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등引燈이란 말의 뜻은
인등引燈이란 말의 뜻은
‘부처님 전에 등을 켠다’는 뜻입니다.
각 사찰에는
아마 거의 인등 접수를 수시로 받고 계실 겁니다.
108인등불, 1,000인등불, 33천인등불, 10,000인등불,
절의 규모에 따라 인등불의 수는 천차만별입니다.
요즘은 인등불에 불상으로 끼어놓고
접수 받고들 계시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인등불火을 연등燃燈이라고도 하는데,
연등은 연등회, 연등절을 의미하는 경우와
그냥 등불 자체를 연등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강 연등제나, 진주 남강연등제와 하는 경우와 같이
대규모의 등불공양 행사를 말할 때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 등불을 올리는 경우는
인등공양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듯 싶습니다.
왜냐 하면 인등이란
‘부처님께 인도 한다’, ‘부처님께 나아간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등불을 의미하는 연등보다는
인등이 종교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등의 유래는 설화에 등장한
아자타사투왕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자타사투왕은 자기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폐륜아 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인도대륙을 통일하는 큰 업적을 감기기도 했는데,
아버지를 죽이고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인 과보인지
온몸에 흉한 종기가 돋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의사를 불러다가 치료했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어 죽음이 목전에 다달았습니다.
마치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온몸에 악창이 돋은 것과 흡사한 고사입니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악창의 고통에서 벗어났듯이
아자타사투왕도 마침내 자기의 과오를 깨닫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참회하자
온몸에 돋은 악성 종양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 뒤로 왕은 진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부처님을 궁중으로 모셔 정성껏 공양을 드린 뒤에
설법을 듣기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왕궁에서 법회를 마치시고
기원정사로 떠나려 하시자
왕이 ‘기바’라는 신하에게 오늘은 무엇으로
부처님을 받들면 좋겠느냐고 물었는데,
그 신하가 등을 많이 켜서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왕은 이 말에 따라
궁궐에서 기원정사까지 수많은 등불을 켜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여인 난다가 등불을 켜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
이처럼 인등불사는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 되었는데,
사실은 그 시원시원은 아득한 과거세로 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에게 수기를 주신
부처님 이름이 연등燃燈 부처님이신데
석가모니부처님은 과거세 세상에서 선혜 보살로 수행 하실 때,
이 부처님을 만나 진흙길에 깔아서
연등부처님이 밟아 건너시게 하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등’이란 부처님의 이름은
이 부처님의 몸이 마치 등불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하므로
이 부처님의 이름에서부터 유래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등불 공양은 어떤 공덕이 있을까 궁금하시겠죠?
♣ 성불의 씨앗이 됩니다.
가난한 난다는 부처님께 작은 등불을 올리고
그 공덕으로부터
“30겁 후에 수미등광여래가 되리라”수기를 받았습니다.
이는 어찌 난다라는 여인에만 국한 되는 일이겠습니까?
누구든 그와 같은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등불공양은 성불의 씨앗이 됩니다.
♣ 지혜의 눈을 얻게 됩니다.
등불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요,
지혜는 무명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을 밝히는 진정한 의미는
세간의 어둠을 밝히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어둠,
탐진치 삼독심으로 엉킨 어둠,
즉 무명無明을 없애는 데 있습니다.
《방등경》에
“보살은 부처님 앞에
등공양을 하였으므로 청안통天眼通을 얻었다.”하였고,
천안이나 불안은
다른 눈이 아니라 지혜로 얻은 눈입니다.
♣ 재앙을 물리치고 소원을 성취합니다.
재앙은 어둠에서 일어납니다.
진리에 대한 어둠,
인과에 대한 어둠이 온갖 악업을 짓게 되고
그 결과 불행한 결과를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소원은
이러한 악업의 장애가 되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지혜의 등불을 밝히면
재앙 스스로 물러가게 되고,
장애도 스스로 사라지므로
장애도 스스로 사라지므로
소원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둥불만 켠다고
그런 공덕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등불만 켠다고 그런 공덕이 모두 다 이뤄진다면
세상에 등불을 켜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다?
해마다 수많은 불자들이 등불공양을 올리고
절마다 수많은 인등이 밤낮으로 빛을 내고 있는데
등을 켠 분들이 한결같이 큰 지혜를 얻고,
모두 다 소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등불을 켜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등불을 켜는 마음입니다.
‘난다’는 비록 작은 등불 한 개를 켰지만
밤새 빛을 내고 아침 되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아자타사투왕의 등불은 화려하고 거창했지만
밤새 다 꺼지고 말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꺼지고 안 꺼지고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불빛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불빛,
바로 신심의 불빛입니다.
얼굴을 내가 위해 등을 켜서는 안 됩니다.
등불 켤 때 불자들은
서로 좋은 자리에 단다고 아우성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등불 켜는데 좋은 자리가 따로 없을 수 없습니다.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등을 켜면
그 곳이 좋은 자리 인 것입니다.
이 오늘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2년 11월 20일 오전 06:40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雲月野人 진각 합장
첫댓글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