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생활의 4가지 영역 교회생활은 다음의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즉 Leiturgia(예배), Martyria(전도), Koinonia(친교), Diakonia(봉사)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영역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고 순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예배에 참여한 회중은 세상으로 나가 전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 안팎에서 친교(성도의 교제)에 참여하고,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서 섬김과 나눔의 봉사 정신을 실천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예배의 자리로 찾아와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계속한다.
이는 마치 야구의 다이아몬드 구도와 같다. 예배를 홈으로 하여 전도, 친교, 봉사가 각각 한 베이스씩을 차지하는 순환적으로 연계된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구도 속에서 교회의 힘은 예배에서 나온다. 예배는 그야말로 교회생활의 홈(Home)이다. 교회생활은 예배에서 시작하여 예배에서 마쳐야 정상이다. 교회생활에 있어서 예배보다 상위 개념은 없다. 전도가 아무리 중요해도 예배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친교나 봉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힘이 있는 교회는 전도, 친교, 봉사가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 교회 예배는 더욱 넘치게 된다.
2. 예배 중심의 목회 목회가 무엇인가? 목회란 목양, 즉 양을 기르고 돌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목양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복음 10장 10-11절의 말씀처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목회자는 선한 목자가 되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는 이와 정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즉 양(교인)들이 목자(목회자)를 위하여 희생하고 목숨을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목회자의 희생으로 교인들이 영육 간에 풍성한 삶을 영위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교인들의 희생으로 목회자가 대외적으로 영광을 받고 풍성한 명예를 누리는 역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목회를 ‘일’이나 ‘사업’으로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세상의 일이나 사업과 구분하기 위하여 앞에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일’이니 ‘선교 사업’이니 하지만 결국 일이요 사업이라는 생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가운데서 세상의 기업논리에서 나온 개념들이 목회라는 용어에 따라붙게 되었다. 목회 행정, 목회 경영, 목회 수단, 목회 요령, 목회 자료 같은 말들이 한국교회에는 너무나 무성하다. 나아가서 목회는 목(장소)이 좋아야 한다느니, 장로들을 꽉 잡아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도 들린다.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서는 자기 심복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 목회는 사업화되어간다. 목회 윤리도 보통의 기업 윤리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커져야 하고, 많아져야 하고, 1등이 되어야 하고 일류가 되어야 한다. 목회의 세계란 이미 피나는 경쟁 사회가 되어 버렸다. 약육강식의 세계요, 거룩의 가면을 쓴 이윤 추구의 세계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목회의 모습은 아닌 줄 알면서도 어느덧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모든 현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개혁의 정신도 잃어버린 채 한국교회는 방향 감각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우리는 목회에 대한 생각을 조금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목회의 군더더기를 다 빼면 무엇이 남는가? 목회의 가장 핵심에는 예배가 있다. 바로 예배를 위해서 목사도 필요하고 교인도 필요한 것이다. 구약의 창조 사건도 출애굽 사건도 모두 예배가 목적이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 사건도 예배관계의 회복에 그 목적이 있었다. 예배가 목회의 중심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고 인간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큰 교회나 작은 교회를 구분하지 않게 된다. 숫자를 가지고 교회를 비교하고 목회를 평가하는 못된 버릇을 고칠 수가 있다. 어떤 교회 공동체도 아름다운 예배의 참 정신을 회복하여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행복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면 숫자의 많고 적음이나 재정의 크고 적음을 떠나서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3. 응답으로서의 예배
그렇다면 이제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한다. 예배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복음과 응답은 어떻게 다른가? 복음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요소이고, 응답은 아래로부터 위로의 요소이다. 복음의 캐릭터는 유일성과 불변성이지만, 응답의 캐릭터는 다양성과 가변성이다.
복음의 유일성에 대하여 성경은 예수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언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전한 복음과 우리의 복음이 다를 수 없으며, 사도 바울의 복음과 루터나 칼뱅의 복음이 우리와 다른 것일 수도 없다. 복음의 불변성에 대하여 바울은 변질된 복음이나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이제 응답의 캐릭터인 다양성과 가변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예배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의 형식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나라와 민족이 고유한 예배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마땅하고 정당한 일이다. 예수 시대의 회당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는 달라야 정상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예배와 우리의 예배는 같아서도 안 되고 같을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유일한 복음이 아니라 다양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어떠한가? 예배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예배의식 중에 우리의 것이란 거의 없고, 모든 것이 미국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4세기에 모든 예배가 로마식으로 통일되었던 강자의 논리가 되살아난 것이다. 4세기부터 로마교회가 주도하여 시작된 예전 통일운동은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예배의 모습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후 중세시대의 예배는 어느 지역의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모두 라틴어로 거행되고 라틴어 찬송이 불리게 되었다. 이는 예배를 응답으로 보지 않고 복음화시켜 유일성과 불변성을 강요한 결과이다.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배의 개혁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 가톨릭에 의하여 교조적으로 단일화된 예배를 타파하고, 응답이라는 원 위치를 찾아준 것이다. 예배는 다시 본래의 캐릭터인 다양성과 가변성을 회복하게 되었고, 각 나라와 민족이 자기의 언어로 예배드리고, 고유의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4. 한국교회 예배에 만연된 미국교회의 응답 예배를 응답이라고 정의했을 때, 그 다음의 질문은 “누구의 응답인가?”하는 문제이다. 예배는 ‘내’가 드리는 것이다. 즉 ‘나’의 응답으로서의 예배가 모아져 ‘우리’의 응답으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복음에 대한 ‘나’의 응답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신앙고백은 남이 해주는 것을 듣거나 구경해서는 안 된다. 나의 신앙고백으로서의 응답적인 예배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는 우리의 응답이 아닌 미국교회의 응답을 모방하고 있는 상태이다. 한국교회 예배는 미국교회 예배의 이론 위에 서 있다. 설교 스타일이나 주제가 미국식이다. 설교 예화의 내용이 거의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것이다. 가령 정직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정직한 사람의 예는 미국인을 들어 이야기한다. 한국의 130년 교회 역사에 정직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가? 미국에서 이야기식 설교를 해야 한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미국에서 강해설교가 좋다고 하니 여기서도 그게 좋겠다고 따라하는 목사들이 많아졌다. 목회스타일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어느 교회가 구도자예배라는 메뉴를 개발하니 그것을 가져와서 그대로 하는 교회가 늘어났다. 미국교회가 소위 셀(cell)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하니까 그것이 좋다고 한국교회에 적용하다가 교회가 분열된 경우도 생겨났다. 셀이란 본래 한국의 구역 제도를 미국교회가 배워가서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만든 것인데, 이를 다시 수입하여 본래의 구역 제도를 추방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위한 가운도 미국식이다. 본래 개신교 가운은 가톨릭과는 달리 인간의 모습과 신분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유럽의 개신교 가운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저 검정색에 목 부분의 흰 리본이 전부이다. 그러나 한국의 가운은 어떤가? 신분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점점 화려해지고, 여러 장식과 화려한 색깔이 가미되고 있다. 이는 미국식 가운의 영향이다. 심지어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것을 본 한국 목사들이 너도나도 박사학위 가운을 입고 설교하던 촌스러운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미국 목사들이 가운을 벗어던지고 T셔츠바람으로 강단에 서니까 이것을 따라하는 목사들도 생겨났다. 한국의 예수상은 미국식이다. 한국교회의 예수상은 서양남자라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부르는 찬송가나 복음성가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건너온 것 아니면 그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미국 예배문화에 안주하여 왔고 우리의 것을 상실한 채 살아왔다. 마치 미국 교회문화가 오리지널 기독교문화라고 생각되는 오늘의 현실은 개탄스럽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예배를 하자는 것인가? 분명히 예배는 한국에서 한국인 목사가 집례하며 한국인 교인들이 드리는 예배인데, 그 내용은 온통 미국문화 일색이다. 예배 엘리트들은 이런 현상을 오히려 정당화시키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굴만 한국인이지 정신은 미국 문화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우리 신앙고백으로서의 예배 이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4세기의 예전 운동 중 강자의 힘에 의하여 역사 속에 묻혀 버린, 각 지역적 특성을 고수하고자 했던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백인) 문화화되어 있는 우리의 예배 현실을 비판하고 우리 식의 예배 모습을 응답적인 차원에서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오늘날까지 남의 응답을 나의 응답으로 착각하고 살아왔으며, 나의 응답에 대하여 오히려 이질감을 느끼며 ‘틀린 것’으로 간주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이제는 미국화 된 한국교회의 응답 문화에 대하여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서의 예배를 통하여, 한국교회의 응답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고백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인이고 우리의 교회는 한국 회중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며, 한국의 전통과 문화는 미국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본래 서양에서 탄생한 종교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하며, 그것은 팔레스타인 문화권에서 출발하여 전파되는 곳곳마다 여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란 유럽과 미국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동화된 서양 기독교 문화이지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의 본래적인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아니다.
그 하나의 예로 우리가 볼 수 있고 상상하는 갈색의 긴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지고 지긋하게 나이를 잡수신 분 같은 예수의 그림은, 팔레스타인 출신 예수의 본래의 모습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유럽 사람들의 자기 식대로의 상상화에 지나지 않다. 예수는 아시아 사람이지 유럽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를 백인들이 자기들 식대로 그렸다고 해서 예수의 본질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 그림이란 유럽인들, 즉 백인들이 자기 식대로 표현한 문화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식으로 갓 쓰고 한복 입은 예수 상을 그리거나, 전통 음악으로 찬양한다고 해서 복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우리 식의 응답일 뿐이다. 서양식의 응답은 정당하고, 우리 식의 응답은 부당하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5. 예배와 음악에서의 우리 것 찾기 응답은 인간이 처한 각각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예배와 음악은 지금까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여러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오늘날도 여러 형태가 존재한다.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떤 음악이 우리의 목회 현장과 예배를 위해 쓰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과 문화와 언어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말하고 노래하고 살고 예배드린다. 우리에게는 우리말이 가장 쉽고 자연스럽듯이, 우리 음악이 또한 가장 친근하고 편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음악과 전통을 바탕으로 한 예배음악이 강조되고 살아나서 보편화되어야 한다. 교회와 이 사회를 비교해 볼 때 교회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전통 문화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오아시스 속의 사막처럼 고립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최근 들어 기독교인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민족의 정서와 유리된 채 미국 문화만을 감싸고도는 기독교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종교란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더구나 교회는 사회 안에서 언제나 제 몫을 담당해야 생존할 수 있다. 교회는 이제라도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나 민족 전통 문화를 교회의 문화로 수용함으로써 사회로부터의 문화적 고립을 면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예배가 정착되고, 우리의 찬송이 불리는 날을 기대해본다.
문성모 | 교수는 독일 뮌스터대학(Westfälische Wilhelms-Universität Münster)에서 예배학을, 오스나브뤼크대학(Universität Osnabrück)에서 음악학을 연구(Dr. Phil.)했다. 대전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장신대학교 특임교수로서 예배학과 음악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