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
2021년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 미국 골든글로브 최우수외국어영화상 수상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 거행
2012년 서울시내 버스정류소 전면 금연 실시
2010년 삼일절 사이버 공격이 일어났다.
2010년 2010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폐막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폐막식이 2010년 3월 1일 오전 9시30분(이하 한국시각) 캐나다 밴쿠버 BC플레이스스타디움에서 펼쳐졌다. 17일간의 대장정을 마친 82개국 선수단은 4년 뒤 러시아 소치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축제를 마무리했다.
총 46명의 선수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대표팀은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며 종합 5위에 올라 역대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1위의 성적이었다.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이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로 쇼트트랙의 부진을 메우며 스타로 떠올랐고 4인승 봅슬레이는 올림픽 첫 출전에 결선레이스에 출전하는 등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번 동계올림픽의 최고 화제는 피겨퀸 김연아였다. 김연아는 처음 나서는 올림픽 무대에서 세계는 물론 온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중압감을 이겨내고 역대 피겨스케이팅 최고인 228.56점으로 금메달을 따내 최고의 피겨여신으로 떠올랐다.
2007년 경부선에 전기기관차가 투입되다
2006년 일본 북관대첩비를 북한 함북 김책시에 반환
2001년 탈레반 정권, 바미얀의 1,500년 전 고대 석불 파괴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탈레반 정권의 민병대가 2001년 3월 1일 바미얀의 고대 석불에 탱크와 로켓 포격을 퍼부어 석불 파괴를 시작했다.
고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바미안의 고대 석불은 약 15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3m와 37m짜리 2개로 이루어져 있다.
탈레반 정권의 최고 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는 2월 28일 발표한 포고문에서 "불상 파괴 결정은 `거짓 우상` 숭배를 막아야 한다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며 "모든 석상을 파괴하겠다"고 선언했다. 탈레반의 불상파괴 선언이 나온 직후 국제사회는 인류문화유산의 보호 차원에서 석불의 보존을 요청했었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측은 유물의 국외 이전을 허용해달라고 호소했고, 유럽연합·러시아 등과 태국·스리랑카·네팔 등 불교국가, 이집트·인도·파키스탄 등도 유적 말살행위의 중단을 요청했다. 심지어 이슬람권 국가들도 탈레반의 야만적인 불상파괴행위를 비난했지만 바미얀 석불은 그 윤곽만이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파괴됐다.
수세기에 걸친 파괴행위와 풍상을 견뎌낸 불상의 머리부분과 다리부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불상 몸통부분에 조각돼 있던 섬세한 옷주름과 아름다운 신체의 굴곡도 사라졌다. 불상을 감싸고 있던 불꽃 모양의 감실 역시 대공포 사격 및 폭발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됐다.
2001년 북한-독일 국교수립
2001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경기도 화성에 개관
제암리에서 일어난 3·1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전시돼 있다. 경기도와 화성군은 1일 지난 3·1운동 당시 주민들이 일본군에 학살됐던 향남면 제암리 일대 1만7455㎡의 성역화 사업을 완료하고 오후 2시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개관식을 가졌다.
제암리 기념관에는 사진과 상징 조형물이 전시되며 시청각실에서는 3·1운동 관련 영상물이 상영될 예정이다. 준공식에 앞서 11시40분 향남면 사무소에서 발안시장을 거쳐 기념관까지 주민 등 1000여명이 참여해 당시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했다.
개관 하루 전날인 28일 오전 10시, 제암리 제암교회에는 중년의 일본인들 14명이 찾아와 참회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제암리 유적은 1919년 4월 5일 발안장터 독립만세운동 이후 일본 헌병들이 제암교회에 주민을 모은 뒤 무차별 총격과 함께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하고 30여채의 가옥을 불태운 곳이다.
2000년 민족자주와 독도주권 수호를 위한 결의대회 열림
1999년 대인지뢰 금지협약 발효
1998년 홍콩 캐세이퍼시픽 항공사 소속 화물기가 한국전쟁 이후 비공산권 항공기로는 처음으로 북한영공을 통과
1997년 김용태 의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
1996년 제1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태국 방콕에서 개최(~2일)
제1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1996년 3월 1일부터 2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렸다. 주제는 `아시아-유럽의 새로운 포괄적 동반자 관계`였다. 각국 정상들은 여기서 향후 협력과정이 동등한 동반자로서 상호존중과 이익을 바탕으로 컨센서스를 통해 개방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데 합의했다.
정상들은 또 1.정치 안보 대화증진 2.경제협력 강화 3.문화 및 기타 분야에서의 협력증대라는 3가지 과제를 중심으로 두 지역간 협력증진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세부실천 방안으로 정치 안보분야에서는 정치 안보 대화의 촉진, UN개혁 노력 지지, 범세계적 군축노력 지지 등에 합의했다. 경제분야에서는 다자주의 자유무역체제 강화, 문역-투자 활성화를 위한 협력 확대, 민간 기업간의 협력확대 등에 합의했다.
1995년 4개시 9개구 분구(分區), 광역시 시계(市界) 확장
1995년 3월 1일부터 서울의 광진구 등 4개 도시 9개구가 분구되며, 부산·대구·인천광역시의 시계(市界)가 확장됐다. 또 서울 구로구 개봉-천왕동 일부가 경기도 광명시에 편입되는 등 7곳의 시-도간 경계가 조정됐다.
내무부는 2월 28일 “이같이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자치단체 수가 1특별시, 5광역시, 9도, 68시, 1백2군, 56자치구에서 1개군 9개구가 신설돼 1특별시, 5광역시, 9도, 68시, 1백3군, 65자치구로 변경된다”고 밝혔다.
신설되는 군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될 경남 양산군 동부 5개 읍-면으로 구성된 기장군이었다. 과대구 분구에 따라 서울에서는 성동구에 광진구가, 도봉구에 강북구가, 구로구에 금천구가 각각 신설되며 부산 동래구에 연제구, 남구에 수영구, 북구에 사상구가 새로 생겼다. 인천 북구는 해체돼 부평구와 계양구로 개편되었으며, 인천 남구에 연수구가, 광주 서구에 남구가 신설됐다.
1995년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칭
1995년 케이블TV 시대 개막 - 20개 채널 개국
뉴미디어의 총아로 불리는 케이블TV 본방송이 1995년 3월 1일 시작됐다. 시청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채널수가 기존보다 약 5배로 늘어나 다매체 다채널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서울 서초구 등 전국 48개 지역에서 이날 일제히 시작된 케이블TV방송은 전송망을 설치하는 작업이 차질을 빚어, 당초 예상했던 30만∼50만가구 규모에 훨씬 못미치는 9만7천여 가구만을 대상으로 했다.
종합유선방송협회 모니터실에 설치된 멀티비전에는 오전 6시20분 마이TV의 첫 방송을 시작으로 20개의 전문채널들의 보도, 음악, 영화, 스포츠 등 12개부분에서 내뿜는 다양한 화면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한국최초로 24시간 뉴스를 하게 된 연합TV뉴스(YTN)는 3·1절 기념 보신각 타종 실황중계를 시작으로 1초도 중단없는 종일방송 체제에 돌입했다. 1월 5일 시험방송 때에 비해 케이블TV의 화면떨림이나 음질불량현상을 현저히 개선, 전파전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예고했다.
그러나 다양한 채널들이 보여준 의욕적 화면들은 케이블TV 가입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전송망 설치작업이 지연돼 가정까지 선이 깔리지 못하고 있는데다 국산 컨버터 생산도 차질을 빚었다. 이 때문에 개국 첫날, 해외통신사들이 모여있는 프레스센터를 비롯, 주요 신문사의 건물에조차 전송망이 깔리지 않아 역사적인 케이블TV 개국을 지켜보지 못했다. 또 이날 개국 프로그램들이 당초 예고됐던 방송순서내용과 달라져 시청자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이는 광고 및 시청료 수입이 없자 일부 프로그램공급사들이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한 필름의 방영을 미루는 등 프로그램편성을 재조정했기 때문이었다.
1993년 독일 헬무트 콜 총리 방한
1991년 사진의 현상과 인화 과정을 단일화한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랜드 사망
1989년 개정 한글맞춤법 시행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발족
1987년 양영자-현정화, 제39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복식 우승
1980년 미국 하와이대에서 한국학센터를 개관
1977년 고리원자력발전 2호기 착공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명동성당에서 발표-`3.1 명동사건`
3.1절 57주년을 맞는 1976년 3월 1일 700여명의 신자들이 모인 명동성당에서 재야인사 이우정 교수가 미리 준비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긴급조치 철폐,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 독립, 박정권의 사퇴 등이 담겨있는 이 선언에는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 등 재야인사와 현직의원으로 신민당의 정일형 의원이 서명했다.
이 사건으로 서명 관련자 20여명이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입건돼 그중 11명은 구속, 정일형 의원을 포함한 9명은 불구속기소됐다. 정일형 의원은 이후 대법원에서 유죄확정판결을 받음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현직의원이 임기중에 법원의 유죄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경우는 이번이 두번째였다.
1973년 내무부는 60년 만의 행정구역 대규모 개편내용 발표(7월 1일부터 실시)
1971년 육군 첫 독자적 복제령(服制令) 발표
1970년 로디지아, 영국에서 독립
1969년 국토통일원 개원
1966년 소련의 금성탐사용 `비너스3호` 3억km를 비행한 후 3개월반 만에 금성 도달
1965년 충청북도 일대 통금해제 실시
1965년 민세 안재홍 사망
6·25때 납북됐던 민세 안재홍이 1965년 3월 1일 북한에서 사망했다. 민족운동가 언론인 사학자 정치가로 한국 근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안재홍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4년 귀국한 뒤 중앙학교 학감,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 등으로 일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 총무를 맡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1924년 5월 최남선이 주도하는 ‘시대일보’에 논설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계에 투신했고, 4개월 뒤 조선일보로 활동무대를 옮겨 주필 겸 이사를 지냈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문필가였던 안재홍은 조선일보에서 경륜과 문재를 십분 발휘했다. 그는 부사장을 거쳐 사장으로 재임하는 중에도 논설을 계속 집필했다. 그가 만 8년의 조선일보 재직기간 중에 쓴 글은 사설 980편, 시평 470편 등 1450편에 이른다.
1963년 정치범 3,762명 가석방 조치
1962년 영국의 지하 핵실험
1957년 유엔총회에서 이스라엘군의 이집트령 철수 요구를 결의
1956년 동부전선에 폭설로 120명 사상사고
1955년 경기신문 창간
1955년 육군본부 대구에서 서울로 복귀
1954년 실향이민 교환
1954년 미국, 비키니도에서 수폭 실험
1952년 서울-타이완간 정기항로 취항
1950년 장개석 중국총통에 복귀
1947년 좌우익 3·1절 충돌
1947년 3월 1일 오후 3시40분 경, 3·1절 기념식을 각기 따로 치른 좌우익이 시가행진 중 서울 남대문-서울역 간 도로상에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며 충돌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날 좌익단체들은 남산공원에서 `3·1절 기념 시민대회`를 마치고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쪽으로 행진하고 있었고, 우익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기미선언 전국대회`를 마치고 종로-광화문-서대문-서울역을 거쳐 남대문으로 행진하던 중이었다.
양 진영은 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격렬히 대치하다가 오후 5시반 경 해산했다. 이날은 전국 곳곳에서 좌우익이 충돌, 이날 하루에만 16명의 사망자와 2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46년 남선경제신문(대구매일신문, 매일신문 전신) 창간
1945년 경부선 복선 개통
1945년 하지중장 남한 단독총선 발표
1943년 조선인징병제 공포
1937년 최현배 `우리말본` 간행
1934년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황제에 즉위
1933년 괴벨스, 나치 선전상에 취임
독재권력의 TV를 통한 대중 조작 사례를 접할 때 사람들은 아직 도 20세기사에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한 이름을 떠올린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3년 3월 1일 괴벨스가 나치 선전상에 취임했다. 1933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독일 전체주의 정권의 주연은 당연 히틀러였다. 그러나 역사는 이 소란한 잔혹극의 무대 감독으로 괴벨스를 지목하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1933년 1월 수상에 지명된 히틀러는 두달만인 3월 14일 괴벨스를 내각 선전상 겸 제3제국 문화원장에 임명,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루르 지방의 한미한 집안 출신인 괴벨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독일문헌학을 전공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 달변이었고 선전에 본능적 감각을 갖고 있었지만 처음엔 나치주의자도, 반유태주의자도 아니었다.
선전 전문가로서 그가 동물적 후각을 발동한 것은 시대의 총아 라디오였다.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 이라고 불렀다. 그는 베를린의 인기 프로그램 ‘라디오 아워’ 매일 저녁 7시 뉴스에 ‘오늘의 목소리’ 란 코너를 신설, 수상 관저 르포를 하게 했다. 1934년 열린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를 소재로 프로퍼갠더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 ‘의지의 승리’ 를 만들어낸 것도, 사상 최대의 정치 선전장이었던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2부작 ‘민족의 제전’ ‘미의 제전’ 을 지휘한 것도 괴벨스였다. 대중은 괴벨스가 조작한 상징들을 통해 전체주의의 늪에 속절없이 빠져들어갔다.
1932년 일본, 중국 동북지방에 만주국 수립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중국 동북지방의 신경(현재는 장춘)을 수도로 1932년 3월 1일 수립됐다.
국가원수격인 집정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였다.
연호는 대동으로 했다.
건국선언은 오전 9시 봉천(현재는 심양)에서 발표됐고, 집정 취임식은 3월 9일 푸이가 참석한 가운데 수도 신경에서 거행됐다.
일본이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운 것은 대륙 침략 전쟁의 병참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만주국 수립을 추진한 관동군 참모들은 장제스(장개석)가 중국을 통일해 국권회복의 움직임이 본격화 될 경우 '만몽위기'가 닥칠 것을 우려했다.
만주국의 실권은 사실상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했고 경제권도 그곳에 진출한 일본기업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일본은 1932년 9월 15일 일만의정서에 조인해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독일, 이탈리아,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도 일본에 이어 만주국을 승인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부당성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이 1933년 2월 24일 임시총회에서 만주국을 괴뢰국가로 규정한 '리튼 보고서'를 채택하면서 국제사회로부터는 승인 받지 못했다.
총회는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만주를 열강들의 공동관리하에 둔다는 권고안을 42대 1로 의결하자 일본은 이에 불복하고 다음 달 27일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국은 열하작전으로 승덕이 점령됨으로써 국토는 요녕, 길림, 흑룡강, 열하의 4성, 인구는 3000만에 이르렀고, 1934년 3월 푸이가 황제로 즉위, 제정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으로 고쳤다. 이후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관동군이 괴멸하고 푸이가 소련군에 체포되면서 무너졌다.
1930년 소금 수입에 관한 令 공포
1925년 NHK 동경방송국 시험방송 개시
1924년 일본 정치가 무라야마 도미이치 출생
1923년 잡지 <어린이> 창간
1922년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 출생
1919년 3ㆍ1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ㆍ1운동은 우리나라 근대 민족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전 시기 개화운동과 민중운동 등 방향을 달리했던 세력들이 하나로 뭉쳤으며 이후 모든 운동이 여기에서 갈라져 나갔다. 운동이 소강 상태로 접어드는 4월 하순까지 팔도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모두 1,214건, 참가자는 약 110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중 7,500여 명이 사망했고 1만6,000명이 다쳤으며 4만7,000명이 검거됐다.
1일 오후 2시에 민족대표 33인은 원래 약속 장소인 파고다공원이 아닌 태화관에 모였다. 파고다공원은 폭동의 우려가 있다며 전날 밤 급히 장소를 바꾼 것이다. 한용운의 인사가 끝난 뒤 민족대표들은 만세삼창을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뒤 곧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기념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4명을 제외하고 손병희를 포한한 천도교계 16명, 이승훈을 포함한 기독교계 15명, 한용운을 포함한 불교계 2명이 함께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한용운의 공약 3장은 선언서 끝에 추가됐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 운집한 학생과 시민들은 민족대표들과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로 행진했다.
이런 전민족적 독립 의지를 바탕으로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입헌공화제를 채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3ㆍ1운동의 진정한 의의는 이런 외형적 성과보다도 사람들 가슴에 남긴 깊은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았던 생각있는 사람 중 3ㆍ1운동을 외면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시위 대열에 가담함으로써 민족에 눈떴고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당초 민족대표 추대를 거절했던 구한말 대신 김윤식마저 고민 끝에 일본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고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를 반납했다.
1915년 영국이 독일에 식량봉쇄를 선언
1911년 1901년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물리화학자 호프 사망
1909년 영국 영화배우 데이비드 니븐 출생
1885년 영국 극동선대 거문도 불법 점령
1881년 러시아황제 알렉산더 2세 피살
1847년 영국 조각가 토마스 브록 출생
1815년 미국 유머 작가 토마스 소프 출생
1810년 폴란드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 출생
1737년 영국 왕비 캐롤라인 출생
1701년 독일 작가 브라이팅거 출생
1424년 전국에 역질(疫疾) 발생
1400년 조선, 일식 발생
898년 신라, 승려 도선(道詵) 사망
888년 신라, 일식 발생
B.C.69 박혁거세 태어남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6부의 우두머리들이 각기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통치력의 한계를 느껴 강력한 왕을 옹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의논을 마치고 높은 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처럼 땅에 비치는데... 그 자리에 붉은 알 한 개가 있어 알을 깨자 용모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지므로 그를 혁거세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