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을 흔든 아만다 고먼의 시(詩)
아만다 고먼은 22세의 미국 여성으로 미국에만 있는 청년 계관(桂冠)시인입니다. 월계관을 쓴 시인이라는 뜻의 계관시인은 영국왕실 행사를 위해 시를 지을 정도의 원로 시인에게 붙여주는 영예의 호칭입니다. 그 영예를 22세의 흑인 여성에게 붙여준 미국이야말로 젊은 나라답습니다.
1월 20일 조셉 바이든 미국 46대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고먼이 5분 동안 낭송한 축시가 전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언덕(The Hill We Climb)'이라는 제목의 이 시에 담긴 깊고 강렬한 영감이 주는 반향입니다. 여기서 '언덕'은 2주전 폭도들에 점거됐고, 또 취임식이 열린 미국 민주주의의 전당, 의사당(Capitol Hill)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고먼은 이 시에서 자신의 출생 배경에 대해 ‘노예의 후예로, 미혼모 밑에서 자란 깡마른 흑인소녀(A skinny black girl descended from slaves raised by a single mother)’라며, ‘대통령이 되기를 꿈꾸다 대통령이 된 이를 위해 이 시를 낭송하고 있다네.(Dream of becoming president only to find herself reciting for one).’라고 읊었습니다.
고먼은 축시 청탁을 받고 기쁨에 넘쳤지만 막상 시를 쓰려니 막막했었는데 1월 6일 의사당 폭동 사건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CNN을 비롯한 미국의 모든 방송과 신문들은 고먼의 축시낭송이 취임식의 백미였다고 대서특필했고, 특히 CNN TV의 생중계에는 150만 건이 넘는 접속과 1만 건 가까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댓글 중에는 ‘아름답다’ ‘감동이다’ ‘믿을 수 없다’ ‘말문이 막힌다’ ‘전율이 느껴진다’ ‘눈물이 난다’ ‘미국인인 게 자랑스럽다’ 등 찬탄 일색이었습니다. 의사당 폭동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이었나를 유추하게 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4년은 미국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두 번씩이나 하원에서 탄핵을 당한 최초의 대통령이 됐고, 퇴임 후 상원에서 재판을 받는 최초의 전직대통령이 됐습니다. 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신・구 대통령이 임무 교대하는 전통도 깨졌습니다.
그럼에도 고먼은 미국의 희망을 말합니다. 상처난 나라를 고쳐서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용기가 있는 한 빛을 찾을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먼의 5분 축시 낭송이 바이든 대통령의 20분 취임사를 능가하는 반향은 이런 긍정의 메시지가 내는 힘이겠지요. 시에 담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인해 울림은 미국 너머로도 미칩니다. 고먼을 추천한 사람은 영문학 교수인 퍼스트 레이디 질 바이든 여사로 취임식에서부터 빛나는 내조를 한 셈입니다. 그의 시는 영어의 운율에 맞추면 더욱 아름다운 시가 되지만 우리말로 운율까지 맞추기는 필자에겐 능력 밖입니다.
이 시에서 미국인들이 특별히 공감하고 있는 구절이 무엇인가를 1월 20일자 CNN TV 생중계보도에 달린 1만개의 댓글들을 통해 살펴봅니다. 댓글 전체를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방대하여 최근 순서로 1,000여 건을 참고했습니다.
고먼이 대통령을 꿈꾼다는 것과 관련한 댓글들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출마하면 찍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고먼이 2036년에 출마하겠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냐?”고 격려했습니다.
댓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은 ‘바로 현상(現狀)이 정의는 아니다.(What just-is isn't justice).’라는 구절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언(金言 Golden Word)’이라고 했습니다. 미국 사회가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다는 의미로 이해됐습니다.
‘우리는 조용함이 언제든 평화가 아님을 배웠다.(We've learned that quiet isn‘t always peace).’는 구절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이에 대한 댓글 중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계속 이 세상을 어루만지기를...’이라는 것도 있었으나 ‘인종차별이 약해진 줄 알았으나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알았다. 차별은 조용했을 뿐이다’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미국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자부심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과거이자,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고쳤느냐이다.(Being American is more than a pride we inherit, it's the past we step in to, and how we repair it)’ 이 구절에서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 축시를 했던 여류 시인 고 마야 앤절루의 환생을 연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야 앤젤루가 어디선가 웃고 있을 것 같다’ ‘마야가 자랑스러워 하겠다.’는 것들입니다.
‘민주주의는 때로 지체될 뿐 영구히 패배하지는 않는다.(But while democracy can be periodically delayed, it can never be permanently defeated).’ 이 구절엔 ‘마틴 루터 킹이나 존 F 케네디의 숨소리처럼 인용돼야 한다.’는 베트남 성을 가진 사람의 댓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공유하기보다 망가뜨리려는 세력들을 보았다. 그것으로 민주주의가 지체된다면 우리나라는 망했을 것이다. 거의 그럴 뻔했다. 어떻든 우리가 풍파를 치르며 증거했던 나라는 부러지진 않았고, 미완일 뿐이다.(We've seen a force that would shatter our nation rather than share it. Would destroy our country if it meant delaying democracy. And this effort very nearly succeeded. Somehow we've weathered and witnessed a nation not broken, but unfinished).’
위 구절은 트럼프 집권 4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인 듯이 들립니다. ‘4년간 숙취 상태였다가 눈을 떠 새로운 미국을 보는 것 같다.’ ‘최악을 경험한 우리에게 최상을 생각하게 해주었다.’는 댓글이 붙었습니다.
‘고뇌하면서 우리는 성장했고, 상처 속에서 희망을 품었으며, 지친 채로 도전했다.(Even as we grieved, we grew. Even as we hurt, we hoped. Even as we tired, we tried).’ 이 구절에서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한줄기 햇살이 우리를 향해 노래하는 듯했다.’라고 했습니다.‘우리는 야수의 탐욕에 용감히 맞섰고.(We've braved the belly of the beast).’라는 구절에는 ‘트럼프라면 야수의 탐욕에 ’의지했을 것‘(braced).’이라고 비꼬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새로운 여명은 우리가 그것을 펼쳐놓을 때 피어날 것이다. 빛은 언제나 있지만 우리가 용감할 때 볼 수 있고, 용감해야 우리는 빛이 된다.(The new dawn blooms as we free it. For there is always light if only we're brave enough to see it, if only we're brave enough to be it).’ 이 마지막 구절을 절구(絶句)로 꼽은 사람도 많았는데 그 중에는 ‘읽는 순간 혈관을타고 전율이 흘렀다’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밖에 ‘73세 노인인데, 내가 죽고 나서도 미국을 인도할 진정한 선함(Goodness)이 있음을 알고 나니 눈물이 난다.' '시를 좋아하지 않으나 이렇게 훌륭한 것임을 놀라움으로 깨닫는다.' '그녀는 시로써 오늘의 우리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미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5분의 시로 얘기하다니 놀랍다.' '이 여성을 찾아낸 퍼스트 레이디, 감사합니다.' 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퍼온 글] / 출처; 2021년 01월 29일 (금)에 받은 자유칼럼그룹의 e메일 / 필자소개; 임종건(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해
2010년 나홍진 감독의 영화 ‘황해’는 바다 안개(海霧)에 갇힌 배 안에서의 잔혹한 살육극이 몸서리가 처지는 영화다. 흐릿함과 끈적거림이 교직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중국과 남북한 해상 경계의 모호함을 방증하며 이곳에서 충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암시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두 차례 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의 상흔이 깊은 바다다.
국제수문기구에 따르면 황해는 제주도에서 상하이 부근 양쯔강 하구까지를 선으로 그어 동중국해와 구분한다. 보하이만(渤海灣)과 나누기도 하지만 합치기도 한다. 남북 1000㎞, 동서 700㎞로 평균 수심은 40m, 가장 깊은 곳이라야 105m로 거대한 대륙붕을 형성한다. 빙하기에는 거의 뭍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기원전 3000년대에 한반도에 농업이 전래되는 통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이 바다로 서진(西晉)에 사신을 보냈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 황해 건너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고려 때 예성강 입구 벽란도(碧瀾渡)가 국제항으로 발돋움한 것도 황해를 통해서였다. 황해는 어찌 보면 동북아의 지중해라고 할 수도 있다.
황해란 명칭은 황하, 화이허, 양쯔강에서 흘러드는 강물 때문에 누런색 바다라고 해 붙여졌다. 1737년 프랑스인 당빌이 제작한 지도에 처음 이렇게 적혔다. 1952년 중국 국무원이 공식 인정했고 우리도 특별한 지정학적 이해 충돌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 따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황하를 연상시켜 중국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며 ‘서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령도와 소청초의 연간 해무 일수는 100일이나 된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며 물살도 빨라 상업적이든 군사적이든 움직임이 쉽지 않은 바다다. 그런데 거의 매일 중국 해군 경비함이 동경 124도를 넘어와 공해에 진입, 이 일대를 ‘내해’(內海)로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듯해 문제다. 동경 124도는 2013년 중국이 우리 해군 보고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한 선이다. 그래 놓고 자신들은 이 선을 넘어 10㎞나 한국 쪽으로 접근했다.
일부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뭘 했느냐고 타박을 한다. 양희철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법정책연구소장은 어제 서울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정전협정에서 경계를 뚜렷이 획정하지 않았고 중국과 남북한 모두 민감해 이제껏 방관했다”면서 “중국이 전력 강화를 공언한 2013년부터 중국 해군의 군사행동이 차츰 늘어 정부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우리도 적절히 비례적 대응 원칙으로 대응해 왔다. 다만 떠들썩하게 알리지 않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임병선(서울신문 논설위원) / 2021-01-29 04:01
유사과학, 혹은 거짓의 창궐
1. 약 150년 전 활동했던 진화론의 주창자 찰스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 “무지는 지식보다 더 확신을 주기 마련이다. 정작 무지한 사람들이 과학으로는 특정 문제가 절대 풀릴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곤 한다.”
2. 코넬대학에서 근무하던 심리학자 데이비드 더닝과 저스틴 크루거는 특정 분야에 대해서 지식이 어느 정도 생기기 시작하면 그 개인의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현상을 기술했다. 아마 그 분야의 방대한 지식을 접하기 시작하며 스스로 겸손해지는 인간의 본능이리라.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는 오히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증가한다는 현상도 함께 기술했던 것이다. 이 현상은 “더닝 크루거 효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 손꼽히는 공상과학소설가 중 한 명인 아서 C 클라크는 여러 촌철살인의 명언으로도 유명한데 그중 이런 말이 있다. “충분히 발전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감이 잘 오지 않는다고?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핸드폰을 처음 본 조선시대의 선비를 상상해 보자.
4. 로봇의 3원칙을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한 또 한 명의 출중한 소설가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대표작인 ‘파운데이션’에서는 로마제국을 본뜬 은하제국이 등장한다. 엄청나게 비대해진 은하제국이 결국 몰락하고, 제국의 과학기술문명이 은하 곳곳에 미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 정치가들과 과학자들은 어떻게 곧 도래하게 될 암흑기를 최소화하고 화려했던 문명을 유지할 수 있을지의 여러 방법을 고민한다. 이미 문명을 잃어버리고 야만화한 행성들에 어떻게 다시 과학기술문명을 심을 수 있을까? 그 한 가지 방법, 과학기술에 의한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마법으로 포장하고, 자신들을 마법사, 혹은 성직자로 선전해 야만인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당대의 최신 과학지식과 기술들로 세계를 보는 과학활동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이를 이용해 근거 없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유사과학, 혹은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창궐하는 뜬금없는 소문들을 목도하는 것도 오래된 일이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심심치 않게 이러한 헛소문에 의한 웃지 못할 해프닝을 목격하고 있다.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캐나다에서는 5G 타워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원지라는 생각에 휴대폰 송신탑들이 불태워졌다. 이란에서는 알코올을 마시면 바이러스에 대한 소독이 된다는 말에 메탄올을 마셔서 700여명이 사망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지난해 봄에 소셜미디어에서 “코로나는 독감보다 덜 위험하다”는 주장을 했고, 여름쯤에는 “소독제를 체내에 주입해 치료를 할 수 있을까?”라는 발언을 해 왔다. 요즈음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큐아논 그룹도 결국은 인간의 역사 속 연연히 이어진 유사과학, 맹목적인 믿음의 욕망이 현 미국의 불안한 정세라는 얇은 지각을 뚫고 나온 분출물이 아닐까 한다.
국내에는 이러한 예시가 없을까? 지난해 초 모 교회에서는 소독의 명목으로 분무기로 사람들의 입에 소금물을 뿌려 오히려 코로나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었다. 코로나 백신이 접종자의 DNA를 조작해 종속적인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주장은 논의의 가치도 없다. 특정 개인의 지위와 사리사욕을 위한 거짓 이론의 생성, 근거 없는 소문의 시작, 일부 대중의 맹목적인 믿음과 추종, 지위가 있는 사람들의 동조와 그에 의한 추가 확산이 일어난다.
이 유사과학 확산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의심을 하자. 그 새로운 정보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해 인정된 내용인지. 주위에 전문가가 있다면 물어보자. 그리고 당신이 막 전해 들은 뭔가 솔깃해 보이는 새로운 이론이 위의 네 가지 상황에 해당되지는 않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퍼온 글] / 출처; 서울신문 / 최무림(서울대 의과학과 부교수) / 2021-01-28 17:04
대나무는 사실은 나무가 아니다
최근 '모소대나무' 이야기가 광고에 등장했다. 모소대나무는 4년을 가꾸어도 3㎝밖에 자라지 못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잘 돌보면 5년째에는 어느 날 갑자기 하루에 30㎝ 이상 자라기 시작하여 6주 만에 15m 높이의 울창한 대나무 숲을 이룬다는 것이다. 과연 한순간에 그렇게 자라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나무가 비범한 속도로 자라는 것은 사실이다. 비온 뒤에 죽순이 하루에 1m 이상 자라는 것을 보고 '우후죽순'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다.
사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처럼 부피 생장을 통해 점점 굵어지지 못하고, 죽순 단계에서 정해진 굵기를 그대로 키만 높이 자란다. 다년생 풀인 것이다. 유전적 분류상 잔디, 갈대, 벼, 보리, 밀, 사탕수수, 옥수수와 같이 벼과 작물이다. 이들의 잎이나 줄기가 모두 닮았고 사실 폭발적인 속도도 닮았다.
대나무가 빨리 자라는 데는 몇 가지 비결이 있다. 첫째는 다른 벼과 식물처럼 줄기의 속이 비어 있는 것이다. 속을 채우는데 양분을 쓰지 않으니 빨리 높이 자라서 햇빛을 차지할 수 있다. 둘째는 대나무는 땅속줄기로 연결되어 있어 아기 나무는 땅속줄기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대나무는 각 마디가 동시에 자란다. 각 마디마다 성장점이 있어 동시에 자라니 하루에 1m가 넘게 폭발적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폭발적인 성장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것이 뜬 벼이다. 뜬 벼는 태국 중앙 평원, 메콩 델타, 갠지스 델타 등에서 자라는 벼인데 갑자기 폭우로 물속에 잠기면 벼가 줄기마다 대나무 자라듯 쑥쑥 자란다. 그래서 금방 물 밖으로 줄기를 내미는 것이다. 그리고 대나무 마디마디에서 뿌리가 자랄 수 있듯이 뜬 벼도 물위에 뜬 부분에서 뿌리가 자라 물과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벼과 작물의 폭발적인 성장력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은 풀이 아주 오래전 동물이 등장하기 전부터 지구에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활엽수에서 풀이 진화되어 나온 것은 불과(?) 3,000만년 전 정도로 추정한다. 식물을 먹는 동물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동물이 풀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닌 것이다. 나무는 수명이 길지만 번식과 성장 속도가 느린데 그 중에 일부가 오래 사는 버티기 전략 대신 빨리 자라고 빨리 씨앗을 맺어 빨리 번식하는 전략을 택해 진화한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압도적인 생산력의 해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칼로리)의 절반 이상이 곡식을 통해 얻은 것이고 그 중에 압도적인 것이 옥수수, 쌀, 밀이라는 벼과 작물이다. 사실 풀의 씨앗인 곡식을 주식으로 삼는 포유류는 인간밖에 없다.
그런데 대나무는 우리에게 벼나 옥수수처럼 씨앗은 제공하지 않는다. 씨앗은커녕 꽃이 피는 것조차 보기 힘들다. 대나무는 5년, 15년, 30년, 60년 심지어 120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사라지는 것도 있다. 원래는 다른 풀처럼 1년에 한 번 꽃이 피었다가 사라졌는데 언젠가 유전자가 고장나 빠른 번식의 사이클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100년에 한 번만 번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줄기가 뿌리가 될 수 있는 번식력을 이용해 땅속으로 줄기를 넓게 뻗어나가 빈자리가 있으면 죽순이 돋는 식으로 거대한 집단을 형성한다. 그러다 수명이 다할 때가 되면 같은 해에 동시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기고 사라진다. 한 번 대량으로 개화되어 동시에 씨앗을 대량으로 뿌림으로써 포식자가 있어도 다 먹지 못하고 번식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벼과 식물 중에 대나무는 그 단단하고 썩지 않는 줄기 때문에 과거에는 지금의 플라스틱의 역할을 했을 정도다. 모자, 그릇, 부채, 바구니, 빗, 화살, 상자 등등 대나무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탕수수는 줄기에 가득 간직한 설탕 덕분에 사랑을 받았고, 옥수수가 압도적인 생산량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곡류가 되었다. 그리고 밀과 쌀은 많은 문명에 주식이 되었다. 인류는 이런 곡류 덕분에 농경시대를 열수 있었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 수 있게 되면서 문명이 본격적으로 창조되고 전승될 수 있었다.
[퍼온 글] / 출처; 한국일보 / 최낙언(편한식품정보 대표ㆍ식품공학자) / 2021.01.28 18:39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차현진의 돈과 세상]
에도 시대 일본은 폐쇄 사회였다. 유럽의 식민지가 될까 봐 걱정하는 다이묘(大名)들이 주민들에게 ‘우리 식대로 살자’는 최면을 걸고 동태를 감시했다. 서양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지하로 숨었다. 다이묘의 통치 자금은 소수 금융 재벌들한테서 나왔다. 보호와 특혜의 대가였다.
외부와 단절된, 지독한 정경 유착의 구조를 메이지 유신이 깼다. 메이지 정부는 과점 금융 재벌들을 해체하고 서양 은행 제도를 수입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금융업자를 료가에(兩替), 즉 맞교환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환전 업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중국에서는 금융기관을 첸좡(錢莊), 즉 돈이 쌓여있는 곳이라 불렀다. 여・수신 업무에 초점을 맞췄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환전이나 여・수신이 금융업의 전부였다.
일본 우키요에 화가 호쿠사이(葛飾北斎)의 그림 '에도 스루가 초의 미츠이 상점(江戸駿河町三井見世略圖)'. /영국박물관
그런데 서양의 ‘bank’는 좀 달랐다. 동업자들이 매일 아침 모여서 어음과 수표를 교환한 뒤 차액을 정산했다. 지급 결제 업무였다. 그러니까 동양의 금융업은 개인 플레이지만, 서양에서는 팀플레이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bank’를 은행, 즉 ‘은화 업자 일행’이라고 번역했다(당시 일본은 은 본위 제도였다). 무역업자 일행을 양행(洋行)이라 부른 것처럼 일종의 집합명사다.
지급 결제 업무에 초점을 맞춘 ‘은행’이라는 말은 요즘 주목받는 핀테크나 간편 결제가 사업의 본질임을 알린다. 팀플레이와 협업은 은행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팀플레이와 협업은 은행에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에도 중요하다. 40년 전 일본 소니사는 베타맥스라는 특허 기술로 세계 VTR 시장을 독식하려다가 스스로 고립되어 결국 사업을 접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우리 정부가 그 교훈을 모른다. 지급 결제에 관한 모든 것은 금융위원회가 혼자 감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팀플레이와 협업이 핵심인 지급 결제에서조차 독불장군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 식대로 살자’던 에도 시대의 다이묘와 고립주의가 떠오른다.
[퍼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차현진(한국은행 연구조정역) / 2021.01.28 03:00
총과 주판의 대결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항우(項羽)를 꺾고 천하 권력을 손에 쥔 유방(劉邦)이 인물평을 했다. 그의 최고 참모였던 장량(張良)을 평가하는 데 이르러선 “장수의 막사에 앉아 전략을 만들어 천리 밖 싸움터의 승부를 가르는 대목에서는 내가 그만 못하다”고 언급한다.
약 2200년 전 유방이 말한 ‘전략 구성’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기록에 ‘운주(運籌)’라는 단어로 등장한다. 셈을 할 때 흔히 사용했던 나뭇가지를 주(籌), 그를 움직이는 행위는 운(運)이라고 표현했다. 싸움에 필요한 전략과 전술의 구성 및 운용을 일컫는다.
왕조시대 최고위 정책을 다뤘던 조정(朝廷)에서 벌이는 그런 행위는 보통 묘산(廟算)이라고 적었다. 국가 운영의 꼭짓점에 있는 왕이나 신하들이 조정의 한복판인 묘당(廟堂)에서 벌이는 계산 행위, 즉 전략과 전술의 구성이다.
흔히는 타산(打算)으로 적는다. 따지고 재는 행위다. 속으로 줄곧 셈을 하면 암산(暗算), 정밀하게 따지고 또 따지면 정산(精算)이다. 기가 막힐 정도의 셈이면 묘산(妙算)이고, 잘못 헤아리면 오산(誤算)이다.
이리저리 재고 따져보는 셈의 전통은 앞서도 얘기했듯 중국이 참 유장하다. 셈 가지 이리저리 얽는 주산(籌算)의 습성은 결국 주판(籌板・珠板)의 발명에도 이르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에서 남을 이기기 위한 병법(兵法)의 화려한 전통으로 이어졌다.
직접적인 충돌보다는 포석(布石)과 형세(形勢) 등 눈에 바로 드러나지 않는 조건을 활용하는 복잡한 싸움법의 게임인 바둑이 중국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라는 점을 떠올려도 좋다. 그런 전통의 중국은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싸움법에 능하다.
정권 교체가 이뤄졌으나 미국의 대중(對中) 정책은 강경함을 유지할 전망이다. 서부 건맨(gunman)식 우직한 미국의 싸움법과 집요한 셈이 전통인 중국의 전법이 또 충돌할 기미다. 세기의 싸움이자 갈등이다.
[퍼온 글] / 출처; 조선일보 / 유광종(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2021.01.29. 03:00
명품 쌀 구독시대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 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고 박완서 작가의 딸 호원숙 작가의 신간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중에서)
▷호 작가가 지은 밥을 상상해 본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밥알이 탱탱한 쌀밥 아니었을까. 흰 눈이 장독대 위에 내려앉듯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긴 새하얀 쌀밥…. 쌀은 한민족의 집념이다. 카레이스키들은 본래 아열대 기후에서 가능한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중앙아시아의 동토까지 확장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쌀 경작지(5000년 전 신석기시대)가 2012년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되기도 했으니 우리의 ‘밥심’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밥에 고깃국’은 최고의 호사였다. 조선시대에 쌀이 귀해 왕족이나 이씨 양반들만 먹는다 해서 쌀밥을 이밥으로 불렀다. 하지만 살 만해지면서 쌀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탄수화물이 비만의 원흉으로 몰려서다. 통계청이 어제 발표한 지난해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역대 최저인 57.7kg으로 40년 전 소비량(132.4kg)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1950년대 550cc이던 밥공기 크기도 요즘엔 300cc 정도로 줄었다.
▷잘나가다 수난을 겪던 쌀에 반전이 일어났다. 국산 ‘명품 쌀’ 덕분이다. 쌀 소비는 줄었지만 고급 쌀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집밥을 자주 먹다 보니 ‘밥맛’이 중요해졌다. 이젠 양 대신 질이다. 국내 한 백화점은 VIP 고객을 대상으로 명품 쌀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쌀 품종과 도정 방법을 고르면 월 2회 정기 배송해준다. 아홉 종류의 쌀을 소량씩 담는 ‘쌀 샘플러 세트’도 나왔다. 꽃 구독은 있어도 쌀 구독 서비스는 처음이다. 정기적인 구독은 일회성 배달보다 브랜드 충성심을 요구한다.
▷명품 쌀에는 명품 전략을 쓸 수 있다. 쌀은 와인처럼 테루아르(재배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지니 ‘맛있는 쌀’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를 열 수 있겠다.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을 라벨에 넣는 프랑스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처럼 예술과의 콜라보는 어떨까. ‘쌀쌀쌀’ 하는 흥겨운 K팝도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눈 덮인 고택에서 뜨뜻한 쌀밥 먹기는 해외여행을 대체할 코로나 힐링 여행상품이 될 것이다. 돌밥(돌아서면 밥 짓기)하느라 힘겹지만 집밥에는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이 있다. 이런저런 명품 쌀을 구독하는 재미에 돌밥 스트레스가 날아갔으면 좋겠다.
[퍼온 글] / 출처; 동아일보 / 김선미(동아일보 논설위원 / 2021-01-29 03:19
에드워드 번 존스(Sir Edward Coley Burne-Jones, 1st Baronet, Edward Burne-Jones, 1833∼1898, 영국의 화가・디자이너), '피그말리온, 이미지 IV - 영혼을 얻다', 1875~1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