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의사’ 없어… 지역 국립대병원, 전공의 정원 자진 반납
[의대 정원 확대 추진]
‘의대 증원 예고편’ 전공의 조정 잡음
정부가 필수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7월부터 의대 입학 정원 확대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비수도권 의대 전공의 증원 작업을 하고 있다. 16일 서울시내 한 대학 의과대학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최근 비수도권 A국립대병원은 보건복지부로부터 영상의학과 전공의(레지던트) 정원을 내년에 2배로 늘려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지역의료를 살릴 대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A병원은 복지부가 전공의를 늘려준다고 해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의학과의 경우 병원 내 ‘가르치는 의사’(지도 전문의)가 전공의보다 최소 5명 더 많아야 하는데, 그만한 인력을 단기간에 구할 수 없었던 것. A병원 관계자는 “지역병원에선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말리기도 바쁜 상황”이라고 말했다.
● 비수도권 전공의 30% ‘파격’ 증원에 곳곳 파열음
정부가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그 ‘예고편’에 해당하는 전공의 정원 조정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면서 의료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복지부는 올 1월 ‘필수의료 지원대책’에 따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전공의 정원 비율을 현행 6 대 4에서 내년 5 대 5로 조정하는 작업을 7월부터 본격적으로 벌여 왔다. 비수도권 병원은 현재 1300여 명인 전공의 정원이 1700명 이상으로 약 30% 증가하게 된다. 앞으로 늘어날 의대 입학 정원을 지역 ‘미니 의대’에 집중 배치하겠다는 계획과 전공의 정원 조정을 연계하면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사를 늘릴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이번 전공의 정원 조정이 의대 입학 정원 확대의 기초 작업인 셈. 의료계에선 서울에 편중된 의사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전공의 정원을 조정하는 방향 자체는 옳다고 본다.
문제는 올해 12월 전공의 모집부터 새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속도를 내다 보니 교육 여건을 미처 갖추지 못한 병원이 속출하고 있는 점이다. 실제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를 늘리고 싶어도 가르칠 교수가 부족한 병원이 많다. 18일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가 거점 국립대 부설 종합병원 본원과 분원 17곳의 필수의료 분야의 전임교수 재직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10월 기준 병원당 평균 전임교수는 응급의학과 3.5명, 흉부외과 4.1명, 산부인과 4.8명, 소아청소년과 6.7명이었다.
이 중 창원경상국립대병원의 경우 지난해 1월 1명뿐이던 응급의학과 교수가 퇴직한 후 응급의학과 전임교수가 없는 상태다. 제주대병원에 재직 중인 흉부외과 교수는 단 1명이다. 이에 의대 입학 정원을 확대해도 실습 기관인 대학병원의 교수가 부족해 충실한 교육이 이뤄지기 힘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 수도권 외상센터 전공의는 삭감
반면 일부 병원은 ‘수도권’이란 이유로 필수의료 분야에서 활동할 전공의를 뽑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인천과 경기 지역의 인구 10만 명당 전공의 정원은 각각 5.0명, 4.8명으로 전국 평균(6.8명)보다 적다. 하지만 복지부의 새 방침에 따라 내년부터는 약 240명의 전공의 정원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전국 중증외상 환자가 몰리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은 최근 복지부로부터 정형외과 전공의 정원을 현행 4명에서 3명으로 줄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병원 관계자는 “지금도 이미 중증외상 환자 대비 전공의 수가 부족한데, 단순히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더 줄이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가 자칫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지원을 더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국립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필수의료 분야를 지망하는 의대생 상당수는 ‘인서울’ 대학병원의 교수직을 노린다. 전공의 비율 조정으로, 그 문이 좁아지면 아예 지망 과목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의대생과 전공의를 지역에 안배하는 정책이 실제 지역의료 위기를 해소하는 효과로 이어지려면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병원이 교육 여건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수도권 소재 병원이라도 필수의료 분야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면 오히려 전공의 정원을 늘리는 식으로 차등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18일 부산대병원 등에 대한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의대 교수 등 인프라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주당 강득구 의원은 이날 국감에서 “현재 의대 시설, 교수 인력 등의 조건에서 정원만 늘린다고 (필수 의료 확충이라는) 목표가 달성되는지 의문”이라며 “의대 교수 등 인프라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국립대병원장들이 의견을 모아 복지부와 교육부에 건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정성운 부산대병원장은 “의료분쟁이나 의료사고 위험성이 큰 점도 필수의료 진료과목을 회피하게 되는 이유”라며 “정원을 늘려서 의사가 많이 나와도 필수의료를 담당할 의사 확보와 비례할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조건희 기자, 권구용 기자
‘의대 증원 규모’ 직접 밝히려던 尹, “중재자 역할을” 조언에 선회한듯
[의대 정원 확대 추진]
세밀한 조율없이 앞당겨 발표 추진
의사들 반발에 ‘숫자’ 안밝히기로
정부가 2006년부터 18년째 3058명에 머물러 있는 의대 정원을 확대하기로 방침을 세운 가운데, 구체적인 규모와 발표 시점을 두고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1000명 이상 확대안’을 발표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지만 이번 주 들어선 “당장 숫자를 내놓지는 않는다”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러한 정부의 기류 변화를 두고 그 배경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18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의대 정원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당초 300∼500명대 증원 방안을 구상 중이었다. 복지부는 대한의사협회(의협)와 함께하는 의료현안협의체, 환자단체와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의사인력전문위원회 등의 논의를 거쳐 12월쯤 확대안을 발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추석 직전 윤 대통령이 조규홍 복지부 장관에게 의대 정원을 1000명 이상 확대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발표 시점도 이달 중으로 앞당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을 통해 이런 기류가 알려지자 의협은 정부가 합의되지 않은 확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며 총파업 카드까지 꺼내 들며 강력 반발했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17일 “정부가 발표를 강행한다면 14만 의사들과 2만 의대생들은 2020년 파업 때보다 더 강력한 투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의료계 전문가들도 대통령실에 “의사들의 반대가 거셀 텐데 대통령이 숫자를 확정해 발표하면 이후 타협의 여지가 없어진다. 대통령은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통령실은 19일 필수의료 관련 정책 발표는 진행하되 의대 정원 확대 숫자는 밝히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선회했다. 정부 내에선 “대통령실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국면 전환용으로 의대 정원 확대를 서두르려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의사인력전문위원회에 참여하는 한 전문가도 “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숫자 논의를 한 적이 없는데 ‘1000명’ 정원 확대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전했다.
이번 정부 들어 주요 정책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발표됐다가 동력을 잃고 마는 상황이 반복돼 왔다. 지난해 7월 윤 대통령은 “취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을 신속히 강구하라”고 지시해 갑자기 만 5세 입학이 공식화되며 교육 현장에 혼란을 초래한 바 있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최종안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아직까지 개편안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의대 입학 정원 확대 역시 세밀한 조율 없이 불쑥 튀어나오면서 의협을 필두로 각계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남을 지역구로 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18일 전남 지역 의대 신설을 요구하며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삭발 시위를 벌였다. 의료계 반발을 넘어 의대 증원이 확정되더라도 증원 방식을 두고 ‘2라운드’갈등이 벌어질 것임을 보여준 셈이다.
이지운 기자, 윤명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