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1)
1
태준이 사색에 빠질 듯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은 그가 잘 나가던 시절, 주체할 수 없는 어둡고 그늘진 절망의 그림자가 덮친 후부터다. 그 버릇은 사뭇 뭔가에서 탈피하고픈 일상의 의무였다. 어떤 가치에 종속된 듯 더 이상 실패나 오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는 더 이상의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통을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주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다짐 때문이었다. 오래전 그의 대인 관계는 대체로 무난했었다. 조금은 소심한 편이지만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해 편하게 해주는 인정도 있었고 이게 잘못이구나 느꼈을 땐 그걸 솔직히 인정하는 솔직함도 있었다. 모든 이와 특히, 친구들과의 생활 속에서 어울림은 그가 감당할 수만 있으면 가벼운 실랑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때그때의 환경에 편하게 맞추려 노력했다. 현실의 가증스러움이나 어려움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을 덮쳤을 때도 그는 혼자서 감내하며 스스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도 했다. 또 복잡다단한 요리조리 잘도 헷갈리는 어떤 것들은 쉽게 포기하거나 결국 놓아 버리기도 했다. 구차한 걸 싫어하는 그로써는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임에 불구하고 만사에 늘 있었고 경험했던 무의식으로 합의된, 자기 식대로 그냥 편하게 생각해 버리곤 했다. 그걸 복잡하게 끌고 가기보다는 체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고 그는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경호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얻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심장 맨 끝에 간신이 매달린 양심의 번뇌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떨쳐버리고 치사함과 욕심으로 가득 찬 풍선같이 부풀려진 그에게…… 야비하게 계산된 머리에 속절없이 당해버린 것이다. 결코 나약하고 바보스러운 태준이었다. 자기 식대로 구차하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스스로 체념 끝에 만들어진 성격이 그를 옥죄어 그의 삶을 단 한 번에 백팔십도 바꾸어 돌이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트린 것이다.
2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태준은 가을 즈음 학교 국문과가 주관한 시에 대한 무슨 문학 포럼인가 하는 행사장에서 처음 혜영과 영전을 만났다. 4살이 아래였지만 태준이 군대와 봄, 새 학기에 등록해 학년은 같은 4학년이었다. 태준이 시에도 관심이 깊어 한 번 참석한 게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 것이다. 영전은 주제 발표를 했었고 혜영은 입구 안내 데스크에서 싸인 북에 뭔가를 적게 한 학생이었다.
혜영이 머뭇거리며 놀란 듯 말한다.
"안녕하세요. 여기…"
"아, 네, 아무나 못 들어가나요?"
쭈뼛하며 태준이 물었을 때,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하듯 손 사래를 치며 대답한다.
"아니에요. 들어가 실 수 있어요."
태준은 약간 통통하면서 홍조를 띤 그녀의 붉은 뺨이 참 예쁘다 생각하며 막 입구로 들어갈 찰나 혜영의 말에 이번엔 태준이 멈칫 서며 당황한다.
"나 아저씨 아는데……"
하는 그녀의 말에 같은 학교니까 어디선가 봤겠지 생각하며, 안내 테이블의 인쇄물을 집어 들며 가져도 괜찮으냐 하는 눈짓으로 동의를 구하며 묻는다.
"어떻게 아는데요?"
이 주 전 미대 졸업 작품 전시회 때 혜영이 전시장에 들른 것이다. 그때 행사를 돕던 태준 후배인 한 친구가 서양화과였고 혜영의 고등학교 1년 후배인 동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먼발치로 후배에게 태준이 어떤 사람이란 걸 알게 됐고 그 후배한테 태준을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 주가 지나 우연찮게 행사장에서 다시 그를 보게 된 것이다.
"회화과…… 아저씨…"
"예, 어떻게? … "
"일단 들어가세요. 그리고 저… 이따가 좀 봤으면……"
행사가 끝나고 혜영은 미리 나와서 태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를 '인 혜영'이라 소개하고 이어 행사를 마치고 나타난 친구를 '임 영전'이라 소개했다. 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우연히 만난 인연이지만 그 인연은 많은 아픔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할 일로 나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험난 함이었고 또 한 사람은 초지일관 오직 그를 바라보며 이상적 사랑을 염원한 애달픈 시인이었다. 혜영은 여자로서 작지 않은 키에 뺨은 약간 도톰하지만 서구적 얼굴이었다. 고양이 상이라서 까칠한 성격일 것 같고 줏대가 있어 보여 주관이 뚜렷할 인상이었다. 쉽게 말해서 지고 못 살 것 같은 예쁘고 당찬 얼굴이었다. 그리고 영전은 화장기 없고 갸름한 얼굴에 뿔테안경 속의 쌍꺼풀이 얌전해 보여 인상이 평범했지만 다소곳하고 누가 봐도 착한 얼굴 그대로였다. 옅은 미소와 어딘가 조금 모자란 듯한 백치미의 영전과 지고 못 살 것 같은 야무진 혜영에 대한 인상은 태준의 첫 느낌이었다. 그시절 그들은 그렇게 우연히 만났다.
3
화천 운수 골은 예전에 그가 여러 번 다녀간 여행지였다. 8년여 전 태준이 그의 연인 영전과 잘나가던 시절 두 사람의 친구 혜영이 살던 곳이었고 덕분에 틈나면 들르는, 그가 자주 찾는 휴양지였다. 여름에는 파로호에서 그곳 친구들과 망중한을 즐기던 곳이다. 어느 해인가는 그들은 그곳이 좋아 여름 한 달을 머문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그곳에는 많지 않은 가구인 토착민 예닐곱 가구와 그가 거기여서 알게 된 박 교수 등이 살고 있었다. 박 교수와는 학교 선후배 사이라 태준이 시골에 내려가기 전까지는 가끔 연락하는 사이였고, 태준이 그곳에 있을 때는 마을 이장인 김 씨와 주민인 이 씨는 아침에 눈만 뜨면 만나는 사이였다. 모두가 어울려 호수에 나가 낚시나 그물질을 하거나 산속에 들어가 나물이나 버섯을 채취하거나 도라지나 더덕을 캐기도 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즐거움을 찾으려 다니는 집시들처럼 같이 몰려다녔었다.
지금은 혜영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았고 김 이장이나 이 씨가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막연한 기대와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으로 그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곳이었다. 차가 없는 그에게는 조금은 힘든 일이겠지만 그가 마음에 둔 몇 안 되는 돌아가고 싶은 정착지여서 오가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재를 넘어 운수골에 찾아 들어갔다. 지금도 이 잿길의 빽빽한 낙엽송 그늘은 길손이 잠시 머무는 쉼 터인가 보다. 태준은 선돌 같은 바위에 걸 터 앉았다. 뺨에 살짝 스치면서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솔바람이 땀을 식힌다. 주위에는 드문드문하게 커버릴 때로 커 버리고 쇠어버린 곰취가 빛을 잃고 있다. 굴 참나무의 도토리 알은 굵어 있고 구절초와 노오란 산국은 가을이 한가운데 있음을 알리고 무리 지어 오붓하게 피어있다.
"아 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숙인다. 그 시절 태준과 영전이 석양에 이곳 풀밭에 앉아 열렬히 애무와 키스를 하며 사랑을 하던 곳이었다. 사랑에 익숙했던 그들이 한적했지만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착란에 빠진 듯 오직 서로만을 탐욕했던 장소였다. 이후에 올 서로의 괜찮았던 여운이나 아쉬움마저 모두 사라질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며, 느슨한 사랑에 빠졌던 아련한 추억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연민과 함께 안타까운 그리움만 남아 있다. 그저 조용한 정적만이 그의 마음을 짠한 후회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는 한참 후 다시 천천히 걸어 재를 내려와 마을이 보이는 오솔길 삼거리에 다다랐다. 눈에 익은 한가롭고 고즈넉한 풍경이 들어왔다. 골짜기 한가운데 파로호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개울은 예전과 다름이 없이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옴팡진 여울 물에는 파란 가을 하늘과 계곡의 숲이 잘 어우러져 예쁘게 비추어, 마치 변두리 이발소의 거울에 비치는 달력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수밭 해바라기는 잔 바람에 흔들리며 생글생글 정답게 웃는 것 같아 그의 마음이 조금은 들떠졌다. 마당 한 쪽 알룩 달 룩 가냘픈 채송화와 그 옆의 붉은 봉선화는 곧 필 듯 꽃봉오리가 뭉쳐있는 키 작은 국화와 조화를 이룬다. 골짜기 양옆 산기슭에 반듯한 집들이 몇 채 들인 것은 그동안 여기에도 많은 변화가 있은 듯하다. 그는 먼저 김 이장 집을 찾았다. 손에는 춘천 시외버스 터미널 마트에서 산 커피믹스 한 박스가 들려져 있었다.
"이장님 계십니까?"
아무런 기척이 없다. '오후의 한가운데라 밭에 가셨나?' 수차례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요란스러운 개 짖는 소리에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가까이 떨어져 있는 예전에 혜영이 살았던 이웃집에 가서 물어보니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지만 아직 생기가 있는 40중 초반의 웬 젊은 부인이 나와 그곳의 변화를 이야기해 준다.
"아! 그분이요. 그분 돌아가신지 3년 됐나? 아주머니는 서울 아들네로 가셨고요."
이집 주인이었던 혜영은 여기 살지 않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김 이장도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니 상황이 난감 해진다.
"그럼 혹시 저기 저 산자락 끄트머리 집 박 교수는 아직 살고 있나요?"
"박 교수 님은요 그분은 한 달에 한두 번 오세요. 집은 비어 있고요."
이렇게 되면 우선 당장 본연의 일보다는 산중이라 곧 해가 저무는 판인데 오늘 저녁 기거할 곳을 생각하니 더 난감해지고 궁색해진다. 다급한 마음으로 태준은 또 묻는다.
"이장님 댁은 어디예요."
"저기 저 집요."
그 부인이 가리키는 그곳은 예전에 그가 파로호 입구 여울에서 천렵을 해 마을 사람들과 매운탕과 수제비를 끓여 먹거나 가끔 음식을 만들어 모임을 가졌던 이 씨네 집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태준은 진정 그 부인의 친절에 고마움을 느끼며 예전의 이 씨네 집으로 향했다. 50 초반으로 보이고 뒷머리를 꽁지로 묶은 머리를 한 이장은 두루춘풍 하게 생겨 서글서글한 눈매에 사람 좋아 보이고 누구든 호감을 느끼는 그런 인상이었다. 태준은 조금 전 부인과 대화를 되도록 소상하게 이야기하며 궁극적인 당장의 문제인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방법을 타진하였다. 그곳은 많이 변해 있었다. 민박을 할 수 있는 펜션도 여러 곳 있었고 숲 속에는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통나무집이나 산골에 어울릴만한 그럴듯한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윽하고 아늑한 청정지역이고 더군다나 아름다운 호수까지 끼고 있어 이미 끊임없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관광지로 변해있었다. 없던 마을회관도 생겼고 관광 방문객을 위한 기반 시설도 갖추어져 있는 곳이 되었다. 친절한 꽁지머리 이장은 그가 알고 싶어 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소상한 답변을 위해 고맙게도 자기 집에 머물기를 권했다. 남향에 여닫이 없는 넓은 민 창은 예전에는 없었지만, 짜 맞춘 책꽂이 겸 수납 찬장이 거실과 주방을 분리해 놓은 것은 여전했다. 찬장에는 온갖 약초 술이 즐비하고 조붓하게 놓여 있다. 내화 벽돌로 만들어진 벽난로도 그대로다. 가볍게 한잔하면서 듣고 싶었던 옛 친구들의 소식을 놀라움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착잡한 심경에 빠져 갑자기 멍해지며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묘한 망설임에 빠졌다. 술 좋아했던 김 이장은 결국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고 박 교수는 서울 K 대로 옮겨 온 가족이 서울살이를 한단다. 그리고 멍해지며 놀랐던 것은 혜영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운수골에서 떠나 여기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왔는데 살고 있다니 망설여지고 놀랄 뿐이다. 가끔 문단 소식지나 인터넷에서 그녀의 시를 접하기도 했고, 재작년 전 초 가을쯤에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먼발치로 혜영을 본 적도 있었지만 한 번도 아는 체나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또한 S 여대에 강사로 나간다는 소식은 친구한테 들어 알고 있어 서울에서 사는 걸로 만 생각했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이장의 휴대폰의 벨이 울리고 그녀가 태준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는지 의아했지만 아까 만났던 부인이 혜영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혜영에게 예전에 태준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전 상황을 종합하고 바로 혜영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휴대폰 속에서 흘러나오는 혜영의 목소리는 항상 활달한 그녀답지 않게 심히 떨리는 듯, 횡설수설이고 따지 듯 단호하다.
"여보세요. 저 혜영인데요. 호혹시 장 선생님 아니세요. 아녀요?"
그녀는 태준을 늘 형이라고 불렀는데 확실한 걸 아직 몰라 조심스러웠지만 확신에 찬 말투였다.
"으응, 그래 혜영이 오랜만이구나."
그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8년 만의 인사를 건넨다.
"혀 허-형……"
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절절한 목소리다.
"거기 있어요. 내가 갈게."
곧, 20 분도 채 안 돼서 혜영은 이장댁에 도착했다. 이장과 부인이 있는데도 인사도 없이 성급해하는 건 혜영의 본 성격이 아닌데 그녀는 너무나 반갑고 한편 야속해하며 들떠져 주위에 누가 있는지 안중에도 없었다. 웃음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태준에게 혜영은 화난 얼굴로 다그치듯 말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그는 그녀를 보고 그냥 멋쩍은 헛웃음만 지으며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까 하다가 반 농을 섞어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 혜영의 두서없는 행동을 감싸준다.
"왜? 여깄잖아! 공기 좋은데 살아서 그런지 좋아 보여 다행이다."
옆에 꽁지머리 이장과 부인, 혜영 친구인 친절했던 부인도 있던 터라 긴 말은 못 하고 혜영은 짧게 말을 잇는다.
"가요. 우리 집으로"
혜영은 지금 자기가 흥분되어 분위기가 무겁고 조금은 딱딱하다는 것을 못 느끼고 있는 듯했다. 태준은 멋쩍게 이장을 바라보며 자기 할 말만 하는 혜영의 성급함을 감추어 모면해 주고 싶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장님 아니었으면 오늘 난감했을 텐데, 덕분에 옛 친구도 만났습니다."
이장의 웃음 짓는 얼굴을 보며 태준과 혜영, 그리고 그녀의 친구 친절한 부인은 밖으로 나왔다. 혜영은 예전보다는 나이 탓인지, 여유로운 전원생활 때문인지 약간 도톰해 보였다. 청바지에 속에 셔츠를 받쳐 입은 가벼운 털 후드 집업 속에 적당히 살이 돋아 볼륨 있게 보였다.
"인사해, 내가 말하던 그 형이야."
"은영이라고 해요. 최 은영요. 멋진 분이고 좋은 분이 란 걸 이 친구에게 자주 들어서… 선생님 처음 뵌 분 같지 않아요."
"아, 안녕하세요. 아깐 정말 고마웠습니다. 은영 씨"
저쪽 산등성에 해가 걸쳐 간다. 태준은 노을 지는 그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산 등선 소나무의 해찬 솔이 더욱 빛나 눈이 부실 정도다. 예전에 낙엽송이 울창한 언덕마루에서 영전과 함께, 온 세상이 환한 지금 같은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 딱, 그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하는 생각을 한다. 서 산에 지는 소나무의 모자라지 않고 알뜰한 긴 그림자는 지난날의 아픔을 함께 하게 해 그에게 회한을 갖게 한다. 오래전 이 씨, 김 이장, 박 교수 부부 등 모두가 함께 한 시간들이 태준에게는 항상 추억이었고 아픔이 있는 곳이었다. 보트를 띄워 밤낚시를 하거나 곰취를 뜯으려 밤새 운전해 와, 숲 속에서 영전과 잠들었을 때 짓궂게 혜영이 훼방을 놓는다던가, 모두 모여 모닥불을 피워 빙 둘러앉아 걸맞은 노래를 부르며 희희낙락하기도 했었다. 때로는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영전과 사랑이 더 깊어진 곳이었고 그들의 만남이 십 년이 될 즈음 태준이 호숫가 근처 달빛 아래서 프러포즈를 해 결혼까지 약속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온 삶에서 젊음의 무한 환희와 긍정의 시대를 맛보았고 의미가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후 태준은 영전과 헤어진 뒤 자신을 암울에서 해방하려는 끓임 없는 방황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최악의 삶을 살아왔다. 근래에 와서야 무엇인가에서 탈출하고 떨쳐 버려야 할 아집을 버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새롭게 정진하려는 의도로 여기까지 찾아온 곳이기도 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활,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의 허약하고 닳아버린 모습들이 그를 억누르고 있지만 태준은 다시 해낼 수 있다는 강한 이끌림으로 다시 운수 골을 찾은 것이다. 두 사람은 은영과 헤어진 뒤 혜영의 풍뎅이 같은 작고 아담한 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혜영은 운수 골 바로 옆 추곡 약수골에 살고 있었다. 약수에 탄산 성분이 많아 사이다 같은 맛이 나 제법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다. 태준도 두 사람과 같이 약수터에 두세 번 온 기억이 있는 곳이다. 한 여름인데도 북쪽으로 난 계곡에 위치해 늘 서늘한 곳이었다. 특히 그때 물갈이 때문에 속이 편치 않아 화장실을 자주 찾을 때 시설이 좋지 않아 고생을 해 별 유쾌한 기억이 없었던 곳이었다. 서로 이해되는 상황 따위에서 사람들은 그것들에 자연스레 어울리고 격에 맞게 상호 존중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부족이나 불만이 없는 상황이 될 수는 없지만, 혜영은 그런대로 약수 골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 씨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서로 도움이 되는 상생의 관계였다. 혜영은 우선 먹는 것을 해결했다. 먹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그녀에게 생각날 때 아무 때고 찾아와 한 끼를 해결하던 곳이다. 그리고 계절에 한 번씩 시 낭송회를 이 씨네 가게 개울 건너 산 머루 넝쿨이 하늘을 가리고 옥외 탁자가 공간을 잘 채운 아담한 공터에서 낭송회를 한다. 시 낭송회 덕분에 그날은 이 씨네 식당이 대목이 되기도 하고 평일에도 대처에서 오는 관광객만이 아닌 낭송회에 관련된 젊은 손님들이 들르는 곳이 됐다. 예전부터 부인 음식 솜씨가 좋아 종종 그 집에서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곤 했었다. 저녁 식사를 이 씨네 집에서 먹기로 하고 차는 입구 주차장에 세우고 식당으로 향했다. 약간 경사진 언덕에 한쪽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그 옆에 두세 사람이 스쳐 지나갈 작은 오솔길은 약수터가 맨 끝이었다. 못 미쳐 중간쯤 '산머루 식당'이라는 작은 간판에, 옹벽 담에 작은 바위로 쌓아 올린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허름한 집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입구 안에서 소주 박스를 정리하던 이 씨는 한참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쳐다보다가 옛 동지를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맞이한다. 반가워하며 손을 내밀어 두 손을 덥석 잡아 마구 흔들어대며 안쪽을 향해 소리친다.
"여보 여보, 여기 나와봐. 장 선생님 오셨어. 여보"
"아이고, 선생님 어서 오시소. 정말로 오래간만 이네에."
반갑게 맞이하며 악수라도 하고 싶은 듯 행주치마에 연신 손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태준은 뜻밖의 환대에 겸연쩍게 웃음 지으며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말한다.
"두 분 그대로시네요. 건강하시죠."
태준이 옛날에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맛보았던 여러 가지 음식 중에 지금 이 씨 부인이 끓여 준 된장찌개가 가장 맛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된장을 채에 걸러 멸치로 달인 속뜨물을 부어 솥에 강된장 찌듯 쪄 다시 뚝배기에 물을 부어 채소와 두부, 칼칼한 매운 고추 등을 넣어 끓여 짜지 않고 감칠맛의 여운이 오래 남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 풍미가 도는 맛은 어디서든 쉽게 맛볼 수 없는 그런 맛이었다.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무얼 먹을지 망설여지지만 이 된장찌개 맛은 태준 입에 착 감기고 다시 떠오르는 지난날의 추억의 맛이었다. 태준은 맛에 취해 칭찬을 아니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여전하시네요. 이렇게 맛있는 된장찌개, 정말 운수 골에서 먹었던 그때 이후 처음이에요."
"형, 난 여기서 거의 식사를 해결해 아줌마 없었음 내가 어찌 살았을까? 나도 아찔해."
듣고 있었던 혜영이 공감하듯 멸치 달인 물에 애호박을 나박나박하게 썰어 겨울에 먹는 시라기 된장국 솜씨도 그만이라고 자랑이다. 태준 보고 겨울에 시라기 된장국 맛을 꼭 보라는 말도 잊지 않고 하면서……
"너 그러다 시집가서 어떡할 거야?"
"밥 해주는 남자 만나면 되지 뭐"
"인 선생, 김 교수는 밥 못하는데……"
옆에 있던 이 씨 말에 혜영은 눈을 흘기며 정색을 하고 대꾸한다.
"김 교순 그냥 친구예요."
그녀는 평소에 입이 거친 만큼 농담도 즐겨했다. 농담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상황인데 혜영의 강한 부정에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을 뿐, 뭐라 거들 수 없다는 걸 태준은 잘 알고 있었다.
"여보, 더덕무침 좀 더 가져와. 두부 하고"
혜영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은 이 씨는 당황하듯 놀라며 순간을 회피하고 싶은 듯 부인에게 딴청이다.
혜영은 주차장 입구에서 양지바른 숲 쪽으로 들어가 아담한 2층의 통나무집에 살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찾아와 머물기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자동차 한 대 만이 다닐 호젓한 맨 흙 길에 양옆에 부러 조성한 듯한 단풍나무는 이미 색이 짙어 있었고 노랑으로 바래 가는 드문드문한 은행나무와 잘 어우러져 벌겋고 노랗게 색을 입으면 꽤나 운치 있고 낭만이 물씬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가 가슴을 후비듯 은은하게 들려온다. 아마 혜영이 운수 골에 올 때 FM 라디오를 그냥 켜놓고 온 듯하다. 태준은 그 음악에 빠져 감상에 젖기라도 할 듯 파란 잔디가 깔린 정원에서 잠시 서 뻥 뚫린 밤하늘을 쳐다본다. 달은 보이지 않고 무수히 많은 별들의 별빛이 좁은 마당에 쏟아진다. 은하수는 그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잿빛으로 흐려 저 있고 촘촘하게 박힌 별들이 황홀로 다가온다. 스산한 바람과 피아졸라의 탱고, 별빛이 쏟아지는 가을의 완벽한 밤이 태준을 또 한 번 아련함에 빠뜨린다. 일 층엔 손님방으로 보이는 방 2개와 주방, 마당 쪽으로 난 고딕풍의 2개의 크지 않는 창, 그리고 별 잡동사니가 없는 열댓 평쯤 되는 거실 한쪽에 원형 탁자와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 4개가 있고 입구 오른쪽으로 벽난로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옛날에 태준이 그려 준 형태가 왜곡된 8호짜리 유화, '기다림'이라는 제목의 여인상이 걸려 저 있었다. 거실의 분위기는 오래전 그가 본 혜영답지 않게 차분하고 심 풀했다. 그녀의 다음 말에 더욱 놀라 태준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형 생각하며 꾸며 놓은 거야."
혜영의 솔직한 말에 태준은 창가에 서서 밖만을 응시할 뿐 반응을 할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해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형, 이방에서 주무세요."
혜영은 도어를 열며 방을 보여주고 다시 나와 태준의 앞에 와 마주 보고 선다. 그녀답지 않게 두 손을 잡고 태준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나 정말 형 무지무지 보고 싶었어……"
이어 태준의 가슴에 안기는 그녀의 촉촉한 눈망울이 태준의 가슴을 연민으로 스쳐 지나가 사정없이 할퀸다. 태준은 도리 없이 살며시 포옹해 그녀의 마음을 진정 시 키 듯 얄팍한 등을 토닥여 준다. 봉긋한 그녀의 가슴이 그의 가슴에 살며시 와닿는다. 태준이 묘한 감정에 빠지는 건 예기치 못한 이상 야릇함이다 한참을 말없이 포옹만 하고 있었다. 그는 냉정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에게 더 큰 잘못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잠깐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녀가 2 층으로 올라간 사이 태준은 오래전 자기가 그린 그림 앞에서 그때의 상념에 잠겼다. '아! 그때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태준은 기다림의 그림을 시리즈로 4 작품을 그렸는데 하나는 혜영이, 또 하나는 영전이, 그리고 다른 두 작품은 그 전시회 때 팔린 것으로 기억한다.
"형 이 그림 날 안 준다면 내가 살 거야, 팔지 말아. 빨간딱지 붙여 놔."
예전에도 몇 점 그림을 두 사람에게 준 적이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기다림에 바람을 넣어버린 혜영이었다. 그 옆에 있던 영전의 한마디가 두 점 그림의 행방을 결정 지어버린 것이다.
"오빠, 나는"
태준은 웃음 지으며 영전의 볼을 가볍게 꼬집는다.
'이 그림은 네 거야."
환한 웃음으로 와락 안기는 영전에게 혜영은 다그치며 말한다.
"또 지랄하네요. 야, 사람들 많잖아."
"있음 어때."
사랑하는 이들만의 전유물인 몰염치의 진수이고 의식이나 감당하지 못할 게 하나도 없다는 그들만의 관용인 사랑 행위는 과감했다. 영전은 모두에게 이 사람은 내 거라는 것을 확인 시키 듯 보란 듯 더 파고든다.
그때의 모든 상황이 태준의 기억 속으로 어슴푸레 스쳐 지나간다. 결과적으로 영전과의 사랑이 아이러니로 끝났지만 그 사랑의 고뇌와 비애가 그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 때, 절망과 상실로 인한 후회가 자기 잘못이기 때문에 태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항상 똑같은 말을 되뇐다.
"아! 그때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