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 윤 효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대웅전도 조사당도 요사채도
사라지고 범종각 구리종도 자취 없이 사라지고
돌탑만이 남았다. 쑥대밭 한가운데 비바람이 지어준
가사를 들쳐 입고 돌탑만이 홀로 남았다.
화살나무 / 윤 효
나무들도 응전을 한다.
피톤치드라는 것도 실은 응전의 산물이다.
그렇게 새순을 또옥똑 따면 어떡합니까?
봄나물로는 최고라 했다.
가지마다 화살깃을 다는 까닭이 있었다.
가을이면 그리도 붉게 잎잎이 타오르는 까닭이 있었다.
생명선 / 윤 효
날이 풀리자 아파트 마당에 실금이 또 하나 늘었다.
어제는 비까지 내려 더 아프게 드러났다.
풀리지 않는 일 탓이겠으나 심란했다.
손바닥에 자주 눈이 갔다.
내내 뒤숭숭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풀 죽을 일이 아니었다.
실금을 따라 푸른 것들이 일제히 돋아나 있었다.
사막 2 / 윤 효
분명 여기서부터 사막이라고 했다.
이상했다.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낯이 익었다.
황야에서, 그동안 황량한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살아왔던 것이다.
한글날에 2 / 윤 효
우리나라 프로구단은
열 개
두산, 삼성, 한화
넥센, 롯데
KIA, kt, LG, NC, SK
우리나라 프로야구단은
세 개
혹은 다섯 개.
강원랜드 / 윤 효
주식회사 강원랜드는 친절한 회사였다.
도박중독예방치유센터를 사내에 두고 있었다.
임상심리전문가 중에서도 박사학위 소지자를 일선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우리나라 도박의 중심 강원랜드는 참 친절한 회사였다.
시론 時論 / 윤 효
평안도 태생 백석 시인의 「절간의 소 이야기」에 의하면,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이 있는 줄을 안다고" 하였다. "인간보다
영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풀에 관한 한 그야말로 전문가라
는 것인데,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수백만 년 동안 한 오라
기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 순한 눈빛을 이어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광우병도 그러면 될 일이다.
한 걸음조차 뗄 수 없는 형틀에 매어 놓은 고삐를, 그 꼬삐를
풀어주면 될 일이다. 그 튼튼한 네 발굽으로 다만 풀밭을
거닐게 하면 될 일인 것이다.
"칠십이 넘은 노장"이 "치맛자락 산나물을 추며" 하는 이야기
라지만, 곰곰 헤아릴 일이다.
태평가 太平歌 / 윤 효
추석 차례 올리고 아침상 물리자마자 며느리 걸음이 빨라졌다.
그래, 어서 올라가거라.
시어머니가 주섬주섬 음식을 담아 건넸다.
며느리는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며칠 후, 시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봉다리 풀어봤니?
그 돈은 우리 손자 옷이라도 한 벌 사 입히라고 넣은 거란다.
며느리는 할 말을 잃었다.
휴게소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그 검은 봉다리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 윤효 시인 약력 ]
* 본명은 창식昶植
*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 1984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 시집 :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 등
* 시선집 『언어경제학서설』등
* 수상 : 제16회 편운문학상 우수상, 제7회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제1회 풀꽃문학상, 제31회 동국문학상 등
* [작은詩앗·채송화] 동인,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장, 문학의집서울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