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풍수지리학의 역사(歷史)
풍수지리는 수백․수천년 동안 자연에서 일어난 현상을 분석하고 집대성한 것으로, 지질학(地質學)과 자연과학적(自然科學的) 이론과 더불어 통계학적(統計學的)인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가혹한 환경과 위기를 피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동물들의 공격을 피해 먹을 것을 찾아야 하고, 잠을 자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적의 공격을 막고 자연재해를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풍수의 시작이다.
풍수지리는 일정한 지역에서 생을 영위하고 대를 이어 살아가는 한 민족의 풍습(風習)이며 전통이다. 풍습이야말로 풍수지리의 기본 바탕이며 역사성이다. 어느 지역이나 고유의 풍습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기후(氣候)와 온도(溫度), 혹은 삶의 형태가 지역이나 민족성(民族性)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산지(山地)와 평야지역(平野地域)이 다르고, 건기(乾期)가 긴 지역과 우기(雨期)가 긴 지역이 달라야 한다. 아울러 온도가 높거나 낮은 지역이 달라야 하며, 고도(高度)가 높거나 낮은 지역이 달라야 한다. 이 같은 자연환경과 삶의 형태에 따라 고유의 풍수지리가 태동되었다.
풍수지리의 역사는 이기(理氣)의 근본이 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은 약 5600년 전 복희씨(伏羲氏)의 용마하도(龍馬河圖)로 거슬러 올라가고, 방위를 분별할 수 있는 도구인 나경의 근원이 되는 침법(針法)의 등장은 약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침법은 그 당시 전쟁터에서 방향을 분간하기위해 쓰였으며, 약 3000년 전에는 자침(磁針)을 수레에 장착하여 생활에 활용되었고, 약 2200여년 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24방위의 나경이 만들어졌다.
그동안 구전으로 내려 오던 풍수지리학이 문자화되어 책으로 만들어진 것 중 현존하는 것은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풍수의 목적은 사람이 살기 좋은 집터를 찾고, 양명한 땅에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이다. 양택이 지역의 기후와 풍속에 따라 다르듯, 죽은 자를 땅에 묻는 매장문화(埋葬文化)도 지역과 민족에 따라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다.
선인(先人)들이 수천년 이상 이어 온 매장문화는 지식과 철학이 축척되어 온 경험이다. 장법(葬法)은 고대로부터 존재했으며, 이 땅에 토속적인 매장풍수가 있었음은 아직도 이 땅 곳곳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고인돌(支石墓)과 고구려․백제․신라․가야시대(伽倻時代)의 고분(古墳), 묘역, 오래된 절터, 성터와 같은 문화유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이 땅의 풍수지리는 형기론의 법칙을 적용이라도 한 듯, 산세와 지형을 토대로 해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촌락의 입지를 보면 공통적으로 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물을 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를 가진다. 배산임수의 정형성은 풍수해(風水害)를 비롯한 자연재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경제활동에 최적의 조건이다. 더불어 좌측과 우측이 산이 교쇄(交鎖)를 이룬 분지(盆地)는 아늑하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통일신라 말 중국의 풍수지리 일부를 도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기록만을 의지하고 추종한다면 당연히 우리나라의 풍수지리 중 일부가 통일신라 말 유입되었다고 믿어야 하지만, 역사적 유물로 보아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미 삼국사기에 고구려․신라․백제의 풍수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땅의 풍수지리는 전통적인 풍수지리에 중국에서 유입된 일부 풍수이론이 보태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풍수지리는 일종의 자연과학(自然科學)으로, 이 땅의 환경에 부합된 이론이다. 만약 지형과 풍습 및 역사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배척을 당하고 소멸되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이론의 유입은 중국 북부지역의 환경요인과 용맥(龍脈)이 유사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 중국의 풍수가 문자로 들어와 우리의 풍수와 접목되어 우리나라 풍수의 한 부분에 자리잡았고, 중국 북부의 지형은 한반도의 지형과 문화의 유사성이 많아 더욱 밀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중국에서 유입된 일부의 풍수마저도 애초에 이 땅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풍수가 만들어지고 발전한 중국 장강과 황하 이북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풍수지리가 동이족의 산물이라는 이론도 어느 정도는 과학적인 증명을 보이고 있다.
풍수지리로서 고려의 건국에 도움을 준 도선국사의 풍수는 계속 이어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선 초기에 한양에 수도를 잡는 등의 영향을 준 이래로 지속적인 계승․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이어 풍수사(風水師)들은 국가시책(國家施策)과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이루는 데 일조했으며, 풍수지리는 출세와 가문의 영달을 바라여 출사(出仕)를 하는 학자의 기본학문 중 하나였다.
학문을 익힌 지식인들은 풍수를 통해 가문의 영달을 추구하였고, 이후 풍수지리는 일반인들 속으로 전파되었다. 학문이 깊은 승려들은 물론이고, 유교계(儒敎界)에서는 학자(學者)와 명신(名臣)이 풍수사로 이름을 얻는 경우가 많았고, 국가에서는 과거를 통해 관리로서 풍수사를 뽑기도 하여 도읍건설과 왕릉축조 등에 활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佛敎)가 국교(國敎)였으므로 종교적 영향으로 다비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었기에 매장문화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이념과 가문의 건승(健勝)에 따른 의식의 변화에 작용하여, 조상숭배(祖上崇拜)를 통한 발복풍수(發福風水)가 지배적인 이론을 형성하여 매장문화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 땅에 인간이 보행을 시작하여, 고래로 양택풍수(陽宅風水)가 먼저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시대에 조상숭배와 발복이라는 대전제 아래 음택풍수가 비약적으로 발달되었다.
불교계(佛敎界)에서도 고승들이 사찰을 짓거나 궁궐을 중수할 때 대대적으로 활동하였고,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게 명당을 구해 주었다는 일화가 남기도 했다. 고승들은 풍수를 익혀 절을 세우거나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전수하기도 하고, 고승의 사리를 모시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이름난 풍수사로 유교계에서는 정도전(鄭道傳), 남사고(南師古), 이지함(李芝菡), 맹사성(孟思誠), 채성우(菜成雨), 성거사(成居士), 이의신(李懿信), 안정복(安鼎福), 안효례(安孝禮), 하륜(河崙)과 같은 명사들이 있었고, 불교계에서는 도선국사(道詵國師), 무학대사(無學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일지대사(一指大師), 일이대사(一耳大師), 성지대사(性智大師), 성원대사(性圓大師), 진묵대사(眞黙大師)가 풍수지리의 대가로 이름이 전한다.
* 자료제공 : 해천동양학연구학회장 유 도 상 올림
- 전) 경기대평교원 명리학, 인테리어풍수 교수
- 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동양철학최고위과정 교수
* 참고자료 :
- 구성학기초에서 통변까지, 유도상, O.B.C.A, 2020. 7.10일
- 실용종합풍수지리, 유도상, 박영사. 2019.7.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