잠도 자지 않으며 잠시도 몸을 눕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공부를 2년 동안 정진한 후, 그 어머니가 애태우며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고는 경산(京山)에 우거하면서 감히 멀리 돌아다니지 않았다. 5~6년 동안 이와 같이 지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람을 시켜《대자묘법화경(大字妙法華經)》을 써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선원사(禪源寺)에 가서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배알하고, 그에게《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깊이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작고한 재상 조공 쌍중(趙公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수릉(首楞)》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는데, 청아하게 뽑아내는 말재주가 있어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었다. 여기에 3년 동안 머물다가 충주(忠州) 청룡사(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서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봉우리가 사방에 둘러있고 주위가 고요한 옛 집터가 있는데, 선사께서 몸소 목재와 돌을 날라다가 기탄없이 경영하여 일이 완성되자 연회암(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자신의 심적(心迹)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현릉(玄陵 : 공민왕)이 선사의 행적이 바른 것을 높이 여겨 회암사(檜巖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곧 금오산(金鰲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신성암(神聖菴)에 거처하였다. 이때 나옹(懶翁) 혜근화상(惠勤和尙) 또한 고운암(孤雲菴)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접견하여 도(道)의 요지를 질의하였는데, 나옹은 뒤에 금란가사(金襴袈裟)ㆍ상아불(象牙拂)ㆍ산형장(山形杖)을 선사에게 주어 신표로 삼았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년) 가을에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에게 명하여 선사를 모셔다 대궐에 나가 강단(講壇)의 자리를 주장하게 하니, 선사는 도중에 도망쳐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고 명산을 편력하여 그 지조를 더욱 굳건히 지켰다. 기유년(공민왕 18, 1369년)에는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 서운사(瑞雲寺)에 선사를 맞이하였는데, 선사께서 이르자 승당(僧堂)을 열고 낭무(廊廡)를 수리하여 선회(禪會)를 크게 여니, 사방의 승려들이 소문을 듣고 와 배알하는 자가 많았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3년 경술(공민왕 19, 1370년) 가을 7월에, 임금께서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나옹에게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임금께서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나옹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 가운데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임금께서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나옹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입문구(入門句)를 물으니, 선사는 즉시 문안으로 들어와 '들어오니 도리어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고 대답하고, 또 문내구(門內句)를 물으니 '안과 밖이 본래 공(空 :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데 중(中)이 어떻게 성립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또 삼관(三關)으로 묻기를 '산은 어찌하여 멧부리에서 그치는가?' 하니, '높으면 곧 낮아지고 낮아지면 곧 그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물은 어찌하여 개울을 이루는가?' 하니, '바다가 숨어 흐르는 곳마다 개울이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밥은 어찌하여 백미로 짓는가?' 하니, '만약 모래로 찐다면 어떻게 좋은 음식이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곧 고개를 끄덕이었다. 임금께서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선사께서는 임금께서 내원(內院)에 머물게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남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위봉산(圍鳳山)에 숨어 지냈다.
5년 임자(공민왕 21, 1372년)에는 임금의 명에 못 이겨 불호사(佛護寺)에 머물렀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으로 내불당(內佛堂)에 불려 들어갔으나, 선사께서는 깊은 밤을 이용하여 남몰래 빠져 나와 곧바로 평해(平海) 서산(西山)으로 갔다. 조정에서 팔도에 칙명을 내려 찾기를 마지아니하므로 곧 나와서 왕명에 응하였다. 갑인년(공민왕 23, 1374년) 정월에 비로소 내원에 들어 갔는데, 임금께서 자주 법요(法要)를 물었고 왕태후(王太后)가 더욱 존경하였다.
9월에 임금께서 승하하자 강선군(康宣君)康寧君이 계승하여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礙圓妙大智普濟)의 존호를 내렸다. 을묘년(우왕 1, 1375년) [가을에는 송광사(松廣社)에 이주하였고, 병진년 3월에는 글을 올려 내원을 떠나서] 서운사(瑞雲寺)로 돌아갔다. 무오년(우왕 4, 1378년)에 치악산(雉岳山)으로부터 연회암(宴晦菴)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문 앞에 손이 찾아오자 선사께서는 곧 침실로 들어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 손은 과연 중사(中使 내시(內侍))였다. 선사에게 광암사(光巖寺)를 맡아 달라고 청하였는데, 선사가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끝내 나왔다.
겨우 3년을 지내고 나서 다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회보가 없자, 선사께선 즉시 밤에 도망쳐 원주(原州) 백운암(白雲菴)으로 갔다. 이후부터 용문(龍門)ㆍ청평(淸平)ㆍ치악산(雉岳山) 등을 편력하면서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계해년(우왕 9, 1383년) 2월에 조정의 의논이 옛 제도에 따라 석문(釋門)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 세워서 사범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당시 물망이 모두 선사에게로 주목되었다. 선사께서 이 말을 듣고 은퇴하기를 꾀하니, 문인 감로장로(甘露長老) 경관(慶觀)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안정하려는 계책뿐입니다. 지금 나라 임금이 불법(佛法)을 존숭하는 의미에서 이 일을 거행하려는 것이니, 그 취지가 매우 훌륭합니다.
선사께서는 사범이 되어 다소나마 안정하여 함부로 움직임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선사께서 끝내 가지 않자, 여름 4월 초1일 갑술일에 왕이 상신(相臣) 우인열(禹仁烈) 등에게 어서(御書)ㆍ인장(印章)ㆍ법복(法服)ㆍ예폐(禮幣)를 받들어 보내 선사가 계신 연회암에 나와서 국사(國師)로 책봉하는 동시,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변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리게 하고,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상주하는 곳을 삼았다. 그해 가을에 서운산(瑞雲山)으로 가니, 왕은 또 정랑(正郞) 박원소(朴元素)에게 안마(鞍馬)를 주어보내 모셔 오게 하였다.
이듬해 갑자년에 해적(海賊)이 깊이 들어와 충주를 침범하므로, 조정에서는 걱정하기를 “개천사 주위가 해적의 소굴이 될 터인데 선사께서 거기에 머무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여, 왕에게 아뢰어 사람을 보내 광암사(光巖寺)로 맞아 왔다. 광암사에 이르자 상언(上言)하기를,
"노승(老僧)이 개천사를 사양하지 못하고, 또 광암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 하나를 맡는 것도 노승의 본뜻에는 어긋나는데 둘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노승으로 하여금 선군(先君)의 명복을 비는 데 전심하게 하시려면 개천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개천사는 선사께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 그 음덕을 입을 곳이요, 광암사는 내가 청하여 연법(演法)하게 한 곳이니, 둘 다 겸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므로, 선사께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을축년(우왕 11, 1385년) 가을에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 : 오불정(五佛頂)의 하나. 결백 청정한 자비로써 널리 법계 중생에게 두루 덮어 주는 것이, 마치 일산이 사람을 덮는 것과 같다 하여 백산개라 함)을 설치하여 온갖 천재지변을 물리치게 하였는데, 명망 높은 유생들과 학식 있는 승려들이 많이 와서 청강하였고, 마지막에는 임금까지 행차하여 예를 베풀었다.
병인년에는 [대비(大妃) 안씨(安氏)가 현릉(玄陵)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보국사(輔國寺)에 불정회(佛頂會)를 베풀고 선사를 초청하였으며, 왕도 또한 와서 불법을 묻고 예를 행하고 갔다. 정묘년 8월에 별들의 운행이 궤도를 벋어나자 또 수창궁(壽昌宮)에 초대하여 소재석(消災席 : 재앙의 소멸을 비는 자리)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돌아갈 때에는 대언(代言) 이직(李稷)을 딸려 보내 존경을 표하였다.
무진년(우왕 14, 1388년) 여름에 왕이 외지에서 손위하고 어린 임금(창왕을 가리킴)이 그 뒤를 계승하자, 선사께서 개천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창왕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호행(護行)하게 하였다.] 기사년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글을 갖추어 인(印 : 도장)을 봉하여 조정에 드리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안 되어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고 사람을 보내 개천사로 도로 모셔오게 하였다.
지금의 주상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선사와 함께 대장경(大藏經)의 완성을 염원하였는데, 신미년(공양왕 3, 1391년) 가을에 장정과 교정의 일이 끝나므로 서운사에 두고 크게 경회(慶會)를 베풀었다. 이때 공양군은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향(香)을 내리고 선사를 맞아 증사(證師 : 법회(法會)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法師))로 삼았다.
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에 우리 주상께서 혁명하여 왕업을 열자 선사께서는 즉시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직위와 절[寺]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함께 인(印)을 보낸 다음 청룡사로 행장을 옮겼다. 시자(侍者) 담원(湛圓)이 전문과 인을 받들고 대궐에 나가니, 임금의 뜻이 전과 같이 스스로 섬기고자 해서 곧 인을 되돌려 보냈다.
담원이 선사에게 와 아뢰니, 선사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내 늙고 또한 병들어 오래 지탱할 수 없거늘, 명철한 주상께선 어찌하여 나의 소원을 막느냐.’고 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질(痢疾)에 걸려 10여 일 동안 낫지 않았다.
용변이 잦았으나 남에게 부축을 받지 않았으며, 피곤하여도 편히 눕지 않고 언제나 꼿꼿이 앉아 있었다. 9월 18일 병신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 :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의 끝이나, 맨 끝에 4자로 된 글귀로 묘한 뜻을 읊어 놓은 운문)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8일 동안 상(床)에 앉았으되 얼굴이 평시와 같았다.
25일 계묘일에 문인들이 연회암 북쪽 산기슭에 섶을 쌓고 다비(茶毗) 하였는데, 전날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아침까지 그치지 않다가 다비를 시작할 무렵에 구름이 걷히고 맑게 개므로 신명의 도움이 있는 듯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뼈를 모으니 그 빛이 눈[雪]과 같이 희었는데, 정골(頂骨 : 이마 뼈)이 더욱 두텁고 정결하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임금께서 애도하는 심정에서 유사를 명하여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내신(內臣)을 보내 그의 유골을 수장(收藏)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는 한편, 공인들에게 명하여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그해 연말 12월 갑신일에 청룡사 북쪽 봉우리에 하관하는데, 전날 밤 청명하여 별빛이 빛나더니 계명(鷄鳴) 때부터 비가 내리다가 돌을 쌓아올릴 무렵에 이르러 그치므로, 뭇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고들 말하였다. 춘추는 73세이며 하랍(夏臘 : 중이 된 해부터 세는 나이. 납(臘)은 세말(歲末)을 일컫는 말인데, 비구는 해마다 여름 90일 동안을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고, 이것을 하안거(夏安居)라 하여 나이를 세기 때문에 하랍이라 함)은 60세였다.
선사께서는 청수한 얼굴에다 맑고 온화한 기상으로 예절이 바르고 말씨가 간절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친애하고 공경하였다. 계율(戒律)을 지킴에 굳건하였고 도(道)를 지킴에 조심하였다.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겸허하였고, 연세가 높을수록 행동은 더욱 굳세었다. 선교(禪敎)의 모든 경전(經典)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거의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자통(自通)하였다.
남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고 강해(講解) 또한 자상하고 밝음으로 이르는 곳마다 제자가 많았고,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석덕(碩德)들이 많았다. 글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붓만 들면 그 말이 정미하게 내려갔으며, 더욱 간독(簡牘 : 편지)에 능하여 식자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임금에게 알림으로써 권근(權近)에게 이 명이 내려졌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선(禪)보다 더 높은 것이 없으나, 그 말이 기괴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것이 많으니, 마삼근(麻三斤)ㆍ간시궐(乾屎橛 : 선문답(禪問答)에서의 화두(話頭). 어떤 중이 동산 수초(洞山守初)에게 '부처가 어떤 것이냐?' 고 묻자 '마삼근'이라 대답하였고, 또 어떤 중이 운문(雲門)에게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묻자 '간시궐이니라'고 대답하였다 함) 같은 유가 더욱 해괴하다.
그 전통이 멀어갈수록 말이 더욱 허황하되 조계(曹溪)의 대감(大鑑 :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시호) 선사가 말한 심평(心平)ㆍ행직(行直) 등이 이치에 맞고 평이하며, 도가 더욱 높아 모든 조사(祖師) 중에 뛰어나서 요즈음 선(禪)을 배우는 자가 모두 그를 높인다. 지금 선사께서 선장(選場)에서 대답한 말을 보니 사리가 뚜렷하고 분명하고 절실하며, 또 평소 학자들을 반드시 진상(眞常)으로 훈도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알아듣기 쉽도록 하였으니, 그 교법(敎法)이 대감과 같은 분이라 해괴하고 허황함을 말하는 다른 파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 참으로 도의 근본이 평탄하고 진실하며 선사의 조예가 심원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사께서는 이미 아름다운 자품(資稟)을 지녔고, 또 공력의 근실함을 더하여 그의 소득이 다른 이들과 특이하니, 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이 참으로 명(銘)을 지을 만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성해(性海)는 미묘하고 담담하여 마치 물거품처럼 저절로 생겼다 사라졌다 해도 그 자취가 없이 항상 깊고 맑도다. 우리 선사는 덕을 제대로 대성(大成)하였으니 그 깨달음이 출중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도다. 감탄하고 분발하여 어머니를 하직하고 집을 떠났으며, 마음을 다잡고 힘을 다하며 기대거나 눕지도 않았도다.
좌우에 치우치지 않아 중도(中道)를 잡았으며, 속세를 멀리해 자비의 햇빛이 항상 밝았도다. 궁벽한 산중에 자취를 감출 땐 병(甁) 하나 석장(錫杖) 하나이지만, 문답이 서로 부합될 땐 임금도 기뻐하였도다. 많은 승려들이 그 기풍을 따랐고 온 나라가 그 덕을 추앙했으니, 나가면 사빈(師賓)이 되었고, 들어오면 종단이 활기를 얻었도다. 처음에 둥근 해를 꿈꾸어 그 영험이 빛났으며, 마침내 죽어서는 징험이 있어 법우(法雨)가 널리 흡족하였도다. 왕명으로 비(碑)를 만들어 거기에 이 글을 새기나니, 무궁한 내세(來世)에 모두 보각(普覺)을 스승 삼으리.
갑무년(甲戊年) 3월 일 문인선사(門人禪師)들이 비를 세우기를 희망하였으므로 문인선사(門人禪師)들의 이름을 새긴다
중원부 청계산 청룡사 보각국사문도(中原府淸溪山靑龍寺普覺國師門徒) 내원당(內願堂)
대선사(大禪師) 축변(竺卞) 신규(信規) 상총(尙聰) 축환(笁桓) 내일(乃一) 상미(尙彌) 신뢰(信雷) 소엄(紹嚴) 각돈(覺敦) 상회(尙恢) 축우(笁雨) 행비(行備) 익륜(益倫) 축연(笁珚) 일선(日宣) 선은(先隱) 현구(玄口) 보구(普口) 탄의(坦宜) 화주(化主) 심밀(深密) 상부(尙孚) 회우(恢佑)
선사(禪師) □안(□安) 현섬(玄暹) 혜구(慧具) 상윤(尙贇) 인조(仁照) 의돈(義敦) 을경(乙瓊) 혜제(慧齊) 상유(尙柔) 상□(尙□) 덕남(德南) 내돈(乃敦) 신연(信淵) 육안(六安) 정선(正宣) □제(□齊) □□(□□) 지검(志儉)
사우(師友) 선해(善海) 현익(玄益) 연린(衍厸) 명운(明運) 인회(忍廻) 의유(義遊) 사근(斯近) 혜비(慧丕) 인남(忍南) 행전(行佃) 가의(可宜) □□ 중□(中□) 료□(了□) 각상(覺祥) 도안(道安)
대선(大選) 조구(祖求) 성빙(性氷) □□(□□) 학중(學中) 각정(覺精) 정유(正乳) 성추(省樞) 해인(海印) 빙□(氷□) 인전(忍全) 수윤(壽允) 자휘(自暉) 혜성(慧性) 홍익(弘益) 해운(海雲) 명해(明海) □□(□□) □□(□□) 소원(紹原) 지심(志心) 각전(覺全) 지운(志雲) 현담(玄湛) 신초(信初) 각□(覺□) □□(□□) 향유(向猷) 의화(義和) 명훈(明訓) 천규(天圭) 각경(覺冏) 각자(覺自) 안분(安分) 각구(覺口) 각구(覺璆) 각선(覺詵) 각인(覺因) 소정(紹定) 혜회(慧恢) 법등(法燈) 법한(法閑) 각희(覺希) 각정(覺丁) 각안(覺安) 각희(覺禧) 각원(覺原) 승준(僧俊) 성원(省原) 혜안(慧安) 종혜(宗慧) 혜온(慧溫) 승현(勝玄) □징(□澄) 지한(志閑) 지현(志玄) □□(□□) 지휴(志休) 관인(觀忍) 지오(志悟) 천유(天乳) 지행(智行) 법공(法空) 도선(道禪) 법선(法禪) 각지(覺祉) 희영(希永) 의명(誼明) 지잠(志岑) 지전(志田) 혜능(慧能) 각근(覺根) 법심(法心) 성휴(省休) 신해(信海) 자오(自悟) 각봉(覺峯) 자월(慈月) 종원(宗原) 지진(志眞) 지초(志超) 안돈(安頓) 지간(志侃) 계전(戒全) 견심(見心) 일선(日禪) 신운(信雲) 해인(海忍) 혜남(慧南) 혜징(慧澄) 원묵(原黙) 신오(信悟) 달환(達桓) 자혜(慈慧) 정분(正芬) 계산(戒山) 해규(海圭) 인혜(仁慧) 각명(覺明) 도잠(道岑) 각□(覺□) 경선(景禪) 도□(道□) 석현(釋玄) 달□(達□) 행엄(行嚴) 달산(達山) □□(□□) 해□(海□) 신□(信□) 소염(紹焰) 도원(道原) 정온(正馧) 정소(正劭) 정□(正□) 각청(覺淸) 중조(中照) 육담(六湛) □덕(□德) □선(□禪) □미(□彌) 석연(釋然) 계매(戒梅) 신정(信正) 경진(景眞) 수항(守恒) □□(□□) 신□(信□) □□(□□) 견초(見超) 인제(印齊) 성능(省能) 성지(省之) 처중(處中) 정위(正韙) 성원(省原) 경상(景相) 정□(正□) 조근(祖根)
사미(沙彌) 조원(祖原) 육개(六開) 성전(省佃) 정제(正禔)
비구니(比丘尼) 혜비이씨(惠妃李氏) 신비염씨(愼妃廉氏) □비이씨(□妃李氏) 조씨(趙氏) 지환(知幻) 정향(正珦)
우바이(優□□) 태비□□(太妃□□) □□□□(□□□□) 보주류□(寶主柳□) 보주□□(寶主□□) □□□□(□□□□) 노씨정견(盧氏正見) 박씨식진(朴氏息塵) 윤씨정행(尹氏正行)
우바새(優婆塞) 남양백 홍영통(南陽伯洪永通) 문하우시중 김사형(門下右侍中金士衡) 검교문하시중 이무방(檢校門下侍中李茂方) 판개성부사 우인렬(判開城府事禹仁烈) 문하시랑찬성사 류□□(門下侍郞贊成事柳□□) 문하시랑찬성사 성석린(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 참찬문하부사 경의(叅贊門下府事慶義) 상의문하부사 정희계(商議門下府事鄭熙啓) 참찬문하부사 박위(參贊門下府事朴葳) 지중추원사 조반(知中樞院事趙胖) 상당군 한천(上儻君韓蕆) 진산군 강시(晋山君姜蓍) 전우사 강□(前右使姜□) 전정당 강□백(前政堂姜□伯) 전밀직부사 김천리(前密直副使金天理) 전첨서 조운걸(前僉書趙云乞) 나연 강인부(那衍姜仁富) 나연조구(那衍 曹玽) 전판서 손득수(前判書孫得壽) 전판서 우희렬(前判書禹希烈) 이은(李慇) 홍□충(洪□忠) 조운개(趙云价) 송신경(宋臣敬) 류신□(柳信□) □경시(□慶時) 이□□(李□□) □□□(□□□) 전판사 진여의(前判事陳汝宜) 민유의(閔由誼) 류운(柳雲) 류담(柳湛) 전총랑 양숙(前摠郞梁肅) 전부령 박사청(前副令朴思淸) 전호군 설존□(前護軍薛存□) 전안산 장방정(前安山張方正) 전좌윤 조간(前左尹曹侃) 전동경판관 허계(前東京判官許繼) 전통직랑 박원(前通直郞朴爰) 전랑장 류시무(前郞將柳時茂) 우인균(禹仁均) □□□(□□□) 전주부 안□□(前注簿安□□) 문하록사 최□□(門下錄事崔□□) 내시장 맹□(內侍張孟□) 별장 김신례(別將金臣禮) 진사 권천□(進士權踐□) 손지부(孫之富) 박안의(朴安義) 안인부(安仁富) 석봉□(石鳳□) 호장 박□양(戶長朴□陽) □□□(□□□) 유□□(劉□□) 최□□(崔□□)
보물 제658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대 조선시대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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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권상,하) | ![]() |
종 목 | 보물 제720호 |
명 칭 |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권상·하>(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卷上·下>)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사찰본 |
수량/면적 | 2권1책 |
지 정 일 | 1981.07.15 |
소 재 지 |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도서관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동국대학교 |
관 리 자 | 동국대학교 |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반야심경 다음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경전이다. | |
이 책은 당나라의 종밀(宗密)이 지은『금강반야경소론찬요』를 송나라의 혜정(慧定)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인데, 상·하 2권이 하나의 책으로 되어있다. 나무에 새겨서 닥종이에 찍었으며, 크기는 세로 28.4㎝, 가로 16.5㎝이다. 표지는 검푸른 색이며, 왼쪽 상단에 금색으로 그린 2줄의 사각형 안에 제목이 쓰여 있다.
책 끝에 있는 고려말의 고승 환암(幻菴)이 쓴 기록을 통해, 이 책은 1339년에 원나라에서 간행한 책을 원본으로 하여, 고려 우왕 4년(1378)에 충주 청룡사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
『금강반야경소론찬요』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그것을 다시 풀이한 이 책은 희귀본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당(唐)나라 종밀(宗密)의 『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疏論纂要)』를 송(宋)나라 혜정(慧定)이 그 요지를 조현(助顯)한 것이다. 책 끝에 지원오년(至元五年)(1339)과 『선광팔년무오(宣光八年戊午)(1378) 환암비구무작(幻菴比丘無作) 서우연회암(書于宴晦庵)』이라고 쓴 발(跋)이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이 책은 원대 지원(元代 至元) 5년에 간행한 책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378년에 충주 청룡사 연회암(忠州 靑龍寺 宴晦庵)에서 중간(重刊)한 것임이 인정된다. 환암(幻菴)은 고려 말기의 명승(名僧)인 혼수(混修)의 법호(法號)이고 무작(無作)은 그의 자(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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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일부 |
선림보훈<권상.하>(禪林寶訓<卷上.下>)
종 목 | 보물 제70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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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선림보훈<권상.하>(禪林寶訓<卷上.下>)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사찰본 |
수량/면적 | 2권1책 |
지 정 일 | 1981.03.18 |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이건희 |
관 리 자 | 리움미술관 |
이 책은 송나라의 승려 종고(宗고)와 사규(士珪)가 학덕이 높은 스님들의 좋은 말씀이나 행동들을 모은 것으로, 남송(南宋)의 승려 정선이 편집하여 선(禪)을 닦는 스님들에게 귀감이 되는 책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권 상·하로 나뉜 2권을 하나의 책으로 묶었는데, 크기는 가로 16㎝, 세로 26㎝이다. 책 끝부분에는 고려말 승려 환암(幻菴)이 쓴 발문(跋文:책의 끝에 글의 내용과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과 간행기록이 있다. 고려 우왕 4년(1378)에 승려 상위(尙偉)와 만회가 우바새(불교에서 출가하지 않고 부처의 제자가 된 남자) 고식기(高息機)와 우바이(불교에서 출가하지 않고 부처의 제자가 된 여자) 최성연에게 부처와 좋은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해 시주(施主)를 청하여 충주 청룡사에서 간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선림보훈』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여러 판본 가운데 간행기록이 있고, 판새김과 인쇄가 가장 정교한 고려본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
『선림보훈(禪林寶訓)』은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스님들의 도와 덕에 대한 교훈을 모은 글이다.
이 책은 처음에는 송(宋)나라 때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묘희 종고(妙喜宗果:佛果克勤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5세 법손)스님과 죽암 사규(竹庵君珪:佛眼淸遠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5세 법손)스님이 운거산(雲居山) 운문사(雲門寺)의 옛터에 토굴을 짓고 20여년간을 살면서 송고(頌古) 100여편을 지었는데 이때에 모은 것이다.
이는 총림의 도덕이 쇠퇴하여 감을 염려하여 옛스님들의 말씀이나 수행을 수립하여 납자들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출판 유포되지 못하고 순희(淳熙:1173∼1189) 연간에 동오(東吳)의 정선(淨善)스님이 운거산에 갔다가 조암(祖庵:靑原惟信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4세 법손. 衡岳에 30년간 은거함)스님에게서 보훈(寶訓)을 얻었다.
그러나 벌레먹고 손실된 불완전한 상태여서 10여년간 다른 어록(語錄)들과 전기(傳記)를 참고하여 황룡 혜남(黃龍慧南:남악의 11세 법손)에서 불조 졸암(佛照拙庵:남악의 16세 법손) 및 간당 행기(簡堂行機:남악의 16세 법손)스님까지 50여편을 더 수집 보완하여 300여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편집된 『선림보훈』은 그 뒤 명말(明末)에서 청대(淸代)에 걸쳐 몇가지 주석서가 저술되었다. 명말 숭정(崇楨) 8년(1635) 운서사의 대건(大建)스님이 지은 『선림보훈음의(禪林寶訓踵義)』 1권이 처음 나왔고, 이를 토대로 명말 영력(永曆) 4년(1650) 장문가(張文圈)와 장문헌(張文憲)이 편찬한 『선림보훈합주(禪林寶訓合註)』 4권이 나왔다.
이어 영력(永曆) 8년(1654) 앞의 합주(合註)에 서(序)를 썼던 행성(行盛)스님은 42분 스님의 깊은 뜻을 염송(頌) 74수로써 나타내고, 『선림보훈염송(禪林寶訓頌)』 1권을 지었다. 그 후 청(淸) 강희(康熙) 17년(1678) 덕옥(德玉)스님의 『선림보훈순주(禪林寶訓順)』 4권과 강희(康熙) 45년(1706) 지선(智禪)스님의 『선림보훈필설(禪林寶訓筆說)』 3권이 있다.
이처럼 많은 주석서가 나오게 된 것은 그들 서문에서 번번히 밝히고 있듯 총림이 쇠퇴함에 따라 총림의 귀감이 되는 것을 밝히고자 한 때문이다.
정선(淨善)스님이 중편(重編)한 명간(明刊)의 선림보훈집(禪林¿訓集) 4권본에 의하면 권1에는 명교 설숭(明敎契崇)에서 진정 극문(眞淨克文)까지 77편, 권2에는 담당 문준(湛堂文準)에서 절옹 여담(浙翁如)까지 72편, 권3에는 설당 도행(雪堂道行)에서 서현사 변공(棲賢寺 辯公)까지 77편, 권4에는 불지 단유(佛智端裕)에서 뇌암 도추(懶庵道樞)까지 64편, 모두 290편을 싣고 있다.
양가(兩街) 요암행제공(了庵行齊公)이 『선림보훈』을 얻어보고는 처음 보는 것이라 감탄하여서 그의 문인 상위선사(尙偉禪師)에게 판각하여 유포할 것을 부탁하니, 상위선사는 만회(萬恢)스님과 함께 모연하고 고식기(高息機)와 최성록(崔星錄)이 모연을 도왔다. 그리고 환암(幻庵)스님이 글〔題〕을 써주었다고 한다.
나는 순희(淳熙:1173∼1189) 연간에 운거산(雲居山)에 노닐다가 이를 조암(祖庵) 노스님에게서 얻었는데, 세월이 오래된 탓에 좀이 슬어 처음과 끝이 완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
그 뒤 어록(語錄)이나 전기(傳記) 가운데 보이는 것을 10여 년간이나 모았더니 가까스로 50여 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황룡 혜남(黃龍惠南:1002∼1069)스님에서 불조 졸암(佛照拙庵:1121∼1203)·간당 행기(簡堂行機)스님에 이르기까지 모든 큰스님들이 남긴 어록을 가지고 절요(節要)하고 수집하여 300편으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이는 얻어진 대로 순서를 정하였을 뿐, 시대순으로 편집하지는 않았다.
대체의 내용은 납자들로 하여금 권세와 이익을 구하거나 나와 남을 구별하는 마음〔人我 見〕을 깎아내고, 도덕과 인의〔仁義〕로 나아가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 문체는 여유롭고 평이하여 궤변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투가 없어서 실로 입도(入道)를 돕는 원대한 법문이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경판에 새겨 널리 퍼뜨리려면 반드시 한 번 보고 마음으로 인정하는 도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비록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늙어 죽는다 해도 뜻〔圍〕과 바람〔願〕이 만족되리라.
동오(東吳)지방 사문(沙門) 정선(淨善)이 쓰다.
호법론(護法論)
종 목 | 보물 제70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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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호법론(護法論)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사찰본 |
수량/면적 | 1책 |
지 정 일 | 1981.03.18 |
소 재 지 | 서울 중구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유 자 | 조병순 |
관 리 자 | 조병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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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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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보물 제641호 | ||||||
명 칭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 ||||||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사찰본 | ||||||
수량/면적 | 1책 | ||||||
지 정 일 | 1978.12.07 | ||||||
소 재 지 | 서울 서대문구 | ||||||
시 대 | 고려시대 | ||||||
소 유 자 | (재)아단문고 | ||||||
관 리 자 | (재)아단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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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만들어지게 된 정확한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쇄가 선명하고 매우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다. |
그리고 청룡사는 조선시대에도 불서를 간행했다. 광해군 4년(AD1612)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贊要)와 광해군 6년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각각 간행한 것이다. 불경이나 논서 의식집 등을 간행하였다는 사실은 청룡사의 사세가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
◈ 고승(高僧)의 호칭
호 칭 |
의 미 |
祖師(조사) |
*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이어 받은 덕이 높은 스님 |
禪師(선사) |
* 오랫동안 선을 수행하여 선의 이치에 통달한 분 |
宗師(종사) |
* 한 종파를 일으켜 세운 학식이 깊은 스님 |
律師(율사) |
* 계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거나 계행이 철저한 스님 |
法師(법사) |
* 경전에 통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선양하는 스님 |
和尙(화상) |
* 평생 가르침을 받는 은사스님 |
師門(사문) |
* 인도말로 쉬라마나 즉, 출가수행자 |
大德(대덕) |
* 덕이 높은 큰 스님 |
大師(대사) |
* 큰 스님 |
국사, 왕사, 제사 |
* 한나라의 정신적 지도자의 명칭으로 황제나 국왕이 명한 직책 |
원 청용사터
청용사지 절터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 32번지에 위치하는 절터에 2단의 석축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범자문, 연화문의 수막새가 출토된다. 북쪽에 국보 197호인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비를 비롯하여 2기의 부도재가 있으며 위전비와 보물 656호인 사자석등 등 많은 석조물이 있다. 1996년 충주산업대학박물관에서 절터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4동의 건물지를 확인하였는데 금당은 전면 3간, 측면 2간 규모였으며 조사 기간 중에 금속제의 신장상이 수습되기도 하였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이 절터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후 17∼8세기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좌측으로 동일한 이름의 청룡사가 있는데 법화종 계통의 절로 1920년 중건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폐사에 따른 전설-
이처럼 조선시대까지 당당하던 사세를 지켜오던 청룡사가 몰락한 것은 조선조 말엽의 일이다. 청룡사가 워낙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의 세도가이던 민대룡(閔大龍)판서가 청룡사 뒤에 명당이 있는 사실을 알고 소실의 무덤을 이장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풍수설에는 명당 부근에 사찰이 있으면 좋지 않다고 하여 절을 없앨 궁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청룡사 주변에는 허(許)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절을 없애기가 쉽지 않자 사람을 시켜 몰래 절에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이 때 지붕에 살고 있던 큰 뱀이 내려와 불 지른 사람의 앞을 가로막자 한 사람은 겁에 질려 피를 토하며 죽고, 다른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주지가 민대감에게 매수되어 절에 있던 다른 스님들을 출타하게 하고 그사이 불을 지른 다음 약속한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가다 대감이 보낸 자객을 만나 비명에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민판서 집안도 소실의 무덤에만 다녀가면 사람이 죽게 되는 등 차츰 가세가 기울어져 끝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세도가의 탐욕에 의해 법등이 끊어졌던 청룡사는 1921년 혜종(惠宗)스님이 옛 건물을 뜯어 북쪽에 있는 암자 터에 옮겨 짓고 청룡사의 명맥을 잇기 시작했다.지금의 청룡사는 보각국사가 머물던 옛 청룡사의 영화를 되살리려고 하지만 그 맥의 대물림이 제대로 되지 않는 처지이다.
-허적대감과 청용사 전설-충북 충주의 소
허적은 어려서 엄정면 괴동리 출생으로 공부하러 다닌 곳은
소태면 오량동 청계산 청룡사였다.
그 때 동문 수학하던 사람 가운데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후일 신선비라고 일컬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소태면 야곡서 통학을 했으니까
허적은 40리 길인데 신선비는 20리밖에 안됐다.
그런데도 허적은 매일 신선비보다 빨리 글방에 나왔다.
하루는 신선비가 허적을 보고 훨씬 먼 곳에서 오는데 어찌해서 글방에는 자기보다 월등하게 빨리
도착을 하느냐며 새벽 길을 떠나는 모양인데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으니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적은 내가 강달고개에 이르면 항상 꽃 가마 한 채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태우고
순식간에 묵봉산을 넘어 청계골 앞에 내려다 주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게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신선비가 괴이롭게 생각하고 또 의아하게 생각해서 내일은 자기가 그곳에 가서 꽃가마를 타고
글방에 가겠다고 주장을 하므로 허적은 그렇게 하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신선비가 날이 밝기도 전에 강달고개에 이르니 과연 한 채의 꽃 가마가 있었다.
신선비가 의아스럽게 생각을 하며 그 옆으로 다가서자 난데없이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신선비 앞으로 가마문을 열고 타라고 하며 발을 내리더니 흡사 날아가는 것처럼 달리는데
요동이 잠시 멈추며 그 사나이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무게가 그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으니 무슨 일인가 확인을 하고 가자며 발을 걷어 올리고
들여다 보더니 사람이 바뀌었다며 나오라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즉 허적은 장차 이 나라의 영수가 될 인물이므로 천의(天意)에 따라 우리가 글방까지
모셔다 드리는 것인데 당신은 그렇지 못하니 내려야 된다는 것이었다.신선비는 겁이 나서 잠시 당황하다가 마음을 고쳐잡고 말을 건넸다.
그럼 나는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고 묻자 그 사나이들은 신선비의 얼굴을 살피더니
찰방 관직을 할 상이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이 빈 가마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과연 허적은 영의정 벼슬까지 올랐지만 신선비는 찰방밖에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그 가마를 대령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는데 가마를 메고 바람같이
나는 것으로 보아 도깨비라는 추측을 하고 있으며 허적은 도깨비가마를 타고 글방에 다녔다는
소문이 나서 오늘날까지 불가사의한 이야기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한편의 전설에서는 허적대감은 호랑이를 타고 다니며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적-
조선조 중기의 대 정치가로 광해군2년(1610)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서 부사였던 허한(許?)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여차(汝車),호는 묵재(默齋) 또는휴옹(休翁)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났으니 한번 본 것은 모두 기억하는 총명한 머리를 가졌다.
글을 씀에 있어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표현을 하였으며, 문예가 날로 발전하니 그 명성 또한 날로 높아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인조1년(1623)에 생원.진사에 오르고 인조15년(1637)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허적이 사헌부에 있을 때의 일이다.
왕이 뇌물을 받고 벼슬자리를 준 이조판서 이경석과 병조판서 이시백을 문책하고 있을 때
마침 허적이 들어가니 왕은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였다.
허적이 "인사행정에 있어서 뇌물을 받고 편파적인 일을 하니 인재를 얻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주살한다면 인재는 나오게 되고 공도(公道)를 밝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청하였다. 왕은 그들을 엄하게 다스려서 물러나 죄를 기다리게 하니 백관 들이 모두 놀라 말이 없었다.
또한 전라감사로 있을 때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씨의 사노가
후궁의 세력을 믿고 이권을 청탁해 온 일이 있었다.
사리에 마땅한 일이 못된다고 책망하며 돌아가게 하자
"후궁의 말을 듣지 않고 벼슬을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소?" 라고 공갈을 했다.
이에 허적은 나졸을 시켜 묶어 놓고 곤장을 쳐서 죽인 후 성문밖에 버리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조 후궁은 주위 사람들에게 "상께서 나의 힘을 빙자하다가 맞아 죽은 줄을 아시면
꾸지람이 반드시 나에게 미칠 것이니 너희들은 부디 이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말라." 했다.
이와같은 일들은 부당한 권세에 의롭게 대처한 장한 기개라고 할 것이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평안감사를 받았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효종이 말하길 "경은 기품이 굳세고 과감하며 그 정신이 또한 남고 넘친다.
반근착절(세력이 단단히뿌리박혀 흔들리지 아니함)만 없다면 쓸모있는 재목일텐데" 하고 그를 아꼈다.
현종12년(1671)에 영의정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우암 송시열의 논척을 받아
영추부사에 전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충주에 내려왔다.
현종15년(1674) 인선대비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있을 때
서인을 물리치고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그 후 영의정에 재임하는 기간이 남인의 집권기가 되었다.
이후 남인을 영도하는데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로 허목의 과격론에 반대하여
허적은 온건한 입장을 지켰다. 이에 남인은 다시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게 되었으니
그의 원만한 인품이 왕의 신임을 받게 되어 그는 청남을 밀어내고 집권자로 등장하였다.
숙종 2년에 허적은 청나라에 다녀와서 오도제찰사가 되었으며 숙종4년에는 재정의 고갈을 막기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이를 백성들로 하여금 사용케 하였다.
온후한 인품과 지도력으로 평탄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받았다.
1680년 할아버지 잠(潛)이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궁중의 유악(帷幄)을 함부로 사용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같은해 서인인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이 그의 서자 견(堅)이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형제와 함께 역모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윤휴 등과 함께 사사(賜死)되었으며,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했다(경신대출척). 1689년 숙종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어 무고한 김익훈 등을 죽이고, 그의 관작을 추복했다
이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허적이 그의 아들이 주륙을 당한 뒤 성밖에 나가 명령을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이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릴 터이니 공은 미리 자결하는 것이 좋다" 고 말하였다.
이말을 듣고 허적은 "내가 법에 연좌되는 것이 당연하나 주륙을 면하기 위하여 약을 먹고 죽으면
이 또한 임금의 명령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숙종15년(1689)에 왕은 허적의 애매한 죽음을 알 게 되자, 무고한 김이훈.이사명 등을 죽이고
특별히 명하여 관작을 회복시키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그는 식견이 넓고 총명했으며 선왕으로부터 탁고의 명을 받고 충성을 다했다.
수상이 되어 자기에게 내리는 은사는 모두 친구들에게 돌리고 녹봉으로 친구들을 구제하기도 하였으니 그에게 힘을 입은 사람이 백여집이나 되었다 한다.
허적은 당쟁의 와중에서도 극단적인 보복이나 갈등을 피하려고 애쓴 거목이었다.
그는 또 남인으로써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가까이 지낸 유일한 인물이었다.
잘못된 자식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을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