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그 천년의 역사 찬란히 빛나다
德業一新 網羅四方 (덕업일신 망라사방)
'신라'의 이름은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따온 말인데,
이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물이 사방으로 펼쳐지듯 하라'는 의미이다.
'신라'라는 국명을 정한 것은 덕업일신(德業日新)의 '신(新)'과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라(羅)'를 합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조(條)와 삼국유사의 왕력(王歷) 기림(基臨) 이사금 조에 보이는 기사로서,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이는 후세 유교사상의 영향 하에서 왕도사상을 강조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라는 국호의 사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조에,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고도 칭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 왕이 이에 따랐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보아 지증왕 이전에는 신라 외에 여러 가지 칭호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 기림 이사금 10년(307)에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때의 기사는 여러 이름 중에 하나인 '신라'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증왕 4년(503) 부터 '신라'라는 단일화된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또한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 또는 '왕(王)'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부터 지금 22세(世)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方言)으로만 부르고 존귀한 호칭으로 바로 잡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호칭을 올립니다"고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신라의 불꽃
박물관 전경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다
박물관 전경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
신라에는 종묘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도가 있었으며
제사는 중요한 국가 행사였습니다.
종묘에서는 왕과 왕비의 제사를 일 년에 여섯 번 지냈고...
당나라 복식을 받아들이다
벼루들...
국학을 설치해 학문을 장려하다
'을' 글자를 쓴 그릇이 발견되다
꽃피는 문화
통일신라의 문화는 정치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한층 발전했다.
특히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교루가 자유로워지면서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였고
유교와 ㅂ루교의 경전을 수입하거나 유학생을 보내는 등 외교적인 실리도 얻었다.
왕릉은 당나라의 능원제도를 받아들여 석인상과 사자상 등의 석물로 정성 들여 꾸몄다.
평지에는 큰 절을 조성하고 금당 앞에 두 개의 탑을 두는 쌍탑식 가람 배치가 성행했다.
석탑 조성의 기준은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으로 완성되었다.
덕이 높은 승려를 기리는 부도와 비석도 많이 세웠다.
불교조각은 신라인의 미의식에 당나라 양식을 더한 독창적이고 비례가 훌륭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석굴암 본존상이 대표작으로, 이는 부처를 가장 이상적이며 조화롭게 표현한 걸작이다.
불교 공예품인 범종과 사리갖춤 등도 역시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통일신라는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당나라.고구려.백제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다.
(좌,우) 도깨비얼굴 기와
궁성과 왕경을 정비하다
궁성은 왕이 사는 궁궐과 이를 둘러싼 성벽을 말한다.
신라 궁성은 월성이 중심이었고, 국력이 커지고 통일을 이루면서 궁성은 월성 주변 일대까지 넓어졌다.
문무왕은 월지와 양궁, 동궁을 새로 짓고 기존의 궁궐도 웅장하게 수리했다.
더 나아가 왕성까지 새로 지으려고 했으나 의상 대사가 만류해 그만두었다.
뒤를 이은 신문황은 수도를 달구벌로 옮기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신라왕들이 궁성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고자 했던 까닭은 오래된 수도 왕경(서라벌)이
통일 왕조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ㅗ를 옮기지 않고 그 대신 왕경을 주변으로 확장해 건물과 도로 등을 만들고 정비했다.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다
내물 마립간에서 지증왕 때까지 왕과 왕족이 죽으면 큰 무덤을 만들고,
죽은 이를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해서 장례를 치렀다.
또 저승에서도 부귀영화가 이어지길 기원하며 많은 재물을 함께 넣었다.
죽은 이의 머리맡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찬 나무상자를 두었고,
발치에는 각정 재물을 담은 부곽((으뜸 덧널에 딸려 있는 껴묻거리를 넣어 두는 곳)을 설치했다.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장례가 간소해졌으며,
왕릉도 나지막한 언덕에 만들면서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 크기가 점점 작아졌고 껴묻거리의 양도 줄어들었다.
왕이나 귀족 등이 주인을 따라 강제로 또는 스스로 죽은 사람을 함께 묻던 순장을 금지하고
흙 인형을 묻는 것으로 대신했다
무덤 구조도 여닫기 쉬운 출입 시설을 마련한 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추가장이 가능해져 나중에 죽은 가족들도 같은 무덤에 묻힐 수 있게 되었다.
돌방무덤을 꾸미다
마립간 시기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은 규모가 크고 껴묻거리가 화려했다.
이는 죽은 뒤에도 삶이 이어진다는 믿음을 반양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수용과 돌방무덤의 도입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변화하게 만들었다.
上) 신장상 돌문:경주 서악동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돌문이다.
문에는 청정과 바닥에 결합될 수 있도록 돌출부가 만들어져 있다.
왼쪽 돌문에는 앞뒤면 모두 신장상 조각이 있고, 오른쪽 복제품은 왼쪽 돌문 뒷면의 모습이다.
下)지석, 지석 덮개:지석은 주인공의 인적사항과 사망시기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어주는 돌이다.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나왔으며, 백제에서는 무령황릉 지석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지석을 무덤에 넣는 것은 중국 장묘문화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화장이 성행하다
통일신라 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주검을 불에 태워 장례 치르는 화장이 유행했다.
*아래 사진 참조
화장이 성행하다
통일신라 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주검을 불에 태워 장례를 치르는 화장이 유행했다.
최초의 화장은 7세기 중반 자장율사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문무왕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화장은 더욱 확산되었다.
화장 방식으로는 뼛가루를 바다나 산에 뿌리는 산골, 땅에 묻은 뒤 부도를 세우는 승탑,
용기에 담아 땅에 묻는 화장묘 등이 있다.
-이하 생략-
신라, 불교를 받아들이다.
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이자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에 큰 변화가 생겼다.
불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에는 귀족들이 저마다의 조상신이나 산천신을 숭배했다.
기존의 민간 신앙과 달리 불교는 종교로서 신앙체계가 논리적이고,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하는 신들의 존재감이 뚜렸했다.
왕실은 귀족과 백성에게 부처의 신앙을 강조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고,
더불어 왕과 왕족을 신격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528년에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했다.
534년에는 서라벌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숲인 천경림을 걷어내고,
신라 최초의 큰 절이었던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다.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의 미소'라고 널리 소개된 신라의 원형 기와이다.
이 수막새는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하여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나
1972년 10월에 국내에 반환되었다.
일반적인 기와 조성방법처럼 틀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먼저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써서 마무리한 작품이다.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된 흔적도 있다.
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손, 오똑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조화에 이르기까지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손으로 빚은 얼굴무늬 수막새이자 신라인의 소박하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낸
작품으로서, 당시 우수한 기와 조성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다.
금동신장상, 금동보살편, 금동여래입상, 화불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모으다
528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뒤, 진흥왕과 선덕여왕은 왕경 안에 큰 절을 세워 나라의 힘을 모으려 했다.
진흥왕은 544년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를 10년 만에 완공했다.
553년에는 황룡사를 세우기 시작해 566년에 완공했으며, 574년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이라는 큰 불상을 봉안했다.
선덕여왕은 즉위한 뒤 황룡사 옆에 '향기로운 왕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지었다.
또 643년에는 왕의 위엄을 세우고 부처님의 도움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설을 추진했다.
신라 천 년 역사를 마감하다
9세기 말, 신라 왕실은 귀족과 백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나라는 빠르게 기울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면서
약 천 년에 걸쳐 번성하던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수인 '동도회고' '구암선생문집' 권1 중에서
국은기념실
국은 이양선 선생님이 수집하여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에 관한 이야기와
선생의 깊은 문화재에 대한 통찰력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대구 지산동 일괄 출토품
오리모양 그릇
청동 옻칠 발걸이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토기
원삼국시대의 영남 지방에서는 와질토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와질토기는 삼국시대 이전에 긴목검은간토기에서 출발한 목항아리가 주로 쓰이다가,
그 뒤 아가리가 벌어지고
바닥이 둥근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와 항아리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의 신라와 가야 토기에는 회청색의 도질토기가 많다.
도질토기는 물레로 모양을 만든 뒤
흙을 단단하게 두드려, 1,000도가 넘는 고온의 가마에서 구운 것이다.
그릇받침, 굽다리 긴목 항아리,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가 대표적이다.
금속공예
첫댓글 맨 마지막 사진의 이정표.
거기에 '교촌마을'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전 처음에 교촌마을? 하면서
교촌치킨을 생각했지요.
여기가 교촌치킨의 원조 마을이 있나보다 하고...
향교가 있다고 해서 교촌마을이라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한번 들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태여서 빼먹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와라~~~!
후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볼거리가 많은 곳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