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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1739
8월23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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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은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초대를 받습니다. 돌잔치 초대, 생일 파티 초대, 동창 모임 초대, 결혼식 초대, 초상집 초대... 기분 좋은 초대가 있는가 하면, 부담스런 초대도 있습니다.
가벼운 발걸음,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되는 초대가 있는가 하면,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원치 않는 초대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어떤 초대가 가장 마음에 드셨습니까? 혹시 이런 초대 어떻습니까?
교황청에서 한 가지 이벤트를 실시했습니다. 각 대륙별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한 가정씩 교황청으로 초대하는 이벤트. 뜻밖에도 우리 가정이 아시아 대륙 대표로 선정되었습니다. 주 이벤트는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작은 경당에서 봉헌하는 미사 참여, 교황님과 원탁에 둘러앉아 함께 하는 만찬 참석, 그리고 로마에 간김에, 열흘간 성지순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료! 이런 초대장을 받았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데 그토록 행복한 초대와는 비교도 안될, 훨씬 더 기쁜 초대가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은혜로운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을 통해 건네시는 하늘 나라 혼인 잔치에로의 초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장을 받았지만, 뜯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던져버렸습니다. 돈이 신앙보다 중요했기에, 사업이 생명보다 중요했기에, 지상이 하늘보다 중요했기에, 오늘이 영원보다 중요했기에, 그들은 이 세상 가장 중요한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 혼인 잔치 초대장을 들고 잔치에 참여는 했지만 혼주인 임금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미있는 자리, 성스런 자리에 걸맞는 혼인 예복을 갖춰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늘나라 혼인 잔치에 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입고 지내던 옷 그대로,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에, 머리도 감지 않은 상태로 혼인 잔치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세속으로 가득차 있지, 그리스도의 정신은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지만,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늘 나라 혼인 잔치에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오히려 잔치 분위기를 망쳐놓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한 임금의 질책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복음 22장 12~13절)
이런 면에서 리마의 성녀 로사(1586~1617)는 하늘 나라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혼인 예복을 가장 아름답게 차려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친 철저한 고행과 보속으로 자신이 입을 혼인 예복을 멋지게 꾸몄습니다.
오랜 세월 괴롭했던 병고 앞에서의 당당함, 고통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수용으로 혼인 예복을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깊이 있는 기도와 희생, 동정 생활로 자신이 입을 혼인 예복에 멋진 수를 놓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여, 모든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입에서 받은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은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느님의 본성에 긴밀히 참여할 수 있고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영혼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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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1)돌로 된 마음, 살로 된 마음>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어디일까요? 몸일까요? 머리일까요? 심장일까요?
사람이 죽어가는 순서는 몸이 먼저 죽고, 그 다음이 머리, 그 다음이 심장이라고 합니다. 아주 드물게는 심장만 뛰고 있는 뇌사 상태에 있다가 다시 뇌가 살아나고 육체까지도 힘을 되찾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결국 심장만 죽지 않는다면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장이 죽어버린다면 머리가 살아도 몸이 움직여도 그것은 좀비에 불과한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웜 바디스’란 영화가 있습니다. ‘따뜻한 몸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텐데, 좀비들이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들은, 사람, 좀비, 보니(뼈다귀들), 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좀비는 비록 죽었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인간으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이고, 보니들은 인간이 되는 것을 아예 포기해 버린 것들입니다.
물론 좀비들도 인간의 몸을 먹으며 살아가는 것들이지만 가끔은 인간의 뇌를 먹으며 그 인간의 기억까지도 가지게 됩니다.
한 청년 좀비는 한 여인의 남자친구의 뇌를 먹고는 그 기억으로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보니들로부터 구해주고 결국에 가서는 그 여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상처 난 곳을 보니 이젠 인간의 붉은 피가 나오고 있고 뛰지 않던 심장이 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남을 해하는 사람이 아닌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마음을 준다는 것은 새로운 심장을 준다는 뜻이고 이전에 가지고 태어났던 마음은 돌처럼 굳은 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심장으로 바꾸어 넣지 않으면 좀비로 머물러 죽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 심장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서 배워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내 심장을 도려내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채워달라는 것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배우라”고 하십니다. 웜 바디스란 영화에서 한 좀비가 인간의 심장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한 여인의 남자친구의 뇌를 먹으면서였습니다.
심장은 머리를 거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마치 지성소가 성소를 거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만 바뀐다면 온 존재가 바뀝니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만 지니게 되면 법규는 저절로 지키게 됩니다. 물론 그 법규란 사랑입니다. 미워하고 있다면 굳은 심장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존재의 상승이 일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피가 도는 살로 된 심장을 청해야 합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양철 나무꾼이 등장합니다. 그는 애인과 헤어지게 됐기 때문에 사랑을 잃었고 심장도 잃었습니다. 그는 심장을 다시 찾고 싶었습니다. 그를 구해준 것은 도로시였습니다.
도로시와 모험을 하면서 도로시를 많은 위험으로부터 구해줍니다.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 심장을 청합니다. 그런데 이미 심장이 자신 안에서 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혼자 머물지 않고 사랑과 함께 머물다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사랑할 수 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고 싶다면 사랑이신 하느님의 심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온 세상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 그래서 목숨을 다 해 원해야 하는 것,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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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옷은 정체성이다>
제가 유학 가서 신학생 때는 성경을 전공하였고, 신부 되어서는 교의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신부로 다시 나갔을 때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학 면담 때 학장 신부님에게 성경석사 때 했던 겹치는 과목들은 면제를 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님은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학과가 다르니 그 학과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배웠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같은 학교에서 들은 과목인데 또 들어야만 한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완강하게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넌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는 줄 모르고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네 처지를 알라는 말입니다. 나는 학장이고 너는 학생이니 주제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까지 들으니 더 이상 따질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학생의 신분으로 학장을 만난 게 아니라 한 사제로서 만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제가 말을 하면 신자들은 대부분 받아들여 줍니다. 초짜 신부가 몇 년 동안 그런 삶에 익숙해 있다가 그 모습을 벗지 못하고 학장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관계가 성립됩니다. 나는 사람이고 상대는 개라면 그것을 알아야지, 마치 상대를 사람처럼 대하거나, 자신이 개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개를 사람처럼 대하면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할 것이고, 자신을 개처럼 낮춘다면 거짓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상대는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를 흉내 내는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서로 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관계를 위한 기본입니다.
이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옷’입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으면 의사이고, 작업복을 입고 있으면 노동자이며,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회사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왕이 거지 옷을 입고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서 사람들이 자신을 거지취급 한다고 상대를 탓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그렇게 먼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의 상징이 되고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옷을 그분이 타고 들어오는 나귀 발밑에 깐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벗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 정체성을 입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정체성으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새 정체성을 입으려면 옛 정체성은 버려야 합니다.
새 정체성은 만남을 통해 얻어집니다. 만약 내가 미혼 남성이었는데, 어떤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면 이제 그 여인 때문에 나는 남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되면 이전 정체성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만나오던 여자들이 있었다면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그 관계들을 끊어야합니다. 이것이 이전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성사로 치면 이 과정이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잔치에 응답한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러나 의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의복을 입지 않았다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하는 모든 이들은 신부의 옷을 입어야합니다. 신부의 옷이란 신랑을 머리로 하여 순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신랑은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붉은 옷을 입고 다가옵니다.
당신의 피를 들고 오시는 신랑 앞에서 신부는 그 피를 통해 그분을 머리로 하여 순종하며 살아갈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의복은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런 순종의 마음 없이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혈을 영하더라도 내가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상대의 의무만 주장하지 자신의 의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잔치인 미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사로 치자면 세례로 부르심에 응답은 했지만 견진성사를 통해 혼인의복을 입는 과정을 소홀히 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신학교 때 예비군 훈련을 하면 신학생들은 수단을 벗고 예비군 군복을 입고 밖으로 나갑니다. 예비군복장은 군대 제대할 때 입고 나왔던 옷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옷만 입으면 사람들이 바뀝니다. 말년 병장으로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모자를 비뚜로 쓰고 윗도리는 밖으로 내고 담배를 뭅니다. 돌아올 때는 술도 거하게 취하여 워커 끈을 다 풀은 채로 복귀합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복장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겉은 군복을 입었지만 속은 여전히 수단을 입고 있는 신학생들도 있습니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밖의 복장보다 내면의 복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입어야 할 옷은 종의 옷이며, 사람들을 만날 때 입어야 할 옷도 종의 옷입니다. 기도할 때, 그리고 밖에 나갈 때 제대로 된 옷을 입고 나가는지 항상 살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입히는 복장대로 살아가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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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2,1-14 :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잔치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모두 참석한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처음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나 오려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도들을 보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 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절) 임금은 살인자들을 없애고 박해자들을 죽여 버린다. 또 그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그들은 지옥의 영원한 불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잔치가 아무도 없이 치러질 수는 없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8-9절)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삶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 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이다. 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분이 지니셨던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절)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갖추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할 것이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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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아직 부족하기에...>
어떤 신자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교회 안에 두 얼굴의 신자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했더니... “믿음과 삶이 너무 다른 두 얼굴의 신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과 평일이 다른 신자들... 교회 안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다른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하늘나라 백성이다. 나는 이미 구원 받았다.”고 안심하는 두 얼굴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그래서 혼인 예복은 봉사할 때 진자리와 마른자리를 가리지 않고 봉사하고,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잔머리를 쓰는 신앙인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입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복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기는 비유...” 말씀을 통해... 혼인잔치에서 입는 합당한 예복은 “선물”임을 묵상해 봅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들어갈 때는 합당한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가, 임금에게 발견되어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밖으로 내던져 졌습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합당한 예복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합당한 예복은 하느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만든 합당한 예복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그렇다면 혼인잔치에 우리가 가지고 가야 할 예물 즉, 합당한 예복이 무엇일까요? 저 두레박은 그 합당한 예복은 “좀 더 참아내는 마음...”이라고 묵상합니다. 가끔은 사제로서 참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제 자신에게 “나 잘하고 있지!”라고 속삭이면서 칭찬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님께서는 “너는 아직 합당한 예복을 입기에 아직 부족하니 좀 더 참아내라.”고 하십니다. 기다림과 참아냄, 고통의 쓴 맛에 익숙해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당신의 속마음을 감추시고 어금니를 꽉 깨무시고 사랑하는 사제인 저를 이리저리 담금질하시면서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 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한 마디로.. 너에게 ‘합당한 예복을 입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 고운님들 모두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합당한 예복을 입히기 위해서 그런다.”
그래서 우리가 참을성이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인내의 쓴 맛에 익숙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 하면서...
‘좀 더 참아내는 마음’으로 혼인잔치에서 입을 합당한 예복을 준비하여 선택된 이들이 되시기를... 그래서 지금 그 삶의 자리에서도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고운님들에게도 베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아멘.
(참, 강복드리기 전에...태풍이 온다고합니다. 한반도에 많은 피해를 남기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도록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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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묵상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와 혼인 예복의 비유를 함께 들려줍니다. 둘째 비유는 본디 독립되어 있었으나 마태오가 중요한 교육 목적을 갖고서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그를 밖으로 쫓아 버립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늘 나라에 대한 보편적인 초대가 일으킬 수 있는 오류를 피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자유롭게 부름을 받은 이들은 유다인들이든 이방인들이든 구원의 그릇된 확신에 빠지면 안 됩니다. 심판 때에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죄인들과 함께하신 행위를 정당화하시려고 당신을 비난하는 이들과 원수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기쁜 소식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심판이라는 면에서 ‘위기의 비유’인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관심과 자만으로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무한하게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마태오는 초기 공동체들, 곧 개종한 이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상황에 맞서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은 옛 백성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망가뜨리는 암담한 상황이 아니라 일찍이 얻은 명예에 만족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임금이 요구하는 혼인 예복은 마음의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 곧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새 인간의 옷으로,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으라는(에페 4,23-24 참조) 권고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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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해 봅시다.>
오늘 독서 말씀을 반복해서 읽다가 27절의 말씀.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는 구절을 지나면서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남편이 달라졌어요.’ 라는 다큐 안에서 부부가 대화코칭을 받던 모습인데요. 코치를 받기 전에 부부가 나눈 대화는 이랬습니다.
아내: 반찬을 며느리 줄 때는 쬐금 주면서 시누이 줄 때는 한 움큼 주는거야..
남편: 너도 이렇게 속 좁은데 나이 드신 분이 속 안 좁다고 생각해?
아내: 그러면 자기 엄마는 그렇게 준 게 당연한 거네.. 지금..
남편: 아니 이해를 하자는 거지..
아내: 그러니까 이해를 어떻게 해? 나는 이해 안 가...누구는 조금 주고, 누구는 많이 주고...
남편: 그럼 이해를 하지 마.. 그러면...
전문가는 남편의 대화 방식에 단정하고 단절하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남편의 대화 방식을 코치해 주기로 합니다. 남편의 귀에 수신 장치를 달고 전문가가 하는 말을 따라하게 하는데요. 그 대화가 이랬습니다.
아내: 저번에 시댁 갔다가 멸치 볶음 쬐끔 들고 온 거 못 봤어? 시누한테는 많이 주고, 나 만 쪼끔 주신거야..
남편: (전문가가 하는 말을 따라 한다.) 어머니는 왜 그러신 걸까? 내가 너라도 화났겠는데...
(아내 웃음)
아내: 나는 마음이 서운한 거지...
남편: (자기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어색한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풀어지냐...
(남편의 말에 아내가 정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웃자, 남편이 웃으며 말한다.)
벌써 풀어진 거 같다... (다시 전문가의 말을 따라 한다.)
내가 일주일에 술 몇 번이나 먹었지?
아내: 다섯 번
남편: (전문가의 말을 따라 한다.) 정말.. 내가 그렇게 많이 먹었어? 그럼 이제 일주일에 두 번만 먹을게.. 세 번은 너랑 먹을게..
아내: 진짜~
남편: 진짜로...(웃으면서 대화가 끝난다.)
남편은 전문가가 시키는 대로 단절하고 단정하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전문가가 가르쳐 주는 공감하고 이해하는 말을 했고, 그런 말을 따라하고 배우는 것이 부부간의 대화를 싸움이 아니라 웃음으로 바꾸어 주었던 거 같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 신앙인들도 나의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비난하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하느님의 언어를 따라하고 배운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내 주위에는 기쁨과 평화, 그리고 행복이 넘쳐 날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오늘 독서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실 겁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오늘 하루, 하느님이 가르쳐주시는 말과 행동을 따라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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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2-6)
‘혼인 잔치의 비유’는 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은 임금의 아들, 즉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누구일까? 신부는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신앙인들을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비유에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공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당신의 ‘신부’가 되라고 초대하는 선포입니다.)
따라서 초대를 받고서도 참석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 잔치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잔치인데도 마치 남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잔치 참석을 거절하면서, 세속 일만 신경 쓰고 있으니,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집은 ‘남의 집’이 아니라 ‘나의 집’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남의 나라,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 나라, 그 집에 들어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생활입니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마태 22,7)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비유에서는 임금이 진노해서 처벌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최후의 심판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나라의 ‘밖’으로 가는 일입니다.
하늘나라의 ‘안’은 구원, 영원한 생명, 행복, 평화, 안식을 누리는 곳이고, ‘밖’은 절망, 후회, 고통만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인자들을 처벌하는 일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속 일’들의 허망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들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은 모두 허망하게 끝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8-10)
이 말씀은, 처음에 초대받았던(선택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자격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 선택과 초대가 그리스도교로 넘어갔고, 그리스도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종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라는 말은, 강제로 끌고 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는 명령이 아니라, ‘권고’이며 ‘초대’입니다. ‘구원’은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가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앞의 이야기에 나왔던 사람들처럼 참석하기를 거절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잔칫방을 채운 사람들은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악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악했지만 회개해서 선하게 변화된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악한 사람이라면, 초대에 응답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응답은 진정한 응답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초대에 응답하는 일인데, 최종적으로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얻으려면 세례 받은 것으로 그치지 말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악했지만 회개해서 선하게 변화된 사람’이라면 그냥 ‘선한 사람’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초대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다고 변명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서 참석했으니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초대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충실한 신앙생활’을 상징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오라는 부르심이 언제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불평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마태 24,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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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강우 클레멘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임금의 아들은 그리스도이며, 첫 번째 나오는 종들은 예언자들이고 그 뒤에 나오는 종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잔치 풍습에 따라서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이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되었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를 따르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 아들의 잔치에의 초대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초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그들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받음은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저 주는 은혜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외면하기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기울이다 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는 참된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종들에게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는 임금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 선인과 죄인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이런 사랑과 초대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하는 것과 우리 신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나 창녀나 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그 초대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되어 있었으며, 이런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세주가 베푸는 잔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시켜 설명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베푸는 천상잔치에 어울리는 옷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회개와 굳은 신앙의 삶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 잔치는 기쁨의 잔치이지만 또한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십자가의 잔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말씀을 우리는 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지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들을 만큼 들었고 알만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십자가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십자가란 싫은거고 없으면 좋은거고 나와는 상관없어야 하고, 그냥 장식품으로만 남아 나를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길을 내 안에서 걸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늘 우리들은 잔치에 합당한 예복에 걸맞는 삶을 예수님안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오늘 하루도 기쁘게 생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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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의 이야기 속의 사건은,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볼 때, 으례 있는 일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들의 풍습에서 보면 혼인 잔치와 같은 큰 잔치에 있어서 초청할 만한 사람들에게 미리 초청을 해 두지만 시간을 정해주어 알리는 것은 아니고, 잔치 준비가 다 되면, 손님들을 부르기 위해 종들을 보내서 오라고 알렸던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풍습을 잘 알고 계셨기에,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은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 되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들 따르고 영접하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의 아들의 잔치의 초대는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를 당시 그들의 생각 속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 받음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져주는 은혜의 부름인 것이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가고,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영원한 것을 외면하기 일 수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함에로 부르시는 참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도 그 잔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듯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여야 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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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하느님의 초대>
성령기도회나 ME 강의를 나가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예상만큼 모이지 않아 준비한 사람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절해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나마 오기로 약속한 이들마저 펑크를 내 이렇게 작은 수로 모임을 진행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봉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처럼 황당하고 허망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인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다 늦기만 하여도 화가 날 터인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하찮은 일상사를 돌보느라 오지 않고,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니 이런 모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이라면서도 하느님에게 거저 얻는 구원이기에 우리가 너무 값싸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 하도 마음 좋은 분이시라 너무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억지를 부릴 줄 모르시는 우리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며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 상처받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기회를 주시는 우리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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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나라>
마태오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늘 나라>
하늘 나라는 기쁨 가득한 잔치입니다.
초대하시는 분과 초대받은 이가
영원히 갈림 없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늘 나라를 거부하지 않는 이는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모든 이의 것이 아닙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간 모든 이가
하늘 나라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생명 정의 평화 연대 나눔 섬김을 살아
땅 나라에서 이미 하늘 나라를 품은 이들은
하늘 나라에 영원히 머무를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에 받아들여진 이들에게
하늘 나라는 영원한 행복이요 희망입니다.
부귀영화와 명예 권력의 뒤에 숨어
탐욕 배척 억압 착취 독선을 일삼아
땅 나라에서 이미 하늘 나라를 능멸한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서는 순간 내쫓길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거부한 이들에게
하늘 나라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하늘 나라는 영원한 고통이요 절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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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 며칠 너무나도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해야 할 일들이 몰려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을 단 일주일 만에 모두 끝냈습니다. 계속해서 잠을 줄여가면서 강의, 원고, 방송 준비를 해야만 했고, 여기에 다음 달에 있을 순교자 현양대회 준비까지 신경 쓸 것들이 너무나 많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마치는 순간, 피곤함이 밀려오더군요. 스스로에게 포상을 주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그 많은 일들 하느라 수고했다. 내일 늦잠 자도 괜찮으니까 푹 자.’
그래서 알람도 맞춰놓지 않고, 커튼까지 쳐서 제 방을 완전히 암실처럼 어둡게 해놓고 잠에 빠졌습니다. 너무나 개운한 느낌이 들어서 잠에서 깼습니다.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입니다.
‘저녁 9시에 잤으니 도대체 몇 시간을 잔거야?’
그런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었지요. 대낮이 아닌 것 같아서 커튼을 살짝 걷어서 보니 한밤중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낮 12시 30분이 아니라, 밤 12시 30분이었습니다. 저는 고작 3시간 30분만 자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도 개운하고 맑은 정신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약간의 쉼만 있어도 피곤함을 풀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다 보니 계속해서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신경도 많이 날카로웠던 것 같습니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들은 그 노력조차 하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틀에 갇혀서 ‘할 수 없다.’, ‘그렇게는 안 된다.’ 등의 말로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에게 초대받은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임금의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데 급급합니다. 그래도 초대에 응답하라고 종들이 말하자 그 종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지요. 임금의 초대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일보다 임금의 초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가장 먼저 혼인잔치에 갔을 것입니다. 또한 임금이 보낸 종을 때리고 죽이는 무례한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임금은 군대를 보내서 처벌을 합니다.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해야 할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무례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 세상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일은 늘 뒤로 미루기만 하고 있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틀 안에 갇혀 있으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틈 자체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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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진산 성지}
진산 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 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입니다.
조선 후기 천주교회는 미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던 제사를 금지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실천 때문에 박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제사 거부는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행동이었지요. 제사를 거부하면 사회 폐륜으로 여겨서 삼족을 멸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납니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평소 가지고 있던 신앙심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위패(신주)를 불살랐습니다.
불효의 죄로 체포된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형벌과 죽음을 각오하고 덕을 쌓는 것이 효성이 부족한 것입니까?”라고 항변하였고, 천주교를 버리라는 말에 “만약 제가 높으신 하느님 아버지를 버린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사촌 권상연은 전주에서 처형되어 참수로 치명한 첫 번째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때 윤지충의 나이는 33세였고, 권상연은 41세였습니다. 이 두 복자 외에도 진산 성지는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김영오, 김영삼, 김요한 등 세 순교자도 함께 기리고 있습니다.
미사는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오전 11시에, 주일에는 오전 10시에 봉헌됩니다. 사전 예약을 하시면 식사도 가능합니다. 주소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진산면 실학로 207이고, 전화는 041-752-6249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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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먼 바다를 건너는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장은 안전을 위해서 짐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소중한 것들이지만 물건들을 바다로 던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 가방을 던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에게 줄 선물을 던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끼던 도자기를 던졌습니다. 가벼워진 배는 풍랑을 이기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숙소를 옮기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입지 않는 옷도 있었고, 신지 않는 신발도 있었고, 읽지 않는 책도 있었습니다. 쓰지 않는 보조 배터리도 있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이어폰도 있었습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나눌 것은 나누니 짐이 가벼워졌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지 않아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입을 것이 없어서 헐벗은 것이 아닙니다. 나누지 않아서 헐벗은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약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지 않아서 아픈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고르는 것,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것,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쉽게 선택할 수 있고, 잘못 선택하면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위가 커지고, 그것이 사람과 관계될 때는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많은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람을 선택하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우선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외모, 재산, 학력, 집안, 직업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준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성격, 취미, 음식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좋아도 성격, 취미, 음식이 맞지 않으면 행복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 역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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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제祝祭인생이냐 또는 고해苦海인생이냐?>
-삶은 축제祝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축제입니다. 고해인생이 아니라 축제인생입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자주 택했던 강론 주제입니다. 축제인생이라 말해도 현실적으로는 고해인생처럼 보입니다. 외양으로는 화려하게 발전한 사회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병들고 허약한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새삼 ‘불편과 느림의 미학美學’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같은 현실에서도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흥청망청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근면 검소하면서도 건강한 영혼으로 밝고 기쁘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아닌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여유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며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지상에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하여 저는 면담 고백상담시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보속으로 마음에 새기고 살라며 많이 써드립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런 귀한 말씀을 남긴 바오로 사도는 고해같은 세상에서도 축제인생을 산 모범입니다. 비록 무겁고 어둔 고해세상같은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널리 깊이 균형잡힌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 보면서, 한 번뿐이 없는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대표적 시, 마지막 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20세기 최고의 천재 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의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해인생중에도 참 치열하게 축제인생을 살았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임종전 의식을 잃기전 함께 한 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고해같은 세상에서도 축제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그랬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옛 예언자들이 그랬고, 오늘 하늘 나라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고해세상에서 하늘 나라 축제 인생을 사셨던 생생한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잔치의 비유’이면서도 하늘나라 비유이기도 합니다. 어제처럼 시작되는 서두 말씀이 기분 좋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바로 삶은 하늘 나라 잔치임을 상징합니다. 바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 축제인생에 초대받은 우리들입니다. 한번의 초대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께 초대받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초대받은 자에 맞갖은 우리 삶인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과연 초대에 응답해 축제인생 하늘나라 잔치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요. 복음의 초대 받은 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초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합니다. 탐욕의 무지로 인한 대죄입니다. 다시 한번 인간의 무지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 좋은 하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입니다. 축제인생을 놔두고 고해인생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그대로 초대교회 현실을 상징합니다. 구체적으로 하늘 나라 잔치는 교회를 통해 실현됩니다. 종들은 거리로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합니다. 바로 선인과 악인으로 이뤄진 하늘 나라 잔치가 실현되는 교회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 받았다 하여 구원이 아닙니다. 세례 받았음이 구원의 보증 수표가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오늘 혼인 잔치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혼인잔치에서 쫓겨 납니다.
혼인 잔치 예복이 상징하는 바, 초대받은 자에 맞같는 일상의 삶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삶,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삶입니다. 과연 이런 하늘 나라 잔치에 맞갖는 삶의 예복을 입고 미사잔치에 참여하고 있는지요.
하늘나라 축제 잔치를 상징하는 미사입니다. 매일의 미사은총이 하루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꿔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같은 세상에 무너지거나 오염되어 부패되지 않고 기쁨과 감사의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일상의 단조롭고 따분한 크로노스 시간의 세상을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카이로스 시간을, 하느님의 시간을 살게 합니다. 일상의 무의미한 크로노스 시간의 세상을 끊임없이 성화聖化시켜 카이로스 시간의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미사은총입니다. 제1독서 예언자 에제키엘의 예언이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서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그대로 이 거룩한 하늘나라 미사잔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의 선물이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인생입니다. 고해인생 중에도 기쁨과 감사로 활력넘치는 하늘 나라 잔치,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하늘 나라 잔치의 축제인생을 살기 위한 구체적 좋은 가르침을 지난 주일 제2독서에서 주셨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살 때 하늘 나라 축제인생의 삶입니다. 그대로 제 생각이 첨가된 전문을 인용합니다.
그러니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카이로스 거룩한 시간입니다. 시간낭비가 큰 죄입니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유혹과 시련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인생을 깨달음의 여정이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한 무지로 부터의 해방이요 점차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청할 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아니 술뿐 아니라 탐식, 탐애, 탐욕 등 온갖 세상 것들에 취하지 마십시오. 결과는 중독이요 폐인입니다. 술맛, 세상맛이 아닌 하느님 맛으로 살아가십시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노래가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세상 맛이 아닌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살 때 이탈의 자유요 하늘 나라 축제의 기쁨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이렇게 살 때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하늘나라 축제의 삶입니다. 참 자유롭고 지혜로운 삶에 무지로부터 해방입니다. 하늘 나라의 구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나부터 하늘나라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렇게 살게 해 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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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핑계 없는 무덤없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 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보람과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이지만 은총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일에 핑계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일은 없으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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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양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 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그렇습니다. 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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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2-3)
'혼인 잔치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선포하신 나라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들어가야 할 나라입니다.
복음을 보니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임금은 밖으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라고 말합니다.
잔칫방은 그렇게 초대되어진 손님들로 가득찼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손님들 중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을 쫓아냅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참으로 무섭고, 임금의 처사가 불공정해 보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모든 이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의 문!'
'그렇다고 모두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께서 먼저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부르심을 인정해야 하고, 이 부르심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삶)이란 무엇일까?
이는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혼인 예복인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입는 옷입니다. 그리고 이 옷은 바로 회개의 옷입니다.
회개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예레36,26)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과 마음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채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날마다 오늘(지금) 회개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여정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더 회개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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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혼인잔치는 준비가 다 되었는데 잔치에 초대받은 자는 마땅하지 않구나!
잔치날은 사람들이 북적거려야 혼인한 부부와 가족들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나는데, 음식은 차려놓고 손님이 없이 설렁하면 잔치를 벌인 사람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로 나가서 오가는 사람들 아무나 초대합니다. 순순히 와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급작스런 초대에 당황스러워하며 자기 갈 길을 가기 위해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잔치를 벌인 장소에 어느새 많은 사람이 몰려왔는데,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있고 악한 일을 하다가 잔치 음식이나 먹고 가자는 심보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리는 채워졌지만, 주인은 예의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선별해서 다시 내보냅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면, 선별해서 너무 작거나, 병든것은 골라 던집니다. 농부가 수확할때도 선별하여 내버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대상이지만, '어떻게 사는가'라는 자기 성찰을 하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하지 않는다면 본래의 자기 모습, 자기 본 이름을 잃게 되어 결국, 한탄하고 후회하는 상태에 이른다고 경고합니다.
인간의 한 생명이 세상에 왔을때, 너무나도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자기 이름을 받았습니다. 고유한 자기의 본질을 타고 났고 그에 맞게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해바라기, 나팔꽃, 민들레, 백합, 국화, 장미 등~ 다양한 꽃들의 이름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이름의 씨앗이 뿌려지고 나면, 땅에서 움트고 여리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새순이 올라오고 점점 자기 모습이 드러날때 아름다운 그 이름의 꽃이 됩니다.
자기 모습, 자기 이름을 잘 가꾼 사람이 선택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민들레로 살라고 보내셨는데, 장미꽃처럼 향기나고 싶다고 흉내내고, 부러워하며 왜 나에게는 안 줬냐고 짓밟아 버리고, 자신을 비관하고 사는 사람은 선택될 날에 밀려나고 맙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 누구와 비길수 없는 사랑의 이름! 그 얼굴! 나를 기억하시고 알아볼 수 있도록 살아봅시다. 세월이 흘러 주름져도 나의 님, 우리의 님께서 나를 우리를 알아보시고, 내 이름을 부를때 나로서 대답하고 품에 안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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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 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잔치로 초대하고
잔치로 우리를
이끌 수는 있지만
잔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몫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기뻐할 예복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시간이 사실
우리를 살리는
예복이 됩니다.
예복은 우리의
내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복을 통해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게 됩니다.
신앙은 우리가
입어야 할
마지막 예복이
봉헌의 예복임을
가르쳐 줍니다.
부르심과
선택 사이에서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선택하는
잔치의 기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기도의
예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복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합사다.
하느님은
선택 목록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필수 조건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도의 예복을
기쁘고 감사로이
입읍시다.
예복은 사랑이고
예복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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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정리/류상현 스테파노(평신도임)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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