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정말 엄청나게 많네요.
전편 마지막 사진에 설명이 있었습니다.
마립간을 모시다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 묻힌 이는 금허리띠와 화려한 큰칼을 차고 있었는데,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쓰고 있었음.
몸에는 금과 옥으로 만든 여러 장신구를 둘렀고, 머리맡에는 진기한 보물들이 놓여 있었다.
비단벌레로 장식한 금동제허리띠, 금동제팔뚝가리개 등은
널(관) 뚜껑 위에 올려놓았고, 널 바깥 안쪽 석단에서는
젊은 여자의 치아와 두개골 일부가 나왔는데
저승에서 마립간의 시중을 들 소녀를 함께 묻은 것으로 추정.
150여 년 전의 사람뼈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울 뿐입니다.
금제 신발
가운데 정 중앙에 있는 것은 팔뚝가리개.
우측 아래는 신발
장식칼
말띠드리개
금제와 금동제 그릇들과 칼, 목걸이 등등.
금관을 쓴 마립간의 부인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는 마립간의 부인, 왕비가 묻혀있었다.
왕비는 금관을 쓰고 있었는데,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 금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왕과 마찬가지로 왕비를 위해서도 이승 이후의 삶을 꾸려 나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황금으로 된 장신구,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먼 나라에서 온 유리그릇 등 귀한 물품을 넣었다.
마립간이 묻힌 남쪽 무덤에는 딸린 덧널이 있지만
왕비를 위해서는 으뜸 덧널안 왕비의머리쪽에 껴묻거리를 두었다.
신라 왕릉, 황남대총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뜻의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길게 맞붙어 있는 무덤.
남북 길이가 120m이며, 동서 길이는 80m이다.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북쪽 무덤을 나중에 덧붙여 만들었다.
남쪽 무덤에는 남자, 북쪽 무덤에는 여자가 묻혀 있었다.
무덤의 크기는 주변 무덤들을 압도할 정도로 크고,
껴묻거리(부장품)는 모든 면에서 최상금이며,
묻힌 이는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신라의 최고 통치자였던 마립간과 부인의 능이 분명해 보인다.
금관을 비롯한 수 만 점의 껴묻거리는 5세기 대 발전하는 신라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마립간(왕)이 묻힌 남쪽 무덤에서 금동관이 나오고,
부인이 묻힌 북쪽 무덤에는 금관이 나왔다.
뿔잔
뿔잔은 소나 양등의 뿔을 이용하여 만든 잔으로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즐겨 썼다고 한다.
그리스어로는 리톤이라고 하며, 그리스, 로마,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널리 쓰였다.
우리나라에는 뿔잔은 삼국시대부터로 보인다.
황금보검의 주인은 누구인가
계림로 14호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두 명의 남성이 묻혀 있었다.
신라의 대외 교류를 보여주는 보물인 황금보검의 주인은
왼쪽 사람으로 혹시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있었다.
먼 서쪽 나라에서 제작되어 들어온 이 귀한 보검의 주인은
신분이 매우 높은 신라인으로 추정.
유리그릇
고대 사회에서 유리는 황금에 버금가는 귀중한 재료였다.
유리그릇은 최상의 교역품이었고,
신라로 전해진 대부분의 유리그릇은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마 유리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유리그릇은 지금까지 25개가 확인 되었는데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과 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에서도
모두 유리그릇이 부장되어 최상의 위세품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7개, 북쪽 무덤에서 4개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다.
주검과 널이 썩어버린 바닥에는 금 귀걸이 두 쌍이 있었다.
귀에 달았던 것처럼 놓였고
귀걸이 사이에서 치아들이 각각 발견, 두 사람을 나란히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위)금관, 아래) 금 허리띠와 꾸미개
경주 천마총 금관과 허리띠
위 모든 유물은 귀걸이입니다.
위 귀걸이의 명칭은 아래 사진에 번호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 귀걸이의 출토무덤에 대해 설명이 있습니다.
귀걸이
신라의 귀걸이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해 신라 사람들의 미적 감각과 수준 높은 금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귀볼에 다는 고리의 굵기에 따라 굵은 고리와 가는 고리로 나뉜다.
5세기에서 5세기로 갈수록 화려하고 복잡한 디자인으로 바뀌며, 아주 작은 금 알갱이들을
촘촘히 붙여 장식하는 누금 기술로 만든 것과 여러 색깔의 옥을 박아 놓은 것들도 있다.
우와~! 온통 황금천지네요.
금팔찌, 금귀걸이와 장식물들...
금관에 드리개를 달다
드리개는 귀걸이와 유사한 형태이나 발굴 정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금관테의 아래쪽 좌우에 매달아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했다.
드리개는 중심고리 아래에 샛장식과 그림이 드리워진 형태이디.
금팔찌와 금반지를 끼다
팔찌는 귀걸이와 함께 인류가 사용한 장신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신라의 팔찌는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가
5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새김눈(각목)을 장식한 것이 유행이 되고,
6세기에는 둥근 돌기를 만들거나 돌기에 유리를 끼워 장식했다.
반지는 한 점에서 여러 점까지 출토되며, 때로는 무덤 주인의 열 손가락에 모두 끼운 예도 있다.
반지는 금판이나 은판을 둥글게 말아 간단하게 만든 것도 있고 유리구슬을 끼워 장식한 것도 있다.
금관의 출처가 써 있습니다.
교동,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금관총, 천마총 등
금관이 나온 신라의 능묘
신라 금관은 지금까지 모두 6점이 발굴 또는 발견되었다.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처음 출토된 후,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1973년 천마총, 1974년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잇달아 발굴 되었다.
1972년에는 경주 교동의 한 무덤에서 문화재를 노린 도굴꾼에 의해
초기 형태의 작은 금관이 발견되기도 했다.
신라의 금관
신라의 금관은 통치자인 마립간과 그 일족의 상징이다.
금관은 마립간(왕)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마립간은 모두 여섯 명뿐인데, 지금까지 금관이 나온 무덤들과 비슷한
돌무지덧널무덤들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 상당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마총, 절정을 이어가다
1970년대에 들어와 나라에서는 대릉원을 조성하여
역사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신라 무덤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그 첫 대상은 황남동 155호 무덤으로
1973년 4월 역사적인 발굴을 시작, 봉분의 규모는 밑지름이 47m 높이가 13m였다.
봉분 위부분을 7m가량 걷어내자 지금 23m, 높이 6m의 돌무지가 나타났다.
그 아래 나무 덧널이 있고, 그 안에 널과 껴묻거리 상자(부장궤)가 놓여 있었다.
무덤의 주인은
금관, 금귀걸이, 옥으로 만든 가슴걸이, 금제 허리띠, 장식큰칼 등을 착용하고
묻혀 있었다.
껴묻거리 상자 안에서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두 장의 말다래(장니)가 들어 있었다.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렸던 말다래에는
하늘을 날아 올라가는 듯한 흰말(천마)이 그려져 있었다.
'천마총'은 1500년 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이 천마도 발굴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이다.
가슴걸이
금동 말안장꾸미개
봉황장식큰칼과 세고리장식큰칼
관꾸미개
관모
신라의 번영
503년 지증 마립간은
나라의 이름을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을 아우른다'는 뜻의 신라로정하고
신라 최고 통치자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법흥왕은 520년 율령(헌법과 행정 법규)을 반포하고 17관등제와 관리들의 공복을 정해
귀족들을 체계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밑바탕을 마련했다.
법흥왕이 다진 중앙 집권의 토대를 바탕으로 진흥왕은 영토를 사방으로 넓혀갔다.
이후 무열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해 정치 제도와 복식(옷과 장신구)을 받아들이고,
군사 지원을 이끌어내 통일 전쟁을 꾀했다.
그리하여 신라는 660년 백제,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명망시키고, 676년에는 당나라를 물리쳐 한반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이룩했다.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 제도와 지방 조직을 개편했으며
넓어진 영통에 걸맞은 군사 제도를 갖추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을 포용하고 그 문화도 받아들여
이름답고 조화로운 통일신라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첫댓글 전편 '국립경주박물관-2'는 설명을 다 옮겼고
이 '국립경주박물관-3'은 이제부터 옮길 생각입니다.
물론 오늘 다 옮길 수 없겠지요.
다 끝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