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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소리’가 들려야 말이지요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You may build with great care a marvellous society, using the infinite knowledge science has given us. But as long as the psychological strife and struggle and battle are not understand, and the psychological overtones and currents are not overcome, the structure of society, however marvellously built is bound to crash, as has happened over and over again.
과학이 주는 무한한 지식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서 굉장한 사회를 건설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부대낌과 몸부림과 쌈박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한 그 속에서의 심리적인 덧칠과 흐름들을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사회구조는 제 아무리 근사하게 건설해놨다고 해도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반복되어왔지요.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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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제6차 대멸종”도 저렇게 “과학”으로 막아낼 수 있겠지요? 그거 안 되면, 끝내 다 죽고 마는 건데요.
한때 “이게 나라냐?” 그런 말이 널리 퍼졌지요? 그러던 것이 곧바로 “이건 나라냐?” 돼버렸고요. 그 뒤에는 어떤 말이 생길까요?
허황한 ‘새로운 사회,’ “굉장한 사회” 말씀입니다만, 역시, 한때, 반짝했던 그 “촛불”들에 대하여 의기탱천하고 다소 발랄했던 기대들은 다 사라져버린 지 오래됐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다시 곱씹어보기라도 해야 안 되겠습니까? 그토록 활활 타올라서 ‘세계사 유래가 없이’ 뜨거웠던 그 “열기”가, 마치 모닥불 남은 재 물뿌리듯이 피식거리더니.. “사이비 정치,” 기어이 구한말이나 제정러시아 꼴 났다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일부러 그런 주장들만 찾아 읽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달리 아전인수들 말고는, 무슨 찬사들 별로 없는 대한민국 오늘날 정치 꼬라지 맞지요? 거의 다들, 심지어 ‘하나같이’ 지꺼 챙기는 꼴들 뿐인가 합니다. 또 글쎄요, 누군가 ‘속세를 떠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만.
그게 최선인 거 같지는 않고요. 또한 삼천리금수강산 멀찌기서 지켜보시는 분도 분명히 계실 터이기에. 여기, 그다지 필요한 거 같지도 않은 말 한마디 내뱉는 심사, 짜다라 뭐 그리 편하겠습니까. ‘어쩌다가..’ 하다가 “우째,, 이런 일이!” 그런 옛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 따위, 그야말로 ‘억지로’ 짜내서 보탤 필요가 어디 있나..?” 그딴 생각만 들 뿐인데도 말씀입니다. 기어이, 저 “굉장한 사회(marvellous society)”라는 말씀에.. 역시, 그야말로 ‘가도 가도 황톳길’ 딱 그 꼴인 듯해서.. ‘그, 참, 문디..’ 우째..
저러다가 ‘보리밭에 달이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그런 꼴을 보고야 마는 거 아닌지.. 어떻게든 ‘수습’이나마 잘 돼야 할 텐데요. 또 누군가 물러나게 해서는, 그, 참, “나라” 쪽팔리는 꼴 아닙니까? 마침,, 오늘은 6·29 그날이군요. 그게 도대체 얼마만한 까닭이란 말인지..
애초에 사람들로 하여금, 저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그런 말이 널리 퍼지게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지만요. 나부터도 그게 하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 자꾸 쳐다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어쨌거나 그거 안 되면, 결국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씀이라서요.
한해두해 궁시렁대기만 하다가 세월이 흘러.. 언젠가 “그래, 바로 이런 게 나라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보수 원조, 백범 선생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까지는 어림 반푼어치나마 없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하다하다 엉뚱하게 해보는 생각! “인공지능”을 지도자로 뽑아놓으면, 세상 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그것도 인간들이 그 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 수완에 놀아날 게 뻔하다고들 하던데요.
결국은 “인생은 고해다!” 그러고 살아서는 영원히 풀릴 길 없는 세상살이입니다. 그게 하필 정치 탓만 할 일이겠습니까마는. 우리 가장 가까운 게 바로 그거라서 말씀이지요.
아마도, “과학”이 아니라, 먼저 인간들 각자 그 ‘고운 마음씨’로 풀어야만 될 일이겠지요. “자유와 지성”에 닿는 그 ‘고움’ 말씀입니다.
천번만번 되풀이되는 소리, “사회라는 건 항상 썩어가는 게 그 속성이다.” 여전히 무기력한 하루의 시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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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9] 심리적인 교란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꼭 ‘과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가 온 마음을 합쳐서 다시 새워보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상에도 해당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수십 년, 수백 년 쌓이고 쌓여 문드러진 우리 사회의 소위 저 ‘적폐’들이 전부 다 해결된다고 해도, 그 뒤에 남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각 ‘개인의 심리상태’ 아니겠습니까? ‘행복’ 말입니다. 그때도 여전히 사회 구성원 각자가 탐욕과 경쟁과 기만과 폭력 따위를 극북하지 못 한다면, 다시 말해서 ‘촛불 정신’이 그쪽으로 확장되지 못 한다면, 기껏해야 물질에 만족하겠다면, 사회는 기어이 무너지고 만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니 수천만 송이 ‘촛불’ 속에서도 반드시 그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그런 마음씨로 키워가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실제 모습이 과연 어떤지 가만히, 찬찬히, 잘 들여다보라는 말씀이겠지요. 거기서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이 ‘정말, 낭떠러지 쪽이구나’ 하고 스스로 알게 된다면, 다른 누군가가 무슨 말을 안 해도, 그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오로지 정말 ‘내 모습이 어떤가?’ 하는 ‘관심’이 있어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간들의 마음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급기야 그저 ‘믿어버리는’ 것이고, 자신의 ‘복이나 비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그 안타까운 마음들을 이용해먹는 부류들이 버티고 있고 말입니다. 그런 소득이 엄청난 사람들에게 ‘세금’ 좀 내면 안 되겠냐고 해도, ‘못 내겠다’고 버둥거리고 있는 거지요?
인생을 고해로 가다가다 끝내 소위 저 ‘종교’를 기웃거리는 거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종교는 그런 게 아니다”고 하시는 거거든요. “종교”라는 것이 어찌 ‘돈 버는 일’이겠습니까! 종교란 그 말뜻부터 ‘으뜸 되는 가르침’이니까, 진짜 ‘인간이 되게’ 해주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래서 “참된 이치”고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진짜로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보자’ 하는 마음 역시 그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결국은 또 무너진다는 말씀이니까요. ‘촛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들을 보태고 있습니다만, 그게 지금 보이고 있는 ‘개인적 심리상태’를 넘어서지 못 하는 한, 좀 근원적인 말로 개인 각자가 ‘혁명’을 일으키지 못 하는 한, 잠시 한때의 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하물며 “어디, 잘 나가나 두고 보자”고 깐죽거리는 무리들에게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고 그것을 제대로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은 그 어떤 국가, 그 어떤 사회에도 반드시 필요한 마음이겠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회 속에서, “지금 내가 정말로 행복한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이라면, 거기서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을 찾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 다 살아버린 사람들에게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젊디젊은 사람들이겠습니까? 저 눈물 나는 ‘세월호’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래도 여전히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을 역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밤하늘의 별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른다운 어른으로 키워야지요.
젊은 마음들을 ‘행복’으로 가게 북돋워줘야 하겠으며, 그 길을 열어줘야만 하겠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마땅히 그렇게 이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정신이고 그런 시대이며 그런 불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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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9] “인생은 고해”가 아닙니다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 보다 더 행복한 세상, 그런 개인과 사회를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오늘날. 저마다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행복”은 절대로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시간’으로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행복은 언제나 ‘지금·여기’의 시간성 없는 순간순간의 심리 상태지요? 과학은 제 영역의 고유한 에너지로 ‘발전’해가겠지만, 인간에게 “행복”이란 것이 어찌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겠습니까? 물질적인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지요? 보릿고개 사라진 삼천리금수강산에 왜 자살하는 사람은 늘어만 간단 말이며, 왜 사람들이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단 말이겠습니까? 마땅히 그 근원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꼭 대한민국뿐이겠습니까, 전세계적으로 각종의 대륙으로 문명으로 인종으로 종족으로 국가로 민족으로 쪼개져 다투고 있으며, 심지어 명색이 종교로써도 갈가리 찢어진 분열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고 굴러가는 인간 세상입니다. 그러니 그 바탕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진 이름’들로서 쌈박질이나 일삼다가 죽어가는 것이고요. 그런 국제관계 · 세계질서 속에서 억지로 “홍익인간”과 “인류공영”을 되새겨도 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게 고작 ‘열흘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 들어갈 소리’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언제나 “너와 나,” 개인들의 됨됨이에 달려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나’ 아닌 ‘너’부터 달라지라고, ‘여기’ 아닌 ‘저기’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하기에 늘 “개인의 책임”을 말씀하시는 것이고요.
그러나 스스로 기꺼이 그 “책임”을 지려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들 되어 있는 모습 자체가, 완전 딴판으로 생겨먹었기에 말이지요. “생각” 자체가 문제인데 전혀 그렇다고는 생각도 안 하고 있으며, ‘시간’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닌데도 언제나 ‘미래의 행복’에 목매달고 끌려가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행복은 ‘물질적 풍요’도 아니지요? 꼭 말을 만들어보자면, 행복은 ‘심리적 안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코 ‘쾌락’이 아니겠습니다. 행복을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에 맞이하는 흐뭇함 · 족함’쯤 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까? 문득 ‘지족원운지’ 그 구절이 또 떠오릅니다. 삶의 현장이 바로 전쟁터기도 하니까 말씀입니다. 우리 고전 한시 딱 처음 배울 때 나왔던 시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에 시달리기만 할 뿐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세상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아무리 잘 본다고 봐도 그 눈에 기껏 “인생은 고해”일 뿐인 것입니다. 잘 본다고 해서 ‘난장판’이 ‘낙원’ 되겠습니까? 보면 불수록 진짜 ‘난장판’이지요. 누구 한 사람 얘기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냥 “인생은 고해다” 하고 꾸역꾸역 죽으러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인생이 어찌 고해 아닐 것이며, 그런 세상이 어찌 난장판 아니겠습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하던데요, 여기서는 ‘만드는 대로 되는 것’일 터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됨됨이도 그렇겠거니와, 그게 성장한다고 해도 그게 저 ‘발전’꼴 나지 않겠습니까? 채워서 되는 게 아니라, 비워야 되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명상이니 마음공부니 하고들 있지만, 그게 진짜로 각자의 “혁명”으로 이어졌습니까?
그 근본부터 다지지 못 하면, 앞으로 백 년을 더 살아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개인들 스스로, 시민들 각자 “자기로부터의 혁명”없이 문명이 천년만년 더 이어진들, 과연 여기서 더 나아질 게 뭐란 말이겠습니까?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뭔가 하나라도 좀 나아지게 해보려고 아등바등해 왔습니까? 그러나 그건 하나같이 다들 ‘나’를 바탕으로 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 ‘나’ 때문에 이다지도 온 천하가 난장판인데 말씀이지요. 그러니 모름지기 그 ‘나’를 떠나야지요.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어쩔 수 없다.’거나, 저런 주장에 대하여 심지어 좀 배웠다는 사람들까지 ‘현실성이 없다.’는 따위로 아예 돌아앉아버리는 거지요? 글쎄요, 그러한 인류 문명이기에 “크리슈나무르티” 그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오시기야 이미 2,500 년 전, 그 옛날에 “고타마 싯다르타” 그 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침을 펼치셨지만, 돌아가신 뒤에 인간들이 그 가르침마저 ‘조직화’시켜버리고는, 여전히 얼기설기 ‘나’에 묶어놓은 채로 내려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처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가 생긴 것이다(Nobody listen to Him, that is why there is Buddhism)." 그렇게 말씀하신 거지요. 꼭 불교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조직 종교들이 제 본연의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조직화’ 자체가 문제니까요. 그러면서도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똑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화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분열’만 조장하고 있는데요? 이래서야 설령 인공지능이 더 ‘발전’하다고 해봤자, 인간의 문제가 풀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문제는 오로지 개인 각자 스스로 하나하나 풀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고해”를 벗어나야지요. 문명 자체가 그래서였다고 해도, 커가면서 스스로 다 헝클어놓은 인생을 누가 와서 풀어준단 말이겠습니까? 정작, “교육”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근원적인 가르침은 입에 담지도 않지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젊은이들에게 저런 핵심적인 “사실”부터 가르쳐줘야 하겠습니다. 최소한 ‘나처럼 살아버리진 말아라!’ 그렇게라도 가르쳐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들 자체가, 저런 흐름에 대한 인식이라도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학생들보다는 선생들을 먼저 가르쳐야겠다.’ 그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선생이 돈·권력·지위·명예 따위 쾌락밖에 모른다면 학생들이 쾌락 이외 그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지식전달이라면 그건 이미 컴퓨터와 인터넷과 인공지능이 훨씬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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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글 들, ‘시인’ 그룹에 게시도 하니까 말씀입니다만, 저런 말씀에 이어놓은 해석 뒤에, 짤막한 제 시 하나 옮겨보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저런 참된 흐름이 이어질 것임이 분명하기에 끌적거려본 시입니다. ‘서른 즈음에’ 쓴 시 같군요. 제목은 “산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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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이어질 것이다. 어디론가
가다 보면
별 하나 내리고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멀리
낮은 음으로 등불이 켜지고
사람 사는 소리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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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는 무엇인가?" 결국 이것이 문제이겠습니다.
등불 켜지는 소리가 바로 사람 사는 소리겠지요?
'등불'이 켜지고, 거기 '사람'들이 모여서 두런두런 속삭이기라도 해야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