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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고 정하다는 그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I have no problem because I don't mind what happens. I don't mind if I fail or if I succeed. I have no problem because I don't demand anything from anybody or from life. I wonder if you understand this.”
“나한테는 그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왜냐면 뭐가 어찌 돼도 괜찮거든요. 나는 내가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관심도 없습니다. 나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단 말입니다. 그 누구한테서나 혹은 삶으로부터 단 하나도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이 이걸 이해할는지 모르겠군요.”
-- Jiddu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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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7] “의지” 작용이 없는 인간
저런 사람이라면 한세상 슬플 것도 두려울 것도 없겠지요. 마음만 무뎌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게 어려울 리가 없건만······.
한때는 저런 말씀에 흉내도 내보고 했습니다만, 그, 참, 가당찮은 짓이었지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부터, 가면 갈수록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글쎄요, 그러니 제가 저 말씀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런 말씀은 그야말로 “자유인”의 경지라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흉내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마 한줄두줄 끄적거리는 게 제 ‘일’이라서 말씀입니다. 이런 것마저 안 하면, 은근히 무서운 게, 소위 ‘밥값’ 반푼어치도 못하는 무지랭이라는 소리가 딱 맞을 처지라서 말씀이지요. 달리, 뭘 어쩔 수가 없습니다. 비록 누구 다그치는 사람은 없다 해도..
그래 저래 이래 궁시렁거려보는 겁니다만, 설령, ‘나 하나야, 뭐가 어찌 돼도 좋다!’고 허풍 비슷하게 주절거린다 해도, 이 좋은 봄날! 뭔가 삶에 ‘생명력’이 충만해서 그나마 좀 싱싱하게 보여야 말이지요. 허나, 별로 그런 거 같지도 않거든요. 기껏, ‘남의 텃발’에 물주기로 하루하루 ‘인생, 여기가 끝인가..’ 그딴 생각만······. 한번씩은 ‘모진 목숨, 이렇게나마..’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러쿵 저러쿵 이러쿵 주절거려보는 이 짓마저 욕망일까요? 여튼, ‘남은 평생’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건, 진짜로 안 내켜서 말씀입니다. 더구나.. 정말로 “우째도 안 해야 될 짓만 안 하면 된다!” 더는 “‘부자 몸조심’이라는 소리도 있다!” 그런.. 텅 못 비어, 알량한 배짱까지.. 그냥, ‘나’로는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는 말씀이겠는데요, 그게 왜 어렵단 말일까요? 역시, 이건 “인간의 굴레” 아닐까나 하는 핑계나 떠올리고는..
역시, 글쎄요, 여전히,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그 싯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비록 그게 전쟁터에서 나온 시라고는 해도.. 어쨌거나 누구라도 결코 한평생 전쟁터에서 보내듯 허망하게 다 보내고 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짜든지 간에, 진짜로 좀 ‘평화’롭게 사랑하면서 살아야지요. 그것 하나가 유일한 열쇠겠지요? 설령, 너나없이 고르게 가난하게 살게 된다 하더라도, ‘평화’가 우선이다 싶지만, 또 그런 소리를 크게 외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닌 듯도 해서요. 그러다가는 ‘기껏, 핀잔이나 주워 먹지..’
간간이 ‘과연, 너는 진짜, 이대로 한세상 가라시구려~~~.’ 그러고 살다 가도 좋으냐? 스스로 그런 의문도 일어나지만, 달리 무슨 수가 없으니, 딱 한 가지 그 수밖에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씀이지요. ‘뭐, 하나만 좀 삐끗해달라고 벼르고 있는 무리들 틈바구니에서..’ 그러구러, ‘다음 세대에라도 뭔가 일어나겠지.’ 그러고 미루며 살아야 할 운명인가 합니다. 진작부터 바탕이 ‘의지’로 뭔가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더 본문 저 말씀이 아주 정확한 말씀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요.
‘눈을 나보다 아래로 돌릴 일이다.’ 더러 그런 말들 하기도 하지만, 눈이야 그 어디로 두나 마나, “인간”이라는 게 전부 다 “고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상들 아닙니까. 늙으나 젊으나 간에, 세상에다가 도대체 뭘 남기고 갈 거라고.. “입신양명,” 남긴들 짜다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고.. 진부하게 느껴질까요? 진작에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은 아주 유명한 거고, 역시 저명한 “하숙생”이라는 노래도 은근하게 익숙한 ‘아재’들 널부러진 삼천리 금수강산에 말씀입니다. ‘아재’들 별로 대접 못 받는 세태가 꼭 바람직한 건 아니지요?
그런 것들이야 어떻든 간에, 각자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서, 인생 거기 근원적인 바탕에서, 저런그런 ‘일상’ 속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생각” 자체를, 그것의 “속성”을 살펴봐야겠건만.. 늘 하는 말이라고나 하시겠지만, 도대체 “생각” 아니라면 인생은 “고해”로 될 수가 없는 이치 아닙니까. “인생은 고해”라는 문제를 풀어주는 열쇠가 바로 그것 하나뿐이라는 가르침이지요? 그걸 일러서 “일아채기”라고 하는 거고 말씀이지요. 흔히 말하는, 이런저런 그런조런 ‘명상법’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거지요. 정작, 사방 삼천리, 진짜로 “자유인”들이 여기저기 생겨 나와야 말이지요만.
“아등바등, 그야말로 ‘죽어라~~~!’ 살면서도, 악바리, 내가 뭐 하나 좀 어찌 돼 보겠다!”고 그러고 있을 뿐입니다. 다들, 정신들 똑바로 차려서가 아니라 그게 ‘고통스러워서’라도, “참, 이러자고 태어났나..?” 마땅히 그런 생각이 들어야만 하는 신세들이지요. 허나, ‘나 하나야, 뭐가 어찌 돼도 좋다’는 자세들이 아니니까, 바닥에서부터 그런 마음자리는 아예 없으니까, 오히려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못하게 가르치니까, 정작,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는 거고요. 수천 년 그렇게 해온 거라 해도, 온세상 더이상은 이냥 그냥 이대로 못 갈 판 아닙니까?
또 하는 소리, 바야흐로 최소한도로나마 그런 마음을 먹어보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지구촌 위기를 만났다지요? 홍수에 태풍에 산불에.. “대멸종”이 이미 시작됐다고도 하지만, 당장 눈앞에서 다 죽어나가는 꼴이 빤히 보여야, 그 말을, 그 사실을 믿기라고 하겠다는 듯이.. 제 자신마저도 과연 얼마나 진지하고 절박한 심정인지 그다지 잘 모르겠거든요. 게다가 이러나저러나 간에, “전쟁 안 하고는 못 살겠다!”고 저리도 발악들 하고 있는 꼬라지들.. 더구나 그딴 짓들, 말려도 시원찮은 판에.. ‘무기’나 팔아먹자고..
심한 비약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째, ‘물가로 기어가는 애기’ 얘기가 떠오릅니다. 세상에 인간 누구라도, 그 꼴을 보고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말종은 없겠지요? 글쎄요, 설령 글마가 ‘웬쑤’의 자식이라는 걸, 딱! 그때 그 순간에 알아챈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제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애기”가 물가로 기어가고 있어요, 글쎄. 오늘날 지구촌이 바로 그런데도 다들.. ‘그 꼴이 안 보이네..’ 그러고들 있는 거 같아서 말씀입니다. 하기사, 역시, 언제나 그래 왔던 거지만요.
‘이링공 뎌링공’ 지내는 세월! 최근에 인터넷으로, “에이지티AGT”라고 불리는 프로, 어떤 꼬마가 부르는 ‘찬송가’ 한 구절이 그다지도 절절하게 들리는 머리, 해본 생각입니다만, 우리 인간 누구에게나 다 있는 그 고귀한 “종교성”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조직해설랑 자기네 이익을 위한 노예로나 전락시켜서는.. 한 가지로 조직화된 세상. 그런 기득권으로 역시 수천 년 착취해 먹은 거 아니란 말입니까?
그 사이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그런 소위 “인류 성인”의 말씀도 조직화해서는 자기네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고 말씀입니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이라면 더더욱.. 홀로 먼 길 걷는 “자유인”들이라면, 그런저런 사정쯤이야 훤히 꿰뚫고 있겠지요? 거기서도 오로지 ‘조직’과는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 그 종교성이 밝혀지는 만큼 세상은 그나마 좀 나아질 수 있을 뿐이겠습니다.
거기서는 동양 서양 별 차이 없는 실태라고 해야겠지요? 오십보백보, 그 얘기겠고요. 그러나 “다 죽게 생겼다”는데도 여전히, ‘그딴 건 문제 아니라는 인간들’ 속에서, 끝내, ‘산으로나 가버려랏!’ 그러던 그 소리만 귓가에 맴맴 돌고 있네요. 거기서.. ‘가다니 배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죠라 ? 조롱곳 누로기 메와 잡사와니 엇디호리라..’
하지만 나 하나야 처한 상황이 그 어떻다 해도, 인류사 문명사 막장 · 파장 · 대멸종을 맞이했다는 위기의 시대, 거기서나마 우째 “국운”이 좀 펴진다는 대한민국! 이미, 서구 저들 가치로는 다 망하게 생겼으니, 여기 그래도 세상에 하나뿐인, “홍익,” 종교적인 그 ‘고운 마음씨’나마 되살릴 일 아니겠습니까?
여튼, 구질구질한 글 나부랭이, 역시 맨날 그 소리라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아서, 올리지도 못하고 마냥 처박아두고 있다가 보니.. 어언 계절이 바뀌고 있네요. 아주 후덥지근한 게······. 이러다가 또 장마가 오고, 푹푹 찌다가, 단풍이 들고, 눈이 내리고.. 또 한 해 가버릴 거고..
그러면 세상은 “대멸종”에 한 해 만큼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고요. 그래도 우리들 가운데 몇이라도 살아남아야지요. 지구촌 어디에서도 진짜, “홍익” ‘고운 마음씨’가 달리 또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삶은 시간 아니다!” 그랬으면서도, 여전히 딱하게, 어느 겨울 들판에서 맨몸으로 ‘싸락눈’ 맞고 서 있을, 그 ‘곧고 정하다’는 “갈매나무” 생각이나 하고 있네요.
하루하루 “마음,” 그것만 요꼴로 무뎌지지 않는다면, 진짜로 “활짝 깨어 있다면,” 내 한평생 저 갈매나무처럼 못 살 것도 없겠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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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머리 20220527] ‘강나루 건너서’ 운운하면서 우째..
한 평생 살면서 저잣거리 좀 멀찌기 서 있겠다고 해도, 아예, 세상과 담을 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무엇보다도 ‘나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모질고 거칠다고는 해도, “인간”들 다 사라진 길이 아님에야..
다른 바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고 해도, “촛불혁명”이 딱 5 년 만에 ‘민도’ ‘민의’는 도돌이표 달고 되돌아갔다고 해도, 여전히 ‘깨어 있는 시민’ 역할을 내팽개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쨌거나 그 “혁명”의 수혜자들은 전혀 반성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니나내나 ‘지꺼 챙기기’만 일삼은 듯하고 말씀이지요. 정치세력이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건 줄 알았더니.. 그저 보수양당체제일 뿐인 듯하고요. 어디에 ‘민주’의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그 많던 지식인들 다 사라졌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본문 저 말씀이 어찌 대한민국을 두고 하신 말씀이겠으며, 더구나 “촛불혁명”을 두고 하셨을 리 만무하겠습니다만. 그 촛불들 다 꺼지고 완전 폐허가 된 ‘광장’을 바라보는 심사.. 다시 한번.. “이게 나라냐?” 그리고 “이건 나라냐?” 그 다음은 뭘까? 그런 생각에.. 나라 일임에도, 예전부터 ‘돌려막기’ 혹은 ‘회전문 인사’라는 말만 나돌던데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딱 그 꼴 아닌가 싶을 뿐입니다. 이만큼이나 살게 되었다고들 자랑질이면서, 왜, 정작.. “행복”은 저다지도 멀리만 있어야 하는 건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만이.. 더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I am nobody]’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도 하시니..
어쨌거나 오늘날, 이 시절, 모름지기 ‘정치’에부터,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거든요.” 그러고 말아야 하는 걸까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저 다 ‘같은 XO’이라면, 우리는 그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걸까요? 삼천리금수강산 “교육”에도 희망 없고, “종교”는 더 포악하게 구는데요. 더구나 여기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에게는 더욱 더 말씀입니다.
여튼, 숨 쉬는 거 말고는 ‘나’의 모든 것이 단 하나도 신경 쓸 거 없으니, ‘그저 세상 돌아가는 꼴’이나 한번씩 흘깃 봐보자.. 스스로도 다짐했었지만, 그게 여전히 ‘나’의 감상에 젖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어이 ‘나한테는 아무 문젯거리가 없다’고 말 못 하겠군요. 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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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끄적거려놓은 건 몇 년 사이의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읽어라도 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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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할까.. 말까..
I don't demand anything from anybody or from life
나는 누군가로부터 혹은 삶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참 자신만만한 선언이지요? 처음 보는 문장이 아니지만, 여전히 마음에 쏙 드는 말씀입니다. 뭘 더 바라겠습니까? 기존에 ‘있는 바람,’ 그 ‘욕망’ 몽땅 처리하기도 바쁜데요.
그리고는 보고 행하고 보고 행하고, 그렇게 살 수 있으면 다 되는 거지요? 과거나 미래에 신경 쓴다면 그게 바로 ‘고해’ 아니겠습니까? 아예 신경 안 쓰일 방도를 구해야 하기도 하겠고 말이지요. 이미 ‘고해’로 안 살고 있느냐, 설마 그렇겠습니까만, 하여간에 저 말씀만으로도 좀 홀가분합니다. 뭔가 느낌이 팍 오곤 하지요.
‘삶에 덮어씌운 더께 걷어내는 것만도 벅차다’고 한 게 벌써 20 년이네요. 여태까지 그만큼 헛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폼만 잡은 거 아닌지,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습관적으로, 은근슬쩍 당하지도 않아야 할 텐데, 애써 망신을 초래해서야 쓰겠습니까? 그래서 더 조신해야겠지요. 여전히 모르고 초래하는 것도 있을 터입니다. 잘 보는 수밖에요. 술 마시는 건 초래하는 거 아니란 말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퍼마시고 다니는군요. 만취 안 한다는 건 고작해야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저 말을 스스로 하고 다니면 안 되는 것이네요. 그냥 저 말씀이 ‘좋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끄적거림도 끝날 날이 오겠지요. 이미 지나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런 끄적거림도 없이 그냥 세월 보내고 살아오기도 했네요. 허송세월은 아니라고 해도, 과연 ‘제대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저어기 ‘강태공’으로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만큼 살아왔으니 어쨌든, 뭐가 어찌 되든지 간에, ‘삶을 산다’는 게 그리 더 어려울 건 없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그럭저럭 잘 온 셈입니다.
역시 항상 하는 말이지만, 다들 살지 못하고 ‘죽어가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요. 그게 ‘고해’로 사는 거니까요. 실상으로 그런 ‘고해’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밀려오곤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생각에 쏠랑쏠랑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지만, 그게 그리 심하지는 않습니다. ‘또 이러네?’ 쯤으로 넘어가곤 하니까요. 아직은 살면서 ‘화’나는 때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괜히 ‘껀쑤’ 만들어서 싸돌아다닐 거 없겠습니다. 관계를 맺어서 ‘고해’로 빠질 거 같으면, 안 맺으면 되는 거지요? 정작 그런 건 ‘관계’도 아닙니다. 진짜로 하나하나 비우며 살 일이지요. ‘할까 말까’ 할 때는 ‘안 하는 게’ 상수이겠습니다.
‘나’에 매여 있는 인간들이 하는 행위들이 얄팍하지 그게 두텁겠습니까? 정작 자기들은 ‘가보려고’ 생각도 못 하면서, ‘피안’과는 아예 담 쌓고 살면서 말씀이지요, 어떻게라도 한발한발 더디더디라도 떼놓겠다는 사람 붙들고 시비나 걸어쌌고 말입니다. 기껏해야 ‘불러줄 때가 좋은 거다’고 협박이나 당하고 삽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지요. 아직 그런 협박에 안 당할 만큼 성숙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무서워도 떼놔야겠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엮여서 저잣거리에 뼈 묻을 생각이나 하고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뭐, 꼭, 그 수밖에 없다면 그것도 역시 좋습니다. ‘안 해야 될 짓’만 안 할 수 있으면 되겠지요?
그래도 아직은 친구들에게 자정능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에 믿음이라도 남아 있는 모양이고요. 완전히 무지랭이는 아니란 말씀이지요. 저 또한 그래도 눈치도 있고 염치도 있습니다만, 정작 통찰이 문제겠습니다. 거기서 여전히 자기 울타리에 안 들어온다고 ‘적’으로 보는 시각의 소유자라면, 그를 가까이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에서는 또 정치세력에 빌붙어먹는 무리들은 과연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뭔가 사달나기 전에 도화선을 빼놔야겠습니다. 꼭 필요한 때가 오면 무슨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겠지요. 그때도 ‘어떻게 되든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자세겠습니다.
여전히 말이 겉도는 느낌입니다. 과연 그 무엇이 무서워서 진심으로 ‘잘 살아 주라’는 말도 한 마디 못 하겠습니까? 지금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인데요! 이 일에 보수니 진보니 수꼴이니가 어디 당할 수나 있겠습니까? 정말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그때는 확실히 ‘사랑’ 또는 ‘자비’가 작동할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무지랭이라고 우기며, 그런 건 전혀 못 받아들이겠다고 윽박지른다 해도, 저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요. 여기서 또 머뭇거리면 이제 인생은 다 가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여력은 더 이상 남아 있을 수도 없지요. 하다 못 해, 생명이라도 좀 오래 지켜내야겠습니다만, 알게 모르게 흘러만 가는 세월을 도대체 어쩐단 말입니까.
그게 뒤에 오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쯤 어느 언덕 구비 사뿐히 돌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분명히 저벅저벅 걷고 있으시겠지요. 아마도 그 역시 ‘혼자’일 것입니다. 결혼과는 무관하게 말씀입니다. 꼭 그 사람 아니라도, 누군가 걷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촛불시민’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태어날 테니까요. ‘촛불혁명’에 10대 청소년 또한 그 얼마나 많았습니까! 참, 복 받은 세대들이지요. 우리 시대의 희망들입니다. 우리의 아들 · 딸들, 조카들이지요. 그들에게는 더 이상 ‘헬조선’ 아니겠지요? 반드시 그렇게 키워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육”이 제대로 가야지요.
누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다 해도, ‘내 할 일부터 내가 해야겠습니다.’ 참으로 깨끗이 비워진다면, ‘삶이 보살펴주겠지요.’ 이제는 스스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케이 그 말씀에서 힘을 얻기도 했지만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야 ‘독립’에 힘쓰신 분들 국가가 찾아서 대우해드리기 시작한 모습입니다. 이게 “양립”이지 어찌 “독립”입니까마는. 한때는 ‘또 나라 잃는다면 누가 나서서 싸우겠는가?’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지요? 조선조 후기는 차치하고 구한말부터 따져도 백 년 넘게 쌓이고 쌓인 ‘악’입니다. 잠시 몇 년 관심 기울인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요. 하물며 적폐 스스로들 반성하고 물러갈 인간들이겠습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입니다만,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그 사회에 소개하는 일은, 저러한 적폐청산에도 더없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비로소 새 역사를 건설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팽개치고 달리 무슨 일을 하라는 말이겠습니까! 아직도 크리슈나무르티 출현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 많겠지요?
수십 번 되풀이 될 말씀입니다만, 한 마디로 고타마 싯타르타 이후 2,500 년 만에 다시 오신 부처님입니다. 제발, 이 사실만이라도 좀 주변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가운데 누구라도 한 사람, 그 말씀 읽고 ‘고해’를 깨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꼭 그러지 않아도 서서히 퍼져가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말씀입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있다.”고 몸소 말씀하시기도 하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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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마라.”
이 글을 쓴 지도 또 어언 꼬박 한 해가 지났군요. 바로 엊그제 쓴 것 같은데······. 다른 건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그 새 1 ‘년’이 그냥 지나버렸습니다. 세월이라는 것이 이렇게밖에 안 된다면, 앞으로 얼마가 남았든지 간에, 그야말로 ‘순식간’ 아니겠습니까? 참, 이거, 예삿일이 아니군요. 제 아무리 “고요”가 최고라고 해도, 최소한 다음 세대 애들한테나마 저게 그렇다는 얘기를 해주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 하나가 인생 지고지순의 “진리”인데, 교육에서마저 그런 건 싸그리 다 무시하고 다들 오로지 허공에 붕 뜬 채로 휘둘리고 있으니 말씀입니다.
하기사, 진짜 ‘아무 것도 안 하고’ 밥만 축내고도 살아봤으나, 그 기간이 ‘강산이 한 번 변할 세월’이었지만 말씀입니다, 그때도 뭐 별로 그리 찔리는 건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어찌 됐 건 간에 인간이 가고나면 ‘얼’이라는 것이 남기는 남겠지요? 이왕 저렇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해놨으니, 어디 가서 더 하소연 할 수도 없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설마 뒤로 무슨 꼼수를 부리겠습니까! “삶”이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행실이 고와야 남자지요. 모름지기 제 마음부터 그대로 살피고 또 살필 일입니다.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고요만이 남겠네,’ 그때까지 말씀입니다. 누구 하나 안 쳐다본다 해도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마지막 “고요”만이 남게 되고, 더 이상 들숨날숨도 사라지면, 그때는 뭐 ‘썩을’ 일밖에 더 남겠습니까. 그런 것 역시 뭐 걱정 안 합니다. 최소한 ‘국가’에서, ‘지자체’에서 몸뚱아리 하나 이건 처리해주겠지요. 다만 그래도 최대한 깨끗하게 남겨놔야겠지만 말씀입니다. 문제는 앞으로 남은 나날들 제대로 ‘살아내는 것’일 텐데, 그게 말씀이지요, 진짜로 남 따라 여기 어시장 댕기는 것뿐이라서 말씀입니다. ‘시장 가는 길’에 무슨 “고요”를 흩날릴 것도 아니고, 하물며 부르지도 않는 데 가서 억지로 “고요” 운운 하겠습니까? 거기 법 따르자고 ‘로마’ 가야 한다고요?
마땅히 가야 할 자리가 아니면, 부른다고 쪼르라니 다 달려갈 일은 아니지요? 누구 하나 “고요”에는 한 오라기 관심도 없는데, 더구나 가서 불편한 자리 같으면 왜 나댕긴단 말입니까? “깔까 말까 할 때는 가지 마라.”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예, ‘갈까 말까’ 할 것도 없어야지요. 반드시 가야 할 곳에만 갈 일입니다. 꼭 가야 할 때에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때는 “할까 말까”가 아닙니다. 그냥 해버리는 거고요. 그러니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지 마라” 하는 저 말 하나가 유명해진 것만 봐도, 인간들이 다들 그 얼마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단 말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갈등의 일상화”입니다. 그게 바로 “고해”에서 일렁이는 물결 하나하나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그런 게 없어야지요.
비록 몸은 저잣거리에 살더라도, 함부로 나뒹굴어서는 안 되겠지요? 설령 위태위태하다고 할지라도 끝내 망가지는 길로 들어서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과연 여기 누가 “고요”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포위망에 포섭된 자들에게 안 걸리기나 바래야지요. 비록 여태까지는 크게 망한 적은 없다고 해도, 앞으로가 더 문제다 싶습니다. 벌써 가버린 친구도 있고 말씀이지요. 그래도 “볼까 말까 할 때는 역시 보지 마라!”가 맞지 싶습니다. “갈등”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 “행동”입니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모순이고 타협 아니면 야합이고 결국 ‘뻘짓’ 쯤이겠지요. 그들의 이해를 바란다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고요”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뭘 ‘이해’할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게다가 역시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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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7] “나는 세상에 바라는 게 없습니다.”
처음 올리는 말씀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다시 이 말씀이 인터넷 온 세상에 게시되어 있군요. 마치 저더러 ‘너, 또 읽어 봐라!’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구러 ‘과연 나는 저런 처지 맞나?’ 스스로 물어보기도 하고 말씀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은 되어야겠지요. 그거 해결 못 해서 죽어나간다면 도대체 “삶”을 어떻게 살았단 말이며, 그런 인간을 어디 써먹겠습니까? 아무짝에도 몹쓸 인간이지요. 그리고 대한민국쯤만 되어도, 저런 마음의 인간은 아마도 굶어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글쎄요, 신변안전에 신경을 써야겠지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이 일은, 대한민국 사회에 비로소 한 포기나마 “진리의 싹”을 피워보고자 함이요 그런 작업이니까, 기득권들이랄까 여튼 그런 못 된 조직들도 있을 것이고, 안 드러나게 뒤에 숨어서 호시탐탐 노략질하는 세력도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 아니라도 하다못해 ‘페이스 북’ 활동도 원활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곤 합니다. 말도 한마디 못해보고 쫓겨난 그룹도 있고, 그런 것들 포함해서 관리자한테 부담되는 듯싶으면 그냥 나와버리기도 합니다. 무거운 절을 어쩌겠습니까? 홀가분하게 가벼운 중이 떠나야지요.
그리고 세상 어떤 사회일지라도 “진리의 흐름”이 이어지는 일이, 처음부터 눈에 띄게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세상이 있겠습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고여서 썩어가는 것이 그 속성일진대, 새로운 가르침을 처음부터 쌍수 들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기가 쉽겠어요? 물론 그런 이치라고 해도, 인문학도로서 한 개인이 당해온 그 내력들은 가히 말도 못 할 지경입니다. ‘대학의 부패’와 함께, “물방아 도는 내력”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무지무지 처절한 사연들로 뒤덮이고 휩싸여 있습니다. 어쩌면 아주 참담하다고도 하겠지요. 참으로 ‘못 할 짓’들입니다.
그런 건 제가 죽기 전에, 제가 이 세상 떠나기 전에, 그 내력들이나마 제대로 적어놓고 가야 하겠습니다. 뒷사람 누군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록일 수도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문건들은 이 사회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기록들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 지성이신 몇 분께는 오래 전에 보고해드린 것도 있지만, 그리고 몇 가지는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해놓기도 했지만, 그런 행동들과는 따로 본인 스스로 할 만큼 해놓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교하자는 건 아닙니다만, 우리 사회에 “난중일기”나 “백범일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게 그 얼마나 아쉬운 일이겠습니까!
결코 제 자신이 하고자는 일이라고 과장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그야말로 세계사 · 인류사 · 종교사 · 지성사적인 거대한 사건이라서, 제 아무리 훼방꾼들과 방해세력이 많다고 해도 결코 좌절되거나 도태되거나 왕따되거나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대한민국이 무슨 대원군 시절처럼 “쇄국정책”을 쓸 것도 아니고 말씀이지요. 정책적으로는 손도 못 댈 일이기도 합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가르침이 동방으로 전해지는 데는, 거의 800 ~ 900 년 남짓 걸렸다고들 하지요? 소수림왕 ‘아도,’ 백제 ‘마라난타,’ 신라 법흥왕 이차돈, 뭐, 그런 말들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그 전에 기록으로 안 남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씀이지요.
그러나 크리슈나무르티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진리의 말씀들이 이미 이 땅에 전해졌습니다. 번역된 책으로부터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번역 가운데 하나가 “굴레에서 해방을”이겠지요. 서울 법대 교수셨던 이흥재 선생님 번역입니다. 하도 고맙고 만나 뵙고 싶어서, 그때 그 시절 서울대 연구실까지 찾아가서 뵌 적도 있습니다. “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어떤 사명감으로 번역하셨을 거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번역 완성도도 그 시절 그 어떤 책보다도 높을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분 역시 딱 한번 만나고는 두 번 다시 뵐 수 있는 기회도 없었습니다. 돌아가시지나 않았기를 빌 수밖에요.
“나는 세상에 대하여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듣기에 따라서는 전혀 문제될 거 없는 진술일 수 있겠지만, 또 달리 보자면 아주 ‘위험한 발언’이 되어버립니다. 저렇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썩은 세상 지천으로 널부러진 소위 저 지성적이지 못 한 행태들에 대해서, 또는 그런 세력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손톱 밑의 가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말씀입니다. 정치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종교까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채 시작이 안 돼서 그렇지, 어떻게 시작만 제대로 될 수 있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저런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쪼록 꼭 그런 사람들이 한번씩이나마 만날 수 있는 구심점 같은 것은 있어야 할 터입니다. 아직은 여기 누구 하나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저잣거리에서 멀찌기 떨어져 있으신 분도 계실 것 아니겠습니까? 설령 그런 분도 하나 안 계신다고 해도, 이제부터나마 ‘애’들이라도 그렇게 키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시대일지라도 “길 찾는 젊은이”들은 분명히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젊은이들이 단 한 번이나마 밟아볼 수 있는 길이라도 하나 ‘외줄기’라도 닦아놔야겠습니다. 이 어찌 ‘젊은 학생’들에게 국한되는 일이겠습니까마는.
저로서는 모름지기 그냥 ‘구름에 달 가듯이’ 살아야 하겠습니다. 길도 ‘외줄기 남도 삼백 리’겠지요. ‘술 익는 마을마다’ 저녁놀이 타고 있을 것이고 말씀입니다. 저기 저 ‘나그네’가 세상에 단 하나, “지성” 따라 사는 거 말고 달리 무엇을 그리 바라면서 걷겠습니까? 다만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도 못 걷게 하는 더러운 세력들이나 좀 물리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러면 저럴수록 한 군데 성한 데도 없을 지들 소갈머리 뭐 그리 편할 거라고.. 왜, “미안하다”는 소리도 한마디 못 하는 주제에.. 조직 종교에 눈이 뒤집힌 인간들이야 또 달리 깨우쳐야 하겠지만 말씀입니다.
목월의 “나그네” 그 시를 그대로 한 번 더 읊어볼까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지훈 선생은 진짜 저렇게 살다 가신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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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9] ‘부평 같은 내 신세야..’
시절이 시절이라서 맨날 ‘세모타령’일까요? 그 비슷하게 저기서 이어지는 ‘혼자도 기막혀서..’ 그런 노래가 있지요? 그다지 귀한 대접 받는 것도 아닌 ‘유행가’입니다만, 그나마 이런 구절은 ‘최소한도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들여다보는 심성’의 소유자일 때에야 해당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오버’입니까? 마냥, ‘급행열차의 유리창에 코를 처박고 달려가고 있는’ 처지라면, ‘부평’이나마나 ‘신세’나마나 ‘기막히나’마나, 그렇게 한탄해볼 여유도 없는 인생들 아닐는지요? ‘문득’ ‘잠시’ ‘얼핏’ 그런 자기 꼴이 보일지라도, ‘기막히다’는 느낌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냥 ‘딴 짓’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요. 말이 거칠지만, “삶”으로 보자면, 다들 평생이 ‘딴짓’이고 ‘뻘짓’일 터입니다. “전체적인 행동”일 수 있으려면 “무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테니까요.
그러나 역시 “인생” ‘자기기만’의 실상에서 본다면, 세상, 그 어느 누구 하나 ‘기막히지 않는’ 처지는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지극히 드물겠지요. 맨날 하는 소리입니다만, 이 세상 모든 생명체 가운데 “삶을 ‘고해’로 살자고 태어나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말씀입니다. 도대체 “인생”이랍시고, ‘가꾼답시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지금 이 꼴이, 그야말로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단 말일까요? 그게 ‘뻘짓’이지요. 그래도 또 그러나마나 여전히 ‘해오던 그대로 하나같이 다들 꾸역꾸역 슬픔과 두려움을 집어 삼키고’만 있습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설령 평생을 다 달려봤자, 그 끝에는 딱 ‘낭떠러지’일 뿐인 것입니다. 물론, 그러나마나 또 ‘생각’으로는 ‘그래도 내가 이런저런 것들은 이루었다.’ 하면서 죽겠지만 말씀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 ‘나’로서 “분열”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분열되어 있는 그 ‘나’로써 뭔가를 ‘이루어놨다’고 해도, 그게 전체적인 영역에서 효능은 결국 인간들의 ‘분열’에 기여할 수 있을 뿐이지요? 막말로 해서, 어느 경상도 인간이 제 좋자고 해놓은 일이, 다른 지역에는 오히려 그 이상으로 ‘안 좋은 일’로 된다면, 전체적으로는 어찌 되는 것이겠습니까? 꼭 그런 식으로 ‘나’로서, ‘나’로써 뭔가를 이룬다는 게 과연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다들 평생을 그 굴레를 못 벗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 쳇바퀴가 너무나도 만연된 세상이라서 애초에 들으려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삶”이란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다들 딱 그 한 마디를 ‘아예, 안 듣겠다.’는 거지요.
하는 수 없는 일지만, 그래도 그 누군가의 귓가에는 그 무슨 울림이라도 생긴다면, 이런저런 한 마디는 그의 가슴 밭에 씨로 떨어져 결국 싹이 트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또 제대로만 커준다면, 기어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야 말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그런 식으로라도 퍼져갈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분명히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까닭만으로도,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덤덤한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 이치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입니다. 아무런 부대낌 없이 말씀입니다. 글쎄요, 무슨 병이 들어 죽는다거나 어떤 사고를 당한다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지만, 그 이전까지는 저렇게 ‘온전’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아마도 시나브로 껍데기 다 벗겨지고 알맹이만 남게 될 것입니다.
글쎄요, 또 하나 걱정되는 게 없지는 않습니다. 작년 글에도 “포위망” 얘기가 있습니다만, ‘병이라도 나주기를,’ ‘사고라도 일어나주기를,’ 그야말로 ‘비나이다 비나이다’ 바라마지 않는 저 ‘포위망 세력’과 그 끄나풀들 말씀입니다. 7 년 전이었군요. 몸에 안 맞는 ‘약’을 먹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쓰러졌던 적’이 있었지요. 그때도 그랬지만, 요새도 저들에게서 팍팍 느껴집니다. 명색이 고향 바닥에 산다고 사는 건데, 참 선한 마음 아니면 대충 ‘의원 · 병원’에서도 “편안하고 친절함”마저 못 느끼겠다는 말씀입니다. 7 년 전 저때도, 여기저기 병원을 다녔었지만, 저 ‘포위망 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것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쪼록 이제 불의의 사고는 없어야겠습니다. 주저리 이렇게 끄적거리는 것을 보니, ‘세모’가 되어서 그런지 우째 ‘신변안전’까지 걱정되는 것일까요? ‘지가 뭐라고..’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설마..’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배기 “삶”은 정말로 “무쏘의 뿔처럼 오로지 혼자서 간다.” 그런 자세겠지요? 그게 바로 저 말씀, “나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또는 “뭐가 어찌 돼도 좋다.”는 그런 마음가짐 아니겠습니까? 아무렴, 친구들이 있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행여 ‘굶주려’ 죽겠습니까? 제가 제 모습을 봐도, 여전히 온전하게 ‘참 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만, 어쨌거나 이리 흔들 저리 비틀, 그러면서도 기어이 가기는 간다고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또 그 동요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반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지금이 무슨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그런가 봅니다, 하루하루 더 으스스 추워지고, 그리운 이 누구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그야말로 ‘적적’한 것일까요? 더 깊이는 몰라도, ‘적적’은 아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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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7]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인간 세상, 인류가 지구상에 태어나고 250만년 내지 350만년쯤 된다고 하지요? 그 끝 무렵에 소위 인류의 4대문명 발상하고 어쩌구 저쩌구 배웠지만, 오늘날 들리는 소리는 그 4대 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이라는 것이 있었고, 거기에 “홍산문화”라는 것이 있었다고 하네요.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 단군할아버지가 바로 거기에 속하는, 아니 그런 문명을 주도한 세력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인류 4대성인 가운데 한 분, “공자”님도 사실상 자신이 “동이족”이라 하셨다 하고요. 이런 거 저런 거 어쨌거나, 서역 기원 2000 년 즈음에 인류에게 “성인”께서 다시 오셨다 가신 것입니다. 2500여년 전의 “고타마 싯다르타” 같은 분이시지요.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이런 말씀 한 마디조차 못 하게 하니까..
그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까 어쩔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상의 이런저런 부조리들이 하나하나 사라져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정말 ‘더 나은 세상’이 올 수가 있단 말이겠습니까? 그러나 부조리 그게 다들 ‘당연시’ 하던 것들이라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도 못하니 더 문제입니다. 그점저점 “고해”로 사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지금의 이런 모습 아니면 달리 어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지만, 펜데믹 시절에는 더욱 더, “깊이 병든 세상에 잘 적응한 몸이, 그 얼마나 건강한지 알 수 없다.”고 하시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도 저 본문 말씀처럼, 거기서 뭔가 딴 ‘마음’ 내어볼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글러먹은 거 아닙니까? ‘마음’이라는 것 그게 바로 저 ‘부조리’의 바탕일 테니까요. 거기서 ‘마음을 낸다’는 게 어떤 꼴이겠습니까?
그러니 달리 뭔가에 ‘마음’을 내어볼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몸과 마음을, 거기에 잘 적응한 몸과 마음이 어떤 꼴인지나 ‘잘 살펴볼 수밖에’요. 그게 바로 “알아채기”라고 불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효과 있는 명상[The only effective meditation]’ 아니겠습니까? 이 역시 참으로 거대한 ‘일갈!’입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자기 자신을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 중에, 다른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그 ‘자기지’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에 관심이 좀 있다고 해도, 그게 겨우 ‘말로만’이라서 말씀이지요. 실제로는 인생 다 살고 죽을 때쯤에 다달아도 전혀 모르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니 자신을 알아라!”고 그렇게 외쳤다는데도 말씀입니다.
저 말은 참으로 거대하고도 근원적인 “진리”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이 한반도에는, 구태여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 아니더라도 그러한 “진리의 흐름”이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으니, 그 옛날 “요하문명”이니 “홍산문화”니 하면서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아시아 동쪽 이 땅에 전해 내려오던 그 “고요”의 흐름이, 그 “자비”와 “지성”의 흐름이, 그런 “진리의 흐름”이 좀 더 일깨워지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비록 한반도 그 누구도 장려하지 않는 일입니다만. 그런 것이 오늘날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으로 해서 하나의 ‘도화선’이나 ‘뇌관’ 쯤 될 수는 혹시 없을까요? 더 활성화되는 계기로서 말씀입니다. 저런 “진리의 흐름”이 너무나도 깊이 파묻혀 흐르고만 있는 듯하기에 말씀이지요. 심지어는 ‘이 땅에 과연 그런 게 있기는 있나?’ 하는 악다구니 비슷한 꼴들뿐입니다. 모조리 한 배 타고 있는 꼴이고, 계란 한 바구니에 다 담은 꼴이지요.
그렇다 해도, 한평생 좀 의미 있게 살아보자면, 모름지기 저런 “진리의 흐름” 끝쯤에 가닿을 그 “고요” 속에 머물러 살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실상은 ‘끝쯤’도 아닙니다. 처음이나 끝이나 간에 두루 다 “고요”지요. 게다가 오로지 그 하나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니까요. 또한 거기에 무슨 ‘끝’이 있는 흐름도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저 “고요”에 접근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란 오로지 과거나 미래로만 존재할 뿐, 소위 ‘지금·여기’라고 불리는 이 순간순간의 “삶”에 이를 수가 없는 이치지요. 다시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만, “나”는 ‘지금·여기 또는 순간순간의 현재에는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새벽별을 바라보는 그 첫순간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그런 말씀도 있지요. 그러므로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셨고요. 저 역시 아득하기는 매일반입니다만.
모든 생명체의 근원으로서 “삶”이란 ‘나’와는 완전 무관한 영역이며, 그건 세상 그 누구라도 도대체 단 하나 뭘 어쩔 수도 없이 고유하게 흘러가는 에너지인데, 세상 모든 인간들은 하나같이 ‘나’를 그 속에 집어넣고서는 아주 발광을 하고 있으니, “삶”이 정작 인간 각자에게 와서는 마냥 망가지기밖에 달리 어찌 될 수가 없는 이치이기도 하지요. 연결이 제대로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람을 붙잡으면 그게 바람이냐?” 그런 말도 있지요? 거기서 ‘바람’을 ‘삶’으로 대체해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영역이 바로 “종교”이기도 하겠지요? 세상과 인간에게 “으뜸 가르침[宗敎]”이라는 것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지구 위에 정말로 종교다운 종교는 달리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각각의 조직으로 인간들을 마냥 갈기갈기 갈라놓고 있음에야, 더 ‘닐러므삼하리요’ 아니겠습니까? 그러고서야 어찌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이 세상 그 누구 그 무엇이든지 간에, 설령 그게 극락이나 천국에 공짜로 데려다 준다는 제안이라 해도, ‘나’가 아등바등하는 상태라면 이미 “삶”은 아니고 따라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치 아니겠습니까?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행복”으로 이끌어준다는 저 수많은 ‘교리’들 다 물리쳐버려야겠고요. 그저 오로지 “삶”이 아니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나’가 있는 한, “나는 아무래도 좋다(I don’t mind).”고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나’라는 건 나서기만 하면 사사건건 “불행”을 잉태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나 또한 누가 뭐래도 다들 ‘나’를 바탕으로 살아들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 ‘삶’에 허무·허망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전부 다 하나 같이 꼭 그러고 살고들 있습니다. 그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하나에만큼은 아예 관심도 없거든요. 더구나 그렇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한동안 ‘속이 시끄러워’ 번역이고 해설이고 넋두리고 간에 아예 손을 떼고 살았더니, 이제는 글 나부랭이도 횡설수설 전혀 짜이지가 않습니다. 설령 잠시 외부적으로 좀 조용하다고 해도, ‘돌발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는 꼴이고 말씀이지요.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도 환영 안 해주는 일인데다가, 오히려 그다지도 저다지도 고약한 꼴들밖에 안 보입니다만, 진짜로 이제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좀 ‘평온’하게 지내볼 마음 터전도 마련을 못 한 채로, 그저 어두운 밤바다 “밤배”처럼 흘러만 가고 있나 봅니다. “반달”마냥 서쪽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래도 그러나 저러나 간에, 여기가 끝인지도 모르지마는, 아직은 완전히 다 늙어빠진 건 아니니까, 우째도 가는 데까지는 가게 될 터입니다. 설령 제 아무리 고약한 “코로나19”라도 감히 못 막을 길이지요. 아무래도 저 ‘구름에 달 가듯이’는 아닌 모양입니다만.
‘속 시끄러운 것’ 때문에 말이 더 샛길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술이나 담배 따위 습관을 끊자는 결심이나, 열정적이지도 않은 직장을 그만 두자는 ‘퇴직’ 또는 아예 아무래도 “사랑” 아닌 것 같은 결혼생활에 ‘이혼’해버리자는 판단, 그런 것들을 ‘혁신’이라고 불러주지도 않지만, 더구나 ‘혁신’도 아니고 “혁명”이라면 다들 엄두도 못 내는 일입니다. 그런 마당에 이른바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면, 그야말로 ‘열흘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 아니겠습니까? 케이 말씀은 바로 “그거”거든요.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일지라도 제대로 되는 “인생길”은 바로 그 “혁명” 아니고는 고스란히 저 ‘호박’ 꼴일 뿐입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지요. 그럼에도 다들, ‘그냥 이대로 살자 죽자.’는 심보일 뿐이고, 좀 좋게 말해준다고 해도, 기껏해야 ‘그런 대로 한 세상 가라시구려.’ 그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나’ 이거 이냥 이대로 두고는 도대체 안 되는 걸 어쩌겠습니까? 가다가다 하다못해 아직 세상 안 나선 애들이나마 제대로 가르쳐야지요.
“나한테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로 시작하는 말씀인데, 전혀 문제없는 인간도 아니면서, 역시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네요.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누가 뭐래도 ‘본문’만이 중요하니까 해석이랍시고 덧붙이는 끄적거림은 전혀 신경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없는 것보다 못 한 꼴일지도 모르니까요. “본문” “말씀” 제대로 읽어보는 사람도 없는 마당에, 이런저런 주절거림으로 더 따분하게 하는 따위나 아닐까, 늘 저어됩니다. 그래도 마음 한 귀퉁이에는, 싯다르타 그 분과 똑 같은 가르침의 크리슈나무르티, 그야말로 “성인” 출현의 이 거대한 사태에, 그런 시대를 살면서, 단 하나라도 뭘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꼼지락거림도 있고 해서 이리저리 적어보는 것뿐입니다. 여기서도 모순인 것이, ‘마음 낼 일’이 아니라, 그렇게 이미 ‘저절로 마음 드러나는 꼴’을 더 이상 ‘나’ 개입시키지 말고 그냥 지켜보라, 바라보라, 그 말씀인데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이 세상에 “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살다가는 일일 뿐인데 말씀이지요.
그런 사람들 아니면, 오늘날 제 아무리 홍콩 시위나 미국 시위 따위들이 격렬해진다고 해도 세상은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은 채”로, 여전히 수많은 ‘나’의 폭력성을 바탕으로 굴러갈 것임은 불을 보듯 빤한 이치입니다. 지난 일입니다만, 거기서 대한민국 “촛불혁명”이라 한들, 과연 그 얼마나 저 ‘근원’에 다다른 흐름이겠습니까? 모름지기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저 “근원적인 혁명”을 일으킬 방도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설령 대한민국이 소위 선진국 반열에 오른다 해도, 기왕의 선진국들이라고 ‘물질적’으로 말고 중진국 후진국들 보다 도대체 뭐 하나 더 나은 게 있었단 말입니까? G7이랍시고 그들이 이 세상에 뭘 그리 “이바지”한 게 있단 말일까요? 오히려 세계대전 일으키고 아시아 침략하고 유대인들 다 죽이고 했던 인간들이 누구였습니까? 게다가 저 악명 높은 “마녀사냥”이나 “노예무역”은 또 어쩐답니까? “국제정세” 운운하고 말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단 한 사람’이라도 “사람이 먼저”입니다. 이다지도 빤한 얘기를, 왜 입도 뻥긋 못 하게 가로막는단 말이지요? 아무도 하려고 않으면서 말씀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자.’면 영원히 요모냥요꼴 못 면할 터입니다. 또 더 주절거림이 마냥 늘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만 끊어야겠네요.
그래도 마음 끄트머리 뭔가가 더 남아 있어서, 제가 쓴 시 하나를 옮겨 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산 길”이라는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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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어질 것이다 어디론가
가다 보면
별 하나 내리고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멀리
낮은음으로 등불이 켜지고
사람 사는 소리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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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9] ‘나 하나야..’
읽을 때마다 새삼스럽습니다만, ‘나 하나야 뭐가 어찌 돼도 좋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참 근사한 말 같아서, ‘이런 말씀에는 몇 마디 소감이나마 더 달아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실상은 그게 아니었든지, 하루씩 이틀씩 하릴없이 날짜만 가고 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말씀은 스스로의 다짐으로라도 곱씹어봐야 할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다들 각자 스스로 과연 저런 자세로 살고 있는가 물어보고 돌아보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여전히 마음뿐, 정작 거기서 더는 손이 안 갑니다. 마냥 이러다가는 세모 다 지나고 해마저 훌렁 넘기겠군요. 그러지 않아도 한파 엄청 쎈놈이 몰려와서는.. 옷을 아주 불편할 만큼 겹겹이 껴입고 있는데 말씀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좀 춥게’ 살아야 한다고도 하니까..
그나저나 위 글 올린 게 벌써 1 년이 지났나.. 싶군요. 한 해, 두 번 세 번 올린 글일까요? 참, 매력적인 내용상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뭔가 토를 더 달아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담백한 맛이라도 어찌 좀 나겠습니까마는. 아무래도 뭔가 ‘사고력’이 소진된 것만 같습니다. 그래저래 일상사 하나.. 최근에 불거진 일도 아닙니다만, ‘무소유’ 어쩌구 한다고 가진 거 다 남 주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더구나 ‘가진 거’ 쥐뿔도 없는 주제라면 말씀입니다. 뭐, 어떤 반대세력이 뒤를 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어느 그물 어느 낚시에 걸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친구’라고 덥석 믿었다가 참 모질게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걸 두고도 ‘나는 뭐가 어찌 돼도 좋다.’며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기사 평생 모은 노후자금 반 너머 훌쩍 날린 친구도 있고, 평생 애지중지 금지옥엽 악착같이 안 쓴 ‘돈’ 반의반도 채 못 남긴 친구도 있던데요. 거기다 대고 ‘그래도 니 목숨 잃은 거보다야 훨씬 낫다.’고 위로해 준다면 오히려 의절이나 안 당하겠습니까? 그렇게 다시는 못 볼 친구를 스스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저야 뭐, 그런 재력들 새발의 피만큼도 없습니다만. 그마저 하다하다 벼룩이 간을 빼 먹더라고.. 참 지독한 수구꼴통들.. 인간이라는 게 그 참, 무한하게 포악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한껏 모아놓은 것도 엄청 많으면서 말씀입니다. 제 주제로는 세상 태어나서 한 평생, 월급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는데 말씀이지요. 철도청에 상납하기에도 빠듯했다고 한 거야, 시절이 그런 시절이라서 그랬다 치더라도요.
내용도 별로지만 글 연결도 안 매끄럽군요. 잘 써지지도 않고 해서, 지난 거 뒤적여보니까, 바로 한 달 좀 더 지난 즈음에 이 비슷한 말씀이 게시되었군요. 그래서 저 ‘데자뷰’ 아닌 효과쯤 되는 게 일어났던 것도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비밀이 뭔지 알고 싶습니까? 보세요들, 뭐가 어찌 되든지 간에 나한테는 마음 안 쓴다는 겁니다(Do you want to know what my secret is? You see, I don't mind what happens).” 그 말씀인데요. 이게, 비슷한 말씀, 같은 말씀 아닙니까? “진리”를 말씀하실 뿐, 거기서 파생되는 다른 모든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듣고자 하는 이는 와서 들어라..’ 그런 뜻도 되겠지요. 물론,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야,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하겠지만 말씀입니다.
그런 거 저런 거 전혀 관심 없이, 소위 한때 ‘잘 나간다’던 친구들도 이제는 ‘허전하다’고 하고, 심지어는 ‘내가 왜 그리 살았을까?’ 하고 있는 친구도 있습니다. 급기야 ‘콱, 주거삐가?’ 그러는 인간도 있고 말씀이지요, 그 와중에 아직 ‘조직’에 명줄 안 떨어진 친구라고 차안의 ‘이런저런’ 생각 안 해보겠습니까? 그러구러 막판 피치를 올려본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 ‘방향’이라면 최소한 ‘허전’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잠시 고무줄 잡아 늘여보는 꼴일 뿐이겠지요. 정말 ‘막판’에 “방향” 바꾸기는 진짜 쉽지 않겠지요? 한평생 ‘서쪽’으로 가다가 그야말로 인생 만년에 그냥 “동쪽”으로 가는 거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삼천리 금수강산 어디, 가물에 콩나듯이라도 있겠습니까?
또 말이 엇길로 접어듭니다만, 성인으로, 미륵불로 이 세상에 오셨어도, 각종 종교들 베껴먹기 좋게 말씀을 남겨놓으셨다면, 저들에게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봐라, 미륵불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하든지, ‘새로 오신 성인 역시 하느님 종이다.’ 하든지, 뭐 그런 따위로 울궈먹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말씀을 남겨놨을 리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가 못 하니, 완전 무시해버리든지 아니면 ‘아마추어 메시아’라고 비아냥거리든지 하는 거지요. ‘프로페셔날 메시아’는 도대체 어떻게 한단 말인지.. 역시 ‘복 줄 테니, 나를 믿어라!’ 했단 말입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 바탕이 요모냥요꼴인데 거기서 어찌 자기만 무슨 복을 더 받겠다고..
온 세상, 설령, ‘지속가능’이라고는 해도 “성장” 자체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지구촌 바탕이나 그냥 인생 바탕을 보자면, “인간”으로 태어난 거 빼고는 도대체 무슨 ‘복’을 더 받을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거 아니란 말이겠습니까? 모름지기 “인간으로 태어난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가야지요. 그 “즐거움”은 도대체 하나도 모르면서들..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들.. 애초에 ‘나’ 때문에, 그거 그냥 두고는 아예 빼도박도 못 하게 되어 있는 거지만요. 그거 해결 안 하면, 앞으로 천년만년 두 평생 세 평생 더 살아본들 별로 의미 없다는 말씀이신데 말씀입니다.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게 딱 그 꼴이다.’는 말 한마디를 왜 못 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게 ‘노빠’니 ‘수꼴’이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야말로 “성인의 시대”를 살면서도..
해방전후사, 흘러흘러 “재조산하,” 대한민국 사회에서, 더구나 정치적으로는 오늘날 삼천리 방방곡곡 민주화에 영 전혀 안 도와주는 ‘역병’까지 돌고 있으니, 소위 ‘경제’에 목매달고 있는 서민들 등쌀에, 앞으로 “정권교체”는 한층 쉬워질 거 아니겠습니까? 그 옛날 “못 살겠다 갈아보자!”까지는 아니라 해도 말씀입니다. ‘찬탈’을 노리는 무리들, 따로 무슨 계략 신책 묘산 궁구 별로 안 해도, 그 “정권찬탈,” 그저 ‘누워 떡먹기’ 호재 아닌지나 모르는 일이겠지요. 제 아무리 ‘방역’ 잘 했다고 해도, 돌림병 ‘발병’ 자체가 정권에 결코 ‘호재’가 될 리가 없을 터입니다. 더구나 저렇게도 어렵게, 힘들게 ‘꾸불텅꾸불텅’ 굴러가고 있는 “검찰개혁”을 봐도, 장관이 세 사람이나 바뀌어도 ‘개혁’은 아련한 것 같고, 오히려 그 덕에 ‘야권후보’만 키워가는 것 같습니다.
더 따져서 설령 “방역”을 세상에서 제일 잘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요.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고 했다던가, 그 엄청나다던 ‘촛불’도 이제는 시나브로 다 꺼져버렸지요? 글쎄요, 다시 정권 바뀌고, 또 한 5 년쯤 혹은 10 년쯤 뒤에 우리는 또다시 촛불 들고 광화문에 모여야 하는 걸까요? 그때는 몇 사람 모이는 인간도 별로 없겠지요? 저들이 ‘5인 이상 모임 금지’에서 무슨 ‘힌트’를 얻든지 해서 말씀입니다. ‘5호담당제’는 아니라 해도 말씀이지요. 소위 “촛불혁명” 아니었다면, 코로나 팬데믹 “방역”인들 이만큼이나마 해냈겠습니까? 악의적으로 끌어온다고 하실지는 몰라도, ‘물에 빠진 애들도 못 건지는 세력’들이었다면, 도대체 역병방역 과연 지금 반의반만큼이라도 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물론 지금 아주 ‘완벽’하게 해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말씀입니다. 누군가 카톡으로 대한민국 ‘방역실패’에 대한 ‘소문’을 일부러 보내와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 이것저거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군요. 그 사이 진짜로 새해가 와버렸고, 또 며칠이 그냥 꿈같이 흘러버렸습니다. 딱히,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별로 알차지도 못 한 요런 주절거림, 더구나 누구 기다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글 나부랭이, 쉬엄쉬엄 쓰다 말다, 끝내 그냥 집어치워버려도 누구 뭐랄 사람 아무도 없어서 말씀이지요. 오히려 ‘궁시렁거리지 마라!’는 압력만 하루하루 나날이 쩡쩡 ‘이마받이’ 할 수 있을 만큼 날아들고만 있습니다. 하다하다 설마 생명 위협까지는 안 하겠지요? 스스로 ‘지까짓 게 뭐라고..?’ 그런 생각도 들지만, 그나마 고향인데도 무섭습니다. “시간”으로서의 ‘두려움’에 떨고 사는 거지요. “생각”일 뿐인데도 말씀입니다. 그래서라도, 그때, 젊디젊은 그 당시, ‘귀향’ ‘낙향’ 안 할 수 있었어야 하는 건데요..
어쨌거나 몇몇 친구 분들께, 이것으로 새해인사를 대신할랍니다. 다들 부디, 코로나 조심하시고,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계시기를 바라마지 않나이다. 당분간 얼굴이나마 볼 수 있는 날도 안 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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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비록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그야말로 지성사적 · 종교사적 · 인류사적인 “성인(聖人)”께서 출현하신 시대, 그 알짜배기 가르침들이 누군가가 ‘큰일 났다’며 막아선다고 안 퍼져가겠습니까? 처음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만요. 그러나 아시아 동쪽 끝 대한민국에서는 아주 효과적으로 ‘안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웃 두 나라는 아주 더 형편없는 것 같고 말씀이지요.
보나 마나 독재국가에서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화(和)’를 내세우면서 ‘칼’ 가지고 백성들 샥샥 베어온 나라 역시 아주 확실하게 동여매 놓을 수 있겠습니다. 뙤나라든지 왜나라든지 심지어 반만년 금수강산일지라도, 그 가르침이 퍼지나 마나, 그 어드메 누구 혼자서라도 그렇게 “진리”의 “행복”을 누릴 일입니다만.
제 아무리 천근만근 공구리처럼 굳어 있는 사회일지라도, 분명히 저렇게 홀가분하고도 실속 있게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또 누리시는 분 안 계실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이어 이어온 반만년 너머 이 땅에서라면 말씀이지요. 그게 왜 하필 오늘날 와서 끊기겠습니까. 걱정할 거 하나도 없겠습니다. 오히려 단 한 분이라도 더 늘어났을 터이고요.
그런 분 가운데 한 분 말씀, “이런 흐름이 있어야, 사회가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는다.”고 하셨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모름지기 ‘먼넘 안 푸고,’ 먼눈팔지 말고, 제 길 그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요. 그러면 ‘길’은 저절로 이어진다는 소리 아닙니까! 누가 어떻게 이어갈지는 모른다고 해도 말씀이지요. 오로지 제 모습 제대로 잘 보기나 할 일입니다.
저 “진리의 말씀”에 하릴없이 이런 주절거림들이 ‘사족’ 아닐 리가 없지만, ‘한 말씀’ 더 드리자면요.. ‘그렇게 신경 안 써도 이어진다매?’ 하며 멀찌기 나앉은 모리배들은 역시 그렇다 치더라도, 오히려 배알 탈난 채 발 벗고 나서서 ‘가로막는 건’ 또 무슨 헛짓들인지요? 왜, 어째서, 그다지도 배배 뒤틀린 심보들을 가지게 되셨을까? 참, 불쌍한 중생들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려.
본문 말씀 같이, 저런 분은 누구나 “세상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고 사시는 거지만, 그 존재 자체로 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이 반만년 금수강산에 ‘무의식’으로나마 그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런 보답도 없이, 따로 뭘 원하지도 않고.. 오로지 “삶”을 살고 계시는 거고요. 그 시절 오로지 ‘나라 찾겠다’고 형장의 이슬로, 일신을 불사른 독립투사보다 더 근원적인 자세 아니겠습니까?
나그네 ‘마음고생’이야 없었겠습니까만,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참, 매력적인 시구입니다. 더불어.. ‘비록 나라 찾겠다고 한 일이지만, 왜넘이라도 사람을 내 그렇게도 많이 죽였으니, 나도 죽는 게 이치에 맞다. 이번 일은 내가 다 뒤집어쓸 테니, 너는 광복된 조국에서 늙으신 어머니와 잘 살아라.’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독립투사 말씀도 새록새록합니다.
[ 본문, 같은 말씀을 한 해 두 번씩 올려져 있는 머리, 그걸 합쳐본다고 해봤습니다만, 오히려 더 어지럽게 돼버렸지요? 어쨌거나 한동안 올리지도 못 한 글.. 이렇게라도 한번 올려봅랍니다. 2024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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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I don't mind what happens
별 것 아닌 거 같지만, 참 대단한 경지에서 나온 말씀이네요. 우리도 뭐 될 거 같은 느낌이 있지만 저렇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
역시, 답글 달아놓으셨군요.
'우째도.. 간간이나마 '한 줄'이나마 올리시라는 뜻일까요?
여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