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남자가 죽는 이유
"저와 희야는 엄마에게 맡겨진 임무의 결과였어요. 엄마 나이가 많아지니까 장미원에서 필요한 아이를 낳게 했다는군요. 자질이 뛰어난 남자를 골라 씨를 받게 한 거였지요.”
동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겨들으면 소름 끼치는 비참한 이야기다.
언니와 달리 희야는 해맑은 표정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릴 큰언니와 똑같이 사랑했어요. 우리 셋을 한시도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우리가 단공삼십육선법만 익히면 엄마처럼 안 살아도 될 거라 생각했나 봐요. 엄마가 사랑했던 그분이 엄마를 구하려고 만든 무공이니까요. 그리고 정말 그 말대로 되었어요. 낭낭과 나으리 덕분에요.”
동진이 양설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원도 희야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엄마가 죽기 전에 저한테 책을 하나 써서 주었답니다. 동생들과 함께 보고 빠짐없이 외워야 된다며 당부하셨지요.”
"어떤 책인가요?”
"동침기록부였어요. 엄마가 같이 잔 남자들의 신상과 이름이 적힌 목록인데, 동침한 날짜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어요.”
"장미원에서는 그런 걸 남겨요?”
양설이 놀라 물었다.
“엄마가 만든 거예요.”
수원이 머리를 저었다.
"저희가 장미원에서 자라니까 두려웠던 거죠. 혹시 엄마와 동침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혹은 이복형제와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수치심을 무릅쓰고 만들었던 거였어요.”
동진이 언니 말의 뒤를 이었다.
“그나마도 너무 어렸을 때 일은 다 기억하지 못해서 빠진 게 많을 거라 하셨어요. 어쩌면 엄마는 동침기록부에 더 적어야 하는 게 괴로워서 자살하셨을 지도 몰라요.”
희야도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잘난 남자를 만나도 조심하고, 뛰어난 남자도 조심하고, 부자나 신분이 높은 사람도 조심하고, 그런 사람의 자제도 조심하고... 잘못해서 핏줄이 꼬여 더러워지게 만들지 말라고 하셨어요. 특히 끌리는 남자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니 결국 아무 남자도 만나지 말라는 말과 같아요.”
양설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나쁜 곳이군요. 장미원은.”
동진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말로는 여자들이 다스리는, 여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장미원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불쌍한 여자들을 구원하고 자유롭게 한다고 하지요.”
"어린 여자애들을 납치하면서?”
양설은 어이가 없었다.
수원이 한숨을 쉬었다.
"구해준다고 생각해요. 여자로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게 살게 한다고 자랑하죠.”
동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장미원은 난잡해요. 남자 여자, 심지어 여자들끼리도 아무 거리낌 없이 관계해요. 어제 흑귀면탈한테 겁탈 당한 여자가 있었다고 하셨지요?”
"한 명이 당했어.”
"겁탈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색마한테 공력을 빼앗긴 건 아까워하겠지만. 겁탈 당할 때 즐기라고 가르치는 걸요. 자기 마음만 극복하면 그것도 쾌락이라고.”
언니들의 말을 듣고 있던 희야가 씨근거렸다.
"그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걸로 여자를 고통에서 구원한다고 믿어요.”
양설은 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장미원 원주는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이상한 조직을 만들었어요?”
수원이 대답했다.
"원주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양설이 눈꼬리를 올렸다.
올라가는 눈꼬리만큼 혐오의 감정과 살의도 높아졌다.
“장미원 사람들이라고 다 난잡한 건 아니에요.”
동진이 양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이 있는 분들 중에는 정숙한 분들도 있어요. 엄마 친구들인데, 그분들 도움으로 우리가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분들 중 한 분이 저희를 보호해주면서 말씀하시더군요. 어렸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순결과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털끝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부득이한 경우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어요.”
수원이 말했다.
"그랬더니 그러더군요.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고 죽으면 좋지 않느냐고. 사랑하는 사람이 용서해줄 수 있지만 그럴수록 자기 심장이 깨어지더라고 하대요. 그나마 가능한 건 달아나 멀리서 그리워하는 것뿐이라고. 이 말은 엄마가 그랬어요. 그래서 엄마 죽을 때 저도 먼발치에서 보기만 하라고 했던 거고...”
양설이 한숨을 쉬었다.
"왜 여자들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까?”
“무슨 말씀이세요 낭낭?”
희야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랑하는 여자가 고통 받는 걸 알면 남자는 못 살아요. 여자들처럼 순결 정조 따져가며 죽을까 말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죽어요.”
희야답지 않게 말에 열기가 가득 올라갔다.
“사랑하는 아내, 자식, 연인, 아무거나 하나만 잡고 있으면 남자 목숨은 손아귀에 다 들어와 있는 거예요. 장미원은 이래서 여자들로 영웅호걸들 목숨을 쥐고 있는 걸요.”
하지만 양설은 회의적이었다.
"남자가, 여러 여자 쉽게 거느리는 남자가 정말 그렇게 할까?”
“낭낭은 정말 남자를 하나도 몰라요. 진짜 영웅호걸은 그래요. 겉만 번드르르한 것들 말고요.”
희야가 건방지게 코웃음 쳤다.
"여자는 남자를 얻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지만 남자는 여자를 위해 세상도 다 버려요. 계산 절대로 안해요. 대의를 위해 죽는 사람보다 여자를 위해 주저 없이 목숨 던지는 사람이 훨씬 많은 걸요. 그런 사랑 한 번 받고 나면 여자는 미쳐 버려요. 엄마나 엄마 친구들이나 다 그런 사랑 받았던 거예요.”
양설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희야가 주저없이 말했다.
"신분이 이러니 시집가고 싶어도 진짜 혼인은 꿈도 안 꾸지만 저는 그런 분을 단 한 번이라도 모실 수 있으면 평생 수절할 수 있어요. 정조 지키지 못할 바에는 죽어도 좋아요.”
희야의 결의 가득한 눈을 보며 양설은 사과했다.
"내가 청루 어쩌고 했던 거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몰랐어.”
처음 만났을 때 청루에 판다고 하자 희야가 보인 과민한 반응이 이해되었다.
죽음을 그토록 무서워하여 청루에 팔려가서라도 조금 더 살고 싶다던 희야였다.
하지만 사실은 속마음에 순결과 정조를 향한 일편단심이 숨어 있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도 그런 사랑 받지 못하고 죽을까봐 무서워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희야는 그때 상한 마음 때문인지 양설의 사과도 받지 않았다.
술이 참 사람 태도를 바꾼다.
맨 정신 술로 걷어내고 나면 본심만 남는다.
수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장미원 하는 일이 영웅호걸들을 관리하는 것이라 이야기 듣다보면 그런 분들이 있더군요. 공명정대하고 기백 출중하고 의기 충천하는 분들은 저희 같은 여자도 불쌍히 여기셔서 스스로 족쇄를 찹니다. 미인계를 몰라서 당하는 게 아니랍니다.”
동진도 말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해 순결을 간직하고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는 거나 영웅호걸이 한 여자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게 서로 다를 게 없잖아요.”
양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옳은 말이다.
속으로는 내가 남편을 얻고 나서 바보가 되어 버렸나 하고 자탄했다.
사부는 그녀처럼 똑똑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그랬는데 이제 보니 자기보다 안 똑똑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새들조차 더 똑똑하다.
양설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되어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얼마 마시지 않아서 취한 척도 못한다.
희야가 말했다.
"우리 이야기는 다 했어요. 이제 낭낭 이야기 해주세요.”
양설은 술 한 잔 더 하고 입을 열었다.
"이젠 새 안 무서워?”
"무섭기도 하지만 싫은 거예요.”
"왜? 왜 무섭고 왜 싫은데?”
희야가 대답했다.
"새는 뭐든 다 뾰족하잖아요. 부리도 뾰족하고 발톱도 뾰족하고. 털 뽑으면 털 끝도 뾰족해요. 그런 게 눈이나 가슴을 찌를 수도 있으니까 무섭죠.”
"무공이 높아서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할 수 있잖아?”
"저보다 무공이 높은 새를 만나면요?”
양설은 할 말이 없었다.
철포삼을 익힌 새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희야가 말했다.
"싫은 건, 한 마리만 근처에 있어도 자꾸 신경이 쓰여서 제가 다른 일을 망치기 때문이에요. 새가 있으면 되는 일이 없어요.”
"집에 새 많은데 어떻게 해?”
"그게... 많으니까 싫기는 해도 이상하게 이제 실수는 잘 안하게 되더라구요.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도 없고.”
희야가 웃으며 말했다.
양설은 또 한 잔을 마셨다.
감홍로는 맛이 절묘하다.
세 잔을 거푸 마셨더니 입술과 입안이 달짝지근해지면서 볼이 혀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이럴 때 입을 맞춰야 하는데.”
양설이 작게 말했다.
"낭낭!”
수원의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동진은 당황했고 양설은 킥킥 웃었다.
"난 두 가지 이야기가 있어. 하나는 내가 자란 이야기고, 하나는 낭군님하고 사랑하는 이야기야. 어느 걸 들을래?”
"사랑하는 이야기요.”
희야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음... 그건 안 되겠다. 주책 맞다고 혼날 거 같아. 부부 이야기는 침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잖아.”
"그건 빼고 이야기해도 돼요. 우린 해보진 않았어도 그쪽으론 도사예요.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마음이 통했는지, 그게 더 중요해요.”
희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동진이 한숨을 쉬었다.
"낭낭, 얘 말 믿지 마세요. 우리 그쪽으로 도사 아네요. 도사였으면 진작 다른 데로 보내져서 임무를 수행했겠죠.”
"언니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희야가 투덜거렸다.
양설이 머리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안 되겠어. 생각만 하면 나도 자꾸 설레거든. 아직 이야기 할 때가 아닌가봐.”
"조금만!”
희야가 간청했다.
"뭐하다 만났는지 만이라도.”
양설은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려 참지 못했다.
"책 사러 왔어. 돈도 없는 거 같고, 머리도 좀 어벙한 거 같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것 같고, 말도 잘 못하고, 허우대는 멀쩡한데 얼굴에는 마마 비슷한 자국이 꽉 차서 좀 이상하고. 글도 잘 아는 거 같지 않고...”
"나으리가요?”
동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양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버는 책을 사고 싶다는 엉뚱한 소리나 하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호감이 가더라. 다른 손님보다 좀 더 싹싹하게 대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잘 해주고 싶었어. 점원이 되고 싶다는 소리도 하고 수작질이 불안해서 쫓아버렸어. 또 와서 음. 여기까지. 더 이상은 말 못해.”
"왜요?”
희야가 안달했다.
동진이 말했다.
"그럼 그 부분은 빼고 이야기해줘요.”
양설도 입이 근질거렸다.
주책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거 없었다.
결국 유혹에 넘어갔다.
짝짓기 같은 천박한 말을 한 것이며 몸이 굳어서 침실까지 들려 들어간 것 같은 부끄러운 부분을 건너뛰고 다 말했다.
첫댓글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결국 사람의 운명이란 인간관계가 결정하는게 가장 크지요.
참으로 직관적인 제목이네요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ㅈㄷ
즐겁게 열독하고 갑니다.
즐독 햇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