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안내도
진관사 일주문
진관사 안내문
[진관사는 동 불암사, 서 진관사, 남 삼막사, 북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아 왔다. 진관사(津寬寺)의 연혁은 고려 제 8대 현종(顯宗)원년 서기 1010년에 현종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 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의하여 조종선령(祖宗仙靈)과 순국충열(殉國忠烈), 희생당한 고려 왕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춘ㆍ추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장엄하게 베풀어 왔었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진관사에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독서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 동란 때 공비소탕의 일환으로 사찰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1963년 비구니 진관(眞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30여 년간 복원 불사를 하여 지금의 가람으로 일신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칠성각, 독성각, 나가원, 홍제루, 동정각, 동별당, 요사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로는 미륵보살과 제화갈화보살을 모셨으며,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십대 대왕을 모셨으며, 나한전은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십륙나한상을 보셨다.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문화역사를 자랑하는 진관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일상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면서 오늘도 부처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백초월길에 관한
안내문
백초월(白初月) - 독립 자금 모금에 앞장선 큰스님
출생 – 사망 : 1878.2.17. ~ 1944.6.29.
20대에 큰스님 반열에 오른 지성인
백초월은 1878년 2월 17일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부락에서, 부친 백하진(白河鎭)과 모친 김해 김씨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원 백씨 26세손이었던 초월은 집안이 진주군 정촌면 관봉리로 이주함에 따라,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지냈다.
한편, 초월은 소년 시절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배움의 탐구열이 용솟음치던 청년기인 1891년에 지리산의 영원사(靈源寺,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로 입산 출가하였다.
입산 출가 당시 그의 법명은 동조(東照)이다. 초월(初月)은 그의 법호이다. 그는 이러한 이름 말고도 구국당(龜國堂)과 구당(龜堂)의 별호, 인영(寅榮), 최승(最勝), 의수(義洙), 의호(義浩), 인선(寅仙), 자인(自忍) 등 다양한 이명 및 가명을 가졌다. 별호, 이명, 가명은 그가 독립운동 당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입산한 그는 영원사의 주지를 역임한 이영진(李永鎭)을 은사로 모시고 수행하였다. 선생은 이영진에게 법을 받아 ‘초월’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백초월은 영원사에서 승려로서의 기본을 배운 후 해인사 강원(講院)에서 사미과와 대교과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래서 1914년에는 대덕(大德) 법계를, 그 후에는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았다.
조선중기부터 구한말까지의 영원사 역대 조실을 총정리한 [조실안록 祖室案錄」에는 백초월이 1903년 겨울, 1904년 초의 영원사 조실이었음을 전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초월이 영원사 조실을 맡을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 이는 백초월의 경학 실력이 간단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해인사 강원의 경학과 지리산권 불교를 정통으로 이수한 대상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초월은 경학을 배우면서 참선 수행도 하였다. 해인사 선원의 기록인 방함록(芳啣錄)에 ‘초월 동조 初月 東照’라고 나오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1908년 해인사 강원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이고경의 [해인사약지]에 나온다. 1909년 범어사 강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전하는 [성도기 成道記]에는 “을유 추칠월 동래범어사 청풍강당 초월대화상 법하 동거록(乙酉 秋七月 東來梵魚寺 淸豊講堂 初月大和尙 法下 同居錄)”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를 보면, 1909년 당시 백초월이 범어사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백초월의 속랍이 30대 초반이었고, 그 호칭이 대화상이라고 지칭하였음을 볼 때 경론을 가르치는 강백으로 공인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그는 해인사와 지리산권의 불교에서 공부를 정통으로 마친 승려였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대강백,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식인, 지성인이었다. 그가 항일 민족운동 대열에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이른바 임제종운동(1910~1911년) 당시였다. 그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초월이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백초월은 1915년에 개교한 중앙학림의 초대 강사로 내정되었다는데 중앙학림은 오늘날 동국대의 전신이다. 동국대 개교의 역사적 시점은 1906년, 불교계의 근대식 최초 학교로 개교한 명진학교이다. 명진학교는 1915년 전국 본사급 사찰의 후원을 전폭적으로 받으면서 중앙학림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백초월이 강사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출가 본사인 영원사가 화재를 입었기 때문이다. 1911년 12월 9일 영원사는 큰 화재를 당하여 가람이 거의 전소되었다. 화재 시 백초월은 영원사 외부에 있었지만 영원사로 돌아왔다. 영원사 재건불사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원사의 주지인 전재룡 및 대중 승려와 함께 불사금 화주를 위해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백초월은 영원사 재건불사와 주지 소임을 마치고 청주 용화사 포교당으로 갔다. 그는 영원사 주지 재직 시에도 용화사의 포교 활동을 지원하다가, 영원사 주지를 마치자 전적으로 이곳으로 와서 포교에 전념하였다. 그는 용화사에 거주하면서 청주의 재가불자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면서 나라 및 민족의 현실에 깊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면서 해인사 지방학림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화엄경>을 탐독하다가,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이라는 구절에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일심( 一心), 즉 한마음을 갖고 독립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어쨌든 용화사에서 <화엄경>의 일심을 주목한 것은 후일 그가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 이념을 정비하고, 일심회(一心會)라는 비밀 항일 조직체를 만든 계기였다. 그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면 나라의 독립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 본부를 이끌다
3․1운동 당시 불교계 대표로 활동한 한용운이 백초월을 민족대표에 포함시키려한 시도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지만 3.1운동 전후, 백초월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기록이 남아있는 일제문서는 백초월이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점을 1919년 4월로 전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3․1운동 발발 당시 국내의 동포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 기독교와 천도교는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는데 반하여 불교도는 무관심한 것을 개탄함에서 찾았다.
그는 상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우선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한국민단본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을 주도하였다.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는 3․1운동 직후 김법린, 김상헌, 박민용, 김상호가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보고한 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全國佛敎徒獨立運動本部)를 지칭한다. 백초월은 당시 불교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던 이 두 단체에 모두 관여하였다. 불교계 3․1운동의 계승, 불교 독립운동의 견고화의 중심부에는 이처럼 백초월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중투쟁을 하였을 때, 백초월은 전국 불교계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백초월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을 배경으로 전개된 군자금 모금과 [혁신공보(革新公報)]의 발간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국내 불교계와 임정을 연결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격인 민단본부 학인승려들을 연락책으로 활용했다.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도 하고, 자신의 특파원으로 중앙학림 학인이며 민단 부원이었던 대상자들을 사찰 및 승려에게 보내 모금활동을 추동했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 천은사 주지 하용화, 화엄사 총무 이인월, 화엄사 승려 김영렬, 쌍계사 등이 백초월의 자금 제공에 협조하였다. 특히, 범어사의 오성월, 오리산, 김경산은 많은 자금을 제공하였다.
모금된 자금은 자신의 조직원(민단부원)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 및 만주의 독립군에 보냈다. 그는 길림성 독립군에 11명(박달준, 김봉율, 김장윤, 강재호, 박영희, 송복만, 손덕주, 박덕윤, 이창옥, 이덕진, 김성수)의 불교청년을, 상해 임정에는 6명(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김봉신, 김상헌, 박민오)의 청년 불자들을 파견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보내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유의하면 당시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결 고리를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백초월은 민단의 부원들을 활용하여 [혁신공보]라는 비밀 소식지를 발간, 배포하였다. 간행은 1919년 7월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는데 백초월은 자신을 혁신공보사의 사장이라고 내세웠다. 이 [혁신공보] 활동에는 중앙학림 출신인 김법린, 백성욱, 김상헌, 김상호 등이 참여했다.
한편, 초월은 임시정부의 경비 지원을 목적으로 인천, 부산, 원산 항구의 관세를 담보로 미국에게 15억 달러의 차관을 신청하였다. 일제의 보고문에 따르면 백초월의 제의에 미국은 유럽의 한 나라가 보증을 하면 응하겠다고 하여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이 그 보증국을 구하였다고 한다. 이에 백초월은 국내에서 임시정부의 공채를 발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획은 임시정부와의 깊은 연계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초월은 1919년 4월경에 상경하여 중앙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그 중심적인 역할로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되었다. 3․1운동 직후 국내불교 독립운동에서 백초월의 부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백초월은 그해 11월 25일 단군 건국기념일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는 시위 계획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로의 삼청동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이 내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포고문이 배포되었는데, 그 배후에 백초월이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이 적극 관여한 그 운동에서 의친왕 선언서가 뿌려졌다. 선언서에 나오는 33인의 민족대표에 불교계 대표로 백초월과 정남용이 포함된 것에서 백초월의 당시 국내 독립운동선상에서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백초월은 1919년 12월 이전까지는 다양한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군자금 모집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1919년 12월 2일 일제의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백초월의 신상 변동, 즉 재판에 회부되었는지, 그리하여 정식 구형․수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추정하건대 많은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부족 등으로 수감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초월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해졌으며, 간혹은 미치광이 행세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1920년 3월 1일, 일본유학생들이 3․1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에서 전개한 만세운동, 국내에 격문 배포, 일본의회에 독립청원을 기도한 사건 등에 백초월이 연루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제에 또 다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신조선]의 주간으로 활동하였던 이달(李達)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백초월은 이 사건을 실무적으로 추동한 이중각(李重珏)의 제의를 받아들여 2월 18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본격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전인 1920년 3월 1일, 동경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월 9일 국내로 압송되었다. 백초월은 체포 시에 42세의 영원사 승려로 나오며,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별명인 백의수(白義洙)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백초월의 치열한 독립운동은 승려독립선언서(僧侶獨立宣言書) 배포 및 의용승군제(義勇僧軍制) 추진 사건에서 극대화되었다. 이 사건은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승려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백초월과 연결되었던 중앙학림 출신인 신상완, 김법린, 백성욱 등은 독립운동선상에 불교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안창호와 협의하여 국내 불교계 거물의 상해 망명 유도, 불교계 자금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 불교 단체의 독립운동 참가 등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승려독립선언서의 작성, 임시의용승군제가 추진되었다.
승려독립선언서는 1919년 11월 15일 대한승려연합회 대표 승려 12명의 이름으로 국내외에 배포된 선언서이다. 국문, 한문, 영문의 3종으로 작성된 이 선언서는 3․1운동기 불교계의 독립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 문건이다. 이 선언서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 12명의 가명으로 상해에서 제작, 국내외에 배포되었다. 초월 그는 국내외를 망라하는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중앙학림 학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직후 급증한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모두 한 마음으로 모으기 위한 일심교
3․1운동 직후, 백초월이 추진한 독립운동은 불꽃과 같았다. 일제에 피체되어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삶 자체가 고통 그 자체였지만 독립운동을 지속해야 하겠다는 의식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백초월은 우선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에서 몸을 추스르고, 재기를 기약하였다. 몸이 회복되자 승려로서의 기본적인 포교 활동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구도 하에서 백초월의 설교, 포교 활동이 주목된다. 그는 조선불교대회, 중앙포교소, 각황사 등에서 강연을 했다. 1920년대 중후반에도 강연 활동은 지속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진관사의 후학들에게 불교와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일제 시선을 피하기 위한 강연을 하면서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 이념을 내세웠다. 1921년 서울 마포포교당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일심교 강령을 구상하였다. 즉 일심만능(一心萬能), 군교통일(群敎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라는 3대주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일심만능(一心萬能)은 일심, 한마음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리 민족의 독립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군교 통일주의(群敎 統一主義)는 잡다한 여러 종교를 일심교로 통일, 세계평화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평화주의(世界 平和主義)는 전 인류, 사회인이 일심이 되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를 하나로 만들 수 있어서 세계 평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교 표방의 목적, 즉 내면으로는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6년 7월경에는 진관사 마포 포교당에 일심교 사무소를 차리면서 본격적인 일심교 행보를 시작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적극 설득하며 동지를 포섭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밀송하였고, 임시정부에 밀사를 보냈다.
백초월은 일심교를 통해 동지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항일 조직체인 일심회(一心會)를 만들었는데 비밀 결사조직인 일심회의 항일 활동은 전국적인 차원이었다. 진관사와 진관사 포교당은 그 중심이었고, 각처에서 백초월의 뜻에 동조한 동지들이 결속되었으며, 전국에서 자금이 모금되었다. 정읍의 오지 사찰인 석탄사에서 비밀리에 일심회 활동을 하였고, 초월이 전국의 각처, 각 사찰을 순방하였다는 것은 그를 증명하는 실례이다.
백초월은 동학사 강원에서 1930년부터 3년 간 강주로 있었다. 그가 어떤 계기로 충청도의 심장부인 계룡산의 동학사에 왔는지는 전하지 않지만 그의 강주 부임은 그의 불교 경학 및 사상에 대한 실력을 인정한 결과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학사에 오기 이전 진관사에서도 학인들을 가르쳤다. 정식 강원이 설립되지 않았던 진관에서는 부정기적으로 학인, 젊은 스님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진관사를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 은신처, 그리고 휴식처 등으로 활용하였다. 때문에 그의 일상적인 가르침은 불교계 제도권 학교인 강원과 같은 강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20대에 조실, 강백을 역임한 당사자이었기에 후학들에게 불교 교리와 사상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나아가 초월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학인과 후배 스님들에게 불어 넣었다. 이와 같은 행적을 갖고 있던 백초월이 동학사 강사로 부임하였다. 현재 동학사의 도서관 자료로 보관되고 있는 [동학사사적(東鶴寺事蹟)]은 1929년에 서술되었는데, 그 서술자가 바로 백초월이다. 도입부에 ‘최승도인最勝道人 초월동조 初月東照’라고 적혀 있다.
동학사 강사로 활동할 당시 초월에 대한 증언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강한 민족정신이 용솟음 쳤다는 것이다. 그는 감시하는 일본 경찰에게는 미치광이, 바보로 행세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독립정신을 불어 넣었다. 그 시절 백초월은 방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는 거북이를 바라보면서 참선을 하였다. 이 시기에도 일본 형사가 정기적으로 동학사를 내왕하여 초월을 감시하였다. 그래서 일본 형사가 와서 초월의 방을 쳐다보면, 초월은 죽은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해서, 일본 형사는 초월을 정신이상자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간혹, 백초월은 방안에서 거북이의 노래를 불렀다고 당시 강원의 학인이었던 금암은 증언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민족정신, 독립운동은 동학사 시절에도 전혀 죽지 않았음을 거듭 확인하였다. 즉, 초월은 동학사의 강사를 하면서 반미치광이의 행세를 하면서도 민족의식을 학인들에게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면으로는 그의 독립운동 조직체로 강구하였던 일심회를 통하여 동지를 모집하였다.
3년간 동학사에 있었던 백초월은 계룡산 신도안의 용화사로 이전하여 2년 간 머물렀다. 초월은 동학사에서 더 으슥한 용화사로 갔다. 그리고 근처인 부여의 무량사에도 왕래하였다. 이런 행보는 그가 추구한 일심교의 전파, 항일 비밀결사체인 일심회의 조직 강화, 혹은 본격적으로 비밀결사의 항일 활동을 위한 것으로 본다.
일제 비밀첩보 문건에 의하면 백초월은 1934년 음력 9월, 전북의 정읍군에 소재하는 석탄사에서 그의 독립운동에 동참한 승려 몇 명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체인 일심회(一心會)를 본격적으로 조직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즉, 백초월은 용화사에 머물면서, 그리고 오지의 석탄사에 가서는 한 단계 진전된 항일투쟁의 길로 나가는 방향을 모색하였다.
동학사와 용화사를 거친 이후 백초월의 행적은 1935년 3월 경, 봉원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신촌에 있는 봉원사는 구한말 근대의 서막을 알렸던 사찰이었다. 이 절은 개화승 이동인과 개화당 청년들이었던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신문명, 근대 지향을 고민하였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다. 초월은 봉원사 강원의 강사로 부임했다. 그 무렵 백초월은 3대 강사로 지칭되었으며, 이화여대의 학장을 역임한 김활란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백초월은 봉선사 학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강렬하게 고취시켰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번갯불 번쩍 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즉시 가담할 것을 늘 종용하였다. 이렇게 초월이 독립운동을 신앙, 생활이라고 언급하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그의 민족의식이 민족 주체성이라는 기반에서 나왔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초월은 1936년에 월정사 강사로 부임하였다. 여기에는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함께 한 항일승려인 이종욱이 월정사의 주지이었던 점이 작용하였다. 이종욱과 백초월은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전달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당시 초월에게 배운 조영암은 이에 대하여, [불교사상] 1985년 3월호에 기고한 ‘스님들의 항일운동’이라는 글에서 “백초월 스님을 강사로 월정사에 뫼신 것 또한 지금 생각해보니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영암은 그가 월정사에서 수학할 때 오대산 중대(中臺)에서 백초월이 갑자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회고하였다. 그 무렵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서 수행하였던 창조는 초월이 독립운동을 하였고, 의식이 투철하였다고 증언했다. 월정사 강사를 그만 둔 1938년 무렵에는 진관사 마포포교당으로 갔다.
이렇듯이 백초월은 동학사, 봉원사, 월정사 등지의 강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학 양성은 단순히 불교를 가르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고, 민족을 수호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학인 스님들에게 고취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일심회를 통한 항일 비밀결사운동을 추진하였다. 때문에 백초월이 학인들과 함께 한 그 시간은 절체절명의 세월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도, 일제와의 대결을 결코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로 향하는 열차에 새긴 ‘대한독립만세’
백초월은 계룡산과 오대산을 거쳐 1938년 초반 무렵,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10년 이상, 서울 및 전국 각처에서 일심교의 강령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그를 통해 나타난 항일 비밀결사 조직체인 일심회를 갈무리 하였다. 그가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 다녔고, 그에 대한 행적이 전하는 것의 본질에는 나라의 독립을 되찾겠다는 염원이 있었다. 이제 그는 일심회라는 비밀 결사조직체를 가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일제는 중일전쟁의 도발을 강구하고 있었다. 한국 침략, 만주 침략의 기반을 발판으로 중일전쟁은 실로 동양의 진로와 역사를 뒤엎을 수 있는 청천병력과 같은 도전이었다. 일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어서도 총력전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명운이 걸린 총력전이었기에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었다. 총후보국 체제로 사회 전반을 전쟁체제로 내몰았다.
한국에서도 징용과 징병이 나타났다. 그리고 전쟁 물자를 위한 각종 물품 납부 등이 강요되었다. 사찰에서도 군수물자 제작에 필요한 그릇, 종 등 쇠붙이를 납부해야만 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만주로, 중국 본토로 군인과 물자를 보급하는 기지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군인, 군속, 간호요원 등의 인력과 전쟁의 물품이 용산역에서 출발하였다. 용산역을 거쳐 평양, 신의주를 지나 만주의 봉천, 신경, 하얼삔 등지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용산역이 이를테면 중일전쟁의 출발선이었다.
그래서 초월과 일심회에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거사를 1939년 10월에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만주로 떠나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쓰려고 한 것이다. 그는 용산역에서 민족의식을 용감무쌍하게 보여줌으로써 중일전쟁의 구도를 깨고, 그로 인하여 동포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고, 만주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는 민족을 절대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1939년 10월 11일, 백초월을 비롯한 일심회 회원들은 마포정 414번지(진관사 마포 포교당)에서 모임을 갖고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낙서를 대서특필하기로 하였다. 그 의거에 나선 회원은 박수남(朴壽南)이었다. 그는 1937년 11월 초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일심회(一心會)에 입회한 조선운송주식회사 용산영업소 임시 인부였다.
일심회 차원에서 행한 10월 14일의 그 거사는 성공했다. 일심회 회원들은 환희하였다. 그래서 초월은 일심회 회원들에게 독립자금을 독촉하고, 지속적으로 동지를 확보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낙서를 단행한 박수남과 배후의 인물인 백초월은 10월 23일 일제에게 체포되었다. 박수남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7월 14일에 사망하였고, 초월은 일제에 피체되어 정식 재판에 회부되어 1940년 10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의 판결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복역을 하고, 1943년 3월 3일에 출소하였다.
출소한 백초월은 또 다시 만주로 보내는 독립운동 자금에 연루되어 일제에 체포되었다. 초월은 그 후 청주교도소에 구금 중이던 1944년 6월 29일에 옥중 순국하였다. 순국 연유는 전하지 않지만, 일제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보인다. 초월은 1920년에도 고문을 당하였기에 20년 간의 체포, 구금, 고문, 감시를 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행방불명되었고, 독립정신의 복권은 1986년에 가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91년에는 고향에 순국비가 서기도 하였다. 초월의 맹렬한 독립운동은 2009년 5월, 그가 머물던 진관사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진귀한 독립운동 자료가 대거 발견됨으로써 재확인되었다. 백초월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는 지금부터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진관사 아미타불
진관사 전통찻집
연지원
진관사 보문원
진관사 향적당
진관사 동종각
진관사 홍제루
진관사 대웅전
질 바이든, 기시다 유코, 리처드 기어가 진관사에 빠진 까닭은…
동아일보 기사 업데이트 : 2023-05-16 09:11
이진구 문화부기자
해외 귀빈 즐겨 찾는 서울 진관사
해외 귀빈들의 진관사 방문기록
#1. 2011년 6월 배우 리처드 기어가 자신의 사진전 ‘순례의 길’ 홍보차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津寬寺)를 찾을 계획이었지만 갑자기 방문을 취소했다. 가는 곳마다 장사진을 이룬 팬들과 취재진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다음 날 취재진과 팬들 몰래, 경찰 경호도 없이 가족과 진관사를 찾아 3시간 정도 둘러보고 떠났다. 그는 당시 통역을 맡은 혜민 스님에게 “다음에는 몰래 와 쉬면서 한국 불교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2. 2014년 당시 백악관 부주방장이던 샘 카스가 진관사에서 사찰 음식을 체험한 후 “불고기를 배워 오라던 오바마 대통령에게 진관사에서 배운 콩국수를 해 주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3. 2014년8월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어는 서울 진관사에 하루 묵으며 템플스테이 체험을 했다.
#4. 2015년 7월 미국 부통령 부인으로 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질 바이든 여사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으로 진관사를 방문했다.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총무국장 법해 스님(현 주지 스님)과 함께 경내 사찰음식 체험관인 향적당과 세심교 다리, 장독대 등을 둘러봤다. 바이든 여사가 진관사를 찾은 건 당시 백악관 부주방장 샘 카스가 강력히 권했기 때문. 카스 부주방장은 2014년 진관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며 콩국수 만드는 법을 배워 갔다. 바이든 여사는 예정했던 1시간을 훌쩍 넘겨 3시간 넘게 머물렀다. 이 사실은 5년 후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된 후 알려졌다. 바이든 여사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진관사 스님들을 일일이 포옹한 뒤 떠났다고 한다.
#5. 2019년03월 한국을 국빈 방문한 마틸드 필립 벨기에 왕비가 귀국에 앞서 비구니 수행도량 진관사를 방문해 사찰 문화를 체험했다.
마틸드 왕비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를 찾아 사찰 음식 등을 체험하고, '정신건강과 교육'을 주제로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등과 차담을 나눴다. 진관사 측은 마틸드 왕비가 "한국과 벨기에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면서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벨기에에서는 명상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명상이 청소년 정신 건강에 해답이 될 수 있다"란 말도 했다고 진관사 측은 공개했다.
#6.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유코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2023년5월7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국가무형문화재인 국행수륙재(온 세상의 외로운 영혼들에게 불법과 음식을 베풀어 넋을 위로하는 불교의식) 중 법고무를 감상했다.
진관사는 해외 귀빈들에게 맞춤형으로 휴식과 음식·다도·명상체험 등을 제공해 호응을 얻었다.
지금까지 벨기에 왕비, 태국 공주, 부탄 공주 등을 비롯해 주한 외교사절과 외국 국회의원, 샤넬 디자인팀과 리처드 기어 등 유명 배우, 샘 카스 등 요리연구가, 페터 춤토어 등 유명 건축가 등 해외 명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꼭 찾아오는 필수 방문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 음식이 어우러진 장소이자 민간외교의 최전선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자하문터널, 구기터널을 거쳐 은평뉴타운을 지나면 멋스러운 한옥이 즐비한 은평 한옥마을이 보인다. 차로는 도심에서 30∼40분 거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7일 방문해 화제가 된 진관사는 바로 그 뒤에 고즈넉하게 숨어 있다. 11일 기자가 찾은 진관사는 평범한 여느 사찰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등산로에 자리 잡은 탓에 많은 등산객들로 오히려 더 평범해 보일 정도. 하지만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가르는 해탈문을 지나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아하∼” 하는 감탄과 함께 벨기에 마틸드 필리프 왕비, 건축가 페터 춤토어 등 수많은 해외 귀빈이 왜 그토록 이곳을 찾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 삼각산 자락 속 한 폭의 동양화
진관사는 예부터 동쪽 불암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혔다.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1011년 왕사인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해,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진관대사는 당시 전국에서 올라온 후보지 3곳(오대산 상원사 터, 해남 대흥사 터) 중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그만큼 진관사의 풍경은 수려함을 넘어 감탄을 자아낸다. ‘뭐지? 골짜기 안에 있지만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눈 맛이 시원한 이 느낌은….’ 귀빈들이 가장 먼저 탄성을 자아내는 것도 바로 이 풍광이라고 한다. 삼각산(북한산) 바위의 매력과 기세가 주변 소나무, 계곡과 어우러져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구니 사찰이란 특성 때문인지 경내를 둘러보다 보면 ‘깨끗하다, 정갈하다’는 느낌이 온몸에 밴다. 홍제루를 지나 본당으로 향하다 보면 작약꽃 흐드러진 마당 너머 보이는 대웅전과 나한전, 적묵당과 잘 정돈된 정원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진관사의 별칭이 ‘마음의 정원’이다. 이 때문인지 진관사 템플스테이는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예약이 어렵다.
● 매일 나물 캐는 스님들
“그날 만들 음식은 당일 캔 재료로만 만들지요. 여기 있는 음식도 모두 오늘 새벽에 스님들이 직접 산에서 땄어요.”
지난달 중순 진관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 후 가진 식사 자리에서 법해 스님은 “채소와 나물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다”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전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진관사 사찰 음식의 기본 정신은 ‘그날 채취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이다. 이 때문에 정해진 메뉴가 없다. 계절별로, 그날그날 인근 산과 재배하는 밭에서 딴 재료에 따라 음식이 달라진다. 수많은 음식이 있지만 진관사를 아는 사람들이 백미로 꼽는 것은 550년 전통의 두부찜 ‘포증(泡蒸)’이다. 신숙주의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에도 등장하는 진관사 두부찜은 갓 만든 두부에 곱게 채 썬 석이버섯, 잣, 검은깨를 얹고 그 위에 미나리로 글자를 입혔다. 진관사에는 섣달그믐에 두부와 두부소를 넣은 만두를 빚어 묵은 제사와 조왕불공을 드리고 이를 신도들과 나누는 풍습이 있다. 이 때문에 두부 음식이 발달했다. 두부채소탕, 두부호박찜, 두부깻잎전병, 구운두부찜, 구운두부장아찌 등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백악관 부주방장 카스는 진관사를 어떻게 알았기에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고, 바이든 여사에게 추천까지 했을까. 사찰음식과 템플스테이를 주관하는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1990∼200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냉장 음식과 식재료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일 때 채식 요리 중 하나로 한국 사찰음식이 조금씩 소개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을 찾았고, 이들이 사찰음식을 미국과 유럽의 리더들에게 소개하면서 입소문이 났다고 한다.
● 불교 상차림의 끝판왕 ‘수륙재’
진관사에서 사찰음식이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 태조가 진관사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국가무형문화재)’를 지내는 사찰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의식으로, 최근 진관사를 방문한 유코 여사도 수륙재 중 법고무를 관람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잠시 맥이 끊겼으나 1970년대 진관사 스님들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재에 필수인 음식도 스님들이 각종 사료를 뒤져가며 복원에 나섰고, 이것이 사찰음식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진관사에는 산사음식연구소가 있고 경내에 방앗간도 있어 가래떡, 절편, 백설기 등 각종 떡도 직접 만든다.
본디 사찰음식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오신채(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를 사용하지 않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수륙재 음식은 다르다. 수륙재는 왕이 외로운 영혼을 도량에 모셔 장엄한 의식과 음식을 베푸는 최고의 불교 의식이기 때문에 수륙재 음식은 속된 말로 불교 의식 상차림의 ‘끝판왕’이라고 불린다. 49일 동안 7번 재를 지내는 수륙재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이틀 열리는 칠재. 상중하 3단으로 차린 제사 음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 기사에 나오는 단차림 규정에 따르고 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올기쌀’로 지은 찐밥 서른 동이, 유과와 두부탕 각각 아홉 그릇, 국수와 떡 각각 아홉 그릇을 올린다. 상중하단과는 별도로 용왕을 위한 용왕단에는 미역, 사자(使者)가 타고 온 말이 쉬는 마구단에는 콩죽을 올린다. 그리고 재가 끝난 뒤에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다. 국행수륙재를 비롯한 의례음식에서 발우공양과 대중공양이 발전해 온 셈이다.
신도, 비신도를 가리지 않고 진관사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진관사가 사랑받는 이유는 맛과 풍광과 함께 ‘나누는 마음’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지만 그 전까지는 월·화요일만 빼고 절을 찾는 누구에게나 점심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등산로 옆에 자리한 탓에 점심 식사를 한 사람이 하루 평균 500∼600여 명이나 됐다니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김유신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사찰음식팀장은 “공양은 보시하는 마음을 의미하고, 나눔과 베풂의 지극한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라며 “진관사 공양문화는 인류가 지향하는 참된 음식문화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진관사 적묵당
진관사 명부전
진관사 나한전
대웅전 앞의
관불하는 곳
[조용헌의 영지 순례]
세계 유명 셰프들이 찾는 진관사의 비밀
기자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주간조선 기사 입력 : 2021.10.27. 08:08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 4군데의 호위 사찰이 있었다. 동쪽에는 불암사, 서쪽에는 진관사(津寬寺), 남쪽에는 삼막사, 북쪽에는 승가사이다. 이를 사고사찰(四固寺刹)이라고도 한다. 4군데서 도성과 궁궐을 지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서쪽에 있는 진관사. 근데 이름이 좀 특이하다. 나루 진(津)에 너그러울 관(寬)이다. 산속에 있는 절 이름에 어찌 나루 진(津) 자가 들어가는가? 고려 때 진관대사(津寬大師)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진관의 뜻은 ‘너그러운,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 또는 이승에서 저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물을 건너야 한다. 물을 건널 때는 배가 필요한데 불가에서는 이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한다. 지혜의 용이 이끌어 주는 배이다. 지혜가 없는 배는 피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지혜가 그만큼 필요하다. ‘너그러운 나루터’라는 작명에는 피안으로 이끌어줄 배가 많이 접안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큰 배, 즉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대기하고 있는 나루터, 항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호등은 백만불짜리
어찌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을까. 고려 8대 임금인 현종(顯宗)이 1010년에 진관대사를 위하여 여기에다 절을 지었다. 현종이 유년(대량원군·大良阮君) 시절 정치적 반대파의 압박에 의하여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진관대사가 현종을 절에다 숨겨서 보호해주고 키워줬기 때문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현종이 자기 스승이자 왕사인 진관대사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스승의 이름을 딴 절을 지은 것이 진관사이다.
고려 초기 당시에 전국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3군데의 절터가 후보로 올랐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 터, 진관사, 그리고 해남 대흥사 터였다고 한다. 현종은 제안하였다. “스님이 원하시는 장소를 정하시죠.” 진관대사는 서울 삼각산 줄기의 진관사 터를 지목하였다. “여기에다 짓고 싶다.” 서울 삼각산의 큰 줄기가 서남쪽으로 내려와 문수봉이 되었고, 그 주봉이 다시 서남으로 내려가 승가사(僧伽寺)가 되었다. 이 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 비봉(碑峰)을 이루었다. 문수봉의 다른 한 줄기는 서북으로 꺾어서 기운이 뭉친 봉우리가 바로 매봉이다. 이 매봉은 400m 정도의 높이지만 정상 부근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기운찬 봉우리이다. 이 매봉의 바위 맥을 타고 떨어진 지기(地氣)가 진관사 ‘大雄殿(대웅전)’ 현판 글씨의 ‘雄’ 자 지점으로 떨어졌다고 주지스님은 설명한다.
바위 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도 줄이 있고 선이 있다. 그 줄에 맞춰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을 받는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때도 이 에너지가 흐르는 전기선을 깔고 앉아서 기도를 하면 효과가 속발한다. 종교 신심은 역시 기도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기도발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땅의 에너지를 받느냐에 핵심이 있다. 진관사 대웅전은 이 매봉을 등 뒤로 하고 있으니 진관사는 매봉의 기운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 앞으로도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 감싸고 있다. 여러 겹을 감싸고 있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기운을 품어주기 때문이다. 추울 때 옷을 한 겹 입은 것보다 여러 겹을 껴입는 게 보온에 훨씬 도움이 되는 이치와 같다.
진관사 터에서 특히 보기 좋은 점은 백호등(오른쪽 맥)이다. 대웅전의 오른쪽 지맥이 절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을 감싸주고 있다. 계곡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청룡이나 백호의 지맥이 이 물을 감싸안아야 기가 안 빠진다. 백호등이 이 계곡물을 조릿대처럼 감싸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백호등이 백만불짜리이고, 역대 진관사에 머물렀던 선지식들이 이 백호등을 특히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특히 백호등의 맨 끝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힘이 뭉쳐 있다. 끝에 바위가 있으면 백호의 발톱이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도교의 도관(道觀)이라면 이 바위에 호랑이를 새겨 놓았겠지만, 불교 절이니까 백호등 끝자락의 바위에 마애불을 조각하여 놓았다. 진관사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서울 삼각산 바위 산들의 매력과 기세가 적절하게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다. 서울 산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터라는 점이다. 가장 한국적인 풍광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뷰를 가지고 있다.
질 바이든도 반한 진관사 밥상
근래에는 진관사가 한국 사찰음식의 본가처럼 주목받고 있다. 주지인 계호 스님이 수십 년 동안 사찰음식의 전통을 잘 보존해 온 결실이다.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불가 음식의 전통을 고수한 것도 대단한 수행에 속한다. 그 수행의 결과물이 시절인연을 만나니까 서구의 왕족들과 명사들이 진관사의 사찰음식을 맛보기 위하여 줄줄이 방문하게 된 것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가 대표적이다.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인 2015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질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를 찾았다. 한국 사찰음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던 것이다. 백악관의 부주방장인 샘 카스로부터 “한국에 가거든 진관사 사찰음식을 한번 맛보세요”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해 진관사에서 보낸 선물을 질 바이든 여사에게 전달했을 때에도 영부인이 아주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부주방장인 샘 카스는 2014년에 진관사에 들러 이미 맛을 본 상태였다. 백악관의 주방을 책임질 정도이면 당대의 요리사 반열에 든 수준일 텐데 어떻게 한국의 진관사 사찰음식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 대답을 계호 스님 밑에서 요리를 배우고 총무를 맡고 있는 법해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0~1950년대에 유럽의 학자들이 인도에 가서 동양의 종교, 사상을 연구하였다고 해요. 그러다가 불교에 주목하게 되었죠. 그런데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뻗어나가기는 동남아시아로 간 것을 알게 되었고, 동남아시아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다시 한국 불교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 학자들이 1980년대에 한국에도 와서 불교 사찰들을 돌아보았어요. 한국 불교 사찰에서 숙박도 하고 밥도 먹다 보니까 ‘발우공양’이라는 전통이 이색적이었고, 발우에 담겨 나온 음식들이 채식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고 해요. 당시 냉장음식에 대한 부작용, 식재료에 대한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었을 때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어떤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 사찰에서 채식요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사찰음식은 대부분 나물과 채소 아닙니까. 시래기 같은 것도 냉장이 아니라 말린 것이죠. 말린 시래기에 방부제가 들어간 것은 아니죠. 그리고 된장, 간장, 고추장과 버무려 먹죠. 장독대에서 발효시키는 된장, 간장도 서구인들 시각에서 보면 흥미로웠어요. 방부제가 없는 천연발효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나물과 채소에 맛을 내주고요. 유럽 연구자들이 한국의 사찰음식을 유럽의 실험실에 가지고 가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다고 하네요. 그 분석 결과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학술지, 논문에 게재되었어요. 데이터로 사찰음식의 우수성이 입증된 셈이죠. 이 연구 결과 데이터를 보고 세계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방문합니다. 유명 셰프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차츰 입소문이 유럽과 미국에 납니다. ‘한국 가면 절에 가서 나무 발우에 담겨 나오는 나물 요리들을 한번 맛봐라. 냉장음식, 육식문화에 대한 대안이 거기에 있다’라는 소문 아니었을까요. 유명 셰프 다음에는 유럽의 왕족을 비롯한 상류사회에까지 소문이 납니다. 오염되지 않고 발효가 잘된 먹거리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가치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백악관 부주방장도 한국에 오게 된 것이고, 부통령 시절의 질 바이든 여사도 오게 된 것입니다.”
태국 공주, 세계적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벨기에 여왕인 마틸드 필리프, 부탄 공주, 리처드 기어와 같은 할리우드 배우, 외국의 정치인들, 외국 건축가, 한국 사람은 그 유명도를 잘 알지 못하는 유명 셰프들이 진관사를 많이 다녀갔다.
진관사가 지닌 장점은 위치에도 있다. 서울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진관사가 지방에 있었으면 외국 유명인사들이 인천공항에 내려 또 몇 시간을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울 은평구에 있으니까 접근성이 좋다. 거기에다가 삼각산의 풍광이 절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다가 진관사가 여자 스님들이 사는 비구니 도량이다 보니 사찰이 아주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다. 진관사에 들어서는 순간 매우 깔끔하고 쾌적한 넓은 자연 정원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주지인 계호 스님의 내공과 사찰음식 주방인 향적당 등이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진관사 음식이 좋은 이유를 꼽는다면 어떤 것을 꼽겠습니까?” “물이 좋다는 점입니다. 비봉과 문수봉, 매봉을 비롯한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진관사 앞으로 모입니다. 팔방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모이는 셈이죠. 이 물이 화강암반을 통과해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에 맛이 좋습니다. 이 물맛이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
진관사는 고려 때는 진관대사라는 왕사가 머문 사찰이었지만, 배불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된 국립사찰의 역할을 하였다. 국가 차원의 수륙재를 지내던 사찰이었다. 물과 땅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천도하는 제사가 수륙재이다. 이성계는 이씨조선 창업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종친들이었던 왕씨들과 귀족들을 많이 살육하였다. 살생을 많이 하면 꿈자리가 사납기 마련이다.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불교국가에서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그 과보를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이성계도 꿈자리가 사납고 살생에 대한 업보가 두려웠다. 그 업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 성대한 수륙재를 열어 죽은 왕씨들을 달래는 일이었다. 이성계가 직접 지시하여 저승에 못 가고 헤매는 원혼들을 달래는 수륙재를 지내게 하였고, 그 장소를 진관사로 지정하였던 것이다. 진관사가 국가적 규모의 수륙재를 지낼 만한 사격(寺格)이 된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수륙사가 설치되었다. 조선조가 불교 탄압정책을 유지하였지만 진관사의 수륙재만큼은 국가적으로 예산 지원을 하는 예외적인 행사였다. 진관사는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사찰음식과 수륙재는 한류의 중요한 콘텐츠이다.
대웅전 앞의
관불하는 곳
관불에 관한
안내문
진관사 나가원
진관사 대웅전 앞 마당
계호 스님
진관사 산사음식연구소를 설립해 사찰음식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G20세계종교지도자, 주한대사부인 가든클럽, 한반도평화기원 주한대사 초청행사, 프랑스 국무장관 초청행사 등 수년간 국가와 종단 주요행사에서 사찰음식으로 만찬을 선보였다. 백악관 전 주방장 샘 카스, 뉴욕 미쉐린 3스타 에릭 리퍼트, 세계 톱3 셰프로 뽑힌 덴마크 르네 레드제피 등 세계 유명 셰프들이 찾아와 사찰음식 조리법을 배웠다. 2017년 조계종 사찰음식 명장으로 지정됐다.
진관사 계곡의
오리 1쌍
진관사 계곡
진관사 계곡
진관사 계곡
진관사 계곡
진관사 계곡
진관사 대웅전 앞 마당
진관사 홍제루
진관사 계곡
진관사 함월당
진관사 길상원
진관사 석탑
진관사 계곡
진관사 계곡
진관사 해탈문
2024년05월14일(화요일) 은평구 [은평한옥마을 8경&은평역사한옥박물관&셋이서 문학관&삼각산 금암미술관] 탐방기 탐방지 : 은평구 [은평한옥마을 8경&은평역사한옥박물관&셋이서 문학관&삼각산 금암미술관] 탐방코스: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버스 정류장~은평한옥마을 제 8 경 한옥마을~은평한옥마을 제1경 숙용심씨묘표~은평한옥마을 제 5 경 태극기 비~사회복지법인인덕원 붓다마을요양원~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평한옥마을 제 2 경 진관사~은평한옥마을 제 4 경 진관사 계곡~셋이서 문학관~삼각산 금암미술관~은평한옥마을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은평한옥마을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은평한옥마을 제 3 경 삼천사~삼천사 계곡~삼천사~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버스 정류장] 탐방일 : 2024년 05월 14일(화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은평구 진관동 최저기온 13도C, 최고기온 24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21분 소요) 13:41~13:54 연서시장 정류장에서 701번 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으로 이동 [13분, 9개 정류장 이동] 13:54~13:59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은평한옥마을 제 8 경 한옥마을을 거쳐서 은평한옥마을 제1경 숙용심씨묘표로 이동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은평한옥마을은 모던하고 깔끔하게 지어진 한옥이 북한산과 어우러져 마을의 고즈넉한 느낌을 더한다. 현대식 한옥마을인 은평한옥마을은 2010년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일대에 한옥마을 조성을 계획하면서 2012년부터 개발에 착수, 2017년 대부분의 한옥이 완공되었다. 전통한옥의 장점은 살리면서 단점은 보완하기 위한 은평한옥마을의 新한옥은 시공비는 낮추고 주택 성능은 높일 수 있어 미래형 도심 한옥으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서울의 외곽에 위치하지만 연신내, 일산과도 가깝다. 넓은 길 사이로 가까이 서면 꽤 높게 지어진 한옥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으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에 있는 느낌도 든다. 한옥마을에서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셋이서 문학관, 진관사 등 둘러볼 곳도 많다. 그림 같은 거리에서 한옥의 미를 느껴볼 수 있다. 셋이서 문학관(서울 은평구 진관길 23)이 마을 안에 있다. 시인 천상병, 시인 중광, 소설가 이외수 3인방의 작품세계와 문학론을 전시하는 전시관이다. 무료입장이며 입장시간은 오전 9시 ~ 오후 6시까지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2016년에 방영된 옥수동 수제자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상업시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옥이 주민들이 거주하거나 개인 사유지로 되어있어서 한옥 내부 관람은 불가하다. 다만 일부 가옥의 경우 소유주의 허락을 받으면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지역이므로 일몰 이후 밤 시간대에는 소음행위를 자제해야한다.] [은평한옥마을 8경 제 1경 숙용심씨 묘표(서울기념물 제 25호) 이 묘표는 빼어난 조각미로 인해 왜병들에 의해 임진왜란에 일본으로 건너가 400년간 일본에 있다가 2001년 후손들이 국내로 반환해온 석비이다. 제 2 경 진관사 진관사는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지고 있다. 제 3 경 삼천사 응봉능선과 의상능선 아래로 흐르는 삼천사 계곡에 위치해 있는 삼천사는 661년(문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고,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제 4 경 진관사 계곡 오랫동안 서울의 기둥이 되어온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울창한 삼림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계곡들이 많아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고 있다. 제 5 경 태극기 비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 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확보한 자료로 추정된다.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서울시 지정 보호수) (고유번호 서 12-1, 12-2, 12-15, 12-16) 은평한옥마을 느티나무는 1981년 서울시 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나무 높이 13~16m, 나무 둘레 2.9~3.1m, 120~220년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아름드리 줄기와 시원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푸른 잎들은 묵묵히 마을을 지켜온 무수한 세월들을 느끼게 한다.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 은평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를 포함한 은평구 일대 양서 파충류 집단 서식지는 현재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를 받고 있다. 야생식물의 보고인 북한산 둘레길과 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 주변은 생태네트워크 보전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높일 수 있는 자연체험교육의 장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제 8 경 은평한옥마을 이미 천년 전부터 한반도 최고의 길지(吉地)로서의 명성을 누려 온 천복지지(天福之地)의 명당에 위치한 은평 뉴타운 한옥마을은 마을 뒤쪽으로 펼쳐진 북한산과 마을 앞의 은평뉴타운으로 인해 수려한 자연환경과 함께 교통과 주거환경에서도 뛰어난 여건을 구비하고 있어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건강 웰빙 뉴타운으로 주목받고 있다.] 13:59~14:06 은평한옥마을 제1경인 숙용심씨묘표를 사진촬영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진관사 입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표이다. 2005년 12월 29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 묘표(墓表)는 일본 금융계의 중진으로 수상(首相)・대장상(大藏相) 등을 역임하다가 1936년 암살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기념공원 안(日本 東京都 港區 소재)에 있다가 2001년 숙용심씨 후손들에 의해 국내로 반환된 석비(石碑)이다. 비 몸돌 전면에 '숙용심씨지묘(淑容沈氏之墓)'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건대 성종 대왕의 후궁으로 성종과의 사이에서 2남(利城君과 寧山君) 2녀(慶順翁主・淑惠翁主)를 낳은 숙용(淑容) 심씨(沈氏)의 묘 앞에 세워져 있던 묘표로 추정된다. 이 비가 어느 시기에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동안 후손들에게도 분묘 자체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오래도록 전해진 것을 보면 성종과 중종의 능이 훼손되기도 했던 임진왜란 때로 추정된다. 현재는 은평구 진관외동 50번지에 조성된 단 위에 모셔져 있다. 숙용심씨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된 심말동(沈末同)의 딸인데 후궁이 된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종대왕실록의 성종 24년 4월 14일조에 '...심숙원(沈淑媛)이 이번에 부상(父喪)을 당했으니...(후략)'라는 기록이 보이는 바 1493년 이전에 이미 후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대왕실록에 실린 성종대왕 묘지문(墓誌文)에는 성종대왕이 왕비 3인, 후궁 7인을 둔 것으로 나오는데 숙용심씨가 내명부의 4품 품계인 '숙원(淑媛)심씨(沈氏)'로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씨는 성종대왕이 세상을 떠날 당시까지 숙원이었다가 후세에 3품의 숙용(淑容)으로 추봉(追封)되었던 것 같다. '숙용(淑容)심씨(沈氏)'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전주리씨 장흥군파 종보・이 묘비 등에서인데 추봉 시기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묘표는 심씨가 세상을 떠나 분묘가 조성되던 해 또는 숙용으로 추봉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인데 전주이씨 장흥군파 종보에는 숙용 심씨가 중종 을해년(1515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무렵 묘비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묘표 자체도 16세기경에 주로 보이는 형태를 하고 있다. 비 머릿돌[碑首]과 비 몸돌[碑身], 비 받침[碑臺]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 머릿돌과 비 몸돌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고 이렇게 조성된 비가 2단의 비 받침에 꽂혀 있는, 이른바 통비(通碑)형태이다. 비 머릿돌과 몸돌은 백대리석(白大理石)을, 비대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비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 즉 교룡(蛟龍)이 조각되는 이수(螭首)가 보통인데 여기서는 뿔이 있는 숫룡을 구름무늬 속에 표현하였다. 용 뿔과 수염, 용 코의 조각이 뚜렷하고 섬세하다. 비수의 후면과 좌우측 면은 모두 구름무늬에 둘러싸여 있다. 비 머리에 구름무늬가 사용된 예는 조선 초기부터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묘표의 경우처럼 구름무늬에 용이 조각된 예는 드문 편으로 16세기 석비 문화를 대표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14:06~14:08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132-28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5 경 태극기 비로 이동 14:08~14:10 은평한옥마을 제 5 경인 태극기 비를 사진촬영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 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 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확보한 자료로 추정된다. 발견된 태극기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변하고 왼쪽 윗부분이 불에 타 약간 손상됐지만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6월에서 12월까지 중국과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 연구를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2월 25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등재되었다.] 14:10~14:18 서울 은평구 연서로48길 41 번지에 있는 사회복지법인인덕원 붓다마을요양원으로 이동 14:18~14:20 노인 요양시설인 사회복지법인인덕원 붓다마을요양원을 사진촬영 14:20~14:25 서울 은평구 연서로50길 8 번지에 있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이동 14:25~14:55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을 관람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 50길(진관동) 설립자 : 은평구 웹사이트 http://museum.ep.go.kr/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은평구 공립박물관이다. 은평한옥마을에 위치해있으며 은평구청에서 관장한다. 2014년에 개관한 박물관으로 서울 은평구의 역사와 향토현황 등을 토대로 은평구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은평구 역사관에서는 경기도 고양군에서부터 서울 서대문구를 거쳐서 1979년 서대문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은평구의 탄생 배경과 은평뉴타운 개발의 배경과 은평구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옥 전시관에서는 선사시대 움집을 시작으로 전통 한옥으로 발달하게 된 한국 가옥의 변천사를 소개하며 한옥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 등을 전시하고 한옥 자재를 통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전시현황 상설전시실(2층, 3층) 은평구 역사관(2층) 은평구의 역사와 향토현황 은평구의 탄생과 배경 은평뉴타운의 개발 수색과 증산동의 지명 유래 은평구의 유적과 유물 파발에 대한 개요와 목적 은평에서 의주까지로 이어지는 통일의 꿈 은평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한옥역사관(3층) 한옥의 역사 한옥의 실생활과 목적 움집에서 한옥까지 한옥 내부 소재 전시 기획전시실(3층) 특별 및 기획전시를 하는 곳이다. 옥외공간 : 북한산 전망대 입장요금 면제 대상자 초등학교 미취학 영유아 및 65세 이상 경로자는 무료입장(부모 동반 및 신분증 제시)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등 무료입장(관련증 제시) 은평구청 및 타 지역 광역시도청 및 시군구청 공무수행자 무료입장(공무원증 제시) 북한산 전망대만 관람시 무료입장] 14:55~15:08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길 73 번지에 있는 진관사로 이동 15:08~15:18 은평한옥마을 제 2 경인 진관사를 탐방 [진관사는 동 불암사, 서 진관사, 남 삼막사, 북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아 왔다. 진관사(津寬寺)의 연혁은 고려 제 8대 현종(顯宗)원년 서기 1010년에 현종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 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의하여 조종선령(祖宗仙靈)과 순국충열(殉國忠烈), 희생당한 고려 왕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춘ㆍ추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장엄하게 베풀어 왔었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진관사에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독서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 동란 때 공비소탕의 일환으로 사찰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1963년 비구니 진관(眞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30여 년간 복원 불사를 하여 지금의 가람으로 일신 중창하였다.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칠성각, 독성각, 나가원, 홍제루, 동정각, 동별당, 요사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로는 미륵보살과 제화갈화보살을 모셨으며,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십대 대왕을 모셨으며, 나한전은 석가모니불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십륙나한상을 보셨다.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문화역사를 자랑하는 진관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일상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면서 오늘도 부처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질 바이든, 기시다 유코, 리처드 기어가 진관사에 빠진 까닭은… 동아일보 기사 업데이트 : 2023-05-16 09:11 이진구 문화부기자 해외 귀빈 즐겨 찾는 서울 진관사 해외 귀빈들의 진관사 방문기록 #1. 2011년 6월 배우 리처드 기어가 자신의 사진전 ‘순례의 길’ 홍보차 가족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그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津寬寺)를 찾을 계획이었지만 갑자기 방문을 취소했다. 가는 곳마다 장사진을 이룬 팬들과 취재진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다음 날 취재진과 팬들 몰래, 경찰 경호도 없이 가족과 진관사를 찾아 3시간 정도 둘러보고 떠났다. 그는 당시 통역을 맡은 혜민 스님에게 “다음에는 몰래 와 쉬면서 한국 불교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2. 2014년 당시 백악관 부주방장이던 샘 카스가 진관사에서 사찰 음식을 체험한 후 “불고기를 배워 오라던 오바마 대통령에게 진관사에서 배운 콩국수를 해 주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3. 2014년8월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어는 서울 진관사에 하루 묵으며 템플스테이 체험을 했다. #4. 2015년 7월 미국 부통령 부인으로 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질 바이든 여사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첫 일정으로 진관사를 방문했다.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총무국장 법해 스님(현 주지 스님)과 함께 경내 사찰음식 체험관인 향적당과 세심교 다리, 장독대 등을 둘러봤다. 바이든 여사가 진관사를 찾은 건 당시 백악관 부주방장 샘 카스가 강력히 권했기 때문. 카스 부주방장은 2014년 진관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체험하며 콩국수 만드는 법을 배워 갔다. 바이든 여사는 예정했던 1시간을 훌쩍 넘겨 3시간 넘게 머물렀다. 이 사실은 5년 후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된 후 알려졌다. 바이든 여사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진관사 스님들을 일일이 포옹한 뒤 떠났다고 한다. #5. 2019년03월 한국을 국빈 방문한 마틸드 필립 벨기에 왕비가 귀국에 앞서 비구니 수행도량 진관사를 방문해 사찰 문화를 체험했다. 마틸드 왕비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를 찾아 사찰 음식 등을 체험하고, '정신건강과 교육'을 주제로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등과 차담을 나눴다. 진관사 측은 마틸드 왕비가 "한국과 벨기에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면서 "아이들이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벨기에에서는 명상이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명상이 청소년 정신 건강에 해답이 될 수 있다"란 말도 했다고 진관사 측은 공개했다. #6.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유코 여사와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2023년5월7일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국가무형문화재인 국행수륙재(온 세상의 외로운 영혼들에게 불법과 음식을 베풀어 넋을 위로하는 불교의식) 중 법고무를 감상했다. 진관사는 해외 귀빈들에게 맞춤형으로 휴식과 음식·다도·명상체험 등을 제공해 호응을 얻었다. 지금까지 벨기에 왕비, 태국 공주, 부탄 공주 등을 비롯해 주한 외교사절과 외국 국회의원, 샤넬 디자인팀과 리처드 기어 등 유명 배우, 샘 카스 등 요리연구가, 페터 춤토어 등 유명 건축가 등 해외 명사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꼭 찾아오는 필수 방문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 음식이 어우러진 장소이자 민간외교의 최전선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자하문터널, 구기터널을 거쳐 은평뉴타운을 지나면 멋스러운 한옥이 즐비한 은평 한옥마을이 보인다. 차로는 도심에서 30∼40분 거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기시다 유코 여사가 7일 방문해 화제가 된 진관사는 바로 그 뒤에 고즈넉하게 숨어 있다. 11일 기자가 찾은 진관사는 평범한 여느 사찰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등산로에 자리 잡은 탓에 많은 등산객들로 오히려 더 평범해 보일 정도. 하지만 속세와 부처님의 세계를 가르는 해탈문을 지나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아하∼” 하는 감탄과 함께 벨기에 마틸드 필리프 왕비, 건축가 페터 춤토어 등 수많은 해외 귀빈이 왜 그토록 이곳을 찾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 삼각산 자락 속 한 폭의 동양화 진관사는 예부터 동쪽 불암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혔다. 고려 제8대 왕 현종이 1011년 왕사인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해, 절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진관대사는 당시 전국에서 올라온 후보지 3곳(오대산 상원사 터, 해남 대흥사 터) 중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그만큼 진관사의 풍경은 수려함을 넘어 감탄을 자아낸다. ‘뭐지? 골짜기 안에 있지만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눈 맛이 시원한 이 느낌은….’ 귀빈들이 가장 먼저 탄성을 자아내는 것도 바로 이 풍광이라고 한다. 삼각산(북한산) 바위의 매력과 기세가 주변 소나무, 계곡과 어우러져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구니 사찰이란 특성 때문인지 경내를 둘러보다 보면 ‘깨끗하다, 정갈하다’는 느낌이 온몸에 밴다. 홍제루를 지나 본당으로 향하다 보면 작약꽃 흐드러진 마당 너머 보이는 대웅전과 나한전, 적묵당과 잘 정돈된 정원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진관사의 별칭이 ‘마음의 정원’이다. 이 때문인지 진관사 템플스테이는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예약이 어렵다. ● 매일 나물 캐는 스님들 “그날 만들 음식은 당일 캔 재료로만 만들지요. 여기 있는 음식도 모두 오늘 새벽에 스님들이 직접 산에서 땄어요.” 지난달 중순 진관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 후 가진 식사 자리에서 법해 스님은 “채소와 나물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다”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전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진관사 사찰 음식의 기본 정신은 ‘그날 채취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이다. 이 때문에 정해진 메뉴가 없다. 계절별로, 그날그날 인근 산과 재배하는 밭에서 딴 재료에 따라 음식이 달라진다. 수많은 음식이 있지만 진관사를 아는 사람들이 백미로 꼽는 것은 550년 전통의 두부찜 ‘포증(泡蒸)’이다. 신숙주의 시문집 ‘보한재집(保閑齋集)’에도 등장하는 진관사 두부찜은 갓 만든 두부에 곱게 채 썬 석이버섯, 잣, 검은깨를 얹고 그 위에 미나리로 글자를 입혔다. 진관사에는 섣달그믐에 두부와 두부소를 넣은 만두를 빚어 묵은 제사와 조왕불공을 드리고 이를 신도들과 나누는 풍습이 있다. 이 때문에 두부 음식이 발달했다. 두부채소탕, 두부호박찜, 두부깻잎전병, 구운두부찜, 구운두부장아찌 등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백악관 부주방장 카스는 진관사를 어떻게 알았기에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고, 바이든 여사에게 추천까지 했을까. 사찰음식과 템플스테이를 주관하는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1990∼200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냉장 음식과 식재료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일 때 채식 요리 중 하나로 한국 사찰음식이 조금씩 소개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을 찾았고, 이들이 사찰음식을 미국과 유럽의 리더들에게 소개하면서 입소문이 났다고 한다. ● 불교 상차림의 끝판왕 ‘수륙재’ 진관사에서 사찰음식이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 태조가 진관사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국가무형문화재)’를 지내는 사찰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의식으로, 최근 진관사를 방문한 유코 여사도 수륙재 중 법고무를 관람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잠시 맥이 끊겼으나 1970년대 진관사 스님들의 노력으로 복원됐다. 재에 필수인 음식도 스님들이 각종 사료를 뒤져가며 복원에 나섰고, 이것이 사찰음식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진관사에는 산사음식연구소가 있고 경내에 방앗간도 있어 가래떡, 절편, 백설기 등 각종 떡도 직접 만든다. 본디 사찰음식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오신채(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를 사용하지 않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수륙재 음식은 다르다. 수륙재는 왕이 외로운 영혼을 도량에 모셔 장엄한 의식과 음식을 베푸는 최고의 불교 의식이기 때문에 수륙재 음식은 속된 말로 불교 의식 상차림의 ‘끝판왕’이라고 불린다. 49일 동안 7번 재를 지내는 수륙재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이틀 열리는 칠재. 상중하 3단으로 차린 제사 음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 기사에 나오는 단차림 규정에 따르고 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올기쌀’로 지은 찐밥 서른 동이, 유과와 두부탕 각각 아홉 그릇, 국수와 떡 각각 아홉 그릇을 올린다. 상중하단과는 별도로 용왕을 위한 용왕단에는 미역, 사자(使者)가 타고 온 말이 쉬는 마구단에는 콩죽을 올린다. 그리고 재가 끝난 뒤에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다. 국행수륙재를 비롯한 의례음식에서 발우공양과 대중공양이 발전해 온 셈이다. 신도, 비신도를 가리지 않고 진관사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진관사가 사랑받는 이유는 맛과 풍광과 함께 ‘나누는 마음’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중단됐지만 그 전까지는 월·화요일만 빼고 절을 찾는 누구에게나 점심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등산로 옆에 자리한 탓에 점심 식사를 한 사람이 하루 평균 500∼600여 명이나 됐다니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다. 김유신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사찰음식팀장은 “공양은 보시하는 마음을 의미하고, 나눔과 베풂의 지극한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라며 “진관사 공양문화는 인류가 지향하는 참된 음식문화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 조용헌의 영지 순례 ] 세계 유명 셰프들이 찾는 진관사의 비밀 기자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주간조선 기사 입력 : 2021.10.27. 08:08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 4군데의 호위 사찰이 있었다. 동쪽에는 불암사, 서쪽에는 진관사(津寬寺), 남쪽에는 삼막사, 북쪽에는 승가사이다. 이를 사고사찰(四固寺刹)이라고도 한다. 4군데서 도성과 궁궐을 지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서쪽에 있는 진관사. 근데 이름이 좀 특이하다. 나루 진(津)에 너그러울 관(寬)이다. 산속에 있는 절 이름에 어찌 나루 진(津) 자가 들어가는가? 고려 때 진관대사(津寬大師)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진관의 뜻은 ‘너그러운,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 또는 이승에서 저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물을 건너야 한다. 물을 건널 때는 배가 필요한데 불가에서는 이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한다. 지혜의 용이 이끌어 주는 배이다. 지혜가 없는 배는 피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지혜가 그만큼 필요하다. ‘너그러운 나루터’라는 작명에는 피안으로 이끌어줄 배가 많이 접안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큰 배, 즉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대기하고 있는 나루터, 항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호등은 백만불짜리 어찌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을까. 고려 8대 임금인 현종(顯宗)이 1010년에 진관대사를 위하여 여기에다 절을 지었다. 현종이 유년(대량원군·大良阮君) 시절 정치적 반대파의 압박에 의하여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진관대사가 현종을 절에다 숨겨서 보호해주고 키워줬기 때문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현종이 자기 스승이자 왕사인 진관대사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스승의 이름을 딴 절을 지은 것이 진관사이다. 고려 초기 당시에 전국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3군데의 절터가 후보로 올랐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 터, 진관사, 그리고 해남 대흥사 터였다고 한다. 현종은 제안하였다. “스님이 원하시는 장소를 정하시죠.” 진관대사는 서울 삼각산 줄기의 진관사 터를 지목하였다. “여기에다 짓고 싶다.” 서울 삼각산의 큰 줄기가 서남쪽으로 내려와 문수봉이 되었고, 그 주봉이 다시 서남으로 내려가 승가사(僧伽寺)가 되었다. 이 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 비봉(碑峰)을 이루었다. 문수봉의 다른 한 줄기는 서북으로 꺾어서 기운이 뭉친 봉우리가 바로 매봉이다. 이 매봉은 400m 정도의 높이지만 정상 부근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기운찬 봉우리이다. 이 매봉의 바위 맥을 타고 떨어진 지기(地氣)가 진관사 ‘大雄殿(대웅전)’ 현판 글씨의 ‘雄’ 자 지점으로 떨어졌다고 주지스님은 설명한다. 바위 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도 줄이 있고 선이 있다. 그 줄에 맞춰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을 받는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때도 이 에너지가 흐르는 전기선을 깔고 앉아서 기도를 하면 효과가 속발한다. 종교 신심은 역시 기도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기도발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땅의 에너지를 받느냐에 핵심이 있다. 진관사 대웅전은 이 매봉을 등 뒤로 하고 있으니 진관사는 매봉의 기운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 앞으로도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 감싸고 있다. 여러 겹을 감싸고 있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기운을 품어주기 때문이다. 추울 때 옷을 한 겹 입은 것보다 여러 겹을 껴입는 게 보온에 훨씬 도움이 되는 이치와 같다. 진관사 터에서 특히 보기 좋은 점은 백호등(오른쪽 맥)이다. 대웅전의 오른쪽 지맥이 절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을 감싸주고 있다. 계곡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청룡이나 백호의 지맥이 이 물을 감싸안아야 기가 안 빠진다. 백호등이 이 계곡물을 조릿대처럼 감싸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백호등이 백만불짜리이고, 역대 진관사에 머물렀던 선지식들이 이 백호등을 특히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특히 백호등의 맨 끝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힘이 뭉쳐 있다. 끝에 바위가 있으면 백호의 발톱이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도교의 도관(道觀)이라면 이 바위에 호랑이를 새겨 놓았겠지만, 불교 절이니까 백호등 끝자락의 바위에 마애불을 조각하여 놓았다. 진관사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서울 삼각산 바위 산들의 매력과 기세가 적절하게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다. 서울 산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터라는 점이다. 가장 한국적인 풍광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뷰를 가지고 있다. 질 바이든도 반한 진관사 밥상 근래에는 진관사가 한국 사찰음식의 본가처럼 주목받고 있다. 주지인 계호 스님이 수십 년 동안 사찰음식의 전통을 잘 보존해 온 결실이다.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불가 음식의 전통을 고수한 것도 대단한 수행에 속한다. 그 수행의 결과물이 시절인연을 만나니까 서구의 왕족들과 명사들이 진관사의 사찰음식을 맛보기 위하여 줄줄이 방문하게 된 것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가 대표적이다.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인 2015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질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를 찾았다. 한국 사찰음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던 것이다. 백악관의 부주방장인 샘 카스로부터 “한국에 가거든 진관사 사찰음식을 한번 맛보세요”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해 진관사에서 보낸 선물을 질 바이든 여사에게 전달했을 때에도 영부인이 아주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부주방장인 샘 카스는 2014년에 진관사에 들러 이미 맛을 본 상태였다. 백악관의 주방을 책임질 정도이면 당대의 요리사 반열에 든 수준일 텐데 어떻게 한국의 진관사 사찰음식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 대답을 계호 스님 밑에서 요리를 배우고 총무를 맡고 있는 법해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0~1950년대에 유럽의 학자들이 인도에 가서 동양의 종교, 사상을 연구하였다고 해요. 그러다가 불교에 주목하게 되었죠. 그런데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뻗어나가기는 동남아시아로 간 것을 알게 되었고, 동남아시아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다시 한국 불교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 학자들이 1980년대에 한국에도 와서 불교 사찰들을 돌아보았어요. 한국 불교 사찰에서 숙박도 하고 밥도 먹다 보니까 ‘발우공양’이라는 전통이 이색적이었고, 발우에 담겨 나온 음식들이 채식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고 해요. 당시 냉장음식에 대한 부작용, 식재료에 대한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었을 때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어떤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 사찰에서 채식요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사찰음식은 대부분 나물과 채소 아닙니까. 시래기 같은 것도 냉장이 아니라 말린 것이죠. 말린 시래기에 방부제가 들어간 것은 아니죠. 그리고 된장, 간장, 고추장과 버무려 먹죠. 장독대에서 발효시키는 된장, 간장도 서구인들 시각에서 보면 흥미로웠어요. 방부제가 없는 천연발효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나물과 채소에 맛을 내주고요. 유럽 연구자들이 한국의 사찰음식을 유럽의 실험실에 가지고 가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다고 하네요. 그 분석 결과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학술지, 논문에 게재되었어요. 데이터로 사찰음식의 우수성이 입증된 셈이죠. 이 연구 결과 데이터를 보고 세계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방문합니다. 유명 셰프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차츰 입소문이 유럽과 미국에 납니다. ‘한국 가면 절에 가서 나무 발우에 담겨 나오는 나물 요리들을 한번 맛봐라. 냉장음식, 육식문화에 대한 대안이 거기에 있다’라는 소문 아니었을까요. 유명 셰프 다음에는 유럽의 왕족을 비롯한 상류사회에까지 소문이 납니다. 오염되지 않고 발효가 잘된 먹거리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가치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백악관 부주방장도 한국에 오게 된 것이고, 부통령 시절의 질 바이든 여사도 오게 된 것입니다.” 태국 공주, 세계적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벨기에 여왕인 마틸드 필리프, 부탄 공주, 리처드 기어와 같은 할리우드 배우, 외국의 정치인들, 외국 건축가, 한국 사람은 그 유명도를 잘 알지 못하는 유명 셰프들이 진관사를 많이 다녀갔다. 진관사가 지닌 장점은 위치에도 있다. 서울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진관사가 지방에 있었으면 외국 유명인사들이 인천공항에 내려 또 몇 시간을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울 은평구에 있으니까 접근성이 좋다. 거기에다가 삼각산의 풍광이 절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다가 진관사가 여자 스님들이 사는 비구니 도량이다 보니 사찰이 아주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다. 진관사에 들어서는 순간 매우 깔끔하고 쾌적한 넓은 자연 정원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주지인 계호 스님의 내공과 사찰음식 주방인 향적당 등이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진관사 음식이 좋은 이유를 꼽는다면 어떤 것을 꼽겠습니까?” “물이 좋다는 점입니다. 비봉과 문수봉, 매봉을 비롯한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진관사 앞으로 모입니다. 팔방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모이는 셈이죠. 이 물이 화강암반을 통과해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에 맛이 좋습니다. 이 물맛이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 진관사는 고려 때는 진관대사라는 왕사가 머문 사찰이었지만, 배불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된 국립사찰의 역할을 하였다. 국가 차원의 수륙재를 지내던 사찰이었다. 물과 땅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천도하는 제사가 수륙재이다. 이성계는 이씨조선 창업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종친들이었던 왕씨들과 귀족들을 많이 살육하였다. 살생을 많이 하면 꿈자리가 사납기 마련이다.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불교국가에서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그 과보를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이성계도 꿈자리가 사납고 살생에 대한 업보가 두려웠다. 그 업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 성대한 수륙재를 열어 죽은 왕씨들을 달래는 일이었다. 이성계가 직접 지시하여 저승에 못 가고 헤매는 원혼들을 달래는 수륙재를 지내게 하였고, 그 장소를 진관사로 지정하였던 것이다. 진관사가 국가적 규모의 수륙재를 지낼 만한 사격(寺格)이 된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수륙사가 설치되었다. 조선조가 불교 탄압정책을 유지하였지만 진관사의 수륙재만큼은 국가적으로 예산 지원을 하는 예외적인 행사였다. 진관사는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사찰음식과 수륙재는 한류의 중요한 콘텐츠이다.] [계호 스님 진관사 산사음식연구소를 설립해 사찰음식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G20세계종교지도자, 주한대사부인 가든클럽, 한반도평화기원 주한대사 초청행사, 프랑스 국무장관 초청행사 등 수년간 국가와 종단 주요행사에서 사찰음식으로 만찬을 선보였다. 백악관 전 주방장 샘 카스, 뉴욕 미쉐린 3스타 에릭 리퍼트, 세계 톱3 셰프로 뽑힌 덴마크 르네 레드제피 등 세계 유명 셰프들이 찾아와 사찰음식 조리법을 배웠다. 2017년 조계종 사찰음식 명장으로 지정됐다.] 15:18~15:28 은평한옥마을 제 4 경인 진관사 계곡을 탐방 후 진관사로 회귀 15:28~15:35 서울 은평구 진관길 23에 있는 셋이서 문학관으로 이동 15:35~15:45 은평한옥마을에 있는 셋이서 문학관을 탐방 [셋이서 문학관 국내 인기작가로 활동했던 천상병, 중광, 이외수 세 명의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문학관으로 건립되어 '셋이서'라는 명칭이 붙은 문학관이다. 셋이서문학관에서는 예술가이자 기인으로도 불린 이들 세 사람의 작품을 통해 개성 있는 문학작품과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셋이서문학관은 전통한옥으로 지어졌으며 일반인들이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북카페 겸 전시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천상병(千祥炳) 요약 : 시인 겸 평론가.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렸으며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주요 작품집으로 《새》(1971), 《귀천 歸天》(1989) 등이 있다. 출생-사망 : 1930.1.29 ~ 1993.4.28 출생지 : 일본 효고(兵庫)현 히메지(嬉路)시 주요저서 : 《새》(1971),《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嬉路市)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 竹筍》 11집에 시 《공상 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문예 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년 7월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 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천상병 연보 출생 1930.1.29~ 사망 1993.4.28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천두용과 김일선의 차남으로 출생. 1934년 한국으로 돌아와 진동에서 지내다, 1940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감. 1943년 간산에서 초등학교 졸업.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 1949년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선생님으로 김춘수를 만남. 시 <강물>을 유치환의 초회추천으로 《문예》에 발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 통역관으로 근무함. 1951년 서울 상과대학 입학. 동인지 《처녀지》 발간. 1952년 시 <갈매기>가 《문예》에 모윤숙의 추천으로 발표.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후 선고 유예로 풀려남. 1970년《현대문학》에 <김관식의 입관> 발표 후 종적을 감춤. 1971년 사망한 것으로 알고 유고시집으로 《새》 발간. 1972년 목순옥과 결혼. 1979년 시집 《주막에서》 출간. 1984년《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출판. 1987년《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시집 출판. 1989년 시집 《귀천》 출판. 1991년 시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 출판. 1993년4월 28일 숙환으로 사망.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출간. [중광(重光) 요약 : 한국의 승려·화가. '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살았다. 선화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말년에는 달마도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출생-사망 : 1934 ~ 2002.3.9 본명 : 고창률 별칭 : 걸레스님·중광스님 활동분야 : 미술·종교 출생지 : 제주도 주요저서 :《허튼 소리》(1989), 《도적놈 셋이서》(1989),《벙어리 절간 이야기》(1997) 주요작품 :〈달마도〉 속명은 고창률(高昌律)이며,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살았다. 1960년 26세 때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로 출가하였으나 불교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고,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받았다.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 참석해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한 후 '걸레스님'으로 불렸다. 1979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랭커스터 교수가 펴낸 책 《광승》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기도 하였다. 미국 뉴욕의 록펠러재단과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에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중광의 일화는 김수용 감독의 영화 《허튼 소리》(1986)로 만들어졌고, 이두용 감독의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1990)에는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막걸리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등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로 들어가 선수행하며 달마 그림에 몰두하였다. 백담사의 오현(五鉉) 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농암'(聾庵)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2000년부터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의 '벙어리 절간'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달마도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2000년 10월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된 〈중광 달마전: 괜히 왔다 간다〉를 열었다. 2002년 3월 9일 타계한 뒤 동년 3월 13일 양산 통도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저서로 《허튼 소리》(1989), 《벙어리 절간 이야기》(1997) 등과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펴낸 《도적놈 셋이서》(1989) 등이 있다. ] [이외수(李外秀) 요약 : 마니아적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21세기 기인 소설가.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발표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는 작가로 유미주의적 소설을 즐겨 썼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장수하늘소》 《칼》 등이 있다. 출생-사망 : 1946.8.15 ~ 2022.4.25 활동분야 : 문학(소설) 출생지 : 경남 함양 주요작품 :《꿈꾸는 식물》 《장수하늘소》 《벽오금학도》 탁월한 상상력과 빼어난 언어연금술로 신비하고 독특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마니아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21세기의 기인 소설가이다. 1946년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태어났으나,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대구와 강원도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8년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기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제중학교를 거쳐 인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춘천교육대학에 입학한 후 1968년 군에 입대해 1971년 제대하고, 1972년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했다.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이 당선되고, 1975년 《세대(世代)》의 문예현상공모에서 중편소설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중앙문단에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단편소설 《꽃과 사냥꾼》(1976) 《고수(高手)》(1979) 《개미귀신》(1979)을 비롯해 원시생명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식을 추구한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1978) 등을 발표하면서 섬세한 감수성과 개성적인 문체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소설가란 평과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신문사와 학원 등으로 전전하던 모든 직장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몰두하게 된다.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 후 일상의 편안함을 거부하는 작가정신을 고수하면서, 단편소설 《박제》 《언젠가는 다시 만나리》 《붙잡혀 온 남자》와 중편소설 《장수하늘소》 장편소설 《들개》 《칼》 등을 잇달아 발표해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는 베스트셀러작가가 되었다. 특히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꿈꾸는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은 섬세한 감수성과 환상적 수법이 돋보이는 유미주의적 소설로, 신비체험과 초현실세계를 즐겨 다루는 이후의 작품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작품으로 평가된다. 화가지망생이기도 했던 작가는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1990년 '4인의 에로틱 아트전'과 1994년 선화(仙畵) 개인전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 삽화가 돋보이는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1983) 《외뿔》(2001) 등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한편, 특유의 감각과 깊은 통찰력으로 《풀꽃 술잔 나비》(1987)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2000)라는 시집과 산문집 《감성사전》(1994)을 출간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함으로써 문학의 다양화에 기여하였다. 저서에 창작집 《겨울나기》(1980)를 비롯해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들개》(1981) 《칼》(1982) 《벽오금학도》(1992) 《황금비늘》(1997) 《괴물》(2002) 등이 있으며, 산문집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1985) 《말더듬이의 겨울수첩》(1986)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1998) 등이 있다. 이 밖에 우화집 《사부님 싸부님》 《외뿔》과 시집 《풀꽃 술잔 나비》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등이 있다.] 15:45~15:46 서울 은평구 진관길 21-2 번지에 있는 삼각산 금암미술관으로 이동 [삼각산 금암미술관 주소 :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21-2 삼각산 금암미술관은 고즈넉한 은평한옥마을에 위치한 문화 복합공간이며 시험한옥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고가구부터 현대 작품까지 다양한 장르의 미술작품을 한옥 미술관에서 전시하여 은평구민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전시, 체험·교육, 문화행사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韓문화특구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은평한옥마을의 한옥 체험· 감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전화번호02-351-8554] 15:46~16:00 삼각산 금암미술관을 관람 16:00~16:02 서울 은평구 진관동 188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로 이동 16:02~16:06 은평한옥마을 제 6 경인 한옥마을 느티나무를 사진촬영 [은평한옥마을 제 6 경 한옥마을 느티나무(서울시 지정 보호수) (고유번호 서 12-1, 12-2, 12-15, 12-16) 은평한옥마을 느티나무는 1981년 서울시 지정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나무 높이 13~16m, 나무 둘레 2.9~3.1m, 120~220년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아름드리 줄기와 시원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푸른 잎들은 묵묵히 마을을 지켜온 무수한 세월들을 느끼게 한다.] 16:06~16:07 서울 은평구 진관동 188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로 이동 16:07~16:08 은평한옥마을 제 7 경인 맹꽁이 서식지를 사진촬영 [은평한옥마을 제 7 경 맹꽁이 서식지 은평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를 포함한 은평구 일대 양서 파충류 집단 서식지는 현재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를 받고 있다. 야생식물의 보고인 북한산 둘레길과 한옥마을 안의 맹꽁이 서식지 주변은 생태네트워크 보전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을 높일 수 있는 자연체험교육의 장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16:08~16:35 서울 은평구 연서로54길 127 번지에 있는 은평한옥마을 제 3 경 삼천사로 이동 16:35~16:55 은평한옥마을 제 3 경인 삼천사를 탐방 [삼천사(三千寺) 요약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창건시기 : 661년 창건자 : 원효 소재지 : 서울 은평구 연서로54길 127 번지에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1027년(고려 현종 18) 6월에 이 절과 장의사(莊義寺)·청연사(淸淵寺)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1994년 11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고, 1996년 12월 30일 지하 1층, 지상 3층의 2동으로 된 복지관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선실·요사채·인덕원복지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이며,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신중탱화·지장보살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다른 사찰의 산신각보다 규모가 커서 북한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절을 ‘산신이 보좌를 튼 절’이라고도 부른다. 유물로는 대웅전 위쪽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입상이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각과 음각을 섞어 조각한 독특한 작품이다. 전체 높이는 3m이고, 불상 높이는 2.6m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찬영(木庵粲英:1328∼1390)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6:55~17:47 삼천사 계곡을 탐방 후 삼천사로 회귀 [삼천사계곡(三千寺溪谷) 요약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방면의 북한산에 있는 계곡. 북한산 문수봉과 부왕동암문 방면의 갈림길에서 삼천사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다. 명칭은 계곡 하류에 있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삼천사(三千寺)에서 유래하였다. 계곡물에 발을 담글 수는 있으나 수영 등 물놀이 행위는 금지된다. 삼천사탐방지원센터에서 삼천사계곡을 거쳐 사모바위~응봉능선~삼천사~삼천사탐방지원센터로 돌아오는 코스는 5㎞ 거리에 약 3시간이 소요된다.] 17:47~18:15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8:15~18:17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연서시장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701번 버스 승차 대기 18:17~18:28 701번 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연서시장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1분 소요] 18:28~18:43 연신내역으로 걸어간 후 구산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8:43~18:45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구산역으로 이동 [2분 소요] 은평구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평한옥마을&진관사&삼천사] 지도 은평한옥마을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