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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10월,워싱턴에 대통령관저가 건축되기 시작했다.오늘날에는 이곳이 세계정치의 중심이지만 초대 워싱턴,2대 애덤스 대통령은 살아보지 못했고1801년1월 1일 개관,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처음 입주하였다. 그러나 외부만 그럴듯하였지 내부는 엉망진창이었고 그나마 1812년 영국과의 전쟁 때 영국군이 불을 질러 검게 그을린 것을 흰색으로 칠해 그때부터 ‘백악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남북전쟁 때 일부분이 무너진 것을 트루먼 대통령이 완전히 분해, 재건축 해서 케네디 대통령 때 마지막 손질을 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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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는 지구가 평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평평한 지구에 도달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밟은 사람이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이 탐험가를 자기들 민족이라 여기며 콜럼버스데이를 특별한 기념일로 삼고 있다. 미국에 사는 라틴아메리카인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엘 디아 델 라 라사를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일로 기념하고 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이미 한번 퇴짜를 받았음에도 그에 굴하지 않고 에스파냐의 두 군주 이사벨과 페르디난도를 끈질지게 설득했다. 두 군주는 위험 부담도 적고 돌아올 이득도 엄청날 것이라는 한 재상의 말과 황금에 대한 욕심 그리고 탐험에서 앞서 나가고 있는 이웃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국 콜럼버스에게 설득당했다.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 항해의 재원을 마련하려고 왕실의 보물을 저당 잡혔다는 이야기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니냐호, 핀타호,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에스파냐의 팔로스 항을 떠나 탐험길에 올랐다. 기함은 산타마리아호였다. 콜럼버스는 탐험에서 얻는 이득의 10퍼센트, 새로 발견될 지역의 총독직 그리고 바다의 제독이라는 직책을 약속 받았다.
10월 12일 새벽 2시,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에스파냐로 돌아가자고 콜럼버스를 막 위협하려는 찰나, 핀타호에 타고 있던 선원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의 시야에 절벽 같기도 하고 모래 같기도 한 곳에 달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콜럼버스는 육지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큰 상금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했었지만 그 달빛은 전날 밤에 자기가 본 것이라고 우기며 상금을 착복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이 과나하니로 부르는 그 육지를 산살바도르로 명명했다. 콜럼버스의 그 산살바도르는 오랫동안 바하마의 워틀링 섬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사마나 섬이다. 그 첫항해가 있은 뒤 콜럼버스는 쿠바와 또 하나의 커다란 섬에 도착하여 그곳을 에스파뇰라라 불렀다.
콜럼버스는 소수의 벌거벗은 원주민들만 발견했을 뿐 그토록 염원하던 황금은 인디언들이 걸고 있던 귀걸이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른바 인도 제도 혹은 인도네시아 군도에 닿은 것으로 착각하여 원주민들에게 "인디오"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붙여주었다. 향료의 발견은 "토바코"라 불리는 토착 식물의 발견으로 대체되었다. 그곳의 아라와크족은 그 식물을 엽궐련으로 만들어 피웠다. 1555년에는 에스파냐에 최초로 담배가 유입되었다. 3년 뒤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코담배를 유럽에 소개했다. 담배의 경제적 중요성을 말하지 않고 초기 미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보통 서류와 결정의 중요성만을 언급하지만 사실 신세계에서 영국 식민지를 유지시켜준 것은 담배였다. 담배는 환금 작물이었고 그것은 말 그대로 이주민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이래 그들곁에는 늘 막강한 정부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콜럼버스는 여전히 중국 주변의 섬들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자 일부를 부서진 산타마리아호의 목재로 지은 에스파뇰라의 나티비다드라는 요새에 남겨놓고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콜럼버스는 이후에도 세 번의 항해를 더 했지만 여전히 현재의 미합중국 본토에는 닿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카리브 해 도착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정복,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놀라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콜럼버스의 카리브 해 도착은 놀라운 업적이었던 것만큼이나 인류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사건들의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황금을 찾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원주민들을 재빨리 노예화했다. 콜럼버스를 비롯한 에스파냐의 모험가들, 그 이후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주도한 바야흐로 학살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전쟁, 강제 노역, 가혹한 형벌, 유럽에서 온 질병들로 황폐화되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유럽에서 온 질병들에 대한 면역이 없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05.gif) 미국인들은 청교도 조상과 제임스 타운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영국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은 에스파냐인들이 휘젓고 다닌 뒤였다. 콜럼버스가 시작한 대담한 탐험에 뒤이어 에스파냐인들은 자국의 군주에게 더 많은 황금을 갖다 바치기 위해 1세기에 걸친 탐험, 식민지화, 정복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들 탐험가들과 정복자들은 자신들과 에스파냐 군주를 위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탐험가들과 정복자들도 교전 중에 인디언들에게 살해되거나 황금과 권력에 눈이 먼 동료 에스파냐인들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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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이 제임스타운에 정착하기 거의 1세기 전에 에스파냐인이 신세계를 지배했다고는 해도, 결과적으로 에스파냐인은 북아메리카에서 밀려났고 영국이 신세계를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6세기가 되자 에스파냐는 부패와 무기력에 빠져 들었다. 국왕이 아메리카 대륙의 금광에서 나오는 이권만 바라보고 국내 산업은 돌보지 않은 결과였다. 금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니 상업이나 발명에 박차를 가해야 할 자극이나 동기가 생겨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부패와 무기력에 빠져들게 된 더 심각한 이유는 아마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 알려진 혁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렬한 가톨릭 교도였던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가 보기에 영국의 신교도 여왕 엘리자베스 1 세는 정치, 군사적 라이벌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교도이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을 수호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그의 정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적대적이며 가톨릭 교도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대로 그 종교 분쟁을 이용했다. 에스파냐를 희생시켜 영국의 힘을 증강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다. 그런 계산으로 그녀는 한편으로는 에스파냐의 교전 중인 네덜란드를 도왔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유럽 최대의 상선함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1588년에 영국이 함대의 힘보다는 오히려 폭풍우의 도움을 받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에스파냐는 이때 받은 타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영국은 이 승리를 계기로 세계적인 해상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보잘것 없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만들어가며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07.gif) 디즈니 영화로 유명한 " 포카혼타스" 제임스 타운에서 포카혼타스의 상을 만날 수 있다...
제임스타운 식민지의 용감한 지도자 존 스미스 선장은 포와탄의 인디언들에게 생포되었다. 포와탄의 본명은 와훈소나콕이었으나 현재의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인근에 있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부락 이름을 따서 포와탄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인디언들이 스미스의 머리를 돌덩이 위에 얹어높고 몽둥이로 내려치려는 찰나 포와탄 추장의 딸인 열한 살짜리 포카혼타스가 "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며" 스미스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전설 같은 이야기는 스미스가 만든 것으로 그는 자서전에서 이 이야기를 3인칭 방식으로 서술했다. 그가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데이비드 비어스 퀸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포와탄이 실종된 이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도 스미스는 인디언들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학살 사실을 비밀에 붙이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 처형은 스미스가 인디언 사회로 들어가는 입문의식이었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도움으로 제임스타운이 조기 소멸될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제임스타운에 힘든 시기가 찾아오자 그는 사실상 군사 독재자가 되어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식민지를 구한 요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문적인 마초 약탈자였고 성공적인 인디언 교역자이기도 했다. 포와탄 인디언들과의 그런협력은 제임스타운에는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영국인에게 식량을 나눠주었고 옥수수와 고구마재배법을 알려주었으며 숲의 풍습도 소개해 주었다. 이런한 도움이 없었다면 제임스타운은 아마 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이주민들은 인디언들에게 등을 돌렸고 그에 따라 두 집단은 빈번하게 맹렬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대하는 그와 같은 태도는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반복된다. 한때 존경의 대상이던 스미스는 이제 인디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스미스는 제임스타운에 겨우 2년을 머문 뒤 또 다시 탐험길에 올랐다. 그 탐험으로 북버지니아라 불리는 "지나치게 추운" 북쪽 땅까지 미국해안의 값진 지도들을 만드는 성과를 올렸다. 1614년에 그는 고래를 잡거나 황금을 발견하여 부자가 되려는 열망을 품고 북쪽으로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고래도 잡지 못하고 황금도 발견하지 못하자 선원들에게 물고기 이번에도 역시 그 흔해빠진 대구를 잡게 했다. 그는 또 체서피크 만의 둘레를 탐험한 뒤 메인 주에서 케이프코드에 이르는 해안선의 지도를 만들어 그 지역을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했다. 또한 원주민 스물일곱 명을 꾀어 배에 태운 뒤 유럽으로 데려가 에스파냐에서 노예로 팔았다.
스미스가 떠나간 뒤에도 그의 구세주로 알려진 포카혼타스는 식민지인들의 삶에서 계속 일익을 담당했다. 열일곱 살이 된 그녀는 이따금씩 벌어지는 이주민과 인디언 사이의 전투 과정에서 납치되어 이주민의 인질로 잡혀 있게 되었다.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이주민 존 롤프의 눈에 뛰어 그와 결혼을 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디언과의 잠정적인 평화를 굳건히 하는 "영원한 식민을 위한" 일이라고 표현했다. 1615년에 롤프는 그 인디언 왕녀와 그녀의 아들을 런던으로 데려갔다. 런던에서 그녀는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국왕알현의 기회까지 얻었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존 스미스도 만났다. 이후 그녀는 기독교 세례를 받고 레이디 레베카로서 영국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
이 유명한 결혼 외에도 롤프는 제임스타운의 진정한 구세주가 되어 미국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은 사건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612년 버지니아의 토착 담배에 그보다 순한 자메이카종자를 교배시켜 버지니아가 최초로 환금 작물을 생산하게 만든 것이다. 그 후 오래지 않아 런던 사람들은 담배 없이는 못살 지역이 되었다. 아주 단기간에 버지니아의 경작 가능한 모든 땅에는 담배가 심어졌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10.gif) 해설 : 영국의 북미 본토 두 번째요 뉴잉글랜드 최초의 식민지인 플리머스(Plymouth)를 건립한 순례 시조들(Pilgrim Fathers)이 북미 도착 직후에 메이플라워 호 선상에서 체결하였던 맹약이다. 순례 시조들은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던 영국의 급진적 청교도인 분리파들(Separatists) 중 신세계 이주를 결행하였던 35명의 자칭 "성자들(Saints)"이다. 1620년에 버지니아(런던) 회사의 식민 허가를 얻은 그들의 망명지 레이덴(Leiden)을 떠나 영국의 플리머스로 건너 갔다가, 거기서 그들이 "외부인들(Strangers)"이라 부른 다른 66명과 함께 108톤의 범선 메이플라워 호로 출항하여 50여일 만인 11월 9일에 예정 목적지보다 훨씬 북쪽인 코드 곶(Cape Cod)에 도착하였다. 버지니아 회사의 관할 밖인 이 지역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그들은 상륙에 앞서서 "시민적 정치 단체(a civil body politic)"의 결성을 약속하는 맹약을 기초하였고, 이 문서에 41명의 성년 남자 이민들이 서명하였다. 이러한 사회 계약에 의한 정부 수립은 그후 다른 뉴잉글랜드 식민지들이 모방하는 선례를 제공하였다. 참고로 국왕 특허장 없이 건립된 플리머스 식민지는 1691년에 왕령 식민지인 매사추세츠에 병합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아멘, 그 이름들이 아래 씌어 있는 우리들, 신의 은총에 의하여 대영국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우리들의 경의로운 최고 통치자인 국왕이요 신앙의 옹호자인 제임스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신의영광과 크리스트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들의 국왕 및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건립하려고 항해를 시도하였던 바, 본 증서를 통하여 우리들의 보다 더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 그리고 전술된 목적들의 촉진을 위하여 엄숙하게 상호간에 신과 서로의 면전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시민적 정치 단체로 결속한다. 그리하여 이에 바탕하여 식민지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가장 적합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법률과 법령과 결정 그리고 관직을 수시로 제정하고 구성하고 조직하기로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최고 통치자 제임스 왕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의 치세 18년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의 치세 54년, 기원 1620년 11월 11 코드 곶에서 우리들의 이름들을 여기 서명하였다.
[이하 41명의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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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길이가 12만리에 불과한 맨하탄의 좁다란 섬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최초 이주민들은 자신들이 정착지로 택한 땅의 지대를 인디언들에게 지불하지 않았다. 1624년에 그곳에 도착한 피터 미누이트가 맨하탄의 이주민 대표로 뽑혔다. 그는 재빨리 인디언 추장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맨해탄 섬 전체를 60 길더 상당의 물품 2상자 - 전투용 도끼, 옷, 금속 냄비류, 투명 구슬 -에 양도한다는 내용의 매매계약서를 작성하여 추장들에게 제시했다. 당시 60길더는 영국 화폐 2천 400센트와 맞먹는 액수였다. 그것이 미국 역사에서 그 유명한 24달러가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뉴암스테르담 사람들은 애초부터 청교도적인 뉴잉글랜드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난폭하고 신앙심도 부족했다. 그리고 교역지였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이주민들이 모여들었고 그 결과 뉴암스테르담은 보스턴과 달리 교회보다는 술집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서인도회사 역시 임금이 낮은 자사 농장에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취직을 하려들지 않자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인종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1640년 뉴욕에서는 최소한 18개 언어가 통용되었다. 그러한 언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뉴욕 시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최초의 13개 주는... 17세기 말, 장차 주가 될 13개 식민지 중 12개가 이미 있었다. 그 성립 순서는 다음과 같다.
1607년 버지니아(제임스 타운) 1620년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및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1626년 뉴욕 (원래는 뉴암스테르담, 영국에 병합) 1633년 매릴랜드 1636년 로드아일랜드 1636년 코네티컷 1638년 델라웨어 1638년 뉴햄프셔 1653년 노스캐롤라이나 1663년 사우스캐롤라이나 1664년 뉴저지 1682년 펜실베니아 1732년 조지아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12.gif) 1773년 영국수상 F. 노스는 미국 식민지의 상인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이를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성립시켰다. 식민지 자치에 대한 지나친 간섭에 격분한 보스턴 시민, 특히 반(反)영국 급진파가 중심이 되어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항구 안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의 선박 2척을 습격하여 342개의 차 상자를 깨뜨리고 그 안의 차를 모조리 바다로 던졌다. 영국정부는 이 사건으로 식민지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보스턴항 법안을 제출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보스턴 시민들은 이를 거절하고 더욱 단결하여 대항하였으며 매사추세츠 의회 하원도 이에 동조하여 ‘혁명정부’의 모체를 구축하였다. 이 사건은 1775년 무력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미국 독립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13.gif) 몰몬교는 1823년 조지프 스미스라는 사람이 뉴욕에서 창설했다. 일정의 예언자인 이 사람은 모로니라는 천사에게서 황금판에 상형문자로 적힌 고대의 성구 <모르몬서>를 선물로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상형문자를 자기가 번역했으며 성령을 받았다고도 말했다. 스미스와 그를 따르는 소그룹은 오하이오로 장소를 옮겨 그곳에서 공동체가 지닌 효율성으로 개종자를 모았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하느님의 계시는 보다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조롱을 받았고 증오감을 유발시켜 그로 인해 적대감이 생겨나자 몰몬교도들도 할 수없이 본거지를 찾아 황 야로의 오디세이를 시작했다. 미주리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주였기 때문에 몰몬교의 입장은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개종자 수가 늘자 스미스는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1834년 스미스의 또 다른 환상은 일부다처제를 요구했고 이에 대한 분개는 박해로 이어졌다. 1844년 폭도들이 일리노이 주에서 스미스와 그의 형제 하이럼을 살해했다. 몰몬교는 강력한 지도자 브리검 영(Brigham Young)재규합 되었다. 그는 더 이상의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 서부 지역 끝에서 교회의 장래를 도모해 보기로 했다. 1847년 영과 소수의 몰몬교도가 새로운 약속의 땅인 Great Salt Lake 유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몰몬교의 확고한 터전을 다진 결과 영은 연방 판사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몰몬교도의 물결이 유타로 통하는 길을 따라 이어지면서 서부로 통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14.gif) Uncle Tom"s Cabin 헤리엇 비처 스토의 <톰아저씨의 오두막>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가장 의미 있는 소설이다.
헤리엇 비처 스토는 프로테스탄트 성직자의 딸이었고 누이였으며 아내였다. 아버지 리만 비처 목사는 칼뱅주의 성직자로 가족과 함께 신시내티에 정착하여 그곳 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헤리엇이 성서문학자이었던 칼핀 스토를 만나 결혼한 곳도 신시내티였다. 그 학교는 노예제 폐지의 정서가 아주 강했기 때문에 헤리엇은 인근 켄터키에 가서나 노예제를 잠깐 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852년 보스턴의 한 출판사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구성은 세 명의 주인공 눈을 통해 노예와 노예 소유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첫번째 주인공은 팔려갈 처지에 놓인 자식을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지하철도를 찾아가는 노예 엘리자이다. 두 번째 주인공은 천사처럼 고운 마음씨를 지녔지만 병약한 뉴올리언스 대농장주의 딸 에비이다. 그리고 세번째 주인공은 백인들에게 팔려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가족과 재회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자존심을 지키고 사는 당당한 노예 톰 아저씨이다. 스토 부인은 켄터키 농장에 있는 톰의 이상적인 오두막에 모여 사는 그 가족을 짐승처럼 일만 하는 사람들로 각인돼 있는 노예 가정으로 묘사하여 노예도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곳곳에는 잊을 수 없는 장면들도 등장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아이를 품에 안은 맨발의 엘리자가 무자비한 노예 상인을 피해 물에 떠다니는 얼음 조각을 뛰어넘으며 극한의 오하이오 강을 건너 도망치는 모습이다. 애처롭게 죽어가면서도 모든 이들에게 선을 베풀어주려 애쓰는 귀여운 아이 에바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톰의 의지와 용기를 꺾으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는 시몬 레그리는 이기적인 양키로 그려지며, 레그리에게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다른 노예들의 감독이 되기를 극구 거부하는 쾌활하고 마치 그리스도와도 같은 덕성을 지닌 소설의 주인공 톰 아저씨가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15.gif)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하와이 시간 아침 7시, 이동 레이다망을 감시하고 있던 두 명의 미군 병사 눈에 뭔가 심상치 않은 물체가 감지되었다. 비행기 50대 이상이 북동쪽에서 날아오는 듯한 모습이 레이다망에 포착된 것이다. 조회를 해보니 주문한 신형 B-17기 일부가 본토에서 날아오고 있는 모양이라며 안심하라는 회답이 왔다. 그 미군 병사들이 본 것은 183대로 짜여진 일본 전투기 편대의 제 1진이었다. 그 전투기들이 하와이의 일본 항공모함에 착륙해 있다가 미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한 것이었다.
미국 진주만 공습이 있기 약 1년 전부터 진주만 공습에 대한 소문이 있었으며 미국 첩보기관이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해 진주만 공격에 대한 암호까지 햐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준비는 없었으며 이로 인해 제 2차 세계대전을 촉진시켰고, 결국 미국정부는 일본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터트리게 되는 참담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rldok.com%2Fuhak%2Fex%2Fimage%2Finfo_img18.gif) 영국인들은 캐롤라이나에서 뉴잉글랜드까지 대서양 연안을 빠르게 점유해갔지만 이들이 신대륙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탐험가들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나름대로 북아메리카에서 독자적인 지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609년 헨리 허드슨이 탐험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현재의 뉴욕 주의 속하는 허드슨 계곡에 뉴네덜란드를 건설했다.
영국인이었던 허드슨은 아시아 북부 해안을 따라 중국으로 가는 북동항로를 찾기로 하고 네덜란드의 한 회사에 고용된 사람이었다. 1609년에 그는 " 하프문호" 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으나 북동항로가 아닌 북서항로를 찾아 나섰다. 그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다시 유턴을 하여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고 허드슨 강을 따라 가다가 강 상류의 올버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허드슨은 그곳에 조수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자신이 가고 있는 항로가 태평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정확한 추정을 했다.
1600년대 초 영국은 국제 무대에서 새로운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상선 함대를 조직하여 바다의 진정한 패자임을 과시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에서 네덜란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분주하고 풍요로운 도시가 되었다. 1621년에는 유럽과 신세계 사이의 교역을 독점하려는 목적으로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는 수지맞는 상품인 노예와 설탕무역권을 포르투갈로부터 빼앗았다. 1624년에는 현재의 올버니 터에 있던 포트오렌지를 모피 무역의 중심지로 확고히 다졌다. 2년 뒤에는 허드슨 강 어귀에 뉴암스테르담 교역지를 개설했다. 뉴암스테르담은 후일 뉴욕으로 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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