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오리밀쌈이라는
차별화된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인
너른마당
[피플&포커스] 광개토대왕비 세워진 너른마당… “천년 갈 문화 만들고 싶다”
천지일보 기사 입력 : 2022.03.09. 07:00
기자명 조혜리 기자 mooksung@newscj.com
인터뷰|임순형 너른마당 대표
고양시 ‘너른마당’서 광개토대왕비 17년째 추모제 열어
대왕 ‘불굴의 기개와 웅혼한 기상’ 후손에게 물려줘야
‘고구려 제법’ 몰라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올려
추모제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 보고 눈물 많이 흘려
[천지일보=조혜리 기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통오리밀쌈으로 유명한 문화 명소 ‘너른마당’ 식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실물 크기(6m)로 복제돼 들어서 있다. 매년 음력 9월 29일이면 거대한 비석 앞에서 합동 추모제가 열린다.
너른마당 뜰 앞 서문에는 ‘우리는 위대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후예임을 잊은 채, 늘 약소민족인 양 스스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기개와 웅혼한 기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주고자 5년여의 노력 끝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됐다. 우리 민족의 끓는 피는 반도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본지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를 세우고 17년째 추모하고 있는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를 인터뷰했다. 임 대표는 30년 전 어머니와 함께 너른마당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꿩 요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통오리밀쌈이라는 차별화된 메뉴를 앞세워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아름다운 한옥으로 지어진 너른마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웅혼한 기상으로 우뚝 서 있어 고양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문화 명소로 알려졌다. 일반식당과는 다른 특별함을 간직한 식당을 차린 임 대표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임 대표는 “정직하게 일했고 그 땀과 노력이 지금의 너른마당을 만들었다”며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느낀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긍심으로 대왕비를 모시게 됐고 그 덕분에 너른마당이 전국의 문화 명소가 됐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임 대표와의 일문일답.
◆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아주 조그마한 사진으로 봤다. 1990년 말쯤인가 고구려 국내성에 여행을 갔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었는 지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위대한 선조들의 기운을 받아야 했기에 현지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담아 광개토대왕의 혼을 한국으로 실어서 가자는 마음이 솟구쳤다. 오로지 드넓은 고구려의 기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올 준비를 했다.
◆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광개토대왕비를 모셔오는 데 약 5년이 걸렸다. 광개토대왕비가 모셔져 있는 지방현은 북경 공항에서 차를 타고 1600㎞, 약 23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광개토대왕비를 가져온다는 소식을 들은 국내 한 석공이 자신에서 맡겨 달라고 했다.
석공에게 국내서도 잘 만들 수 있지만, 고구려의 현지 기상과 정신을 모셔 와야 했기에 현지의 돌과 솜씨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렇게 만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할 때 사진을 보여주고 수치를 재어 사진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현지에서 비석이 완성됐다고 해 가서 보니 이들은 비석이라고 생각하고 납작하고 넓적하게 만들어 놨다. 두께도 얇게 만든 것이다. 현지 석공에게 화가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보고 오라고 했다. 현지 석공들도 광개토대왕비 웅장함에 놀랐다. 하지만 크기와 모양, 글자 등을 실물처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완성 직전에 비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비로소 거대한 4면 돌기둥 비석이 제작됐다.
높이 6.3m, 둘레 6.6m, 무게 47t으로 실물 크기와 비슷하고 한자도 원형과 같은 1775자가 새겨진 비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언제부터 추모제를 지냈나?
비석을 세워놓으니 학생들이나 공무원 임용되신 분들이 와서 비석의 기상을 보고 갔다. 광개토대왕은 영웅임에도 영웅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다스리던 땅이 남한과 북한, 조선족으로 흩어져 있고 북만주땅 요동벌을 다 내어줬다. 또 고조선의 단군 역사와 고구려 역사가 중국 변방국의 일부 역사로 왜곡이 되고 있으니 광개토대왕의 넋이 헤매고 다닐 것 같아 넋을 달래드리기 위해 추모제를 시작했다. 고구려 제법을 몰라서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추모제를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많았다.
◆ 돈은 얼마나 들었고,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돈이 얼마 들었는지, 이런 것을 묻는 것은 불경죄다. 우리 가족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낳아서 지금껏 키워주셨으니 약 10억짜리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 않나? 이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얼마 걸렸다. 이 정도만 이야기한다. 그들이 우리의 문화를 도굴하면서 돌아가신 유골을 돌아보았겠는가. 그 유골들이 이곳에 다 떨어져 어딘가로 흩어졌겠지. 인생이 꼭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훌륭하신 분들은 영원히 살아 신선같이 돼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면 좋겠다.
◆ 너른마당을 어머니와 함께 어떻게 시작했나?
어머니는 배우지 않았지만 지혜롭고 예절을 중시했다.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았다. 동네 두레가 있는 날 우리 집 순서가 되면 형님 이름이 순철인데 ‘순철네 두레가 있는 날은 잘 먹는 날’이라고 동네 분들이 좋아했다. 아버지는 음식 드실 때 까다로웠다. 꼭 소스가 있어야 했다. 고추장도 그냥 고추장이 아닌 초를 쳐야 했고 간장도 그냥 간장이 아닌 초라도 쳐야 했다.
◆ 너른마당에 오니 소중한 우리 문화를 보는 것 같다
이 터전은 앞으로 천년을 가게 하려고 만든 터전이다. 몸에 좋은 음식도 있고, 광개토대왕비도 있고 추모제도 하고 있다. 연못은 신라의 안압지를 모태로 꾸미고 있다. 안압지를 만들 때는 백제사람들이 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삼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이 돕고 주위에서 도와줘야 한다. 서로 조화와 상생으로 만들어지는 터전이 바로 너른마당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부모님들께서 해 오신 방법대로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신(修身)하고 있다. 맘 편히 배고프지 않고 조상 잘 모시고 살면, 천년이 아니라 만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수신(修身)이다. 이것이 바로 효의 마음 아닐까.
높이 6.3m, 둘레 6.6m, 무게 47t으로
실물 크기와 비슷하고
한자도 원형과 같은 1775자가 새겨진
너른마당의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에 관한
안내문
임순형 대표가 경영하고 있는
너른마당
매년 음력 9월 29일이면
광개토대왕 추모제를 지내는
너른마당
너른마당 주차장 표지
신라의 안압지를 모태로 꾸미고 있는
너른마당의 연못
너른마당의 연못
너른마당의 장독들
너른마당에서 키우고 있는 말
너른마당의 연못
너른마당의
코끼리 조형물
너른마당의
코끼리 조형물
너른마당의
손가락 조형물
너른마당의
황소 조형물
너른마당의 연못
너른마당의
해태상
너른마당
2024년05월12일(일요일)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원당 종마목장&너른마당&농협대학교] 탐방기 탐방지 :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원당 종마목장&너른마당&농협대학교] [고양 서삼릉(高陽 西三陵) 요약 : 조선시대 왕가의 무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일 : 1970년 5월 26일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⑴ 효릉:중종의 아들 인종(仁宗)과 그 비(妃)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능이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欄干)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兩隅石)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리었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減殺)하여 산릉(山陵)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宣祖)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石物)을 다시 고쳐 넣었다. 인종(仁宗) 요약 : 조선 제12대 왕(재위 1544~1545). 기묘사화로 폐지되었던 현량과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 등을 원통함을 풀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병약하여 포부를 펴지 못한 채 31세에 사망하였다. 출생-사망 : 1515 ~ 1545 재위기간 : 1544년 ~ 1545년 가족관계 : 왕비 인성왕후(仁聖王后), 아버지 중종(中宗), 어머니 장경왕후(章敬王后), 자 천윤(天胤). 휘 호(峼). 시호 영정(榮靖). 중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인데 인종을 낳고 산후증으로 7일 만에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으나, 문정왕후의 성격과 기질이 고약하여 인종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목숨이 위태로운 시달림을 받았다고 전한다. 인종 비(妃)는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에 책봉되고 1544년 30세에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의 거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하였고 개혁 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중종의 계비이자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의 권력욕에 시달렸으며 또한 인종 자신도 병약하여 포부를 펴지 못한 채 재위 9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짧다. 인종이 사망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를 두고 야사에 의하면 인종이 문정왕후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능은 고양 서삼릉(高陽 西三陵) 경내에 위치하며, 생전 그의 지극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를 효릉(孝陵)이라고 지었다. 인성왕후(仁聖王后) 이칭별칭 : 시호 효순공의인성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 인성왕후(仁聖王后)는 조선시대, 제12대 왕 인종의 비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이다. 소생은 없다. 11세에 세자빈이 되고 31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인종이 승하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64세까지 살았다. 능호는 효릉(孝陵)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이다. 주요활동 1514년(중종 9)에 출생하였고 1524년에 11세의 나이로 10세의 인종과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세자빈으로 20년간 생활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인성왕후 뿐만 아니라 다른 후궁들에게서도 후사가 없어 인종이 동생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일부러 후사를 두지 않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1544년에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승하하자 곧바로 왕대비의 위치로 올라갔다. 명종은 즉위하면서 형수인 인성왕후에게 공의(恭懿)라는 존호를 올렸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주로 공의전(恭懿殿)으로 불렸다. 32년간이나 왕대비의 위치에 있었으나 대비권을 행사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명종이 즉위할 때에는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까지 하는 상황이었고, 선조가 즉위할 때는 명종비 인순왕후가 대표 대비로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친정어머니 문소부부인 김씨가 죽었을 때 조문을 하는 과정에서 조정은 성종이 예종과 안순왕후에게 하였던 것과 같이 황고(皇考)의 예로서 해야 한다고 논의하였으나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는 못하였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가 죽은 후에야 선조에게 육선(肉膳)을 권하는 등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577년(선조 10) 11월 28일, 죽기 하루 전 자신이 죽은 후에 상례를 간략히 하고 의원과 의녀를 추문하지 말라는 유언을 내리고 다음 날 향년 64세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당시 인종과 함께 후덕하고 온순한 성격을 가진 왕비라는 평가를 받았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효순공의인성왕후(孝順恭懿仁聖王后)이고, 능호는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⑵ 희릉: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獻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요약 :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 세자(후의 仁宗)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생-사망 : 1491 ~ 1515 본관 : 파평 별칭 : 휘호 숙신명혜 성 윤(尹). 본관 파평(坡平). 시호 장경(章敬). 1491년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출생하여 중종과 혼인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 궁에 들어왔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1506년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중종실록에는 1507년(중종 2) 6월 17일 종4품 숙원에서 중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15년 세자(世子:仁宗)를 낳은 후 산후병(産後病)으로 25세에 사망했다. 휘호는 숙신명혜(淑愼明惠)이며, 후에 선소의숙(宣昭懿淑)으로 가상(加上)되었다. 능은 고양(高陽)에 있는 희릉(禧陵)이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인종 외 효혜공주가 있다. ⑶ 예릉:국말(國末)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철종(哲宗) 요약 : 조선왕조 제 25대 왕(재위 1849~1863).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다. 출생-사망 : 1831 ~ 1863 재위기간 : 1849년 ~ 1863년 본명 : 휘(諱) 변(昪). 초명 원범(元範) 별칭 : 자 도승(道升), 대용재(大勇齋) 휘(諱) 변(昪). 초명 원범(元範). 자 도승(道升). 호 대용재(大勇齋).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광(철종 폰트 이미지 1)의 셋째 아들로, 조부는 장조(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이다. 비(妃)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이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妃)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德完君)에 책봉되었으며, 1849년 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1851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를 삼았다. 문근은 국구(國舅)로서 정권을 장악,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1852년부터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정치에 어둡고, 김씨 일파의 전횡(專橫)으로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정세에서 최제우(崔濟愚)가 주창한 동학사상은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失勢)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병사하였다. 능(陵)은 예릉(睿陵:高陽)이다. 철인왕후(哲仁王后) 요약 : 조선 제 25대 왕 철종(哲綜)의 비(妃). 출생-사망 : 1837 ~ 1878 본관 : 안동 별칭 : 휘호 경헌, 전호 효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성은 김(金)씨이다. 존호는 명순휘성정원수령(明純徽聖正元粹寧),휘호 경헌(敬獻), 전호(殿號)는 효휘(孝徽)이다. 영돈녕부사(永敦寧府事)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태어났다. 1851년(철종 2)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858년 원자가 되는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이며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은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에 의해 왕이 되었기에 당시 안동 김씨의 위세에 눌려 대항할 힘이 없었다. 철인왕후 또한 순원왕후의 천거로 왕비가 된 이후 안동 김씨 친정을 위한 주청을 계속하다가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게 되었고 이후 철종은 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 철인왕후는 철종 승하 15년 후인 1878년 자손 없이 42세로 사망하였다. 능은 서삼릉 능역의 예릉(睿陵:高陽)에 철종과 함께 묻혀있다. 의령원(懿寧園) :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손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 고양 서삼릉 내, 서삼릉 정문에서 왼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재 중앙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고종 때 의령원(懿寧園)으로 승격된 후 1949년 현재의 장소인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봉분 주변에 장명등과 여러 석물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비의 비문은 영조가 직접 쓴 친필이다. 의소세손(1750~1752)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莊祖 : 思悼世子 · 莊憲世子)의 장남으로 1750년(영조 26) 8월 27일에 태어나 이듬해인 1751년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영조 28) 3월 4일에 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효창원(孝昌園)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원. 처음에는 용산구(龍山區) 청파동(靑坡洞)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1944년 10월 9일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문효세자는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1782년(정조 6) 9월 창덕궁 연화당(讌華堂)에서 태어나 1784년 8월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86년 5월 21일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죽었다. 이에 시호를 문효, 묘(廟)는 문희(文禧), 묘소의 명칭은 효창묘(孝昌墓)라 정하고 윤 7월 19일에 장례를 치렀으며,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 의빈 성씨의 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와 사적으로는 모자지간이나, 종법으로는 문효세자가 효의왕후의 양자여서 사친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바람대로 1786년(정조 10년) 9월에 의빈의 묘산(墓山)을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로 정했고, 11월에 효창묘(孝昌墓)와 백 걸음 떨어진 곳에 의빈묘(宜嬪墓)를 조성했다. 이후 효창원과 의빈묘 소속이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생기자 정조는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하게 하라."라고 했다. 숙종이 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 본래 효창원(孝昌園)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고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부터 1790년(정조 14년) 5월까지 의빈의 무덤 및 사당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1790년(정조 14년) 7월에 순조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문효세자의 무덤과 사당도 마찬가지였는데 순조의 후계 정통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829년(순조 29년)에 효창묘에서 동쪽으로 99보 떨어진 곳에 영온옹주의 묘가 마련되었고, 1854년(철종 5년)에 영온옹주의 생모이자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의 묘가 효창묘 내에 조성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는 효창묘가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숙의 박씨의 묘가 서삼릉 후궁묘역으로 이장되고 1939년에 영온옹주의 묘가 서삼릉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뒤이어 1940년에 의빈묘(宜嬪墓)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1944년에 효창원(孝昌園)은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이장되었다.] 숙의 박씨의 묘 숙의 박씨(淑儀 朴氏, ? ~ 1854년 음력 6월 30일)는 조선의 제23대 왕 순조의 후궁이다. 본관은 밀양이다. 원래 궁인 신분으로, 순조의 승은을 입은 후 1817년(순조 17년) 10월 11일 새벽 딸(영온옹주)을 낳아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일한 소생인 영온옹주는 태어난 후 병을 자주 앓고 말을 잘 하지 못하였고,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한편 박씨는 1854년(철종 5년) 음력 6월 30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효창원(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이곳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인근인데,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5년 3월에 강제 이장되어 현재 박씨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에 있다. 그녀의 묘는 서삼릉 전 지역이 사적으로 지정될 때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영온옹주의 묘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년 음력 10월 11일 ~ 1829년 음력 4월 8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순조와 숙의 박씨의 딸이다. 1817년(순조 17년) 음력 10월 11일 새벽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와 그 후궁 숙의 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이다. 효명세자(헌종의 아버지) 등과는 이복 남매간이다. 영온옹주의 생모 숙의 박씨는 밀양 박씨 출신이다. 원래 궁인 신분이었다가 순조의 승은을 입고 영온옹주를 낳자, 1817년(순조 17년) 음력 10월 11일 종2품 숙의에 봉작되었다. 11살 때인 1827년(순조 27년) 음력 6월 10일 영온옹주(永溫翁主)에 책봉되고 여러 가지 물품을 하사받았으나, 불과 2년 후인 1829년(순조 29년) 음력 4월 8일 13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순조의 자식들은 적자녀 2남 3녀는 물론, 유일한 서녀인 영온옹주까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순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영온옹주는 태어날 때부터 병을 자주 앓았고 말도 잘 못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옹주를 이복 오빠인 효명세자가 유달리 불쌍히 여겨 항상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옹주가 요절하자 효명세자가 매우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 자모(慈母)의 정경(情境)은 더욱 슬프게 여길 만하다." 라고 하였다. 한편 이 효명세자 역시 영온옹주가 사망한지 약 1년 뒤인 1830년(순조 30년) 음력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영온옹주의 묘소는 효창원(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에서 동쪽으로 99보 되는 지점에 만들어졌다. 이 자리는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일대인데,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있던 모든 무덤이 옮겨지면서 영온옹주의 묘도 함께 이장되었다. 현재는 생모 숙의 박씨의 묘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소현세자의 묘 소현묘(昭顯墓)는 인조(仁祖)의 장자(長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무덤으로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원신동(元新洞)에 있는 서삼릉 경내에 있다. 후에 소경원(昭慶園)으로 고쳤다. 소현세자는 이름이 왕(왕)이고, 인조의 장자이며, 효종의 형이고,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인조 3)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인데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부른다. 순회묘로 명명된 순회세자 무덤의 전례에 따라 소현묘로 명명되었다가 1870년(고종 7년)에 순회묘, 의소세손의 의소묘와 함께 원(園)으로 개칭되었다. 무조건 '세자 무덤=원(園)'이 아니고 원이 아닌 묘로 명명했으니 격을 낮췄다고 하면 안 된다. 세자의 무덤을 원으로 일괄 명명함은 대한제국이 점차 일본에게 잠식되어 망하기 직전인 고종 때의 일이다. 그전까진 정조가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사례가 전부로 그 외엔 묘라고 부르다 의경세자, 효장세자, 효명세자처럼 추존되면 릉으로 올리는 식이었다. 사도세자도 그가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부왕에게 처분당한 세자라서 큰아버지 진종(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가 선왕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추존하는 게 불가능해 궁여지책으로 원으로라도 개칭한 것이지 단순한 병사였다면 바로 왕릉으로 격상되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소경원은 서삼릉 권역에 있으나, 주변 부지가 농협 젖소개량소, 군부대로 둘러싸여 있어 비공개 구역이다. 특히 그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의 무덤은 군부대 권역 내에 있다. 소현세자(昭顯世子) 요약 :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 출생-사망 : 1612 ~ 1645 본명 : 이왕 성은 이(李), 이름은 왕이며, 시호는 소현(昭顯)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1627년(인조 5)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慶善君) 이석철(李石鐵, 1636〜1648), 경완군(慶完君) 이석린(李石磷, 1640〜1648), 경안군(慶安君) 이석견(李石堅, 1644〜1665),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1655),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1682),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54) 등 3남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음력 정월 4일에 태어나 1625년(인조 3) 정월에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과 함께 전주(全州)에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참의(參議)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1635년(인조 13)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 뒤 소현세자는 1640년(인조 18)과 1644년(인조 22)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에는 베이징으로 옮겨졌다가, 1645년(인조 23) 음력 2월에야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였으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베이징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고양(高陽)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염습(斂襲)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인조는 세손(世孫)인 이석철이 있는데도,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제17대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영의정 김류(金瑬) 등 대신들이 반대했는데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고,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죽였다. 그리고 1647년(인조 25)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조가 소현세자의 세자빈과 자식들에게도 무자비하게 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인조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탐방코스 : [ 원흥역 6번 출구~서삼릉 매표소~희릉~예릉~효창원~의령원~서삼릉 매표소~원당 종마목장~너른마당~농협대학교~원흥역 6번 출구] 탐방일 : 2024년 05월 12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고양시 덕양구 최저기온 10도C, 최고기온 24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46분 소요) 13:24~13:39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출발하여 원흥역으로 가서 원흥역 6번 출구로 나옴 [15분 소요] 13:39~14:14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638-1 번지에 있는 원흥역 6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번지에 있는 서삼릉 매표소로 이동 [2.4km] 14:14~14:22 서삼릉 매표소 근방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 14:22~14:24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인 희릉(禧陵)으로 이동 14:24~14:29 희릉(禧陵)을 탐방 14:29~14:32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인 예릉(睿陵)으로 이동 14:32~14:39 예릉(睿陵)을 탐방 14:39~14:4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원인 효창원(孝昌園)으로 이동 14:43~14:48 조선후기 제22대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원인 효창원(孝昌園)과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손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인 의령원(懿寧園)을 탐방 14:48~14:50 서삼릉 매표소로 회귀 14:50~14:51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12 번지에 있는 원당 종마목장으로 이동 [원당 종마목장 (렛츠런팜 원당)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12 원당목장은 인기 있었던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위험시설이 많아 개방지역을 제한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특별한 볼거리보다는 말이 방목되어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산책하면서 즐길 수 있다. * 면적 - 약 363,638㎡ (110,000평) * 초지면적 - 약 165,290㎡ (50,000평) ※ 종마목장은 시민공원이 아닌, 기수후보생 및 마필관계자를 교육시키는 업무공간이므로 음주, 취사, 고성방가, 공놀이, 텐트설치 등을 삼가해야 하며,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 등은 모두 가져가야 한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하절기(3~10월) 09:00~17:00 동절기(11~2월) 09:00~16:00 쉬는날 : 매주 월,화,국공휴일, 명절,한국마사회 휴일] 14:51~15:21 원당 종마목장을 탐방 15:21~15:29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4 번지에 있는 너른마당으로 이동 [피플&포커스] 광개토대왕비 세워진 너른마당… “천년 갈 문화 만들고 싶다” 천지일보 기사 입력 : 2022.03.09. 07:00 기자명 조혜리 기자 mooksung@newscj.com 인터뷰|임순형 너른마당 대표 고양시 ‘너른마당’서 광개토대왕비 17년째 추모제 열어 대왕 ‘불굴의 기개와 웅혼한 기상’ 후손에게 물려줘야 ‘고구려 제법’ 몰라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올려 추모제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 보고 눈물 많이 흘려 [천지일보=조혜리 기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에 통오리밀쌈으로 유명한 문화 명소 ‘너른마당’ 식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실물 크기(6m)로 복제돼 들어서 있다. 매년 음력 9월 29일이면 거대한 비석 앞에서 합동 추모제가 열린다. 너른마당 뜰 앞 서문에는 ‘우리는 위대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후예임을 잊은 채, 늘 약소민족인 양 스스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불굴의 기개와 웅혼한 기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주고자 5년여의 노력 끝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됐다. 우리 민족의 끓는 피는 반도에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본지는 실물 크기의 광개토대왕비를 세우고 17년째 추모하고 있는 임순형 너른마당 대표를 인터뷰했다. 임 대표는 30년 전 어머니와 함께 너른마당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꿩 요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통오리밀쌈이라는 차별화된 메뉴를 앞세워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아름다운 한옥으로 지어진 너른마당 앞에 광개토대왕비가 웅혼한 기상으로 우뚝 서 있어 고양시를 넘어 전국적으로 문화 명소로 알려졌다. 일반식당과는 다른 특별함을 간직한 식당을 차린 임 대표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임 대표는 “정직하게 일했고 그 땀과 노력이 지금의 너른마당을 만들었다”며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느낀 우리 민족에 대한 벅찬 자긍심으로 대왕비를 모시게 됐고 그 덕분에 너른마당이 전국의 문화 명소가 됐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은 임 대표와의 일문일답. ◆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오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아주 조그마한 사진으로 봤다. 1990년 말쯤인가 고구려 국내성에 여행을 갔다.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었는 지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위대한 선조들의 기운을 받아야 했기에 현지에서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담아 광개토대왕의 혼을 한국으로 실어서 가자는 마음이 솟구쳤다. 오로지 드넓은 고구려의 기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모셔 올 준비를 했다. ◆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광개토대왕비를 모셔오는 데 약 5년이 걸렸다. 광개토대왕비가 모셔져 있는 지방현은 북경 공항에서 차를 타고 1600㎞, 약 23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광개토대왕비를 가져온다는 소식을 들은 국내 한 석공이 자신에서 맡겨 달라고 했다. 석공에게 국내서도 잘 만들 수 있지만, 고구려의 현지 기상과 정신을 모셔 와야 했기에 현지의 돌과 솜씨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렇게 만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할 때 사진을 보여주고 수치를 재어 사진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현지에서 비석이 완성됐다고 해 가서 보니 이들은 비석이라고 생각하고 납작하고 넓적하게 만들어 놨다. 두께도 얇게 만든 것이다. 현지 석공에게 화가와 함께 광개토대왕비를 직접 보고 오라고 했다. 현지 석공들도 광개토대왕비 웅장함에 놀랐다. 하지만 크기와 모양, 글자 등을 실물처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완성 직전에 비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04년 비로소 거대한 4면 돌기둥 비석이 제작됐다. 높이 6.3m, 둘레 6.6m, 무게 47t으로 실물 크기와 비슷하고 한자도 원형과 같은 1775자가 새겨진 비석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언제부터 추모제를 지냈나? 비석을 세워놓으니 학생들이나 공무원 임용되신 분들이 와서 비석의 기상을 보고 갔다. 광개토대왕은 영웅임에도 영웅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다스리던 땅이 남한과 북한, 조선족으로 흩어져 있고 북만주땅 요동벌을 다 내어줬다. 또 고조선의 단군 역사와 고구려 역사가 중국 변방국의 일부 역사로 왜곡이 되고 있으니 광개토대왕의 넋이 헤매고 다닐 것 같아 넋을 달래드리기 위해 추모제를 시작했다. 고구려 제법을 몰라서 하늘에 지내는 천제 제법으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추모제를 보러 왔다가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많았다. ◆ 돈은 얼마나 들었고,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 돈이 얼마 들었는지, 이런 것을 묻는 것은 불경죄다. 우리 가족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낳아서 지금껏 키워주셨으니 약 10억짜리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지 않나? 이것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얼마 걸렸다. 이 정도만 이야기한다. 그들이 우리의 문화를 도굴하면서 돌아가신 유골을 돌아보았겠는가. 그 유골들이 이곳에 다 떨어져 어딘가로 흩어졌겠지. 인생이 꼭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가. 훌륭하신 분들은 영원히 살아 신선같이 돼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면 좋겠다. ◆ 너른마당을 어머니와 함께 어떻게 시작했나? 어머니는 배우지 않았지만 지혜롭고 예절을 중시했다.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았다. 동네 두레가 있는 날 우리 집 순서가 되면 형님 이름이 순철인데 ‘순철네 두레가 있는 날은 잘 먹는 날’이라고 동네 분들이 좋아했다. 아버지는 음식 드실 때 까다로웠다. 꼭 소스가 있어야 했다. 고추장도 그냥 고추장이 아닌 초를 쳐야 했고 간장도 그냥 간장이 아닌 초라도 쳐야 했다. ◆ 너른마당에 오니 소중한 우리 문화를 보는 것 같다 이 터전은 앞으로 천년을 가게 하려고 만든 터전이다. 몸에 좋은 음식도 있고, 광개토대왕비도 있고 추모제도 하고 있다. 연못은 신라의 안압지를 모태로 꾸미고 있다. 안압지를 만들 때는 백제사람들이 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삼국의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이 돕고 주위에서 도와줘야 한다. 서로 조화와 상생으로 만들어지는 터전이 바로 너른마당이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부모님들께서 해 오신 방법대로 정화수 떠 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신(修身)하고 있다. 맘 편히 배고프지 않고 조상 잘 모시고 살면, 천년이 아니라 만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수신(修身)이다. 이것이 바로 효의 마음 아닐까.] 15:29~15:40 너른마당을 사진촬영 15:40~15:46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81 번지에 있는 농협대학교로 이동 [농협대학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3년제 전문대학이다. 농협이 운영하고 농협중앙회 회장이 당연직으로 이사장이 된다. 1962년 학교법인 건국학원 산하의 농업협동조합초급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돼,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의 일부였다. 1966년 농업협동조합이 학교법인 농협학원을 세워 학교를 인수하면서 현재의 원당동으로 학교를 옮겼다. 1979년 농업협동조합 전문대학으로 교명이 바뀌고, 1998년 농협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다가 2012년 농협대학교로 교명을 최종 변경했다. 과거 한국철도대학, 국립세무대학과 함께 3대 전문대로 유명했었다. 농협대학교는 협동조합과 농업 관련 과목을 배우는 단과대학이다.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농협대학교 특채의 존재가 논란이 된 때가 있었는데, 농협대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의문에 농협중앙회의 답변이 있다. [농협에서 대학까지 운영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답] Q 「농협대학」을 운영하여 직원으로 필요한 사람을 교육하고 있는데, 이제는 불필요하다는 여론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농협에 필요한 인재를 직접 길러야 했겠지만, 지금은 취업난과 높은 청년실업으로 명문대출신, 고학력, 고스펙 인재들이 농협에 취업하기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농협대학을 폐지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A 기업이나 정부를 막론하고 주어진 소명이나 경영목표를 달성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양질의 인력, 즉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시험을 통한 선발, 둘째는 교육을 통한 육성, 셋째는 구성원의 선거를 통한 선출입니다. 농협은 임원의 경우는 선거를 통하여 검증된 인사를 선출하고, 직원은 시험을 통한 선발과 직접 양성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농협대학은 농협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의 양성과 기존 인력의 보수교육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취업난으로 우수한 청년인재들이 농협취업을 위해 줄을 서고 있는 현상도 현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농협이 필요로 하는 인재의 양성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농협의 인력은 업무능력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조예와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의식화된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조직의 목표와 철학을 영혼 깊이 새긴 사람과 단순히 다른 직장과 수평비교하며 일하는 사람은 업무에 임하는 기본 생각과 자세가 다르고 특히 위기상황에서 행동이 확연히 다르게 되고 업무수행의 목적이나 목표의식이 다르므로 업무수행의 품질에서도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즉, 똑같은 일을 같은 시간 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과 성과에 있어서 건성으로 겉보기만 좋은 성과와 혼이 깃든 성과는 그 조직의 미래를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취업난 때문에 부득이 농협을 선택한 유명대학 출신 인재, 능력과 자격이 출중한 직원은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바로 농협을 등지고 더 나은 대우,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련 없이 농협을 떠나는 것이 당연하고 또 지금까지 우리 농협의 현장에서 수없이 겪은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옮겨가는 곳은 대부분 농협과 유사한 업무를 하는 곳으로서 은행, 보험, 증권, 신협, 저축은행 등인데 농협을 떠날 때 농협의 고객정보, 조합원정보와 영업비밀을 모두 가져가서 활용하므로 농협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기업들의 경우, 우수하다고 이름난 인재를 스카웃하거나 고액연봉으로 유혹하여 업무나 경영을 맡긴 결과 단기업적주의의 함정에 빠지거나 탈법이나 꼼수로 실적만을 올렸다가 결국은 기업을 파산지경으로 몰아간 사례들을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폭스바겐, 도요타, 메릴린치, AIG등 세계적인 기업이 하루아침에 도산하거나 파산위기에 몰린 것이 모두 인재의 품질과 정신자세를 소홀히 하고 스펙과 성과만을 중요시 한데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각국은 국방이나 치안, 국가전략을 맡는 분야는 사관학교, 경찰대학, 행정대학 등을 세워서 직접 인재를 육성하여 국가의 운명을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육,해,공군은 국비로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에서 복무할 인재를 직접 양성하여 활용하고 있는데, 사관학교의 존재와 그 의미, 역할에 대해 누구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또 국립 경찰대학에서 경찰간부를 양성하여 경찰공무원으로 특별채용, 활용한 결과 경찰의 대민봉사자세가 확연히 달라지고 수사와 치안에서 법률적 실력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하기에 ‘경찰이 달라졌다’고 찬탄할 정도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협동조합에 있어서 농협대학은 3군 사관학교나 경찰대학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졸업생들은 모두 뛰어난 업무능력은 물론, 잘 무장된 협동조합정신으로 농협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농협대학은 학부과정 외에도 단기과정, 심화과정을 두어 맞춤형 교육을 하고 있으며, 경영대학원과 산학협력대학원, 농협문제연구소, 중앙교육원과 농촌지도자교육원, 농촌사랑교육원 등을 거느리는 농협교육의 중심이고 회원농협의 경영자, 농촌지도자, 직원들에 대한 전문교육과 보수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재의 양성과 함께 기존 농협임직원을 새시대형 인재로 탈바꿈시켜 현장에 재투입하는 역할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농협이 급변하는 경제여건 속에서 수많은 경제위기, 경영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오히려 사업을 확대 발전시켜가는 배경에는 이러한 인재육성과 재교육시스템 덕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성과 때문에 다른 나라의 협동조합도 우리나라의 사례에 자극받아 협동조합대학을 설립 운영하기로 하고 농협대학에 관련 자료와 노하우의 전수, 제휴, 교수파견 등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역사 농협대학교 요람을 참고했다. 농협대학교는 1962년 12월 28일 학교법인 건국학원의 설립을 발판으로 삼아 운영되어 오다가, 1966년 농협중앙회의 인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건국대 축산대학의 교사 일부를 빌려 개교한 농협대학교의 초창기 건국이념은 낙후된 우리 농촌의 근대화를 위하여 농촌에 정착하여 살아갈 유능한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새로 발족될 농협의 간부요원으로 봉사할 인재를 양성하여 농협에 공급하겠다는 이중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초대 총장으로는 농협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한 최응상 선생을 모셨다. 입학자격은 군복무를 마친 후에 농촌에 투실할 젊은이에 한하였고, 입학 후에는 등록금 전액을 면제하고 의무적으로 생활관에 입사했다. 또한 학생들은 아침부터 밤늦게 취침할 때까지 빈틈없이 계획된 일과표에 의해 생활했으며, 생활관 생활은 일반대학의 기숙사와는 달리 침식제공차원을 넘어서서 자치적 단체생활을 통한 협동이념을 생활화 하느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못내 아쉬웠던 것은 1965년 1회 졸업생을 배출했을 때, 대부분이 바랐던 농협 근무가 좌절되고 자유취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여건상으로는 농협직원채용은 일반 일류대학 출신의 유능한 인재확보가 쉬워서, 협대출신 채용의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졸업생들의 진로가 이렇게 불투명해지자 재학생이나 졸업생 모두가 동요, 학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측에서는 운영자를 찾던 중에 농협중앙회와 인수 합의를 보았다. 이로부터 농협중앙회가 학교운영의 핵이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농협중앙회는 1966년 3월 9일자로 학교법인 농협학원을 설립, 재학생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으며 그 해 9월 11일자로 현 대학 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캠퍼스는 집 없는 나그네 신세인양 유일하게 갈 곳이란 원당골 밖에 없덨던 정말 적막한 산속의 캠퍼스였다. 강의실에는 전기통신시설이 전혀 없었으며 정말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1968년 교육환경 조성목적으로 강당과 협우관이 신축되어 교육장과 생활관이 분리되고, 그 사이에 길이 개통되었다. 이 길이 개통되기 까지는 학생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1971년도 에는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이 바라던 농협 졸업생 시-군 조합 배치제가 실시되어 전 졸업생이 일선 농협에 채용되게 되었다. 2000년 까지 조합배치 졸업생은 약 3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1972년 1월 14일 에는 독농가연구원을 설치하였으며, 10월 21에는 협동에 따른 제문제와 그 대응책을 위해 협동문제연구소를 설치했다. 또한 교내에 학훈탑과 새농민상이 건립되었다. 또 대학이 한동안 운영해 오던 농협임직원 연수원이 분리되기도 하였으나 1980년을 기해 다시 농협대학교와 통합되어 대학부설기구의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1975년 부터는 입학금 및 등록금 징수제를 실시하였으며, 그 해에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1976년도에는 학생들의 정신적 교양과 견문을 넓히기 위한 방침으로 도서관을 준공하였다. 이때 펜실베니아대학 H. M. SouthWorth 교수의 주선으로 미국 ADC(농협개발이사회)로부터 수백권에 달하는 농업관계도서의 기증을 받았다. 농협대학교가 정식으로 농업협동조합전문대학으로 개편된 것은 1979년 1월 1일이며, 이를 계기로 전문직업인양성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더불어 농협중앙회에서도 대농민사업이 단위농협에 이관되고 단협경영이 복잡해짐에 따라 유능한 단협 기간요원의 확보가 시급히 요청되었으므로, 기왕에 시-군 조합에 배치해왔던 협대 졸업생을 전원 단협에 배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에서는 1991년 기존의 협동조합경영과 이외에 농공기술과와 식품제조과를 신설하고 1992년에는 전자계산과를 신설함으로써 4개과 체제가 완료되었으며, 1998년 5월 1일에는 교명을 농협대학으로 개명하였다. 1999년도에는 시대조류에 맞추어 세계유일의 협동조합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학운영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1999년 8월에는 기존의 4개 학과를 협동조합계열로 단일화 하고 입학 후 '유통경제전공'이나 '금융보험전공'으로 나누는 전공코스제를 도입함으로써 실리적이로 수요자 중심적인 발상의 전환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999년 10월에는 입시 및 취업제도를 대폭 수정하여 조합원 자녀에게 가점을 부여하였고, 예전의 의무채용제도를 조합의 재량채용으로 바꾸었다. 2010년에는 산학협력단을 설립하여 새로운 교육사업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2012년 2월 1일자로 농협대학에서 농협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그 위상을 높혔다. 또한, 2013년 1월 25이자로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대학평가인증을 획득하였고, 2014년 6월 27일 특성화전문대학육성사업에 선정되어 명실공이 국내 최고 수준의 특성화 대학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이제 농협대학교는 과거에 안주하는 구태의연한 자세에서 벗어나 미래에 일류 협동조합대학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부단히 면모를 일신해 가고 있다.] 15:46~16:09 농협대학교 캠퍼스를 탐방 16:09~16:25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638-1 번지에 있는 원흥역 6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을 완료 16:25~16:30 원흥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전철 승차 대기 16:30~16:50 3호선 전철을 타고 원흥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20분 소요]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원당 종마목장&너른마당&농협대학교]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