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이 최초로 익힌 무술은 아버지 이해천으로부터 배운 태극권 입니다만, 이것은 현재도 일부에 전해지고 있는 격투무술로서의 태극권이 아니고, 건강체조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해지는 것이 정설입니다. 즉, 홍콩의 공원등에서 볼수있는, 여러 노인들이 아침 일찍 건강체조삼아 하는 것같은 느긋한 것입니다.(의문은 있습니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은 호가태극권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소룡이 양가태극권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촬영된 사진도 다수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90년대에 홍콩의 TV 방송국이 제작한 드라마에서는 무도인으로서도 유명한 류가량이 이해천으로 분해, 무술에도 뛰어난 부친으로서 그려져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단순한 각색이라고 생각됩니다.)
1953년, 공부는 싫고 싸움에는 자신있던 13세의 소년 이진번은 어느 날, 간단하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상대에게 져버립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쿵후를 배우고 있었던 것을 알게되고는 자신도 정식으로 무술에 입문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 입문했던 것이 영춘권의 달인 엽문선생의 영춘권도장이었습니다.
도미할 때까지의 5년간이었지만, 광적으로 무술수련에 열성을 보였던 이소룡은 경이적인 스피드로 영춘권의 중심기술을 흡수해 나갔습니다. 나쁜소행은 여전했지만, 1958년의 고등학교 복싱대회에서는 3년연속 챔피언을 지낸 영국인을 영춘권테크닉만으로 1 RKO 해 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영춘권은 기본적으로 중심을 뒷발에 많이두고, 직선적인 수기나 낮게 차는 기술을 사용 하는 무술로, 자세가 큰 수기등은 이용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양손을 봉해 버리는 기술이나 공격을 주고 받으며 카운터 펀치를 넣는 등의 테크닉에는 매우 우수합니다. 또, 오로지 짧은 틈에서의 찌르기 공격은, 후의「이코노미 라인」이라고 하는 JKD의 발상의 원형이 됩니다만, 실전(싸움^^;;)에서 이소룡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같은 시기, 그가 서양식 복싱을 연습한 이야기나 다른 무술을 배운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엽문선생이 말하는「무술을 배우는데 있어서의 정신성」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소룡입니다만, 그 실전성에서의 회의, 탐구심은 본능적으로 눈뜨고 있던 것 같습니다.
또, 도미하기 전에는, 황비홍의 손자 제자에 해당하는 꽝조우 정무 체육회 출신의 달인 소한생노사로부터 차기기술을 배웠습니다. 후에 연기한 「정무문」의 주인공처럼, 이소룡도 사실상 정무 체육회의 직계제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덧붙여 소한생노사는 무술의 대선배인 것과 동시에, 배우로서도 베테랑인 같은 분야의 선배이기도 했습니다.
정확한 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1964년경까지 이소룡이 배운 것 같은 쿵후의 기록이 있습니다. 홍가권, 금나수, 당랑권, 미나미파 당랑권, 호조권, 백학권 등입니다. (1964년의 오디션필름을 보면, 그가 다종의 스타일에 접했던 것은 명백합니다. 그 천재성이란 - 배웠던 시기나 기간을 모르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만)
1959년, 타류시합에서 상대에게 중상을 입힌 일, 조계지에서의 대립하던 불량그룹이 몇명인가에게 중상을 입힌 일등으로 아버지 이해천은 걱정끝에 이소룡을 미국으로 건네보넵니다. 미국에서 다니기 시작한 에디슨 직업학교에서, 클래스메이트에게 부탁받아 무술교사가 됩니다. 그 무렵 그가 가르치고 있던 무술의 내용은, 거의 영춘권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도나 가라데가 유행하고 있던 당시의 미국에서,「중국무술의 훌륭함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가지기 시작한 이소룡입니다만, 돈도 기반도 없는 당시에는 그야말로「꿈」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에 만난 타키 기무라(제자이자 친구)가 후에 그에게 중요한 어드바이스를 하게 됩니다. 1961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한 이소룡은 철학을 전공, 놀라울 만큼 근면하고 성실해져 있었습니다만, 타키 키무라의 권유로 정식으로 도장을 열었습니다. 「진번국술관」 본격적인 직업으로서의 무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노자나 인도의 사상도 깊게 추구해, 무술에 있어서의 정신적 신념도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진번국술관」에서 가르치는 이소룡의 무술은 영춘권을 모체로, 전통은 존중하지만 실전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개량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번쿵후'라고 불리워져, 전통영춘권에는 없는 많은 기술들이 이소룡의 독자적인 연구를 거쳐 받아들여진 '이진번류 쿵후'인 것입니다.
1964년, 도장경영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오클랜드로 이사한 이소룡은, 시애틀의 도장을 타키 키무라에 맡기고 제2의「진번국술관」을 개설합니다. 그 파트너는 1962년부터 그의 제자였던 제임스 리로, 권법, 유도, 아마츄어 복싱의 경험도 있었고, 1938년에는 웨이트리프팅의 북부캘리포니아 기록을 만든 사람입니다. 또, 이 해에는 이소룡의 인생전반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 집중되었던, 분기점같은 것이었습니다. 결혼, 할리우드 배우로 진출하는 계기가 됬던「 롱비치 인터내셔널 가라데 챔피언쉽」에서의 연무, 그 대회를 주최했던 에도.파커와의 만남, "미국 태권도의 아버지"라고 말해졌던 준.리와의 교류도 이때부터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개겠지요.
댄.이노산트와의 만남.(에도.파커의 수제자이기도 한 이노산트입니다만, 그도 유파나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가지 무술을 수행하는 유연한 발상과 행동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롱비치의 대회에서 게스트인 이소룡을 본 그는, 금새 의기투합, 타키 키무라, 제임스 리처럼, 이소룡의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됩니다. 또한, 후에 이소룡 출연영화로 온 세계에서 유행한 쌍절곤도 이노산트가 이소룡에게 전수한 필리핀의 무술중의 하나입니다.)
또하나, 1964년말, 지금은 전설이 된「대결」이 있었습니다. 국적,인종에 관계없이 쿵후를 가르쳤던 이소룡에게, 전통 무술인들로부터 이러한 내용의 도전장이 온 것입니다.〈쿵후는 중국의 비전이다. 도장을 폐쇄하든지, 외국인을 가르치는 것을 중단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대표와 겨루어야 한다.> 영화「드래곤/블루스.리 이야기」에서는, 극적인 두번의 승부로 그려져 있습니다만, 사실은 지극히 심플합니다. 장소는 오클랜드의 진번국술관. 결과는, 약 30초로 이소룡의 압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기기는 했지만 이소룡의 내면에는 큰 과제가 생깁니다. 자신의 예상으로는 좀 더 단시간에 넘어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이소룡은 격투는 6초안에 끝나야 한다고 말해왔다고 합니다.) 생각과는 달리 시간도 체력도 자신의 생각이상으로 소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던 효율적인 전법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이소룡은 그「승리의 과정」을 반성하며, 한층 더 진번쿵후를 세련되게 만들수 있도록 연구합니다.
이 대결 이후 이소룡은, 여러가지 격투기를 계속 연구해 갑니다. 복싱이나 펜싱의 실전적 풋워크, 무에타이나 사바테(프랑스의 발차기위주무술)의 킥킹등. 현재는 널리 쓰이고있는 튼튼한 킥 미트, 오픈핑거 글러브(손가락이 나오는 글러브 - 꺽기, 잡기등을 가능하게 만든것입니다) 등을 고안해, 연습프로그램에 할용합니다. 또, 전통영춘권의 목인장을 사용한 연습법을, 실전에 맞는 것으로 개량하는 등,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자꾸자꾸 거둬들이며, 반대로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실전적이지 못한것은 주저없이 지워내 갑니다.
진번쿵후는 스타일(형식,유파)을 넘는 것으로 진화해 가고 있었습니다. 현재 들어와 인기를 얻게된 감이 있는 종합 격투기를 30년전부터 만들어내, 이론뿐만이 아니라 실천하고 있었던 사람이 이소룡인 것입니다.
스타일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종합 격투기를 창조한 이소룡이었습니다만, 때때로 곤란한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격투방법을 물었을 때, 한마디로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형태를 가지지 않고 아직도 진화하고 발전해 나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기성의 무슨류, 무슨파라고 하는 좁은 범주안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소룡은 이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만,「상대의 공격을 인터셉트 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보다,「절권도」라고 하는 명칭이 무엇에라도 이름을 붙이고 분류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편리했던 것뿐인 것입니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도장을 만들어, 무술의 지도를 시작한 것은 1961년의 일입니다만, 그 시기부터 「절권도(Jeet Kune Do)」의 이름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절권도(Jeet Kune Do)」의 명칭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 1966년·3월입니다.
어느 날, 이소룡과 댄.이노산트는, 차 안에서 여느 때처럼 무술이나 스포츠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팬싱의 "스톱.힛트 Stop-Hit"에 이야기가 미쳤을 때, 이소룡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방법은, "Stop-Hitting Fist Style" 혹은 "Intercepting Fist Style"라고 불러야 한다.」
「그것을 중국어로 말하면? 」 「절권도 Jeet Kune Do 라고 되는 것일까...」 이 때, 처음으로「절권도 Jeet Kune Do」의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Stop-Hit"라는 것은 기선을 제압하고 자신의 공격만을 히트시키는, 공방일체의 고도의 기술입니다. 항상 가장 유효한 공격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던 이소룡에게 있어,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것에 제일 가까웠습니다. 상대의 공격을 받거나 피하거나 한 후, 반격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상대의 움직임을 감지해 카운터를 히트시키면, 효과는 보다 클 것입니다.
한층 더 후의 일로, 이소룡과 이노산트의 사이에「JKD = 훌륭한 것」이라는 뜻으로 쓰여져, 마음에 들었다!라는 뜻으로 사적인 대화에서도「이 요리는 JKD!」「어제 본 영화는 JKD였어!」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즉, JKD는 무엇인가 뛰어난 것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고, 이소룡 자신도, 자신의 격투기방법만을 나타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JKD」&「Jeet Kune Do」의 명칭은 점점 퍼져 갔습니다. 1967년에는「블랙.벨트」지에 소개되어 매스컴에 첫등장 합니다. 점차 이소룡은「절권도는 무술의 하나의 유파나 하나의 형식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첫댓글 길다..-_-
한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무술인.. 영화배우가 아니었더라도 유명해졌을 사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