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스물네 번째 이야기(2)】
다시 쓰는 문화 보고서報告書 / 이은화
문화의 보고寶庫–되새기고 새로 새긴 사고思考
문화에 대한 고찰–문화의 가치와 문화상대주의의 한계
모든 문화에는 절대적으로 우등하거나 열등한 문화가 없으며 전부 상대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문화상대주의’관점은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이론으로서 포괄성은 인정받고 있다. 이는 문화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고 우열을 가리는 태도나 관점인 ‘문화절대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이다. 어느 이론이든 한계와 비판은 존재하지만, ‘문화상대주의’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문화로서의 위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보다 진보적인 관점이다.
문화상대주의의 대척점으로 ‘문화절대주의’나 ‘자문화중심주의’가 일반적으로 거론되지만 역사적으로 문화상대주의의 진정한 대척점은 ‘사회진화론’과 ‘문화제국주의’를 꼽는다. 문화상대주의가 근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바탕인 사회진화론을 비판하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 문화 형성은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으로 이는 문화 간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일례로 ‘상대성’을 문화에 접목시킨 ‘문화상대주의’에서는 흑인, 백인, 황인종으로 대표되는 인류에게도 절대적인 우열은 없다. 인종에 우열이 없듯이 인류 각각이 만든 문화 역시 그 절대적 우월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문화상대주의’에서는 어느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의 문화보다 더 우등하다는 문화절대주의를 거부한다. 모든 문화는 고유한 환경에 대응하면서 얻게 되는 한 사회의 경험과 지식의 총체이며 존재 이유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문화상대주의는 어떤 특정 문화의 우월성이 아닌 여러 국가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문화는 그 문화가 처한 환경이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문화의 절대적 우월성을 제한하고 영향력을 줄여 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현대 사회는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여러 문화의 유입이 불가피하다. 그로 인해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문화상대주의’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국제결혼이 늘고 있고 빠르게 다문화 사회 속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 기존의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사회적 편견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많은 난제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문화의 내용을 ‘문화상대주의’의 관점에서 보려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무분별한 (극단적) 문화상대주의자가 되는 것 역시 피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문명과 문화는 구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극단적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한다.
‘문화상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침해하는데도 그것이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인정해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는 있다. 무작정 독자적인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극단적 문화상대주의’라고 하여 이 또한 지양해야 한다.
문화를 두고 우열과 순위를 따지기는 어렵다. 가치중립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문화상대주의’를 가치판단에 적용할 수 있는지 세계적으로 통합된 의견도 없다. 최선두에서 인권과 자유를 지지할 것 같은 미국에서도 미국인류학협회가 ‘문화상대주의’를 근거로 세계인권선언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적이 있다. 비인격적이고 비윤리적인 관습을 이해하는데 여전히 조율과 해석이 필요한 개념이지만 중요한 것은 문화와 예술이 갖는 가치는 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가치면에서도 많은 관념과 이론이 맞설 때마다 이를 조율하고 있지만, 문화가 가지는 가치는 경제적 개념으로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도시는 재화와 물류의 이동이 이루어지면 중심도시가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의 도시는 이동도 불가하지만 시간이 더할수록 간직한 문화와 예술 도시의 가치는 상승하기 마련이다. 그 도시의 19세기 모습을 알면서도 프랑스 파리를 문화 예술의 으뜸 도시로 꼽는데 이견이 없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발자크의 시선으로 바라 본 19세기 파리-문화로 만나는 파리
혼란이 휩쓴 파리는 1789년 7월 14일, 민중 봉기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고,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제1제정이 시작된다.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나라를 정복하지만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1815년에 사망한다. 1814년에서 1830년까지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 시대에서 샤를 10세는 보수적 정치를 실시해 부르주아의 반발을 샀다. 1830년 7월, 부르주아는 혁명을 일으키고 ‘부르주아의 왕’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다. 7월 혁명을 계기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산업 혁명이 진행되었고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난다. 한 작가가 이 혼란의 프랑스를 관통하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작품을 남기게 된다. 발자크(1799~1850)다.
1799년에 태어나 1850년에 사망한 발자크는 프랑스 혁명 이후와 2월 혁명의 시기에 걸쳐 살았고, 그의 작품은 대부분 왕정복고 시기와 7월 왕정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한다. 철저한 사실주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1819년 11월 말부터 1820년 2월 21일까지 대략 3개월 동안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왕정복고 시대에 놓인 소설로 발자크의 의식세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당대 프랑스 사회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이 소설은 독자의 이해를 도울 의도가 없는 작가가 나서서 자세하고도 성실하게 인물과 사건에 대해 서술한다.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잘 구분되지 않아 어디까지를 소설적 요소로 받아들일지가 모호하지만 발자크 시대의 풍속이 지금 시대와 비교해도 이질감이 전혀 없다. 돈을 소유한 자가 최고인 시대는 준비되어 있었고 재물을 따르는 자는 사회적 악인으로 치부하면서도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로 진행되어왔다. 발자크가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풍속도는 21세기를 지나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이 오늘의 군상들은 재현되고 있다.
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럽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가 거기에 있네. 내가 이처럼 자네에게 세상 얘기를 하는 것은 세상이 나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기 때문이야. 나는 세상을 알아. 내가 세상을 비난한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세상은 늘 이런 모양이었네. 도덕군자도 이 세상을 결코 고치지 못할 걸세. 인간은 불완전하지. 『고리오 영감』 중에서
제면업자였던 ‘고리오 영감’은 프랑스 대혁명 때의 혼란을 틈타 한몫 잡아 부자가 된, 선하지만 어긋난 부성애로 자기와 두 딸의 삶까지 망쳐버리고 외롭게 죽는 69세의 노인이다. 그는 1200프랑의 하숙비에서 45프랑의 하숙비를 지불하며 점점 가난해지는데, 그 이유는 모두 사교계에 목숨을 거는 그의 두 딸에게 투자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곤과 권태만이 있는, 파리의 그 어느 구역보다 소름끼치고 낯선’ 뇌브생트 주느비에브 거리에서 보케르 부인은 40년 동안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다. 퀴퀴하고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보케르 하숙집에서조차 내는 돈에 따라 대우는 달라진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갈 중요 인물은 7명의 하숙생 중 세 사람으로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남부 지방(앙굴렘) 출신의 가난한 법학도인 ‘외젠 드 라스티냐크’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으며 자신의 출세가 가족 전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파리 입성에서 그가 금방 알아낸 진리는 자신을 사교계에 입문시켜 줄 여성이 필요하며, 사교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법학도가 파리에 입성 후 경제의 논리를 먼저 배운 까닭이다.
도형장에서 탈옥해 ‘보트랭’이란 이름으로 위장해 살고 있는 자크 콜랭이 있다. 그는 라스티냐크의 야망을 알고 그것이 실현되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다. 보트랭은 체포되면서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얘기처럼 사회계약이 지닌 뿌리 깊은 기만에 반항하는 사람이오. 나는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오.”라고 말한다. 이 보트랭이란 인물에 발자크의 내면이 투영된 듯하다. 보트랭의 입을 빌렸지만 감추고 있는 그 속에는 쾌락의 본능과 권력 의지의 동경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발자크는 소소한 군상 세 인물을 통해 촘촘하게 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발자크 스스로도 19세기 격동의 파리 시대의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황금만능을 추종하던 19세기 근대화를 표방하는 프랑스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두 딸을 위해 모든 것 바친 아버지, 고리오 영감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중심은 파리의 근대적 제도 속에 잠식된 사회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등장인물이 대변하는 사회계층의 속물근성을 통해 근대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발자크가 사실주의에 입각해 묘사한 19세기 프랑스 근대의 자화상 그 자체이다. 이는 작품으로서의 가치에 기록으로서의 유물이 되는 문화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오로지 돈이면 행복인 줄 믿었던 맹목적 집착으로 끝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고리오를 통해 근대의 죽음을 경고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살던 19세기 파리의 변화는 가파르고 숨이 찼다. 그럼에도 현재 문화예술 도시로서의 파리는 독보적이다.
근대까지는 경제적 발전이 문화적인 발전과 맞닿아 있어 세계의 중심은 안팎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는 경제적 중심과 문화적 중심이 나누이게 된다. 19세기 경제의 중심은 영국의 런던이었음이 명확하고 같은 시기 문화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문화와 경제가 나누이고 그에 따라 도시의 명암도 달라졌다. 같은 걸음이지만 결과가 다른 두 도시를 견주어 보면 문화에 집중하고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더 분명해진다.
당시 파리에는 저명한 예술가 대부분이 파리에 입성하게 되었고 그 당시 스페인의 피카소(1882~1973)와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1884~1920)도 파리에서 활동한 유명한 예술가였다. 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스페인 태생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사망한 후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족들로부터 유산 상속세 대신 작품들을 기증받아 미술관을 세웠다. 여러 도시에 피카소 미술관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곳 파리의 미술관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피카소를 얻은 파리는 박물관의 도시다.
파리 이전의 예술 중심도시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의 피렌체였다. 문화예술의 도시는 중심이 이동한다 해도 남아 있는 예술품과 건조물이 도시를 채우고 문화의 향기라는 유산으로 전에 누리지 못했던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로마와 피렌체, 파리와 오스트리아의 빈과 같은 문화와 예술의 중심도시는 지금도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세계인들의 동경과 영감의 도시가 되었다. 경제와 함께 가야 하는 문화와 예술이지만 경제적인 부富보다 문화와 예술을 남긴 도시 파리는 발자크와 함께 문화와 예술이 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그럼에도 근대문화와 함께하는 자본주의 역사와 닿아 있는 문화유물론의 역사를 위한 변명은 필요하다.
문화유물론을 위한 변증법
문화에 대한 인식이 복잡하게 보이고 다양한 것은 문화를 보는 시각과 방법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여전히 어떤 시각으로 문화와 문화 현상을 바라보고, 어떤 관점에서 문화와 문화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조금 더 실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가 늘 따른다. 인간의 정신활동은 특정한 자연환경 속에서 특정한 생존 방식, 노동 방식에 의해 규정되고 이루어진다. 만약 이런 조건들을 무시할 경우에는 그러한 정신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이렇게 문화를 인간 정신활동의 산물로 보면서도 그 활동을 사회적, 물질적 조건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을 문화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 혹은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이라 한다. 문화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가에 의해 의식을 규정한다.”라고 하는 마르크스 유물론적 관점을 문화 연구에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화 현상을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에는 무리가 따르고 한계가 있음도 지적되고 있다.
문화유물론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인의 힘을 빌려야 한다. 자본주의와 과학 기술이다. 이는 대중문화를 20세기의 중심으로 부상시킨 요인으로서 대중문화를 성립시킨 핵심적인 요인이며 대중문화의 핵심적인 본질을 규정하는 요소다. 먼저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의 내포적 확대 전략의 일환으로 성립되는데 자본주의의 발전은 곧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려면 지속적으로 이윤을 챙길 수 있어야 하고 시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팽창은 외연적 팽창과 내포적 확대전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외연적 팽창전략이란 시장을 공간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내포적 확대전략이란 시장을 공간적으로 늘리지 않고도 소비자층을 늘려서 실제 시장 확대의 효과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이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역사는 자본주의의 외연적 팽창 첫째 단계를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이라고 적고 있다. 제국주의 전략은 한 국가 안에서 자본주의가 성립되고 발달하면 내수 시장만으로 한계가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독점적으로 차지하려는 식민지 획득에 모든 힘을 결집시킨다. 그들에게 식민지는 시장의 확대뿐 아니라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매력적인 전략 사업이었던 셈이다. 19세기 말부터 서구 열강들의 새로운 시장쟁탈전이 가열된 이유다. 근대의 현상은 이와 유사한 경험에서 탄생했다.
근대를 지칭하는 모더니즘은 종종 세계 다른 지역에 퍼진 서구적 현상으로 설명되고, 이는 자본주의의 확대와 맞닿아 있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만든 새로운 ‘인권’이라는 언어가 등장하면서 특권을 가리게 된다. 새로운 언어는 무엇보다도 <미국 독립 선언>(1776)과 프랑스의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1789)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두 선언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자연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게 보면 이제 특권은 없다. 자연권 사상이 두 혁명의 원인은 아니었고 오히려 발생하는 일들을 정당화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유럽에 식민지 전쟁의 소용돌이와 몰아친 소유 전쟁은 자본주의의 확장을 불러왔다. 문화유물론이 불러온 것은 아니지만 그 관념이 역으로 몰아친 파장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럽을 삼킨 자본주의 문화–식민지 확장에서부터 우주전쟁까지
20세기의 비극인 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도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과 후발주자로 뛰어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과정에서 비롯된 주도권 쟁탈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이러한 주도권 쟁탈전은 충돌과 전쟁이어서 비용을 천문학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소모전이었다. 서로에게 남는 것이 없고 효율적인 시장 확대전략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합의를 도출하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고 식민지에 대한 시선이나 시각이 바뀐 것도 아니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AAA(아시아, 아프리카, 중남아프리카)지역에서 실질적인 경제적 지배를 이루려는 은밀한 노력과 과감한 시도는 지속되어 왔다.
그들의 확대전략이 멈춘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2차 대전 이후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외연적 팽창전략의 둘째 단계는 바로 우주 개발로 전투장을 옮긴 것이다. 왜 그토록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우주에 투자를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답을 한가지로 뭉뚱그릴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지구촌에서는 외연적 팽창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대륙을 개발의 의미로 우주 정복에 나선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자본주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마는데 성과나 이익이 투자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결과지를 받아든 것이다.
영토의 개념을 우주로까지 확장하여 길을 내기 시작하고, 정보통신을 위한 인공위성 궤도를 선점한 나라는 경제적인 이익과 군사적으로 엄청난 힘을 비축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미 항공우주국의 달에 얼음이 있다는 획기적인 보도는 달에 호텔을 지을 설계도를 주문한 해프닝도 등장하게 만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우주 정복 전쟁은 이제 시작일지 모른다. 이제 우주의 영역을 영토로 기록할 지구촌의 역사다.
외연적 팽창전략에서 식민지 획득 방식의 시장 개척이 어렵게 된 20세기 전반기에 새로운 방식의 시장 확대전략으로 내포적 확대전략이 시도된다. 그 일환으로 크게 두 방향의 전략이 등장하는데 한 가지가 이제까지는 시장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들을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바로 문화영역이다. 문화영역을 시장에 끌어들임으로써 거시적인 시장 확대는 엄청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대중문화가 선두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선두에 선 대중문화의 대표 영역이 스포츠다.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명예를 중시하는 아마추어 스포츠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중 곁으로 부쩍 가까워졌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에 프로 스포츠가 대중문화를 선도하기 시작해 중요한 상품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들의 상품 가치는 갈수록 커졌다. 시장은 몸집을 키우며 경제는 자본주의의 꽃인 천문학적인 숫자로 대변되는 선수들의 몸값과 이적료로 나타났다. 즐기고 있는 사이에 그들에게 꽂히는 대가성 사용료는 시장을 형성하고 각국의 스포츠계를 흥분시키며 성장일변도에 이르렀다.
그와 같이 성장하는 또 다른 대중문화는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정보사회다. 자본주의의 특징인 확장성과 경제성을 무한대로 장착할 수 있는 정보사회의 사이버스페이스(cyber space)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확장 무한대의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이미 실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공간이 되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공간이 진정한 유비쿼터스가 되려면 현재 개발되는 모든 첨단기술이 모이는 최종단계에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진행 과정 중이기는 하지만 이미 인류는 자유로운 공간인 온라인 공간에서 더 활동성을 띠고 있다. 여기에 과학 기술이 대중문화의 핵심적 성격의 규정을 도왔다. 가늠할 수 없는 속도와 홀로 즐기지만 결집력을 지닌 대중이 갖는 힘은 따라오는 부가가치다.
대중문화의 핵심적 요소를 만드는 기술의 하나인 컴퓨터 그래픽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문화 작업은 없다. 영화와 음악이 본질적으로 기술에 의존하는 형국이다. 이미 무한 복제와 교정과 보완이 인간의 손길을 거치는 것보다 완벽한 작품과 성과물이 나오게 하는 기술적 상품가치와 시장은 정보화 사회의 가속화에 따라 더 커질 것은 분명하다. 이것을 위한 막대한 자본은 필수적이다. 그에 반해 대중적인 가치는 확대되는 만큼 독점자본의 힘은 약해지고 다원화되어 민주화될 것이라는 기대에 희망을 걸어본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렸다. 기계와 기술이 만들어 주지 않는 인간만의 자원이고 능력이다. 문화의 영역을 예술의 영역으로 확대하게 되면 인류가 관여해야 하는 분야는 무한하게 된다. 그것을 주도하는 의지는 인류에게 달렸다.
에필로그-문화의 음미는 단상의 기록을 빚는 철학의 오감으로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생전에 그에게 떠오르는 단상들을 기술하기 위한 고통을 단계적으로 발달하는 질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생겨나고 진행되고 고통을 유발하고 사라지는 ‘산산이 부서진 담론, 파괴된 논설이라는 알리바이를 지닌 단상’을 규칙적으로 연습하면서 그 단상으로부터 ‘일기’ 형태의 글쓰기로 변모하는 지점은 ‘과연 어디쯤인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곤 했다. 매일 떠오르는 단상을 노트에 적어 나갔던 롤랑 바르트는 주제별로 단상들을 분류해서 신화-언어-사건-철학-사랑-편지-일기로 세분화시켜서 마지막 강의로 자신의 삶의 연대기를 마무리했다.
사상적 지도를 기록하고 일기로 완성시킨 그가 만일 현시대에 활동했다면 강의를 위해 영상 촬영과 편집을 했을 것이고 인기 철학 교수이면서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 철학가여서 대중들을 위한 팟 캐스트도 진행하면서 이렇게 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어쩌면 롤랑 바르트는 수많은 저작물을 쏟아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철학이라고 전제를 달지만 여전히 철학의 범주와 철학의 역사를 규정할 수 없는 현실적 막막함이 현주소다. 단정 지을 수 있는 문화와 문화의 범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습관적 일상에 파고든 문화 앞에 때때로 무기력하고 반성 없이 맹목적인 수긍을 의심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았던 의식과 제도를 반성하는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글이다. 왜 그런지와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은 현재형 철학이 받아 든 숙제다.
사람들은 앞으로 무엇이 변할 것인지에 대해 늘 관심을 갖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중요한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다. 고유의 가치를 가지는 인간의 사유는 자유롭다. 성찰과 반성의 본질은 변화를 수용한다는 점이다.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인류의 의식과 사유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가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라면 다음에 사용될 때까지 그 유적을 보존하는 매개자의 사유는 변화의 수용을 담고 있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다만 빌려 온 문화를 돌려줄 뿐이다
철학적 오감으로 만지며 고민하고 돌아보아야 하는 성찰은 지금 아니면 늦다. 실체가 없는 문화의 충돌은 문명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고 극적으로 되살리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원인은 ‘다름’에서 오는 충돌이었고 사유의 반전이었으며 세대와 세대의 마찰이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정신이 어느 지점에서 합의점을 찾는가가 중요해졌다.
반성과 성찰이 없으면 성장도 없는 법이다. 일상에서 없는 반성이 의식적인 사유의 성찰로 이어질 이유가 없고 습관적으로 행해온 전통과 관습에 대한 제대로 된 통찰이 없이 올바른 보전과 보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적인 관습과 의식적인 제도에서 비롯된 문화가 이 사회를 만들고 이끄는 동력이 된다면 실체가 없으면서도 막강한 힘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지혜의 창고는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과 번역, 그것을 종합한 아이디어 등이 있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를 행할 인간의 의지의 집적체일지도 모른다. 과거와 타지의 문화를 거부하고, 순환 대신 고립을 선택하는 파괴적이고 폐쇄적인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 문화의 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화의 상호 교류에 대한 경쾌한 찬사 이면에 숨은 분노도 놓치면 안 된다. 부단한 성찰과 반성은 인류의 의지여야 가능한 창조적 작업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여러 분야의 일과 일상의 학문들이 유기적으로 엮인 문화의 영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과 성찰이야말로 문화에 대한 올바른 철학적 오감을 활용한 문화수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멀리 미얀마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들려오는 비련의 전쟁 소식이 우크라이나를 감싼 전운과 닿아 있다. 그들의 문화가 무너지는 비운의 소식이 우리의 사유와 닿아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의지를 기록하고 담는 것이 미래의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는 인류가 품고 갈 과제이리라.
첫댓글 사유의 속도는 느리지만 천천히 생각해가면서 문장을 따라 읽어 내려갑니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본질과 사회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않고 볼 수있는 시각이 필요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