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의 협동·공동작업 – 톨조문과 메역조문 / 강 서
철썩철썩 파도가 친다. 저 끊임없는 물결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무서움 없이 바다를 즐겼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여름방학 때 우리 동네 아이들은 한데 어울려 파도를 거슬러 헤엄을 치며 입술이 파랗게 될 때까지 멱을 감았다. 튜브를 가진 아이가 없어서 작은 수박이나 참외 등을 띄워 공처럼 가지고 놀았다. 수영을 한 후 따뜻하게 데워진 넓은 바위에 아이들은 여기저기 엎드려 몸을 말렸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바다가 말없이 툭 끼어든다.
산과 들에 봄이 와서 싹이 움틀 때 바닷속 갯바위에도 해초의 어린잎이 자라기 시작한다. 우리 마을은 다른 데 비해서 마을도 크거니와 해안선도 길고 해산물도 좋았다. ‘톳’은 ‘톨’이라 불렀다. 크기는 약 60센티미터까지 자란다. 동네 사람이 모여들어 톳을 채취하고 말리는 작업을 일컬어 “톨 조문한다.”라고 했다. 해녀가 소라 채취하러 간 것을 “구젱이 조물레 갔져.”라고 한다. ‘조물다’라는 말은 물에 잠긴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말한다.
톳이 큰 수입원이었던 1970~1980년대, 톳이 자라기 시작하면 동네별로 바닷가에 공동 작업을 나갔다. 겨울이 되기 전, 반장은 각 집에 한 사람씩 소집을 시켰다. 톳 옆의 해초를 쪼아내어 뿌리를 캐내려는 것이다. 그래야 톳이 다 자라 낫으로 베어낼 때 다른 잡초가 들어가지 않아서 깨끗하다. 보통 ‘지충이’라 부르는 해초가 많다. 다 크면 톳과 비슷한 크기로 자란다. 톳이 있는 곳에는 지충이가 있는데, 그것을 쪼아내면 나중에 톳에서 다른 해초를 골라낼 때 잔손질이 덜어진다.
매년 음력 이월에서 삼월 사이, 제주의 해변 마을은 톳 작업으로 바빴다. 조합별로 나누어진 해변은 톳이나 미역, 우뭇가사리가 잘 자라는 곳과 그렇지 못한 구역이 있다. 갯바위가 별로 없는 해수욕장이 속한 데는 해산물의 수확량이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 마을의 경우 해마다 구역이 순환되었다. 톳을 채취할 때는 물때에 맞춰야 한다. 처음 며칠은 조간대(만조 때 바닷물에 잠기고 간조 때에는 드러나는 곳)에서 작업한다. 큰 썰물일 때는 깊은 바다의 것도 채취할 수 있다. 반장은 이날을 기다려 동네 사람을 총집합시킨다. 수확이 늦어지면 톳에 ‘늦 돋는다’고 한다. 톳 줄기에 파래 등 해초가 달라붙는 걸 말하는데 그러면 질이 낮고 가격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며칠간 공동 작업에 나서야 한다.
노인만 있는 집은 타지의 자식이라도 와서 참여한다. 일이 있어 함께 하지 못하는 집은 나중에 나누어 주는 돈에서 그만큼 차감한다. 그러나 하루 일당보다 많이 떼기 때문에 되도록 조합 일을 한다. 그때 제사가 있는 집은 떡을 만들어 공동 작업을 하는 곳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면 그 집은 궐을 면해 주었다.
수확한 톳은 해변에서 말린다. 바람 좋고 볕이 좋을 때다. 삼사일에서 일주일 정도 말려야 하는데 잡목이 많은 곳을 피해 넓고 편편한 빌레(너럭바위)나 들판에 널어놓는다. 말려서 걷어 들인 톳은 사람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다른 해초와 검불을 골라낸다.
잘 말린 톳은 여러 곳에 눌(가리)을 만들어 뜸을 들인다. 가격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밤에는 톳을 지키러 집마다 한 사람씩 나가야 한다. 간단한 바람막이를 만들어 그곳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다. 공금에서 과자와 빵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날씨가 매섭지 않으면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톳 눌은 보통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해변에 쌓는다. 그러나 해당 구역이 인가와 인접해 있으면 길가에도 톳을 쌓았다.
우리 집 근처에도 마른 톳을 쌓은 적이 있다. 돌담에 의지해서 가마니로 겨우 바람만 가릴 정도로 움막 같은 것을 낮에 만들어 놓는다. 톳 눌을 지키는 일은 보통 여성들이 나왔다. 초저녁부터 모인 어른들은 늦은 밤까지 재미있는 얘기를 주고받는다.
톳은 비싼 값으로 수출되었다. 마을의 공동경비를 제하고도 집마다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래서 해녀뿐만 아니라 남성도 같이 참여한다. 함께 거두어 공동자산의 일부를 집마다 나누는 것이다. 그것도 마을회에 속한 집만 참여할 수 있는데 남의 집에 밖거리(바깥채)에 사는 사람이나, 방 한 칸을 빌어 사는 어려운 이들은 자격이 되지 못했다. 언제 마을을 떠날지 모르고, 같은 마을 안에서도 어디로 이사 갈지 알 수 없다. 한 마을(里)의 청수동, 한수동 같은 동네 회(會)에 가입되어 있어야 한다. 없는 사람은 이래저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동네 제삿집에서 나누어 주는 떡을 받는 것도 소외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의식이 굳은 지어미의 경우, 그런 집이라고 해서 빼면 결코 안 된다고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톨조문’은 한 가구당 한 사람이 동원된다. 물 깊은 곳은 해녀들이 잠수하여 베어내고 나이 든 이들은 물이 빠져나간 곳에서 채취한다. 젊은 사람들은 채취한 톳을 지게에 져서 파도가 닿지 않는 곳, 즉 풀이 나 있고 톳을 말릴 수 있는 갯가로 날랐다. 한동안 해변가의 마을은 톳 작업에 매달린다.
톳을 채취할 때 뿌리째 모지라지게 베어서는 안 된다. 뿌리를 남겨 둬야 내년에 다시 싹이 돋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톳 수확량이 많은 구역은 말려서 큰 마대에 담아 수협창고에 들어가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큰 마대에 60㎏을 담아 ‘한 칭’을 만들었다. 한 칭짜리 마대가 몇 개 나오느냐에 따라 조합원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어촌계에서 마대마다 톳을 저울에 달아 계량한 것을 수협창고에 들이는 날을 ‘어협에 톨 바치는 날’이라고 한다. 이날을 끝으로 한 해의 톳 작업은 끝이 난다. 이제 조금 지나면 리 사무소에 돈 받으러 오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요즘은 바다의 생태계가 많이 변화되어 톳이 자라던 자리에 전에 보지 못했던 조류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에는 여성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릿결처럼 바다의 크고 작은 암초엔 듬북(해초)이 수북하게 자랐다.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물고기의 피신처가 되어 주었다. 손으로 헤쳐 보면 소라나 오분자기(떡조개)가 붙어 있기도 했다. 그게 그렇게 귀하고 보기 좋은 모습인 줄 미처 몰랐다. 어릴 때부터 늘 보아오던 것이라 변할 줄 몰랐다. 그러던 바닷속 돌들은 백화현상으로 뭍의 민둥산처럼 되어버려 더는 해산물을 품어주지 못한다.
지금은 수출이 안 되어 톳값도 많이 떨어졌다. 어떤 마을은 수확하는 걸 포기했으니, 누구나 채취해도 좋다고 한다. 톳은 진한 갈색을 띠고 있지만 끓는 물에 데쳐내면 고운 녹색으로 식감도 부드럽게 변한다. 데친 톳은 멸치젓갈이나 액젓을 넣고 쪽파를 썰어 넣어 깨를 뿌려 반찬으로 쓴다. 바다가 키운 봄나물이다. 여름엔 마른 톳을 물에 불려 삶아 양파와 갖은양념, 식초를 첨가하여 무침을 만들어 상에 낸다. 국물을 낙낙하게 하여 얼음을 띄워 냉국처럼 먹기도 한다. 요즈음은 거창한 톨 조문도 거의 없어졌다.
그래도 제주 바다에 봄은 온다. 유월이 오면 성급한 아이들은 바다로 뛰어들고 몇몇 아이들은 담 그늘에 오종종히 앉아서 구경했다. 좀 더 멀리 깊은 곳에서는 해녀들이 숨비소리를 내며 소라나 전복을 따고 있다. 바다는 씨 뿌리지 않고도 수확할 수 있는 끝이 없는 밭이었다. 하지만 위험도 뒤따랐다. 전복을 발견하고도 숨이 모자라 물 밖으로 나오면 다시 못 찾을까 봐 숨을 참으며 작업을 하게 된다. 잘못하다 빗창(전복을 떼는 쇠로 만든 도구)이 전복과 바위 사이에 딱 물려 버리면 급한 마음에 손목에 감았던 빗창의 손잡이 끈을 미처 풀지 못해서 사고를 당한다. 바닷길이 저승길인 것이 바로 물질이다.
그래서 휘파람처럼 들리는 숨비소리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숨소리다. 폐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그 소리는 어떤 악기의 소리보다 깊고 애절하다. 오래 숨을 참았다가 깊고 길게 내뱉는 어머니의 비장한 숨비소리가 나를 키웠다.
해변 마을에서는 임신한 여인도 물질을 해야 살고, 나이 든 여인도 바다 일을 해야 살았다. 칠팔십 대 해녀도 있었다. 물질하다 바닷가에서 출산하는 여인도 있었다. 아기를 낳는 날까지 물질하는 여인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참고 살았다. 임산부를 특별하게 대우해 주지 않았으므로 뱃속에서 아기가 나올 때까지 일하는 것이다. 예부터 제주에는 ‘애깃질 뱃질’이라는 말이 있다. 아기는 언제 태어날지 모르고, 배는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아깃배를 맞춰서(산통) 배가 아프면 물속으로 숨비질해서 들어가고, 물 밖으로 나와 숨을 고르며 테왁에 의지하여 물에 들고 나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뭍으로 나올 땐 출산이 거의 임박했을 때이다. 집에 다다라서 낳으면 운이 좋은 것이다.
“ᄂᆞᆷ도 다 경ᄒᆞ멍 애기 낭 살았져.(남도 다 그렇게 하면서 아기 낳고 살았다.)”라는 차가운 시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땐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물질 가는 배에서 났다고 ‘배선이’ 길에서 낳았다고 ‘길동이’ 또는 ‘길녀’ 항구에서 낳았다고 ‘축항둥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첫딸은 물질을 해서 집안 살림을 돕는 경우가 많으니 살림 밑천이라 좋아했다. 하지만 아기와 엄마가 함께 오래 누워 있기는 힘들었다. “좀녜 아긴 사흘이민 골체에 눅져 뒁 물질ᄒᆞᆫ다.(해녀의 아기는 사흘이면 삼태기에 눕혀 두고 물질한다.)”는 말이 있다. 출산하고 삼 일 후부터 물질을 했다는 말이니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았다는 말인가. 그래서 ‘쇠로 못나 여자로 난다’라는 제주 속담이 생겼나 보다.
특히 그 시절 큰돈이 되었던 미역을 채취하는 철에 산모는 더 쉬지를 못했다. 오죽해야 “애기짐광 메역짐은 베여도 안 내분다.(아기와 미역짐은 무거워도 안 버린다.)”라는 말이 생겼을까.”
오래전, 우리가 어릴 때의 바닷가 마을은 봄(음력 삼월 중순)에 ‘메역조문’(미역해경, 또는 미역채취)이 큰 행사였다. 온 마을의 해녀가 며칠간 바다를 구역별로 나누어 미역을 채취하는 것을 ‘메역 조문한다’라고 했다. 겨울 동안 자란 미역을 금체 시켰다가 봄철 날을 정하여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해녀는 물속곳(해녀가 물질할 때 입는 옷)을 입고 물가에 가 입수할 준비를 한다. 가족들까지 나왔으니 바닷가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수협 직원이 호루라기를 불기 전에 물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주의 사항을 말하는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고 수백 명의 해녀는 일사불란했다. 왜냐하면 며칠간 수확한 미역의 값이 반년 농사지은 곡물의 값에 버금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역은 망사리(해녀가 채취한 해물을 담는 테왁에 이어진 그물자루)를 다 채우면 너무 무겁다. 그래서 뭍으로 끌어올려 줄 힘센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역을 말릴 수 있는 너럭바위까지 등에 지어 옮겨 와야 한다. 해녀는 다시 물질하러 들어가고 가족들은 바닷가에 널어 말렸다. 미역귀는 잘라서 버렸고 곱게 모양을 잡아 말렸다.
마른미역 한 손은 노끈으로 묶었다. 1970년대 이것의 가치는 보리쌀 몇 말을 살 정도였다. 동네 상인이 거둬가기도 하고 육지에서 온 도매상이 대량으로 사기도 했다. 어머니가 작업한 미역이 마루에 수북이 쌓여 팔려나가기만 기다리던 때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미역은 큰 것 네다섯 개를 펼쳐 넓고 길게 말렸다. 그것을 ‘한 낭’이라고 했고 한 낭씩 열 개를 노끈으로 묶어 ‘한 손’이라 했다. 서른 낭을 묶으면 ‘한 단’이 된다. 남한의 미역 70%를 담당하던 제주의 미역은 남해안에 미역 양식이 시작되면서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서울의 어느 백화점에 갔을 때 미역귀 마른 것을 수북이 모아놓고 파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가격도 너무 비쌌다. ‘누가 저런 걸 사 먹을까. 우리는 다 버렸는데.’ 하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겨울에 무를 넣어 국을 끓여 먹었던 잘 마른 가시리(불등풀가사리)가 천 마대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이것 또한 보통 비싼 게 아니었다. ‘돈 많은 서울 사람도 이런 걸 먹네.’라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서울 강남의 백화점이라 고급 물건만 파는 줄 알았는데 미역귀와 가시리를 그곳에서 볼 줄이야.
메역조문은 이제 없어진 지 오래다. 톨조문도 어떤 동네는 이삼일 안에 끝나기도 한다. 바다의 생태계가 바뀌었고 오수도 바다로 방출한다. 정화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옛날엔 빗물만 내려가던 바다이다. 그러니 옛날만 하랴. 해산물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바릇잡이나 해루질도 못 하게 해녀들이 번갈아 가며 바다를 지키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썰물이면 보이던 보말이나 소라도 씨가 말랐다. 어린 날 작은 구덕(바구니) 하나 가지고 바닷가에 내려가면 저녁 반찬감으로 소라나 성게를 푸짐하게 잡았던 것은 기억 속에서나 남아있다.
겨울밤 횃불을 비추면 낙지가 물속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갈고리로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자비하게 느껴져 그렇게 못한다. 십여 년 전, 지인들과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해초 위에 문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 문어, 문어가….”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을 뿐 직접 잡을 수 없었다. 고명딸로 곱게 자라 문어 따위는 잡아보지 않았을 것 같은 지인이 바지를 걷고 물속에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문어를 확 낚아채고는 의기양양하게 내 앞에 들이밀었다. 문어가 앉아있던 바닷속 돌 틈에는 문어가 또 있을 확률이 높다. 헤엄치던 그곳에 가면 소라가 있을 것 같고 문어도 있을 것 같다. 어릴 때 보았던 우리 동네 바닷속 지형이 지금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오래된 등대가 서 있는 곳, 가장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고래기름으로 불을 밝히던 아낙들은 오래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 부근에서 물질하던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의 삼촌들은 나이가 들어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바다는 늘 거기 있어서 좋다. 어릴 적 혼자 앉아서 어머니의 테왁을 쫓던 그 자리에 다시 앉아본다. 바릇잡이(해루질) 갔다가 통통한 성게알을 어린 미역에 싸서 먹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첫댓글 '쇠로 못나 여자로 난다.'
제주 해산물을 마주칠때 그녀들의 비장한 숨비소리를 떠올릴 것같습니다.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