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지 못한 일/신길자
서울시청에서 에세이스트의 열세 번째 생일잔치가 열렸다. 행사 한 시간 전에 도착하였는데 김종완 발행인과 조정은 주간을 비롯해 각 지방에서 많은 분들이 와 있어 벌써 웅성웅성 잔칫날 분위기였다. 오늘 기념식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님이 참석한 점이 여느 때와 달랐다. 박 시장님의 축사가 끝나자 많은 어린이들이 엄마아빠 손을 잡고 단상으로 올랐다. 시장님께서 수필읽기 운동을 응원하고 동참하는 뜻에서 아이들에게 작은 족자에 글씨를 써서 증정해주신 것이다. 단상에는 칠팔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북적였는데 그러니까 이들은 모두 2권짜리 에세이스트 연간집 완독자들의 아들딸, 손자손녀들이었다.
나도 조카네 4명의 손주들에게 시장님의 휘호를 받도록 했다. 에세이스트에서는 미리 50명의 명단을 작성하여 아이들의 나이와 성별을 표기해 시장님께 드렸던 터라 50개의 족자에는 아이들의 이름을 넣고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장래 희망이 축구선수인 우리 형준이에게는 “도전의 삶, 박형준 군의 꿈을 응원하며”란 글을 주셨다. 이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형준이는 영국 런던에서 유치원을 2년간 다녔는데 그곳에서 축구를 배웠다. 코치 선생님이 재능을 알아보시고는 만약 아이가 축구를 계속하기로 결정되면 부모의 직업도 알선해 주어 영국에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제도가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으나 조카네 부부는 형준이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형준이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다. 3학년 때 고학년 형들과 같이 캠프를 가서 코피까지 흘렸지만 잘 따라가고 있고, 4학년이 된 지금 5학년 형들과의 경기에도 한 팀에 넣어준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운동으로 다져진 허벅지는 근육이 발달되어 손가락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만치 탄탄하다. 하지만 부모는 의사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도전의 삶이 될 것은 뻔하다.
형준이 동생 주현이에겐 “저 햇살처럼 밝고 따듯하게 박주현 양도 자라주길”이라고 써주셨다. 주현인 매사 쾌활하고 매일매일이 행복한 아이다. 장래 희망이 뮤지컬 배우인데, 연기력이 대단하다. 주특기는 표정 연기로, 누가 주문만 하면 자동판매기 단추 누른 듯 다양한 연기가 나온다. 공부 잘해서 상을 받았을 때, 실망했을 때, 졸리울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등등…. 웬만한 아역탤런트를 뺨칠 정도다. 내가 그애 집에 더러 들르면, 주현인 공주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 왕국》을 틀어놓고는 뮤지컬 연습을 끝없이 한다. 얼마나 깜찍하고 귀여운지 모른다. 나를 위한 공연인가 싶어 감격스러워 하면 그 애 엄마는 항상 이러고 놀아요, 한다. 시장님의 문구는 주현이의 일상을 들여다본 듯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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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이가 시장님께 드리겠다고 편지를 쓰니까 아직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주현인 그림을 그리더니 단상에 오르자 주현이가 먼저 시장님께 제 그림을 드렸다. 시장님은 참 예쁘다면서 네가 그렸니? 하고 물으셨고 주현인 저 햇살처럼 밝고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자랑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또 작은조카네 손주 인교에게는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고 소나무처럼 꼿꼿하게” 라는 글을 주셨다.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인 인교는 성격이 섬세하고 행동이 민첩하다. 어찌나 책을 좋아하는지 시끌시끌한 곳에서도 책을 펴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다 읽는다. 버드나무와 소나무의 이미지를 다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아이는 유독 신앙심이 깊다. 지금도 성당 미사시간에 복사를 서고 있다. 그 아이를 보면 왠지 성직자의 길을 걸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부모도 그러길 바라는 눈치다. 속세에서 자랄 때 무엇이라도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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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교 동생인 혜교는 잘 웃고 한없이 착하다. 수줍어서 늘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다섯 살인데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다섯 달 먼저 태어난 주현이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놓고는 만나기만 하면 언니, 언니, 하면서 졸졸 따라다닌다. 시장님은 혜교에게 “함께 가는 길, 서혜교 양의 꿈을 응원하며”라고 써주셨다. 마치 이 아이의 성품을 꿰뚫어보시고 “마음 놓아라. 우리는 모두 함께 가는 것이란다”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시는 것만 같다. 우리 손주들을 만나보신 것도 아닌데 어쩌면 이렇게 적절한 말씀을 주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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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각기 다른 말씀을 주셨다. 그 세심한 배려가 참으로 놀랍다. 시장님은 뭐든 최선을 다하는 분이구나 하는 신뢰가, 행사에 모인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지는 듯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신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신뢰만큼 크나큰 자산도 없다. 신뢰란 관계 속에서만 성립되는 것이고 관계의 지속성을 함의하기에 끝없는 확장이 가능해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족자의 짧은 경구를 가슴에 품을 것이고 에세이스트가 마련한 이 축제를 기억할 것이다. 시장님은 아이들에게 꿈과 이상을 심어주셨고 에세이스트는 수필의 미래를 아이들에게 심어놓은 셈이다.
참석자가 420여 명이나 되었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삼사십대의 엄마아빠, 거기에 오륙십대의 중견작가들, 칠팔십대의 문학계 원로들, 1세부터 90세까지 연령이 고르게 분포되었다. 또한 제주부터 부산, 순천, 창원, 광주, 대구, 전주, 울산, 등등 전국 각지에서 오신 분들이고, 서울사람은 반이 채 안된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모임이 가능한가? 이 풍성한 모임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변화는 이렇게 작은 단체로부터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떤 희망적 조짐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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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차속에서 형준이에게 물었다.
“형준아, 시장님께 드린 편지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 좀 알려줄 수 있겠니?”
“우리 신용산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트랙을 올 여름방학에 바꾸어 주신다고 해서 축구를 하는 저로서는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이다음에 대통령이 되셔서 청와대에 가시면 그때도 저를 꼭 초대해주세요.”
“아! 그랬구나. 오늘 무엇이 좋았어? 소감이 어땠어?”
“다른 애들이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은 것이 참으로 특별했어요.”
열 살 아이가 ‘겪어보지 못했던’이란 말을 쓴다? 나는 집에 와서도 이 말이 자꾸 생각났다. 에세이스트의 열세 번째 생일도, 방혜자 선생님의 고운 자태와 말씀도 처음이다. 김종완 선생의 멋진 베이지색 양복에 주황색 넥타이도, 권은민 변호사와 김기연 사무총장의 유려한 사회도, 배영숙 선생의 정경문학상 수상도 처음이고, 김단 선생이 화려한 노란 재킷을 입으신 것도 처음 보았다. 신예 작가 세 분이 한자리에서 각자의 신간을 사인해서 증정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모든 하루하루가 나의 모든 순간순간이 모두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는 새삼스런 자각이 서늘하게 들어왔다.
첫댓글 사진 저 위에 있는 녀석들이 조카들이군요. 어려서부터 단상에 올라갔으니 큰 인물이 될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